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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조선투위사건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1975년 3월 17일 새벽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사원들이 회사 측에 의해 강제 축출된 뒤 자유언론만세를 외치고 있다.(경향신문 포토뱅크)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해당사항 없음
영어표기
the Dong-a and Chosun Copmmittees for Defense of Free Press Defense Incident
한자표기
東亞·朝鮮鬪委事件
발생일
1974년 10월 26일
종료일
1975년 3월 21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지역
서울

개요

1974년 가을부터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요구하면서 일정 부분 자신들의 주장을 보도에 관철시키고 있던 동아일보·동아방송의 기자, PD, 아나운서 등 113명과 조선일보의 기자 32명이 회사 측의 징계와 언론인들의 농성을 거쳐 강제해직됐고, 이후 언론자유를 위한 노력 지속을 위해 각각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출범했다.

배경

1961년 5.16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4년 한일협정반대운동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언론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공포했다. 이 법은 문화공보부 장관이 신문의 발행을 정지 및 취소시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언론 장악의 길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악법이었다. 비록 언론계의 반대로 법 시행을 보류하긴 했으나 이후 이른바 기관원들이 언론기관에 공공연히 출입하여 제작에 간섭하고 정권 비판적 기사를 문제삼아 필화사건을 일으켜 해당 기자를 구속시키는 등 언론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높아져 갔다. 또한 한국 언론기업들은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권력에 대한 굴복을 넘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유착관계를 가지게 됐다.주)001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이 같은 언론의 변질에 대해 국민들의 불신과 지탄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고 이것은 양심적인 젊은 언론인들을 자극했다. 1971년 4월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고 곧 각 언론사로 번져갔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이른바 유신쿠데타를 통해 종신집권의 길로 나아가는 가운데 1973년 11월과 12월에 다시 언론자유수호를 외치는 선언문이 동아일보 기자들에 의해 발표됐으나 한국의 언론 상황은 1974년 1월 긴급조치 발동으로 더욱 어려워졌다.주)002 결국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유신독재의 언론탄압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을 시작했다.

동아일보·동아방송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은 여타 언론사의 언론인에게도 영향을 끼쳤는데, 조선일보 기자들도 같은 날 오후에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 및 ‘결의문’을 채택·발표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에서 당국의 부당한 압력에 그동안 무기력했음을 고백하고 앞으로 이 같은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배제할 것과 언론인들의 부당한 연행에 맞서 투쟁하고 각계의 의사 표시를 반드시 게재할 것을 결의했다.

원인

1. 조선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 열의와 노력은 동아일보 언론인들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24일 결의 직후에도 《조선일보》 지면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는 석간신문 보도 후에야 조그맣게 보도됐다. 그나마 방우영(方又榮) 사장은 초기에 표방했던 ‘《동아일보》의 뒤를 적당히 따라가기만 한다’는 방침을 곧 철회했고 편집국 간부들은 이 같은 사주의 태도에 영합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대책위원회’를 구성, 중요한 기사의 삭제, 축소를 막기 위해 간부들에게 이 문제의 시정을 요구했다. 기자들의 부단한 문제 제기로 11월 중순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개헌 추진 선언을 사진과 함께 1면 톱기사로 싣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1975년 3월 6일부터 해직 기자 복직 요구 및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농성투쟁을 벌이는 조선일보 기자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그러나 1974년 12월 17일자 지방판 4면에 유신정우회 전재구(全在球) 의원의 유신체제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칼럼이 실리자 외신부 백기범(白基範) 기자와 문화부 신홍범(愼洪範) 기자는 김용원(金容元) 편집국장에게 이 칼럼의 게재가 편집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김용원 편집국장은 오히려 두 기자의 문제 제기가 편집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일축했고, 이후 사측은 두 기자가 위계질서를 깨고 편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두 기자에게 시말서 제출을 요구했다. 두 기자가 이를 거부하자 사측은 12월 17일 징계회의를 열어 전격적으로 두 기자의 해임을 결의했다. 이에 경악한 조선일보 기자들은 논의를 거쳐 12월 19일 편집국에서 비상 총회를 열고 두 기자의 해임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김윤환(金潤煥) 편집부국장이 사측을 대표하여 ‘두 기자를 3개월 안에 복직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자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을 재확인하고 일단 해산했다.

