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동의어
- 해당사항 없음
- 유사어/별칭/이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어표기
- the October 24 Declaration for Press Freedom
- 한자표기
- 10.24自由言論實踐宣言
- 발생일
- 1974년 10월 24일
- 종료일
- 1975년 3월 17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 지역
- 전국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삼선개헌, 유신 선포로 독재 체제로 나아갔다. 정당성이 부족해진 정권의 언론 탄압은 점차 심해지고, 언론인들은 ‘언론자유수호선언’ 등을 발표하며 저항했지만 변화가 없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실천운동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자고 결의했다. 동아일보에서 시작한 ‘자유언론실천선언’과 운동은 다수의 언론사로 확대되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실질적인 보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박정희 정권은 민정이양 이후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제정하여 언론 탄압을 시도했다. 언론계의 반발로 비록 법 시행은 유보했지만 법을 폐기한 것은 아니기에 언론에게는 위협적 존재였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언론인 테러, 구속 등의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했다. 1968년에는 월간지 ≪신동아≫에 실린 차관 기사와 ‘북괴와 중-소 분쟁’이라는 기사를 빌미로 압박을 가해 동아일보가 천관우(千寬宇) 주필을 비롯한 세 언론인을 해직시키도록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석채(崔錫采) 편집인협회장이 ‘한국의 언론이 죽었다’고 규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주)001 그 이후 언론사에 기관원들이 수시로 출입하며 언론 보도에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언론사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언론사들은 1962년 군사정권이 발표한 언론정책 25개 항과 1963년 통과시킨 ‘신문 및 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의 영향으로 기업화, 상업화의 길을 걷게 됐기 때문이다. 정부의 차관 지원을 받아 막대한 투자를 하게 된 언론사는 언론인 테러나 구속 등의 탄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주)002 한편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삼선개헌에 성공하고 1971년 대통령선거로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섰다. 1972년 10월 17일에는 유신을 선포하고, 12월 27일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정당성이 부족한 정권은 언론 탄압을 강화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언론의 보도와 비판 기능은 제 구실을 못했다. 1971년 3월 26일 서울대학교 학생회장단 30여 명은 동아일보 앞에서 이를 비판하는 ‘언론 화형식’을 진행했다. 화형식에서 대학생들은 언론이 변하지 않으면 불매운동과 그 이상의 방법을 쓰겠다고 경고했다. 대학생들의 화형식 이후 4월 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다. 결의문에는 당시 언론 보도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는 외부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제재와 간섭이 원인임을 지적하는 동시에 내부 구성원의 책임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동아일보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은 한국일보, 조선일보, 문화방송 등 서울의 신문, 방송, 뉴스통신사 등으로 확산됐으며, 경남매일신보 등 지방의 일간지들도 동참했다. ‘언론자유수호선언’의 확산은 기자협회의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 제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71년 12월 박정희 정권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 이후 정권은 언론 탄압을 줄이기는커녕 프레스카드(보도증) 제도를 실시하여 언론인의 숫자를 통제했다. 이어서 사이비 언론 척결을 명분으로 대구일보 등을 폐간하고 전북에서는 신문 통폐합을 강제했다. 1973년 경향신문 초년 기자들이 외부 압력에 반발하며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동아일보 기자들의 두 번째 언론자유수호선언으로 이어졌다. 10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세 번째 언론자유수호선언 운동이 전개됐다. 정부도 기관원 출입을 금하고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언론 보도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선언과 운동에도 언론 현실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1974년 초 정부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여 유신헌법 비판을 금지하고 보도를 막았다. 1973년 8월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 지국을 폐쇄하고 특파원을 추방했으며 1974년 2월 4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국내 수입 허가를 취소하는 등 외국 언로(言路)도 막았다. 언론인 연행 구속 사건도 늘었다. 합동통신의 기자가 지방의 병무 행정의 문제점을 기사화하자 그를 구속했고, 5월 3일에는 중앙일보가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을 보도하자 기자를 구속하고 이 사건과 관련하여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동아방송 기자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9월에는 언론계 간부들 연행과 조사가 이어졌고, 10월 22일에는 정보기관이 한국일보 장강재(張康在) 사장과 김경환(金庚煥) 편집국장을 베트남 문제 해설 기사와 관련해서 연행, 조사했다.
