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단체
- 분류
- 사회운동
- 유사어/별칭/이칭
- 동아투위
- 영어표기
- the Dong-A Committee for Defense of Free Press
- 한자표기
- 東亞自由言論守護鬪爭委員會
- 결성일
- 1975년 3월 17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1975년 3월 17일 새벽 '언론자유수호' 등을 외치며 동아일보 사옥 안에서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이 회사 측이 동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력배들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후 3월 17일 결성한 조직이다. 당시 해직된 언론인들의 복직 및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하는 언론자유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됐다. 유신체제기는 물론 전두환(全斗煥) 정권기 언론자유 압살에 저항했고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 등을 통해 한국의 언론자유 회복과 확장에 앞장섰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갔다. 집권 직후부터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학생들의 강력한 반대운동을 언론이 지지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비판적 언론인에 대한 테러가 잇달았고 비판적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언론사에 압박을 가해 관련 언론인이 해직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 결과 1969년 삼선개헌 때에는 일부 신문을 제외하고는 비판적 기사가 거의 실리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같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 통제에 대해 1970년대 초부터 젊은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비판과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젊은 언론인들은 대학생 시위를 취재하는 현장에서 학생들이 정권의 탄압에 굴종한 언론을 비판하면서 언론의 취재를 금지한 데 대해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언론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에 들어갔다.

1971년 4월 15일 동아일보사 일부 소장 기자들의 주도로 30여 명의 기자들이 ‘자유로운 진실보도’ 등 3개 항의 결의사항을 담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1973년 12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언론자유수호선언문이 추가로 발표됐지만 1972년 10월 유신쿠데타에 이은 1974년 1월 긴급조치 선포로 언론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결국 동아일보 언론인들은 이같은 언론탄압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1974년 3월 최초의 언론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이와 함께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이하 기협 분회) 등에 대한 개편을 통해 언론자유운동을 전개할 수단을 마련했다. 새로 개편된 기협 분회는 1974년 10월 23일 송건호(宋建鎬) 편집국장 등의 중앙정보부 연행 사태로 계기로 다음날인 10월 24일 오전 편집국에서 기자 총회를 열고 미리 준비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여주)001 편집국, 출판국, 방송국 소속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의 지지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자유언론 실천작업에 들어갔다.
동아일보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실천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민주화운동 및 그에 대한 탄압, 서민들의 어려운 생활 등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보도되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탄압의 일종인 광고주에 대한 협박, 즉 광고탄압이라는 방식을 동원하여 동아일보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실천을 막고자 했다. 1974년 12월 하순부터 본격화된 광고탄압으로 《동아일보》의 광고는 평상시의 98%가 떨어져 나갔고 동아방송의 광고 수입도 평상시의 91.7%가 줄어들었으며 이는 전체 광고 수입의 큰 손실로 이어졌다. 이 같은 《동아일보》·동아방송에 대한 무더기 광고 해약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곧바로 일반 독자 및 청취자들의 ‘동아돕기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5년 들어 일반 독자·청취자들의 ‘동아돕기운동’은 격려광고라는 형태로 진화하여 《동아일보》의 지면을 장식했고, 동아방송의 프로그램에는 ‘프로그램 협찬’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을 지지했다.

그러나 일반 독자·청취자들의 격려광고에도 불구하고 광고탄압이 지속되자 동아일보 사주와 경영진은 언론인들과는 달리 갈수록 위축되어 갔다. 회사 안팎에서 동아일보 사측이 권력과 타협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1975년 2월 28일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복귀한 이사 이동욱(李東旭)과 재선임된 사장 김상만(金相万)이 사내 질서 문제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동아일보 사측은 3월 5일 인사규정, 복무규정을 개정해 사장과 주필이 강조한 내용을 명문화했고, 3월 8일 ‘경영난’을 이유로 기구 축소 및 소속 사원 18명 해임을 단행했다.
기협 분회 등 동아일보 언론인들은 이를 광고탄압에 굴복한 사측의 자유언론실천작업 압살 의도로 보고 3월 12일 ‘자유언론 실천백서’를 채택하며 저항했다. 이들은 사측의 조치와 정권의 탄압을 비판하고 끝까지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한 뒤 신문, 방송, 잡지의 제작 거부를 결의하고 공무국, 편집국 등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3월 17일 새벽 사측이 동원한 200여 명의 사람들의 폭력을 동반한 강압으로 농성 언론인들은 모두 동아일보사 사옥 밖으로 쫓겨났고, 이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결성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제작거부 언론인들은 1975년 3월 12일부터 벌인 제작거부 농성을 통해 동아일보사 내에서 자유언론을 사수하고 실천하는 작업을 지속하고자 했지만 동아일보 사측에 의한 강제축출이 이루어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협 분회 안종필(安鍾珌) 분회장은 강제축출 후에도 동아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을 위한 투쟁은 지속될 것을 다짐하는 성명서를 권근술(權根述) 기자에게 준비시켰다. 3월 17일 새벽 동아일보 사측이 동원한 사람들의 폭력 행위에 밀려 동아일보사 밖으로 쫓겨난 150여 명의 제작거부 언론인들(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은 곧바로 경찰 기동대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으나 하나둘 동아일보사옥 앞으로 다시 모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측은 정문을 굳게 걸어 잠갔고 제작 참여 언론인들은 새로 받은 신분증을 가지고 별관 쪽문으로 출입하고 있었으며 근처에서 경찰이 행인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는 등 강압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제작거부 언론인들은 신문회관으로 이동했고 안 분회장은 권 기자가 준비한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에서도 다짐했듯이 제작거부 언론인들은 “각자의 해임 여부에 관계없이 전원이 애초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을 한층 확대하기로 한다”는 3월 16일 밤의 결의에 따라 3월 17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를 구성하고 초대 위원장으로 기협 분회장과 문화부 차장을 지낸 권영자(權英子) 기자를 추대했다.

