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2월 서울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열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옥중문학인의 밤 행사(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단체
분류
사회운동
유사어/별칭/이칭
자실
영어표기
the Council of Writers for Freedom and Practice
한자표기
自由實踐文人協議會
결성일
1974년 11월 18일
해체일
1987년 9월 17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지역
전국
개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74년 11월 18일에 ‘문학인101인선언’을 발표하며 창립된 민주화운동 관련 문학운동단체이다.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선언문 및 성명서를 지속적으로 발표했으며 기관지 무크 《실천문학》을 발행했다. 1984년 12월 20일 ‘84문학인선언’을 발표하며 재창립됐고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중민족문학의 건설과 문학의 민주화를 주장했다.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편됐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추진해 온 근대화 정책의 구조적 모순은 1969년 삼선개헌을 전후한 시기에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수출 증대를 통한 경제성장 정책이 한계를 노정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노동자는 최소한의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全泰壹)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사건과 1971년 8월에 일어난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은 노동자와 도시빈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저항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과 저항이 분출했다. 시인 김지하(金芝河)는 1970년 5월 《사상계》에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발표하며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1971년 동아일보 기자들도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며 국가권력으로부터 언론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전태일분신사건과 광주대단지사건 등 1970년대 들어 가시화됐던 민중들의 저항은 사회현실에 대한 문인들의 관심 증대와 문학관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오적’을 통해 박정희 정권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김지하는 문인들의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 특히 언론계의 ‘자유언론실천선언’(1974.10.24.)은 표현의 자유를 중심으로 문인들의 연대감을 고양하고 이들이 저항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했다. 1974년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선언’ 이후 발생한 ‘문인간첩단조작사건’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고은(高銀), 박태순(朴泰洵), 이문구(李文求), 염무웅(廉武雄), 황석영(黃晳暎) 등의 문인들이 1974년 11월 18일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문학인101선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인 것을 계기로 창립됐다. 이 선언문의 당시 표제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이었고, 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학운동단체의 조직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단체명도 이때 결정됐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수평적 조직구조를 지향하여 간사회로 상임기구를 편성하고 일반회원과 함께 협의체를 구성했다. 창립 당시 고은이 대표간사를, 박태순, 신경림(申庚林), 염무웅, 조해일(趙海一), 황석영이 간사를 맡았으며, 김정한(金廷漢), 박두진(朴斗鎭), 박화성(朴花城), 이헌구(李軒求), 이희승(李熙昇) 등은 고문으로 추대됐다. 창립 선언문 ‘문학인101선언’에서 결의한 내용인, 긴급조치로 인해 구속된 민주 인사 석방, 필화와 검열에 맞선 표현의 자유 보장, 민중의 생존권 보장 및 노동법의 민주적 개정,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헌법 개정 등은 이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의 근간이 됐다.
단체 활동
1.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 후 활동
창립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주로 선언문과 성명서를 통해 유신체제에 맞섰으며, 체제 순응적이었던 기존의 보수 문인단체와 대립각을 세웠다. 1974년 12월 7일 무렵 문단에서는 순수한 작가정신을 주장하는 관제적인 성격의 ‘한국문학인 시국선언’이 발표됐고, 이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주 회복과 자유 실천에 앞장서야 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양성우(梁性佑)의 ‘겨울공화국’ 필화 사건(1975.2.24.), 《신동엽전집》 판금 조치(1975.8.26.), 이문구의 《오자룡》 필화 사건(1975.12.22.), 양성우의 ‘노예수첩’ 필화 사건(1977.6.13.), 송기원(宋基元)의 <집단> 필화 사건(1977.9.13.), 리영희(李泳禧)의 《8억인과의 대화》 및 《우상과 이성》 필화 사건(1977.11.23.) 등 저작물에 대한 검열과 탄압을 지속적으로 자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지하 시인 재구속(1975.3.15.), 염무웅 교수 해직(1975.7.23.), 문익환(文益煥) 목사 구속(1976.3), 김남주(金南柱) 시인 체포(1979.10.4.) 