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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1975년 1월 17일 '1육군중위' 명의의 격려광고와 관련해 육군보안사에 연행돼 조사받고 풀려난 동아일보 김인호 광고국장을 사원들이 무등 태우며 환영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동아일보백지광고사건/동아일보백지광고사태/동아일보광고탄압사건/동아일보광고해약사태/동아돕기운동
영어표기
the Dong-A Ilbo Encouragement Advertisement Campaign
한자표기
東亞日報激勵廣告運動
발생일
1974년 12월 26일
종료일
1975년 5월 7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지역
전국

개요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은 1974-1975년 유신체제 아래에서 전개된 언론자유 수호 운동으로, 정부와 정보기관이 주도한 동아일보 광고탄압에 대한 사회적 대응으로 발생했으며 시민들은 기업의 광고해약으로 백지가 된 광고지면을 격려 문구로 채우면서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동참했다.

배경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광고탄압의 배경에는 유신체제의 강력한 언론 통제 정책이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가 피살된 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하는 긴급조치 5호를 선포했다. 이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상대적 자유의 공간’이 조성됐다. 그러나 육영수 피격사태를 계기로 국민총화 분위기를 주도하려던 정부의 의도와 달리 대학가를 필두로 각계각층에서 유신 비판 및 구속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유인물이 배포됐고, 서명운동 등이 전개됐으며, 민청학련 사태에도 불구하고 10월로 넘어가면서 전국 각지로 시위가 번졌다.
마침, 동아일보 문화부에 재직 중이던 기자 김병익(金炳翼)은 신문사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석 중인 한국기자협회장 선거에 단독 출마해 만장일치로 제12대 회장에 당선됐다. 이를 기회로 기자협회의 언론자유활동이 본격화했는데, 한국일보의 월남 반정부운동 기사와 동아일보의 서울대 농대생 데모 기사와 관련해 기자가 연행되자 동아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면서 ‘10.24자유언론실천운동’으로 발전했다.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180명은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하고 선언문의 결의 사항을 보도하기로 의결했다. 경영진의 보도 거부와 기자들의 신문 제작 보이콧으로 발행되지 못하고 방송뉴스가 전면 중단됐다. 당시 석간이었던 신문은 이튿날인 1974년 10월 25일 새벽 1시경에야 발행됐다.

원인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는 동아일보가 유신체제의 문제점과 민주화 요구를 비교적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기자들의 활동을 지면에 반영하면서 정권과 갈등을 빚게 된 데 있었다. 유신체제의 강력한 언론 통제 정책은 직접적인 검열로 가해졌는데 1974년 문화공보부가 사회불안 요인에 관한 보도금지 지침을 신문·방송사에 강요하자, 일선기자들 사이에서 반발 공론이 일기 시작했으며 당시 정부는 언론사들이 지시에 응하지 않자 편집간부와 기자들을 중앙정보부에 연행했다. 기자들이 1974년 10월 24일을 기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맞서자 정부는 경제적인 압박을 통한 언론 통제를 기획했다.

광고탄압은 중앙정보부와 관계기관의 비공식적 압박 속에서 진행됐다. 기업들은 정치적 불이익을 우려해 광고 계약을 해지하거나 신규 광고를 취소했으며, 신문 지면에는 광고가 빠진 빈 공간이 늘어났다. 동아일보사주와 경영진은 경영상의 심각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버티려 했고, 기자들은 광고탄압 사실을 알리면서 언론자유 수호 의지를 표명했다. 광고 부서 역시 광고 유치를 위해 노력했으나 정치적 압력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신문 지면에는 상업광고가 빠진 빈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이 알려지자 독자와 시민들은 광고탄압을 언론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했다. 독자와 시민들은 빈 광고란을 직접 메우기 위해 소액의 광고비를 모아 격려광고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전개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은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적극적으로 기사화한 시점부터 촉발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이 실린 10월 24일 자 1면 하단의 광고란을 완전히 백지로 비우고 “내일, 이 페이지를 보아주십시오”라는 작은 문구만을 왼쪽 상단에 실었다. 예고된 25일 자 신문 1면에는 “언론탄압 즉각 중지토록”이라는 제목으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하게 된 경위와 이에 따른 신문발행의 지연 이유가 소상하게 다뤄졌다. 정부가 보도지침 4개항을 내리고 언론인을 연행하여 구속하는 등 노골적인 탄압을 가하자 동아일보를 위시하여 국내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는 등의 한국언론계에서 벌어진 상황을 AP, AFP, 로이터(Reuters) 등의 통신사가 보도하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등 외신이 대서특필했다는 소식도 같이 실었다.