1974년 12월 말부터 조선일보 기자들은 부진한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한국기자협회 조선일보분회(이하 기협 조선분회)를 개편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경제부 정태기(鄭泰基) 기자가 새 분회장에 선출됐고 기협 조선분회 새 집행부는 2월 1일 분회 활성화와 자유언론 실천의 일환으로 분회보를 발간했다. 사측은 정태기 분회장에게 분회보 발간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기협 조선분회가 이를 거부하자 사측은 정태기 분회장 등 분회 임원 5명을 파면 등 징계를 결의했다. 징계는 기자들의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유예하다 2월 17일 일단 백지화됐다. 그러나 창간 기념일인 3월 5일을 전후하여 사측이 당초에 약속했던 백기범, 신홍범 두 기자의 복직 약속을 파기하자 기협 조선분회 주도로 3월 6일부터 두 기자의 복직 관철 때까지 신문제작을 거부하는 농성이 편집국에서 시작됐다.

2. 동아일보

동아일보·동아방송에는 1974년 12월부터 정권이 개입한 것으로 보이는 광고탄압이 시작되어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이후 수많은 독자와 청취자들이 격려광고, 격려성금 등의 형태로 동아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을 지지했다.주)003 이 같은 독자·청취자들의 지지에 감격한 동아일보·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은 신문과 방송 제작 현장에서 일체의 외부기관 간섭을 거부하고 그동안 보도되지 않거나 축소 보도되어 왔던 서민생활의 어려운 상황과 각계각층에서 일어나는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보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광고탄압이 장기화하고 수많은 격려광고가 대규모 광고주의 광고 결손으로 인한 손실을 채울 수 없다고 판단한 사주와 경영진이 내세운 이슈는 조선일보 측과 마찬가지로 ‘사내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여기에 광고탄압으로 인한 경영난을 이유로 ‘불필요한 사업과 기구를 정비’하여 ‘경영을 합리화할 것’이 포함됐다. 이 같은 사측의 방침은 1975년 2월 28일 열린 동아일보 정기 주주총회에서 세워진 것으로, 사장에 재선임된 김상만(金相万)과 3년 동안 동아일보를 떠나 있다가 주필(이사)로 복귀한 이동욱(李東旭)에 의해 거듭 강조됐다. 사측은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 과정에서 언론인들이 편집권을 침해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사내 질서 유지’와 연루시켜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

1975년 3월 12일부터 공무국에서 제작거부 단식농성을 벌이는 동아일보 기자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일보 기자들의 농성이 시작된 지 불과 이틀 후인 3월 8일 오후 사측은 경영난을 이유로 심의실, 편집국 기획부, 과학부, 출판국 출판부를 폐지하고 소속 사원 18명을 전원 해임한다는 공고문을 내걸었다. 해임된 사원들 중에는 기협 분회원 7명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아 언론인들은 이 조치를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압살하려는 저의로 여기고 같은 날 총회를 열어 회사 측이 조치를 취소할 때까지 밤에 농성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사측은 기협 분회 집행부의 이 같은 결의를 거부하고 3월 10일 추가로 전임 분회장 장윤환(張潤煥) 기자와 외신부 박지동(朴智東) 기자를 사내 질서 문란의 이유로 해임했다. 기협 분회는 3월 12일 긴급총회를 열고 이부영(李富榮), 성유보(成裕普) 기자 등이 작성한 ‘자유언론 실천백서’를 채택했다. 백서의 내용은 정권의 언론탄압과 경영진의 해임 조치를 비판하고 언론인들이 국민의 편에 설 것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기협 분회는 경영진의 부당 해임 철회 및 이동욱 주필의 퇴진을 요구하며 이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신문, 방송, 잡지의 제작을 거부할 것을 결의했다. 이날부터 110여 명의 기자들이 공무국, 편집국에서 제작거부 농성을 시작했다.주)004

전개

1975년 3월 6일부터 시작된 조선일보 기자들의 제작거부 농성 첫날, 기자들은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4개월이 지났음에도 조선일보의 변화가 없음을 지적하면서 해임된 신홍범·백기범 기자의 복직 및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 노력을 외면한 국장단의 인책 사퇴를 촉구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편집국 부·차장들은 통신사와 다른 신문의 뉴스를 베껴 신문 제작을 계속했다. 그리고 사측은 기자들의 제작거부 농성에 대해 추가 해임으로 대응했다. 3월 7일 오전에 분회장 정태기 기자 등 기협 조선분회 집행부 5명이 전격 파면됐다.