등 반체제 인사의 인신에 대한 탄압 또한 계속됐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75년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 등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와 연대하며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77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창립 3주년을 맞아 조직의 정체성과 활동의 방향을 재설정하기 위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제3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긴급조치 9호의 발동으로 인해 정체됐던 활동을 반성하면서 “문학적 이념집단”으로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사회적 실천에 이바지할 문학을 지향”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나아가 1979년 8월 20일에 발표된 ‘1979년 문학인 선언’은 “유신체제의 전체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전태일분신사건, 동일방직민주노조사수투쟁, YH노조신민당사농성사건 등을 계열화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민중 지향적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1978년 4월 24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백기완(白基玩)의 백범사상연구소와 공동으로 성공회 대강당에서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두 단체 회원을 비롯하여 구속자가족협의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해직교수협의회 등의 관계자, 민청학련 관련 제적 대학생 및 가족, 인권변호사,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공덕귀(孔德貴)와 이희호(李姫鎬) 등 각계각층의 반유신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참여했다. 행사는 시 낭독을 중심으로 창(唱)과 노래, 진상 보고, 강연 등 다채로운 형식으로 구성됐다. 고은은 개회사를 통해 ‘반봉건 반외세의 역사발전적 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 ‘궁극적으로 민중이 쓰는 문학으로서의 민중문학’, ‘사회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의식화시키는 지평으로서의 인간화의 문학’ 등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추구해야 할 문학적 지향을 제시했다. 이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김지하 문학의 밤’(1978.12.21.) ‘고난받는 문학인의 밤’(1979.4.24.)과 같은 저항운동으로서의 문학 행사를 연속적으로 개최했다.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전개했던 활동의 성과는 무크 《실천문학》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유신체제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79년 9월 중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기관지 발행을 본격적으로 논의했지만, 10.26과 12.12를 거치면서 1980년 3월 25일에 이르러서야 동아일보 해직기자 김진홍(金鎭洪)이 대표로 있던 전예원 출판사에서 창간호를 발행할 수 있었다. 무크지(mook誌)는 잡지(magazine)의 성격을 지니면서 실제로는 단행본(book)의 형식으로 발행되는 출판물로, 당시 비상시국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무크 《실천문학》의 창간은 고은, 박태순 등의 문인들이 주도하고 김병걸(金炳傑), 백낙청(白樂晴) 등의 해직교수가 참여한 가운데, 긴급조치 등의 위반으로 제명되었다가 복권된 대학생 권오걸(權五傑), 구은우(具銀雨) 등이 편집 실무를 담당하고, 김진홍, 장윤환(張潤煥), 임채정(林采正) 등 해직 언론인 출신의 출판·번역 종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로서의 무크 《실천문학》은 총 다섯 권이 발행됐다. ‘역사에 던지는 목소리’라는 부제를 붙인 제1권(1980.3.25.)은 1970년대 문학을 정리하고 1980년대 문학의 과제를 전망하면서 ‘실천문학’의 함의를 논의했다. 제2권(1981.11.10.)은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는 부제를 붙여 발행됐고, ‘말이여 솟아오르는 내일이여’라는 부제를 단 제3권(1982.11.5.)은 ‘김지하의 문학과 삶’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제4권(1983.12.10.)은 ‘삶과 노동과 문학’이라는 부제와 관련하여 특집을 꾸렸으며, 제5권(1984.10.20.)은 ‘드디어 민중의 바다로’라는 부제와 함께 ‘80년대란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묻는 특집을 통해 ‘새로운 민중문학’에 대한 지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2.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
1984년 12월 19일 오후 6시, 서울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84회의’가 개최됐다. 채광석(蔡光錫)의 사회로 정관이 채택되고 ‘84문학인선언’이 발표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재창립하게 된다. 당시 기관지 무크 《실천문학》의 발행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조직으로서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거의 와해 상태에 놓여 있었다. ‘84문학인선언’을 통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지난 수년간의 고립분산과 태만을 깊이 반성”하고 “민중·민족문학의 건설과 민중·민족운동에의 주체적인 동참”을 천명했다. 정관에서는 인적 구성원의 세대적 연속과 문학론의 이론적 계승을 분명히 하면서도 회원 자격과 조직 구성에 있어서는 기존의 그것과는 다른 비판적 계승임을 강조했다.
특히 정관의 회원자격 조항에서는 일반 독자에게도 회원자격을 부여함으로써 등단제도를 위시한 문인의 전문성과 비전문성에 대한 구분을 없애고자 했다. 상설기구로서 연구조사분과, 복지분과, 홍보분과, 섭외분과, 재정분과, 교육분과, 총무분과로 구성되는 사무국을 설치하여 체계적이고도 효율적인 사업 추진의 의지를 다졌다. 정관을 통해 밝힌 구체적인 활동 계획은 ‘민족·민중문학의 확립을 위한 활동’, ‘문학인의 권익 옹호를 위한 활동’, ‘문학인의 유대강화를 위한 활동’, ‘기타 민족·민중문학의 터전을 다지기 위한 제반 활동’ 등의 네 가지였으며, 주요 임원의 인적 구성도 크게 변화했다. 1970년대 창립기를 주도했던 고은, 김병걸, 박태순, 백낙청, 이문구, 이호철(李浩哲) 등이 고문 및 운영위원으로 추대되고, 실질적인 활동을 기획·실행하는 사무국에는 채광석, 김사인(金思寅), 김정환(金正煥), 이은봉(李殷鳳), 김진경(金津經) 등 무크 동인지 출신의 젊은 세대가 전면에 배치됐다.
