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단체
- 분류
- 사회운동
- 동의어
- 조선투위
- 유사어/별칭/이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어표기
- the Chosun Committee for Defense of Free Press
- 한자표기
- 朝鮮自由言論守護鬪爭委員會
- 결성일
- 1975년 3월 21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유신체제를 수립하고 긴급조치 등으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억압했다. 언론사 역시 정권의 요구에 따라 비판적인 보도를 축소시키거나 아예 보도를 하지 않았다. 1971~1973년 언론인들은 세 차례에 걸친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정권의 변화가 없자 1974년 10월 24일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보도 투쟁을 했다. 하지만 정권의 압박을 받은 언론사들은 역으로 기자들을 탄압했다. 조선일보는 부당한 기고에 항의하는 백기범(白基範), 신홍범(愼洪範) 기자를 해고했고 이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순차적으로 해고했다. 해직 기자들은 1975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결성하여 투쟁했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등과 연대하여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2014년 자유언론실천재단 설립 등에 동참하며 투쟁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언론사는 이익 추구의 기업 집단으로 변질되고 언론인들은 위축됐다. 정부가 강화한 시설기준을 갖추기 위해 정부 차관 제공에 의존하게 된 신문사들은 정부에 의존하고 이윤 추구에 더 몰두하게 됐다.주)001 한편 박정희 정권은 언론인을 테러하고, 연행하거나 구속했다. 언론인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68년의 신동아 사건은 대표적 사례다. 차관과 ‘북괴와 중소분쟁’이라는 기사를 이유로 연행 수사하게 되자 동아일보는 천관우(千寬宇) 주필을 비롯해 세 명의 언론인을 해고했다. 언론이 정권에 굴복한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삼선개헌과 유신 선포로 독재 체제를 완성한 박정희 정권은 언론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언론사에 기관원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제목이나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정부 비판 관련 기사는 아예 나가지 못하거나, 나가더라도 1, 2단 짜리 단신 기사로만 취급했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 언론들은 동아일보를 필두로 1, 2, 3차에 걸친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면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정권의 간섭은 줄지 않았고, 보도의 문제점은 여전했다. 1974년 동아일보는 다시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면서 구체적 실천을 하겠다고 천명했다. 동아일보의 실천선언은 수십 개의 언론으로 확산됐다. 조선일보 기자들도 같은 날 저녁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언론자유회복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을 계기로 보도 투쟁을 하던 조선일보 기자들이 강제 해직되고, 해직된 기자들이 구성한 조직이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다.
박정희 정권 당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언론을 향한 사회의 불만이 매우 컸다. 그중에서 대학생들의 불만이 커서 1971년 3월 26일 서울대 학생회장단 30여 명은 동아일보 앞에서 ‘언론화형식’을 거행했다. 이 사건은 언론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촉발했다. 1974년 12월 초 조선일보가 유신헌법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국회의원(전재구)의 기고문을 게재하려 하자, 백기범·신홍범 두 기자는 견해를 달리하는 기고문도 싣자며 항의했다. 조선일보는 이를 위계질서 문란으로 규정하고 해고했다. 기자들은 항의했고 조선일보의 김윤환(金潤煥) 부국장이 3월 5일 창사기념일에 맞춰 복직시킬 것이라고 구두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에 항의, 농성하는 기자들을 3월 11일 집단 해고했다. 조선일보의 이중성은 조선일보 방우영(方又栄) 사장 행태에서도 드러난다. 방우영 사장은 1975년 2월 13일 《조선일보》를 정론지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간부회의에서 “앞으로 《조선일보》에서 쓰지 못한 금기사항은 하나도 없다”고 강조까지 했다.주)002 하지만 결국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기자들을 해고한 것이다.

해직된 기자들은 회사의 부당 행위에 성명서나 호소문을 내면서 저항했다. 3월 12일 낸 성명서에서는 조선일보 해직 기자들의 복직이 한국 언론의 명분과 직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현했다. 같은 날 또 다른 성명서를 통해 해직된 기자, PD의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에게 연대의 의지를 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 PD들이 강제축출된 3월 17일에도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은 연대성명서를 냈다. 조선과 동아 해직 기자들의 수십 년에 걸친 연대의 출발점이다.