농성 6일째인 1975년 3월 11일 33명의 기자들이 회사에서 쫓겨난 데 항의해 조선일보 기자들이 회사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이 같은 사측의 해임 조치에 대해 농성 기자들은 예비했던 1차 임시 기협 조선분회 집행부의 취임을 승인하고 농성을 계속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의 농성 소식에 여타 언론사들은 물론 민주회복국민회의, 한국기자협회, 구속자가족협의회 등 사회단체들로부터 기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가 이어졌다.

조선일보 측의 기자 해임 조치를 비난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농성 5일째인 3월 10일 1차 임시집행부의 간부 5명을 포함해 총 8명을 파면했다. 그러나 농성 6일째인 3월 11일에 부차장급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치부 이종구(李鍾求) 차장이 농성에 합류, 농성 기자들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같은 날 사측은 기자 4명 파면, 37명 무기정직이라는 징계조치를 단행했다. 남은 40여 명의 기자들은 마지막까지 농성을 이어가기로 결의했으나 3월 11일 저녁 수많은 경비원들에 의해 편집국 밖으로 강제로 끌어내어졌다. 회사 밖으로 쫓겨난 기자들은 3월 12일 오전 회사 정문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고자 했으나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후 거리로 밀려난 기자들은 신문사 밖에서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로서 3월 21일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출범시켰다.주)005

《워싱턴포스트》 본 오버도퍼 기자(맨 왼쪽)가 편집국에서 농성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송건호 편집국장, 장윤환 기자협회 분회장, 이부영 대변인이 앉아 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동아일보·동아방송의 경우도 조선일보의 경우와 비슷한 경로를 밟아 나갔다. 조선일보 농성 기자들이 강제로 쫓겨난 3월 12일 동아일보·동아방송의 기자들이 공무국, 편집국을 점거하고 제작거부 농성을 시작했으나 동아일보 측의 대응도 조선일보 측의 대응과 비슷하게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사측은 3월 12일 밤 11시를 기해 기협 분회 간부 등 언론자유실천운동 핵심 언론인들을 무더기로 해임조치했다. 권영자(權英子) 기협 분회장 등 총 17명의 언론인이 대상이었다.

여기에 더해 사측은 경영진에 동조하는 일부 기자들을 중심으로 신문제작을 진행하도록 했다. 이들의 신문제작 역시 《조선일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통신 및 타 신문 기사를 편집한 형태로 진행됐다. 더구나 방송의 경우, 방송 기자들의 제작거부로 오전 뉴스 방송이 나가지 못하게 되자 사측은 타 신문과 통신을 복사한 기사를 오류동 송신소로 가지고 가서 뉴스 방송을 만들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음악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오후 1시를 기해 세종로 사옥에서의 뉴스는 물론 여타 프로그램의 제작을 차단했고 오류동 송신소 주변을 경찰이 엄중하게 경계한 가운데 사전에 미리 배포한 출입증 소지자만 출입시켰다. 기자들과 달리 3월 12일 오전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은 이 같은 조치에 결국 같은 날 오후 방송국 점거 및 제작거부 농성에 참여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바로 임시총회를 통해 안종필(安鍾珌) 차장을 기협 분회장에 선임하는 등 임시집행부를 구성했고, 해임조치된 37명의 사원들의 복직과 이동욱 주필의 퇴진을 요구하며 제작거부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이처럼 제작거부에 참여한 동아일보·동아방송 언론인들은 기자 110여 명, 프로듀서·아나운서·엔지니어 50여 명에 이르렀다.