재창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주요 활동은 ‘민족문학의 밤’ 개최, 기관지 발간, 민주화운동 참여 등으로 전개됐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대외교육사업의 일환으로 ‘민족문학의 밤’을 매월 개최하여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민족·민중문학의 대승적 확산을 추진하고자 했다. ‘민족문학의 밤’은 재창립 이후 총 일곱 차례 기획됐지만 실제로 개최된 것은 다섯 차례였고, 그 가운데 대중적 참여를 가장 크게 이끌어 낸 것은 김지하가 강연자로 초청되어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제3회(1985.3.6.)였다. ‘민족문학의 밤’ 행사의 현장 사진, 진행 기사, 강연 원고 등은 모두 빠짐없이 갈무리되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새롭게 발간한 기관지 《문학의 자유와 실천을 위하여》에 특집으로 게재됐다.
1985년 2월 《실천문학》이 계간지로 정식 발행하게 되면서 그 운영은 실천문학사에서 맡게 됐다. 이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새로운 기관지 무크 《문학의 자유와 실천을 위하여》를 창간했고, 이후 총 여덟 권을 발행했다. ‘민족의 문학 민중의 문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제1집(1985.2.5.)의 <창간사>에서는 문학에 있어 민족·민중 이념을 달성하고 다른 민주화운동 주체들과 연대함으로써 “참다운 민족·민중·민주 사회”의 건설을 지향점으로 내세웠다. 제2집(1985.3.5.)은 ‘자유의 문학 실천의 문학’을, 제3집(1985.5.10.)은 ‘노동의 문학 문학의 새벽’을, 제4집(1985.6.15.)은 ‘5월의 노래 5월의 문학’을 부제로 달았고, 제5집(1985.8.15.)부터 제8집(1987.5.15.)까지는 《민족문학》이라는 제호로 발행됐다. 무크 《문학의 자유와 실천을 위하여》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고, 제1집부터 제7집(1986.3.30.)까지는 당국으로부터 압수당했다.
1980년대에도 당국의 검열과 필화는 지속됐다. 개인 창작물의 필화는 다반사였고, 《실천문학》은 폐간(1985.8.23.)됐으며 창작과비평사는 출판등록을 취소(1985.12.9.)당했다. 이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창작과표현의자유에대한문학인401인선언’(1985.8.1)을 발표하며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했다. 1986년에 접어들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재야운동단체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서명운동과 시청료 거부운동에 참여했으며, 광주항쟁 열사 추모제를 개최하고 당국의 탄압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87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에 맞서 성명서 ‘4.13호헌조치에대한문학인193인의견해’를 발표하며 민주화 실현에 앞장섰다. 1987년 6월항쟁의 승리와 노동자대투쟁의 전개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조직을 개편하기로 확정했다. 9월 17일 서울 YMCA 강당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가 개최됐고, 이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산하의 ‘자유실천위원회’로 존속했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로의 개편은 순조롭지 않았다. 김명인(金明仁), 이재현(李在賢), 현준만 등 젊은 세대는 체계적인 논의의 과정 없이 급작스럽게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음을 근거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창립을 비판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둘러싼 신구세대 간의 갈등은 재창립 무렵부터 표면화됐다. 재창립을 주도했던 채광석 등의 젊은 세대는 ‘문학의 민주화’라는 테제를 통해 전통적인 작가·문학·장르 등의 개념을 해체하고 전체 민중이 향유할 수 있는 문학으로의 재구성을 추구했기에 전통적인 문학 관념을 고수하던 이호철 등의 구세대와는 입장 차가 확연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유하며 젊은 세대 문인들은 ‘당파적 노동문학’의 수립을 주창하는 가운데 민족문학작가회의로의 전환 및 그 운동 방식에 동의하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족문학의 ‘주체논쟁’을 통과하면서 젊은 세대의 활동은 ‘민중적 민족문학론’, ‘노동해방문학론’, ‘자주적 문예운동’ 등으로 분화했고 그런 가운데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걸쳐 다층적인 문학논쟁이 펼쳐졌다.
멀티미디어
무크지 《실천문학》 창간호(1980년)
1975년 5월 19일 반공법 위반 사건 첫 공판에 나온 김지하 시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8년 4월 24일 서울 성공회 강당에서 열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첫 번째 민족문학의 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5년 3월 6일 서울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열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민족문학의 밤'에서 강연하는 김지하 시인(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을 주도한 채광석(오른쪽)이 1987년 4~6월 열린 민족문학교실에서 도종환과 대담하고 있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족문학의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성명서를 읽고 있는 백낙청
양성우 석방 환영 예배에 참석한 박형규
자실 나들이
제5집부터 《민족문학》이라는 제호로 발행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새 기관지(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200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3, 돌베개, 2010.
박태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1~8), 《내일을 여는 작가》 5-10, 1997-1998.
한국작가회의 40주년 기념사업단 편찬위원회, 《증언: 1970년대 문학운동》, 한국작가회의, 2014.
민주화운동사전 연계자료에서 활용하고 있는 사진 자료는 소장 기관으로부터 사용 허락을 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 서비스 이용 외에 무단전재 또는 재배포로 인한 재산상의 피해, 명예훼손 등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사진 자료의 사용에 대해서는 소장 기관에 문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