1975년 1월 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정부의 광고탄압에 항의집회를 가진 후 언론자유 만세를 부르고 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이를 기점으로 두 달 후 정부의 광고탄압으로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가 발생하자 《동아일보》는 “항의의 표시”로 26일 신문 3면 하단의 일부 및 4면과 5면 하단의 광고란을 완전히 백지로 비워 발행함으로써 사건을 쟁점화했다. 12월 26일 자 석간 1면에는 동아일보의 주요 광고주 20여개 회사가 24일경부터 분명한 설명 없이 갑자기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가면서 무더기 광고 해약사태가 벌어졌음을 알렸고, 30일 자는 1면 전체 지면을 할애하여 광고해약 사태를 다각도로 다루면서, 광고해약에 분개한 시민의 격려성금과 성원전화가 전국에서 답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빈 광고지면을 시민광고로 활용할 수 있다는 발상은 광고국장의 공고에서 시작됐다. 애초의 공고는 개인광고를 모집한다는 기획이었고주)001 점차 “개인, 정당, 사회단체의 의견 광고, 그리고 본보를 격려하는 협찬광고와 연하광고(年賀廣告)”주)002 모집 형태로 발전해갔으며, 이에 대해 정작 시민들이 화답한 것은 개인 혹은 그룹 연대의 구독 신청과 동아일보 기자들의 투쟁에 대한 격려 및 언론탄압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었다.

1975년 신년호 4면 하단 광고란에는 “본란은 동아일보 사원의 언론자유수호를 지지하는 광고입니다”라는 설명문과 함께 “언론자유수호격려”라는 1단짜리 컷이 달린 본격적인 ‘격려광고란’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횃불을 판화로 찍은 그림 표식을 배경으로 한 이 안내광고를 필두로 격려광고가 본격적으로 게재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당시 격려광고 분석에 따르면 1975년 1월 한 달 동안만 96개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254건의 격려광고를 냈고 중학생의 격려광고도 37건이나 된다. 대학생과 일반 시민이 주도하는 가운데, 외국인과 해외거주 국민이 보내온 광고도 상당했다. 외국인들은 대개 ‘언론자유’로 구체화하여 사태를 이해하는 반면 해외거주자들은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공격적인 정치비판의 여지를 보였다.

소시민적 정체성을 강조한 다양한 직업·계급군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격려광고(영등포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격려광고에는 ‘시민’, ‘민주시민’, ‘민주국민’의 이름으로 주체성을 드러내거나 소시민적 정체성을 강조한 다양한 직업·계급군이 참여했다. 지게꾼, 택시기사, 밥집 아줌마, 월급쟁이 등 자신의 직업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소액을 출연하는 소회를 “술 한 잔 덜먹고 여기에 내 마음 담는다 드라이브맨 안”주)003,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밥집 아줌마”주)004, “동아광고탄압 넉 달째를 바라볼 수만 없어서 월급의 10분지 1을 바칩니다 용기 없는 월급쟁이”주)005 등의 형태로 ‘서민’으로서의 참여임을 드러내면서 염원을 표시했다.