1975년 3월 1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농성하는 편집국을 방문해 기자회견하는 각계인사들. 왼쪽부터 홍성우 변호사, 박형규 목사, 공덕귀 여사, 이우정 교수, 백기완 선생, 유택형 통일당 대변인, 이택돈 신민당 대변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측은 제작거부에 참여한 언론인들을 ‘과격파’, ‘난동분자’로 몰면서 사태를 왜곡 선전했다. 그러나 그동안 동아일보에서 벌어진 자유언론실천운동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일부 야당 인사 및 외부 재야인사들은 농성장을 찾아 농성 언론인들을 격려하고 사측을 설득해 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3월 14일 저녁 농성장을 찾은 박형규(朴炯圭) 목사, 홍성우(洪性宇) 변호사, 공덕귀(孔德貴) 여사 등 재야인사들 22명이 3층 편집국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해임된 언론인들의 복직을 통한 사태의 해결을 호소했다. 이들은 사측이 무더기 해임을 백지화하고 언론인들은 제작 일선에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언론인들의 농성이 계속되는 동안 총 12명의 신문과 방송의 부장 및 차장들이 농성에 합류했고, 3월 15일에는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실천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송건호(宋建鎬) 편집국장이 김상만 사장에게 해임 언론인들의 전원 복직을 통해 사태를 수습할 것을 촉구하면서 사표를 냈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창문을 통해 들어오려는 사측 동원 인력을 막고 있는 기자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하지만 이 같은 재야인사들과 일부 간부급 언론인들의 호소와 농성 합류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강제 농성 해산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3월 17일 새벽 3시 15분경 사측이 동원한 200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2층 공무국부터 진입, 단식농성 중이었던 23명의 기자들을 폭력을 행사하며 강제로 끌어냈다. 이로 인해 임채정(林采正), 정연주(鄭淵珠) 기자 등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 사측이 동원한 사람들은 3층 편집국 농성 기자들이 잠근 문을 부수고 들어와 강제로 농성 기자들을 사옥 밖으로 밀어냈다. 방송국 프로듀서와 아나운서 등이 농성 중이었던 4층 방송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새벽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많은 재야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강제로 쫓겨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언론인들은 아침 9시에 다시 동아일보 앞에 모였으나 동아일보 측은 이미 신분증을 바꿔 제작거부 언론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이에 제작거부 언론인들은 신문회관으로 이동하여 ‘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라는 공동 명의(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 동아방송 언론자유실행위원회)의 성명서를 채택, 낭독한 뒤 매일 오전 9시 동아일보 사옥 앞으로 출근하여 동아일보 측의 조치에 항의하는 침묵시위를 벌일 것을 결정했다. 다음 날인 3월 17일 이들 언론인들은 해임 여부와 무관하게 애초의 자유언론실천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을 확대하기로 한 3월 16일 밤 결의에 따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출범시켰다.주)006

결과/영향

해직된 동아투위 위원들이 6개월 동안 회사 앞에서 아침 시위를 벌이고 프레스센터나 기독교회관까지 도보 시위를 벌였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1975년 3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일어난 언론인 해직 사태 및 언론인들의 제작거부 농성으로 백수십여 명에 달하는 언론인들이 신문사에서 쫓겨나 해직 언론인이 됐다. 동아일보·동아방송에서는 몇 차례의 파면과 정직, 그리고 사측의 회유에 따른 제작 복귀 행렬을 거쳐 최종적으로 1976년 3월 17일 투위 출범 1주년이 되었을 때 동아투위 위원의 수는 113명이 됐다. 조선일보에서도 조선투위 결성 이후 조선일보 측이 추가로 18명의 기자를 파면하여 해직 기자가 34명으로 늘었다가 이들 중 2명이 이후에 조선일보에 복귀, 최종적으로 32명이 조선투위의 위원이 되었다.

