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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운동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해당사항 없음
영어표기
the Free Press Movement
한자표기
自由言論實踐運動
발생일
1974년 10월 24일
종료일
1975년 3월 17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지역
전국

개요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선 기자들의 잇따른 언론자유수호선언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1974년 언론계가 더욱 적극적으로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해 전개한 운동이다.

배경

박정희 정권은 언론에 대해 탄압과 회유의 양면책으로 사용했다. 언론 탄압은 비판적 성향의 야당지에 집중되었는데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굴복시켰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언론사 내에 상주하며 편집에 직접 개입하여 사실상의 사전 검열을 했다. 이는 1970년대 언론인들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오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에 갖가지 경제적 혜택을 제공했다. 신문사들에 대해서는 외국 차관을 저리(낮은 이율)로 장기 제공했으며 언론사의 다각 경영을 허용하여 신문과 방송의 겸영이 가능해졌다. 신문사들은 각종 잡지를 창간하여 주간지 붐을 일으키며 선정성 경쟁으로 치달아 흥미 본위의 저급 문화를 공급했다. 또한 언론인들을 정관계의 고위직으로 발탁했으며 언론인의 재교육과 복지도 정부가 제공했다.

1971년 4월 21일 언론자유수호 결의문을 채택하고 있는 합동통신 기자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이러한 혜택에 매몰된 나머지 언론에서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은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신문들은 카르텔 체제를 형성하여 불필요한 경쟁을 배제하고 공생을 모색함으로써 차별성을 잃었다. 더구나 1969년 삼선개헌 추진 과정에서 언론들은 정부의 홍보 기관 역할만을 하자 독자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1969년부터 대학생들은 시위에서 언론을 규탄하고 각성을 촉구하였으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급기야 1971년 3월에는 대학생들은 언론 화형식까지 벌였다. 이는 현장 언론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어 그해 4월 15일 동아일보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한 것에 이어 전국의 많은 언론사들이 선언에 동참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진실을 적극적으로 보도할 것과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외부적 강제를 거부하고 기관원의 언론사 상주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기자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0월 위수령 발동을 시작으로 12월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972년에는 계엄령 및 10월 유신 선포 등 초강압적인 정책을 연이어 펼치며 영구 집권을 획책했다. 이로 인해 언론자유수호운동은 위축되었다.주)001

원인

유신체제가 출범하면서 언론자유를 외치던 목소리는 수그러들었으나 해가 바뀌면서 다시 움직임이 시작됐다. 1973년 3월 중순 동아일보 기자들은 인사 문제 및 처우 개선과 함께 편집권의 행사와 지면 쇄신을 요구하는 연판장(連判狀)주)002을 돌렸고, 70%에 가까운 기자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해 10월 2일에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10월 유신 이후 처음으로 시위가 벌어져 유신 철폐와 민주 회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기자들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언론 보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언론사의 기자들은 1971년에 이어 다시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73년 10월 19일 경향신문의 초년생 기자들을 시초로 여러 언론사가 뒤를 이었으며 11월 20일에는 동아일보가 언론자유를 수호하여 진실 보도에 충실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통제와 이에 굴복한 언론사 사주들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전개

《기자협회보》(1974.3.8.)의 동아일보 기자노조 결성 보도(전태일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이은 언론자유수호선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부터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와 자유마저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기자들은 1974년에 들어서면서 보다 근본적이고 효율적인 투쟁을 위해 언론노조 설립을 시도했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74년 3월에 있었던 동아방송의 부당한 인사조치였다. 세 명의 기자를 방송사 프로듀서와 영업직으로 발령한 조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다 조직화된 힘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노조 결성을 시도했다.

1974년 3월 6일 동아일보의 33명 언론인들이 모여 ‘전국출판노동조합 동아일보 지부 발기인위원회’ 창립대회를 열었다. 다음 날 전국출판노조로부터 인준필증을 교부받고 서울시청에 신고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3월 8일 노조 간부 11명과 2명의 기자를 전격 해임했다. 노조는 이에 대해 13일 법원에 해고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했다. 바로 그날 밤 회사는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기자 6명을 해고하고 6명 무기정직, 10명 감봉 등 추가로 징계했다. 기자들은 부당해고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27일에는 2차로 가처분신청을 제기하고 28일에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서울시는 4월 5일 노조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4월 12일 동아일보는 사장 특별담화를 통해 두 차례의 징계를 모두 사면한다고 발표했다.주)003 이때의 노조 설립 시도는 바로 그해 하반기 자유언론실천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긴급조치 제4호까지 발표하며 언론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10월 19일에는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대학가와 종교계의 동향, 월남 사태, 사회 불안 우려가 있는 기사는 취급하지 못하도록 했다. 동아일보 10월 23일 서울대 농대생들의 시위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편집국장 등 간부 3명이 정보기관에 연행됐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들은 연행된 간부들의 귀사를 요구하며 편집국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바로 그다음 날인 10월 24일 오전 9시에 180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를 밝혔다.주)004