언론자유에 대한 염원이 좌절되는 상황은 인권존중이나 정의에 대한 배반으로 여겨지면서 정치혐오를 낳기도 했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꺼야 이대S생”주)006, “동아가 단결하면 1 민주주의가 속히 소생하고 2 인권존중사회 가 이루어지고 3 이민 가는 사람이 줄어 든다 이민 갈 궁리를 하고 있는 P”주)007 등 ‘이민’까지 거론할 정도였다. 사회정의가 배반되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실망은 사회적 의분으로 결집되어 나타났다. “동아 말살에 울분을 금치 못하겠읍니다 울분생 욱”주)008, “《동아》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분쇄하자 분통생 오”주)009에서와 같이 감정적인 토로를 하기도 했다. 한편 격려광고에는 《동아일보》를 “민족지”로 호명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민족지는 민족의 생명! 워싱톤 동아일보 애독자 심기섭”, “민족지를 지키자!” 등의 언설로 드러났다.주)010

시민 격려광고는 다양한 교호적 소통을 통해 현장감과 ‘ 즐거움’의 한 차원을 보여 주었다. 독자들은 신문지면상에서 기사와 사설을 통해 사태 전개 국면을 알아가는 동시에 ‘격려광고란’을 통해 전날의 기사 상황과 시민들의 반응이 상호소통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백낙청 교수 징계철회 요구서한에 서명하지 못한 미안감이 아직도 가셔지지 않아 이렇게나마 마음을 표합니다 고려대학교 교수 몇 사람”주)011과 같은 광고가 그런 경우였다. “‘광고탄압’보다 더 무서운 ‘오해’를 무릅쓰고 의연히 ‘동아일보 제작’에 참여하시는 아빠에게 더욱 뜨겁고 꿋꿋한 기자정신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동아가족”주)012처럼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하는 현장 기자들의 자녀와 가족이 광고를 게재하는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아기의 돌, 입학, 졸업, 개업 같은 일상을 광고지면에 공개하거나 당시 유행하던 교양 퀴즈 형태로 시국을 비판하기도 하였는데, 자유’와 ‘정의’, ‘민주’ 같은 단어로 시민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연대감을 표시했다. “나는 자유시민이다 화곡동 김정승”주)013, ”동아일보를 지원해야 언론자유가 실현된다 민주시민“주)014에서처럼 이 언설들은 신문이 갖추어야 할 언론의 역할을 ‘정의’와 ‘자유’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공적인 시민권을 통해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감을 표시했다.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격려광고들(Current, Marion,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에는 기관이나 단체가 지면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신민당의 대정부 투쟁과 국회질의는 광고로 중계되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의 광고가 자주 실렸으며 법조인들도 고정지면을 사서 광고를 실었다. 특히 ‘문인광고란’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주동으로 1975년 1월 27일부터 3월 17일까지 총 39회 동안 연재됐다. ‘자유수호 격려’라는 문구를 고정으로 삽입하여 문구 아래 게재하는 문인의 이름을 기명으로 넣으며 내용은 매회 자유롭게 채워지는 형식이었다. 문인광고는 기명의 상징성이 컸으므로 언론과 일반 독자를 매개하는 지점에서 공권력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공공성을 시민계급이 쟁취해나가는 과정을 암암리에 돕는 역할을 했다. ‘문인격려광고’ 연재 스무 번째 순서를 맡은 소설가 박경리(朴景利)는 “국민 여러분! 우리 손자에게 아빠를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경리 올림”주)015이라고 사위인 시인 김지하의 석방 소식으로 대신함으로써 광고를 하나의 뉴스 상황으로 만들기도 했다. 문학자들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실천문인협회의회의 ‘실천’에 동조하는 집합적 목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언론자유투쟁에 힘을 실었다. ‘독재’상황을 문학적 은유로 비판하면서 국가권력과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으로서의 권리 아래 모여들었던 신문 독자들의 목소리의 총합이 지닌 기세와 연대 덕분이었다.

결과/영향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는 폭력을 동원해 농성 중이던 기자들을 사옥 밖으로 끌어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의 결과로 수만 건에 이르는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동아일보 지면에 게재되면서 광고탄압으로 발생한 빈 광고란이 상당 부분 채워졌다. 이를 통해 동아일보는 언론자유를 지지하는 사회적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광고탄압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언론사에 대한 압박을 지속했다. 정권의 탄압으로 경영난에 직면한 동아일보 경영진은 결국 유신체제에 굴복했다. 1975년 3월 17일 회사 측이 물리력을 동원해 자유언론을 주장하며 농성 중이던 기자들을 사옥 밖으로 끌어내자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30여 명이 즉시 ‘동아자유언론실천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였고 사측은 이들을 대량 해고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보복 조치를 완화하여 1975년 4월부터 일반 상업 광고가 일부 재개되고 시민들의 격려 광고 접수가 점차 마감되면서 대규모 운동은 막을 내렸다.