조직 명칭을 동아투위로 한 것은 “동아의 자유언론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다”는 3월 17일자 기협 분회 명의 성명서의 주장을 재확인함과 함께 이후 동아일보사에 복귀하여 다시 자유언론을 실천할 때까지 ‘자유언론 수호’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동아투위는 12명의 중앙위원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아래에 부차장단, 기협 분회,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와 총무·섭외·조직·공보·법무·여성 등 6개의 특별위원회를 두었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청진동 강한빌딩에 임시 사무소를 마련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조직 당시 투위원은 편집국 및 방송뉴스부 70명, 방송국 49명, 출판국 30명, 심의실 7명 등 모두 156명이었다.주)002
동아투위 노선의 핵심은 3월 17일 기협 분회,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 및 같은 날 동아투위의 이름으로 발표된 첫 번째 성명서에서 드러나듯이 ‘애초의 목표’인 자유언론 실천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비록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해임 여부와 관계없이 자유언론을 실천하는 것이 동아투위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동아투위의 초창기 활동은 자신들을 쫓아낸 동아일보사 앞 침묵시위부터 시작됐다. 3월 아침부터 시작된 침묵시위는 9월 17일까지 6개월 동안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동아투위원들은 출근하는 제작 참여 언론인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고 50여 분간 침묵시위를 벌인 후 신문회관으로 이동해서 동아일보사 측의 해임조치 철회와 자유언론 실천을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앞까지 침묵행진을 벌였다.

침묵시위가 끝나면 각 특별위원회별로 일과가 이어졌다. 섭외특위 위원들은 미리 제작된 투위 유인물을 언론, 종교, 정치계 등과 사회단체 등에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유인물 내용은 주로 동아일보사 측의 권력과의 야합을 규탄·비판하는 것으로 공보특위 위원들이 제작을 맡았다. 법무특위 위원들은 동아일보사 측의 부당인사조치에 대한 법적 대응, 투위원들의 연이은 연행, 구속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법원, 검찰청, 구치소, 변호사 사무실 등으로 바쁘게 이동했다. 초기의 활동은 동아투위 결성의 배경이 된 해직과 농성 해산의 진상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현업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직접 시민들과 접촉하는 것이 중요했다. 더구나 당시 모든 신문과 방송들이 동아일보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투위원들은 투위의 입장을 알릴 유일한 수단인 유인물을 사회 각 부문에 배포함으로서 진상을 알리고자 했다.
유신독재의 탄압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아투위는 독재정권의 언론탄압과 여기에 굴복 혹은 야합한 언론기업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몇 차례에 걸쳐서 발표했다. 동아투위는 독재정권과 언론기업 규탄에만 머무르지 않고 언론 활동을 재개하여 1978년 6월부터 기존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민주화운동과 인권에 관한 기사를 자신들이 발행하는 소식지 《동아투위소식》에 싣기로 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6월 17일 《동아투위소식》에 언론자유 등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대학가, 종교계, 재야 민주단체 등의 소식 7건을 실은 데 이어서 전남대민주교육지표사건, 동일방직 노동자 취업방해 관련 기사 등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들을 꾸준히 보도했다.

동아투위의 활동은 재야의 언론인 역할에 머물지 않고 여타 재야 단체와연대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78년 1월 발족한 한국인권운동협의회에는 동아투위의 박종만(朴鍾萬), 임채정(林采正), 정연주(鄭淵珠), 김종철(金鍾澈) 위원이 참여했고 한국인권운동협의회의 발족 성명 및 2월 27일 발표한 성명서 ‘우리의 인권현실’, ‘한국 국민의 인권선언’ 작성에도 안성열(安聖悦), 성유보(成裕普) 등 동아투위 위원이 참여했다. 동아투위는 1978년 7월 발족한 반유신독재 연합전선인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에도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동아투위는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조선투위)와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등 지식인 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언론과 표현의 자유,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 발표에 자주 참여했다.
동아투위는 지식인 운동단체와의 연대에만 머물지 않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도 적극 동참했는데, 다수의 동아투위 위원들은 1978년 3월 생존권 사수를 위해 단식농성 중이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동조 단식을 벌였다. 또한 유신 말기인 1979년 8월 이른바 YH노조신민당사농성사건이 벌어졌을 때 동아투위는 조선투위 등과 함께 YH문제대책위원회 구성에 참여했고 9월 7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재야 민주세력과 힘을 합쳐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민중의 자유, 생존을 위해 투쟁할 것임을 선언했다.
동아투위는 1975년 3월 17일 결성 이후 지속적으로 유신독재정권에 의해 탄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구성원들이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투옥됐다. 또한 동아일보사 측도 동아투위에 대해 1970년대 후반 내내 비난을 가했고 동아투위 위원들에 대해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여 1975년 4월 초순까지 투위원들 중 약 30여 명이 동아일보사로 복귀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권과 사측의 탄압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남은 동아투위 위원들은 유신독재 및 정권과 야합한 언론사 경영진의 행태를 비판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후 유신정권이 붕괴하고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찬탈,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대에도 동아투위는 한국의 언론자유와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조선투위 및 1980년 해직 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전두환 정권의 언론탄압과 독재에 저항했고, 이들의 활동은 1988년 세계 최초의 국민주신문인 《한겨레신문》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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