ㅡ.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ㅡ.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ㅡ.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이는 불법 연행에 대한 대처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 외에는 1971년의 언론자유수호선언과 거의 같다. 한 가지 차이는 이전의 선언들은 언론자유를 ‘수호’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이를 ‘실천’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후 만세를 부르고 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한국일보도 10월 22일 사장과 편집국장이 월남 사태 해설 기사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자 기자들이 사내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기자들은 이를 기사화했으나 간부들의 만류로 지면에 실리지 못하자 사실이 보도될 때까지 제작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는 10월 25일 새벽 민주 언론 사수를 선언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두 신문사 기자들의 이번 선언도 언론계로 확산되어 전국 31개 언론사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를 결의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언론사들은 경향신문, 서울신문, 신아일보, 조선일보, 중앙매스컴, 동양통신, 합동통신, 산업통신, 시사통신, KBS, MBC, 기독교방송, 국제신보, 부산일보, 경기신문, 강원일보, 충청일보, 충남일보, 전북일보, 전남매일, 전남일보, 대구매일신문, 영남일보, 경남일보, 전주MBC, 대구MBC, 춘천MBC, 내외경제신문, 경남매일 등이었다.
이들의 결의 내용은 대체로 외부 간섭 배제, 사실 보도 충실, 기관원 출입 금지, 언론인 연행 거부 등이었다. 한국기자협회도 25일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지지하고 1971년에 채택한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재확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26일에는 상설 기구로 ‘언론자유수호특별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주요 언론사들도 선언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주)005

1974년 12월 10일 한국일보 노조 창립총회(기자협회보 1974.12.13.)

한편 한국일보 기자들은 12월 10일 노조 창립대회를 열고 바로 서울시청에 신고했다. 발기인은 31명이었지만 하루 만에 143명이 가입했다. 회사는 바로 지부장 이창숙(李昌淑) 기자를 해임하고 간부들에게는 경고 조치했다. 노조는 운영 세칙을 만드는 등 활동을 개시했지만 서울시는 1975년 1월 6일 신고서를 반려했다.주)006
이때의 선언 이후에도 언론의 보도 경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11월 12일 자 신문에서 시위 기사를 4단으로 편집하고 현장 사진도 게재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으나 간부진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다. 이에 기자들은 제작을 거부하여 결국 이 날짜 신문은 휴간했다.주)007

언론인들이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자 정권은 동아일보를 보다 근본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광고 탄압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동원했다. 이로 인하여 이른바 동아일보 광고 사태가 빚어졌으며 이것이 바로 동아일보격려광고운동이 전개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언론들이 대부분 광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데 착안하여 광고주에 압력을 행사하여 광고를 게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언론을 통제하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1973년 3월 일시적으로 조선일보에 가해진 바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3월 5일 조선일보에 다음 날 광고하기로 되어 있던 9개 업체에 압력을 가해 광고를 전면 취소하도록 했다. 이때의 광고 탄압은 특정 기사나 사건이 계기가 된 것도 아니었고 취소된 광고란에는 무료 광고나 기사로 채우도록 하였기에 사회적으로 별다른 파장 없이 지나갔다.주)008 이 방법이 1974년 12월 자유언론실천 투쟁에 앞장선 동아일보를 탄압하기 위해 다시 동원된 것이다. 12월 20일 한일약품이 광고를 취소한 것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광고주들이 예정된 광고를 해약함으로써 동아일보는 경영에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됐다.

1974년 12월 26일 자부터 동아일보에 백지 광고가 나가자 먼저 종교계가 나섰다. 12월 2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시초로 28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30일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뿐만 아니라 대한감리교여선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여전도회,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 구세군가정단, 한국루터교회연합부인회, 대한성공회어머니회가 연명하고 성명(성명서1, 성명서2, 성명서3)을 통해 정부의 언론 통제를 규탄하고 동아일보를 돕는 운동을 제안했다. 야당인 신민당도 ‘민권의 시대를 창조하자’는 제목의 광고를 통해 민주언론 돕기 운동을 제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로 언론인 홍종인(洪鍾仁)이 1974년 12월 30일 자 1면 하단에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제목의 의견 광고를 게재했다. 여기서 홍종인은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면서 동아일보에 대한 탄압을 규탄했다. 이 광고의 바로 위에는 돌출 광고 형식으로 동아일보 광고국장 김인호(金仁浩) 명의로 개인의 의견 광고나 협찬 광고를 모집하니 적극적인 성원을 바란다는 안내 광고가 게재되었다. 이것이 동아일보 격려광고 운동이 벌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에 대한 격려광고(영등포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곧이어 백지로 나가던 동아일보의 광고면에 각계의 격려 광고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1975년 신년호 1면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7면에 야당인 신민당, 8면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경동교회 교인 일동,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의 격려 광고가 게재됐다. 김인호 당시 광고국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민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었다고 한다.주)009 1월 8일부터는 ‘언론자유수호격려’를 4면의 광고란에 고정시켰다. 이때부터 전국의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여하여 개인, 혹은 집단으로 의견 광고를 게재하여 동아일보 기자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이 운동은 대중적으로도 급속히 확산되어 전국에서 다양한 독자들이 참여했고 1월 10일경부터는 3~5개 면의 광고란을 차지했다. 밀려오는 광고를 다 싣지 못해 1월 27일 자에는 광고국장 명의로 ‘오늘 격려광고 일부는 지면 부족으로 내일로 미룹니다’라는 안내문을 낼 정도였다. 정부의 극단적인 언론 탄압에 대해 국민들이 격려광고라는 형태로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에 성원을 보내고 동참했던 것이다. 나아가 동아일보 구독 운동도 전개됐다. 1974년 12월 2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에서 동아일보 구독 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한 이후 여러 단체들이 나섰다.