언론사 간부들을 연행하는 사건이 이어지는 중 1974년 10월 23일 학생시위 관련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동아일보 송건호(宋建鎬) 편집국장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사회부장과 지방부장도 함께였다. 이에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이 농성을 시작했다. 다음날 24일 오전 동아일보 편집국에 편집국, 방송국, 출판국 기자 200여 명이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했다.주)003 선언은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가 중요함에도 현실의 언론자유는 억압당하고 있으며, 언론사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언론자유를 주장하면서 언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현실에 이르게 된 것이 부끄럽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론인 자신의 실천을 통해 확보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 실천의 과제로 일체의 외부 간섭을 배제하고,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하며, 언론인들의 불법 연행에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자들이 연행되면 귀사 시까지 퇴근하지 않고 농성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기자들은 선언 중 전술한 세 가지 과제를 보도해 줄 것을 회사에 요구했다. 회사는 기관원 출입금지만 빼면 보도할 수 있다고 버티다가, 기자들이 신문과 방송 제작을 중단하며 항의하자 25일 자 신문에 보도했다. 이로써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이 세상에 공개됐다.주)004

동아일보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은 언론계로 확산됐다. 조선일보에서는 재조직된 기자협회 조선일보분회를 중심으로 ‘언론자유회복선언문(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실천 조직으로서 ‘언론자유수호특별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주)005 조선일보 기자들 또한 이 선언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타사에서 발생한 부당한 연행 구금에 함께 저항하고 학생과 종교인 등의 비판적 목소리와 행사를 보도할 것을 결의했다.
동아일보에서 시작된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은 한국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신아일보, 중앙매스컴, 동양통신, 합동통신, KBS, MBC 등 중앙 언론은 물론 국제신보, 부산일보, 경기신문, 강원일보 등 지역신문을 포함하여 29개 신문, 통신, 방송사까지 확산했다. 관영신문이었던 서울신문까지 합류한 것은 당시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언론인들의 불만 증대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한국일보에서는 자유언론선언을 지지하는 사설 게재를 회사가 거절하자 논설위원실의 임재경(任在慶), 김용구(金容九) 등이 사설 집필을 거부하기도 했다. 전국적인 언론운동으로 확산되자 당시 이원경(李源京) 문화공보부 장관은 국회에서 학원시위, 연탄 부족 현상, 베트남 반정부 운동 등 국가와 직접 관계가 없는 문제까지 신문 제작에 관여하는 등 무리가 있었음을 시인했다.주)006

이전의 세 차례에 걸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선언적 운동에 그친 한계를 극복하려 ‘언론자유실천운동’을 선언했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안들을 보도하는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선언문을 자사 보도를 통해 공지했음에도 25, 26일 사회문제를 다루는 자사의 보도가 기자들의 요구 수준에 미치지 못하자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는 26일 각 부에서 파견한 30여 명의 위원으로 ‘자유언론실천특별위원회(실천특위)’를 구성하고 상임위원회를 설치했다. 실천특위는 매일 오후 6시 편집국 조사부에 모여 그날 신문과 방송에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 결의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는지를 분석평가하고 대책을 논의했다.주)007 제일 먼저 문제가 제기된 건 동아방송 뉴스였다.
당시 동아방송 뉴스 제작 담당 부국장이었던 김진현(金鎭炫)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뉴스를 청취율이 낮은 시간대에 배치하거나 횟수를 1회로 한정하는 등 보도의 영향을 줄이려 노력했다. 기자들은 10월 31일 기자총회를 열어 동아방송의 보도 행태가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중대한 위배’임을 지적하고 김진현 부국장의 해명을 요구했다. 이것을 계기로 동아방송이나 동아일보의 보도는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다. 대학가의 시위 기사나 종교계의 움직임을 다루는 기사가 늘어났다. 하지만 언론인 천관우는 시위의 원인을 분석하는 심도 있는 기사는 적었다고 평가했다. 또 실천특위는 정부의 요구에 따라 순화된 제목주)008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위는 대신 정확한 표현을 쓰기를 요구하면서 ‘기사 제목에 금기로 된 용어는 없다’고 선언했다. 한편 당시 동아일보는 정부가 불편해하는 기사는 그 사안의 중요성과 무관하게 1단 또는 2단을 넘기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기자들은 총회를 열어 기사의 중요도에 걸맞은 지면 배치를 주장하면서, 그 예로서 가톨릭의 대규모 ‘인권회복기도회’를 7면 머리기사로 실을 것을 요구했다. 전국 14개 도시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종교집회도 2단 이상의 기사로는 실을 수 없다는 사측과 기자들은 대립했고 결국 1974년 11월 12일 자 신문은 발행되지 않았다. 신문 발행 중단 사태를 맞이한 송건호 편집국장은 기사 중요도에 따라 편집, 보도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시위 기사의 1단 벽은 사라졌다.