복직을 염두에 두고 조선일보와 대화를 하던 해직기자들은 조선일보의 미온적 태도에 초기에 결성했던 ‘자유언론투쟁희생자 대책위원회’에서 적극적인 ‘언론자유투쟁위원회’(조선투위)로 전환했다. 산하에 자문위원회, 공동투쟁부, 생활대책부, 법정투쟁부, 섭외부, 연락부, 조사부, 기획부 등을 두어 체계적 조직을 구성했다. 또 외부에 조선일보 사정을 적극 알리는 노력을 시작했다. 3월 20일 기독교회관의 신구교 합동기도회, 3월 21일 저녁 정의구현사제단 주제로 열린 구국기도회 등에 기자 또는 정태기 분회장이 참여해서 조선일보 사태를 설명했다. 해고된 기자 32인(33인 중 1인은 나중에 재입사)이 1975년 3월 21일 조선투위를 결성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언론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기자들이 적극적인 투쟁 자세로 전환하자, 회사도 강력한 엄포 또는 회유를 시작하고 지급해야 마땅할 급여조차 지급하지 않으면 압박했다. 이에 조선투위는 조선일보 기자들의 투쟁 이유와 과정을 설명하는 ‘조선일보 사태의 진상’이라는 연속적인 문건을 다섯 번에 걸쳐 만들어 대외적으로 홍보했다. 이 문건들은 《조선일보》 보도의 문제점부터 집단해직, 기자들의 회유 협박 등의 만행은 물론 진실을 외면하는 《조선일보》 보도의 문제점까지 다뤘다.주)003 기자로서 신문 밖에서 신문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6개월을 맞이하여 언론계에 관심을 촉구·호소하는 합동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조선투위와 동아투위가 해고를 당하면서 투쟁하고 있었지만 언론은 이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기자협회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들의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국제신문인협회(IPI)에 한국의 언론 상황을 담은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내려 노력했다. 정부는 이런 기자협회를 강력히 탄압했다. 협회장인 김병익(金炳翼) 기자와 부회장인 백기범 기자 외에 세 명을 연행하여 수사했다. 사실 김병익 기자협회장은 협회장에 출마했다는 이유만으로 휴직 처분했고, 휴직 처분이 끝나는 시점에 다시 무기 정직 결정을 했다. 당시 언론인은 조선투위나 동아투위처럼 해고를 당하지 않아도 이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사주에게 강력한 탄압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고당한 기자들에 대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반면 언론탄압의 배후인 정부는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를 탄압할 수 있는 연행, 구금, 구속, 수사 등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투위 사람들에게는 고통이었지만 당시 미약했던 재야 세력에게 조선투위, 동아투위 위원들은 새로운 젊은 피였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목요기도회 그룹,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등 재야단체들은 조선투위나 동아투위 위원들을 많이 보살펴주었다. 투위 위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생계였다. 재야단체들은 투위 위원들의 생계를 돕는 것까지 신경을 써주었다. 반면 투위 위원들은 재야단체들과 교류하며 민주주의가 붕괴되는 것의 위험성을 더욱 절감하고, 신문기자 본연의 임무에 맞는 민주화 운동을 펼쳐나갔다. 민주화운동 현장 소식을 담는 《조선투위소식》, 《동아투위소식》의 발행, 배포가 그것이다. 이 과정에 위원들은 경찰에게 강제 해산을 당하기도 하고, 소식지를 압수당하기도 했다.주)004
조선투위는 1977년 12월 30일 동아투위와 함께 ‘민주민족언론선언’을 발표하며 투쟁을 이어갔다. 해고된 지 2년이 넘어가며 양 투위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거는 기대를 접고 진실된 언론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것이 자유언론의 본질인 민주언론, 민족이라는 주장이며, 민주·민족 언론의 구현을 주장했다. 이 선언의 목표는 유신체제 아래서 구현되지 못했지만 더 이상 제도 언론이 아닌 진정한 대안언론을 주장한 것으로서 기존 언론의 개혁이 아닌 새로운 언론의 모색으로 투위 위원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주)005 1978년 5월 17일에는 조선투위 소식을 통해 제도권 안에 있는 언론인들의 통렬한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조선투위는 대안언론 활동 못지않게 사법적 판단을 통해 부당한 해고를 원상회복시키려는 노력도 진행했다. 1975년 7월 7일 법원에 ‘부당해고무효확인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사법부도 유신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사법적인 기록을 남기려는 목적도 있었다. 물론 결론은 1, 2심 모두 패소했다. 당시 변호를 맡아 준 이돈명(李敦明), 조준희(趙準熙) 변호사는 조선일보 간부를 법정에 불러내어 증언하게 하고, 50쪽이 넘는 준비서면으로 언론의 책임을 저버린 조선일보와 한국의 언론을 고발하는 내용을 사법 기록에 남겼다. 1심은 신문제작거부 농성이 위계질서 위반이라는 사측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줬다. 2심은 기자들의 행위 동기가 이해되더라도, 고용계약 위반이라며 기자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조선투위는 대법원에 8000자가 넘는 상고이유서로 기자들의 행위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주장했지만 여기서도 패소했다.주)006