이들의 대량 해직 이후 언론계에서 자유언론실천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1970년대 말까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고, 반면 조선, 동아를 포함한 언론기업들은 정권의 언론통제에 굴복, 야합하여 한국언론은 유신독재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됐다. 그러나 조선, 동아에서 해직된 해직 언론인들, 즉 조선투위와 동아투위 위원들은 해직 상태에서도 ‘재야의 언론인’으로서 언론기업들이 다루지 않던 기사들을 보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일부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붕괴 후 새로 등장한 전두환(全斗煥)·신군부 독재에 저항하여 1980년대에도 1980년 해직 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자유언론을 회복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노력은 1988년 세계 최초의 국민주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한겨레신문》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주)001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언론 40년: 실록 동아투위 1974-2014》, 다섯수레, 2014, 73-74쪽. 
주)002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의 책, 76-88쪽. 
주)003
김행섭, <1974~75년 동아일보·동아방송 구성원들의 자유언론투쟁>, 《사림》53, 2015, 360-371쪽. 
주)004
김행섭, 위의 논문, 371-376쪽. 
주)005
신홍범, <자유언론을 향한 머나먼 길 - 조선자유 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걸어온 발자취 >, 《기억과 전망》42, 2020, 354-358쪽. 
주)006
김행섭, 위의 논문, 376-381쪽. 
멀티미디어
  •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1975년 3월 6일부터 해직 기자 복직 요구 및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농성투쟁을 벌이는 조선일보 기자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 1975년 3월 12일부터 공무국에서 제작거부 단식농성을 벌이는 동아일보 기자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농성 6일째인 1975년 3월 11일 33명의 기자들이 회사에서 쫓겨난 데 항의해 조선일보 기자들이 회사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 《워싱턴포스트》 본 오버도퍼 기자(맨 왼쪽)가 편집국에서 농성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송건호 편집국장, 장윤환 기자협회 분회장, 이부영 대변인이 앉아 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1975년 3월 1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농성하는 편집국을 방문해 기자회견하는 각계인사들. 왼쪽부터 홍성우 변호사, 박형규 목사, 공덕귀 여사, 이우정 교수, 백기완 선생, 유택형 통일당 대변인, 이택돈 신민당 대변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1975년 3월 17일 새벽 창문을 통해 들어오려는 사측 동원 인력을 막고 있는 기자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해직된 동아투위 위원들이 6개월 동안 회사 앞에서 아침 시위를 벌이고 프레스센터나 기독교회관까지 도보 시위를 벌였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동아일보 투쟁위원회 농성장에서 농성에 필요한 집기들을 나르는 사람들
  • 성명서[조선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투쟁 관련 성명서 모음]
  • 東亞사태 日誌[1975.3.8부터 1975.4.2까지의 동아사태 일지. 각계 성명과 결의사항 다수 포함]
  • 성명서[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지지한다]
  • 성명서[자유언론에 힘쓰는 기자들에 대한 해고와 언론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 성명서[우리는 언론자유실천운동을 분쇄하려는 자를 반민족분자로 단정한다]
  • 自由言論實踐白書[성명서-'투쟁의 자세를 한단계 높이면서'외 1종 포함]
참고문헌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언론 40년: 실록 동아투위 1974-2014》, 다섯수레, 2014.
  •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 조선투위 18년 자료집 1975-1993》, 두레출판사, 1993.
  • 김행섭, <1974∼75년 동아일보·동아방송 구성원들의 자유언론투쟁>, 《사림》53, 2015.
  • 신홍범, <자유언론을 향한 머나먼 길 –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걸어온 발자취>, 《기억과 전망》42, 2020.
집필정보
집필자
김행섭
집필일자
2024-11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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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네스티 한국지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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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동아일보 기자 신문 제작 거부(조선일보 1975.03.13.)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기자해직 비난성명 천주교사제단(조선일보 1975.03.14.)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NYT지 동아 사태 보도(동아일보 1975.03.14.)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해임·제작 거부 기자 6일 만에 본사 농성 풀어 오늘부터 정상 제작...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동아」 농성기자 해산(조선일보 1975.03.18.)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동아·조선 기자 지원 민주국민회의 호소(경향신문 1975.03.21.)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자...
[《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1975년 3월 6일부터 해직 기자 복직 요구 및 언론자유수호를 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1975년 3월 12일부터 공무국에서 제작거부 단식농성을 벌이는 동...
[《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농성 6일째인 1975년 3월 11일 33명의 기자들이 회사에서 쫓...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워싱턴포스트》 본 오버도퍼 기자(맨 왼쪽)가 편집국에서 농성하는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1975년 3월 1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농성하는 편집국을 방문해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1975년 3월 17일 새벽 창문을 통해 들어오려는 사측 동원 인력...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해직된 동아투위 위원들이 6개월 동안 회사 앞에서 아침 시위를 벌이...
동아일보 투쟁위원회 농성장에서 ...
성명서[조선일보 기자들의 언론자...
東亞사태 日誌[1975.3.8부...
성명서[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
성명서[자유언론에 힘쓰는 기자들...
성명서[우리는 언론자유실천운동을...
自由言論實踐白書[성명서-'투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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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조선투위사건
  • 설명 1975년 3월 17일 새벽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사원들이 회사 측에 의해 강제 축출된 뒤 자유언론만세를 외치고 있다.(경향신문 포토뱅크)
  • 출처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