선언 이후 기자들의 노력은 라디오 방송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동아방송에는 권력의 간섭으로 청취자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는 죽정회(竹正會)라는 이름의 프로듀서의 모임이 존재했다. 조민기, 김창수, 윤성옥 등을 회원으로 하는 모임으로 자신들을 ‘쭉정이’라 비하하며 지냈는데, 선언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동아방송 PD들은 금기시됐던 취재원을 발굴하고, 문제의 현장을 취재해 진실을 전하며 선언을 실천했다.
‘10.24자유언론실천선언’과 운동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언론사 노동조합(노조) 결성 노력과 외부의 지원이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3월 7일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지부’를 결성했다. 결성의 주목적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저항하는 것이었다.주)009 33인으로 시작한 동아일보 지부의 조합원은 짧은 기간에 196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동아일보 회사 측과 정부는 노조 결성을 반대하고 방해했다. 동아일보 지부는 조학래(趙鶴來) 기자를 지부장으로 하여 1973년 3월 7일 서울시에 노조 설립을 신고했다. 동아일보는 신문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명분으로 집행부 11명을 포함한 핵심 조합원 13명을 해직시켰다. 노조는 권근술(權根述) 기자를 중심으로 해고대책위를 구성했다. 하지만 회사는 13일 다시 6명을 해직하고 16명에게 징계 조치를 내렸다.

한편 서울시는 노조 임원 전체가 동아일보에 재직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동아일보 노조는 국무총리에 소원을 내고 행정소송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노조 결성은 실패했지만 노조 결성 과정에서 확보한 응집력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과 이후 실천 운동으로 이어진 원동력이었다. 선언 이후 동아일보 밖에서 이루어진 응원은 실천운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동력이었다. 25일 언론 억압을 비판하는 신민당의 성명,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한 통일당의 성명 등 정당의 지지가 있었다. 종교계의 지원도 있었다. 10월 2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인권선언, 26일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회의 자유언론운동 지지 선언이 있었다. 천주교도 11월 6일 기도회에서 발표한 2차 시국선언을 통해 지지를 선언했다. 펜클럽 한국본부는 11월 16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8일 각각 선언을 통해 지지를 표명했다. 윤보선(尹潽善)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같은 재야단체도 지지를 선언했다.주)010
동아일보를 비롯해 여러 언론에서 기자들이 보도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 실천 운동을 벌였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회 제 세력의 비판적인 활동들이 언론을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도 강력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정부의 압력으로 대규모 광고 해약 사태가 이루어졌다. 12월 20일부터 12월 24일까지 20여 개의 기업이 광고 취소를 통보했다. 당시 광고 지면을 확보하기 어려워 수개월간 장기 계약을 해야 했던 기업들이 오히려 인쇄 동판을 회수하는 등 광고를 취소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1975년 1월 28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의 광고는 98%가 사라졌다. 기사 지면을 확대해서 사라진 광고면을 메우던 동아일보는 결국 광고면을 백지로 내보냈고, 탄압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격려광고로 응원했다. 하지만 동아방송으로도 광고 해약이 이뤄져 2월 7일에는 광고 건수 88.7%, 광고 수입 91.7%가 줄어들었다.주)011 2008년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광고 해약 사태는 중앙정보부가 광고주를 압박하여 벌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언론자유실천운동을 이어갔다.
정권의 광고 탄압에 굴복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기자들을 해직시키는 강수를 뒀다. 동아일보에서는 3월 8일 18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했고, 항의로 제작 거부하고 농성에 들어간 17명을 다시 해임했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들이 철야농성에 돌입하고 신문 제작이 어려워지자 3월 17일 정체불명의 괴한을 동원해 160여 명을 축출했다. 이 중 회사로 복귀한 사람을 제외하고 134명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언론자유, 언론개혁을 위해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일보 역시 기자들의 언론자유 투쟁에 해직으로 응수했다. 1974년 12월 초 유신을 옹호하는 국회의원의 기고문을 일방적으로 게재하는 것에 항의하던 백기범(白基範), 신홍범(愼洪範)을 해고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한 기자들을 중심으로 이에 항의하자 사측은 1975년 3월 6일 복직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3월 11일 이에 항의하며 농성하는 25명의 기자들을 쫓아냈다. 해고나 무기 정직을 당한 사람들 중 32인이 1975년 3월 21일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언론개혁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에 동참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은 동아투위, 조선투위를 결성하여 연대했고,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2014년 자유언론실천재단 등에 참여하며 그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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