1975년 3월 13일 동아·조선일보 기자 대량해고사태 등에 맞서 한국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이 신문회관 앞에서 ‘자유언론만세’를 외치고 있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1975년 5월까지 총 1만 352건의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통해 정점을 맞았던 1974년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은 동아일보의 경영진이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자들을 대량 해고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1975년 3월 17일 회사 측은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농성 중이던 언론인들을 강제로 해산하고 대량으로 해고했다. 해고된 언론인들은 바로 그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1975년 4월 12일까지 해임이나 무기 정직된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는 모두 131명이었다. 그 후 일부 무기 정직자가 회사로 복귀함으로써 동아투위 창립 1주년에 회원 수는 113명이었다.주)010

당시 조선일보에서도 기자들의 대량 해고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일보는 1974년 12월 18일 기사에 대해 항의하는 백기범(白基範)과 신홍범(愼洪範) 두 기자를 편집권을 침해했다며 해고했다. 부당 인사에 대한 항의가 지속되자 회사는 다음 해 창간 기념일인 3월 5일까지 두 기자의 복직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조선일보 기자들은 1975년 3월 6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재천명하고 제작을 거부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3월 11일 회사 측은 농성 기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킨 후 4명의 기자를 파면하고 36명을 무기정직 조치했다. 해고된 기자들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주)011

결과/영향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서울 장충동 베네딕토 수녀원 피정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송건호 초대 의장이 실무진을 소개하고 있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이후 언론사 외부에서 자신들의 복직과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고, 이는 한국 언론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이 두 단체는 5공화국 출범 과정에서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대량 해직으로 인해 조직된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와 결합하여 1984년 12월 1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85년 6월 월간 ‘말’ 지를 창간하여 보도지침을 폭로함으로써 제5공화국의 언론 통제 및 탄압의 실상을 알렸고, 1988년에는 모든 국민이 주주가 되는 새로운 형태의 언론인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001
채백, ≪한국언론사≫, 컬처룩, 2015, 335-378쪽. 
주)002
한 문건에 여러 사람이 도장을 찍어 판결하거나 승인한 서장(書狀) 
주)003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언론 40년: 실록 동아투위 1974-2014》, 다섯수레, 2014, 90-107쪽. 
주)004
<동아기자들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자협회보≫, 1974. 10. 25. 
주)005
≪기자협회보≫, 1974. 10. 30.자의 여러 기사들 참조. 
주)006
<한국일보 기자노조 결성>, ≪기자협회보≫ 1974. 12. 13;<「한국」노조 설립신고서 반려>, ≪기자협회보≫ 1975. 1. 10. 
주)007
<기자들의 제작거부로 「동아」 12일 휴간>, ≪기자협회보≫, 1974. 11. 15. 
주)008
김주언, ≪한국의 언론통제≫, 리북, 2009, 263-265쪽. 
주)009
<동아사태 때 격려광고 첫 참여자는 DJ>, ≪미디어오늘≫, 2006. 3. 15.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791 (검색일: 2023. 11. 13.). 
주)010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의 책, 2014, 67쪽. 
주)011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 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 조선투위 18년 자료집, 1975-1993≫, 두레출판사, 1993. 
인정 내용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확정일
2001.03.20
인정 내용
민주화운동 및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제15차 회의 인정 민주화운동관련자 등)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민주화운동백서: 인명편》1, 2005.
멀티미디어
  • 1971년 4월 21일 언론자유수호 결의문을 채택하고 있는 합동통신 기자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 《기자협회보》(1974.3.8.)의 동아일보 기자노조 결성 보도(전태일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후 만세를 부르고 있다.(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1974년 12월 10일 한국일보 노조 창립총회(기자협회보 1974.12.13.)
  • 1975년 3월 13일 동아·조선일보 기자 대량해고사태 등에 맞서 한국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이 신문회관 앞에서 '자유언론만세'를 외치고 있다.(《기자협회삼십년사》, 한국기자협회)
  •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서울 장충동 베네딕토 수녀원 피정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송건호 초대 의장이 실무진을 소개하고 있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에 대한 격려광고(영등포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기자협회보≫, ≪동아일보≫
  • 김주언, ≪한국의 언론통제≫, 리북, 2009.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언론 40년: 실록 동아투위 1974-2014≫, 다섯수레, 2014.
  •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자유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 조선투위 18년 자료집 1975~1993≫, 두레출판사, 1993.
  • 채백, ≪한국 언론사≫, 컬처룩, 2015.
집필정보
집필자
채백
집필일자
2025-04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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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운동
  • 설명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출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