동아일보 광고 재개 기사(1975.7.18. 경향신문)

정론직필을 외치던 수많은 언론인들이 현장에서 쫓겨나 한국 언론사에 큰 공백을 남겼다. 그러나 이때 해직된 언론인들은 훗날 민주화운동의 중추가 됐고,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등의 밑거름이 됐다.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기자들의 외침에 부응하여 문학자들과 시민들이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상호 소통하며 연대를 이룬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신문의 위상이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광고지면을 채운 문학자와 시민들의 수행은 자유언론실천운동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격려광고운동이 지속되는 동안 신문을 정치적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면서 연대의 정치적 효능감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언론자유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민주화운동과 언론자유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기반이 됐다.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은 국가권력이 경제적 압력을 통해 언론을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으며, 동시에 이에 맞선 시민사회의 자발적 참여와 연대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주)001
《동아일보》, 1974. 12. 27, 3면. 
주)002
연하광고(年賀廣告)는 새해를 맞아 축하 인사를 전하는 광고다.;《동아일보》, 1974. 12. 30, 1면. 
주)003
《동아일보》, 1975. 1. 14, 4면. 
주)004
《동아일보》, 1975. 1. 18, 4면. 
주)005
《동아일보》, 1975. 3. 27, 7면. 
주)006
《동아일보》, 1975. 1. 18. 3면. 
주)007
《동아일보》, 1975. 3. 22, 3면. 
주)008
《동아일보》, 1975. 1. 14, 4면. 
주)009
《동아일보》, 1975. 3. 14, 2면. 
주)010
<재미 교포들도 격려광고 신청>, 《동아일보》, 1975. 1. 6. 
주)011
《동아일보》, 1975. 2. 28, 4면. 
주)012
《동아일보》, 1975. 3. 24, 5면. 
주)013
《동아일보》, 1975. 1. 4. 4면. 
주)014
《동아일보》, 1975. 3. 14, 2면. 
주)015
《동아일보》, 1975. 2. 18, 4면. 
인정 내용
진실화해위원회
확정일
2008.10.21
인정 내용
- 결정사안
· 1974년 말부터 중앙정보부가 동아일보 광고주들에게 광고를 해약·취소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이를 통해 언론사주를 굴복시켜 언론인의 해직 등 언론탄압에 관여했음

- 출처
·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 2008(인터넷 제공판).
멀티미디어
  • 1974년 12월 26일부터 1975년 3월 11일까지 동아일보에 실린 백지격려광고. (이윤씨 기증)
  •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1975년 1월 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정부의 광고탄압에 항의집회를 가진 후 언론자유 만세를 부르고 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소시민적 정체성을 강조한 다양한 직업·계급군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격려광고(영등포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동아일보 광고 재개 기사(1975.7.18. 경향신문)
  •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는 폭력을 동원해 농성 중이던 기자들을 사옥 밖으로 끌어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격려광고들(Current, Marion,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알림[동아일보분회]
  • [동아일보 돕기 만찬회 성금모금 관련 감사문]
  • 감사문
참고문헌
  • 《동아일보》
  • 박태순,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운동 30년사》1-2, 작가회의출판부, 2004.
  • 한국작가회의 편찬위원회, 《한국작가회의 40년사: 1974~2014》, 실천문학사, 2014.
  • 박태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70년대 문학운동사 1>, 《실천문학》5, 실천문학사, 1984.
  • 이정숙, <‘프레스 정동’의 탄생과 문학자의 ‘선언’>, 《민족문학사연구》60, 2016.
집필정보
집필자
이정숙
집필일자
2024-12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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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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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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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
  • 설명 1975년 1월 17일 '1육군중위' 명의의 격려광고와 관련해 육군보안사에 연행돼 조사받고 풀려난 동아일보 김인호 광고국장을 사원들이 무등 태우며 환영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출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