하지만 이런 법정 투쟁의 성과는 조선일보의 왜곡된 언론관을 여실히 드러나게 했다는 데 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집단해고 당시 징계위원장이었던 유건호(柳建浩) 전무이사는 전재구(全在球) 의원의 글을 게재하는 것과 관련한 변호사와 문답에서 ‘안보를 위해 유신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유신이 필요없다는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정권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편집국 최고 간부의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또 조선일보 선우휘(鮮于煇) 주필은 ‘언론이 공적 책무를 포기한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기자는 오직 신문사 사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복종해야 한다’고 진술했다. 당시 제도 언론에 남아 있는 언론인들의 의식 수준을 상징하는 문답들이었다.
조선투위는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민주화 가능성이 열리자 1980년 2월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조선·동아일보가 조선·동아일보 양 투위의 기자들을 원상회복시키지 않고 자유언론이나 민족지를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주장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3월 6일에는 조선일보에게 자유언론 정론지로 돌아가고, 부당 해고 철회하고, 유건호 편집인 물러나라 주장하는 조선투위 소식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4월 7일에는 동아투위와 함께 유신언론의 청산이 언론민주화의 선결과제임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이 성명서는 당시 언론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지적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조선투위의 복직은 무산됐다. 방우영 사장은 국회를 해산하고 설치한 반헌법 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맡아 신군부 세력에 합류했다. 해고자 복직이 무산되고 조선투위는 제도권 언론의 반민주 행태를 비판하면서 민주언론운동 모색을 함께했다. 1984년에는 동아투위, 1980년 해직기자 일부 그리고 출판계인 금요회와 더불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를 결성했다.주)007 그리고 조선투위 위원인 최장학(崔長鶴), 신홍범 등은 대안 언론으로서 언협 기관지인 월간 《말》 창간과 운영에 동참했다. 당시 《말》은 불법 간행물이라 발간할 때마다 관련자들이 며칠씩 구류를 살아야 했다. 최장학, 신홍범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안언론이었던 《말》은 1986년 보도지침 폭로로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주)008
조선·동아투위 위원들은 독재정권의 탄압과 반민주적인 언론사의 정권 유착으로 제도권 언론에서 축출되고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민주언론을 위한 대안언론을 만들어내고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투위는 1985년 투위 발족 10주년을 맞이하여 ‘새 언론의 창설을 제안한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조선투위는 1988년에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신문》 창간에도 함께 했다. 1988년 2월 목표액 50억 원을 모아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이 신문 창간에 조선투위에서는 김선주(金善珠), 성한표(成漢杓), 신홍범, 오성호(吳性浩), 이창화(李昌華)가 참여했다. 제도권 언론의 변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사회에 각인시켰고, 언론자유의 본질이 민주, 민족 언론에 있음을 설파했다. 해고 이후 복직의 가능성이 막히는 현실임에도 투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언론자유를 추구함으로써 언론인 후배들의 귀감이 됐고, 이후 벌어지는 각종 언론민주화 투쟁에 뛰어든 후배들이 사표(師表)주)009로 삼는 선배로 남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오랜 바람에도 몸담았던 조선일보의 변화가 없고 더 심각해진다고 인식한 조선투위는 또 다른 언론자유투쟁을 시작했다. 즉 2019년 10월 24일에는 조선·동아투위를 비롯한 57개 단체가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 100년 청산시민행동’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다.주)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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