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동의어
- 자유실천문인협의회101인선언
- 유사어/별칭/이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어표기
- the 101 Writers’ Declaration
- 한자표기
- 文學人101人宣言
- 발생일
- 1974년 11월 18일
- 종료일
- 1974년 11월 19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1974년 11월 18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고은(高銀), 박태순(朴泰洵), 이문구(李文求) 등의 문인들은 101명의 문학인 서명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했다. 문인들은 이 선언문을 통해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근대화정책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면서 민주적 정치체제로의 변화를 촉구했다. 선언문에는 구속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서민 대중의 생존권 보장 및 노동법 개정, 헌법 개정, 인권 보장 등 다섯 가지 주요 결의 사항이 담겼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의 계기가 되기도 한 ‘문학인101인선언’은 1970년대 문학장의 흐름을 크게 바꿔 놓았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고, 이는 당시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대 문인들은 민중의 현실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문학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 또한 1970년 6월에 발생한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하에서 억압당하고 있던 표현의 자유 문제가 부각됐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시행됨에 따라 표현의 자유는 점점 더 제한됐으며, 민주주의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신체제에 대한 문인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고 이는 개헌청원운동의 참여로 이어졌다.
1973년 하반기부터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구체화되면서 반체제 운동에 동참하는 문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5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 발표한 ‘민주주의 체제 재건을 위한 시국선언’에 이호철(李浩哲), 김지하(金芝河) 등이 참여했다. 12월 24일 재야인사 30여 명이 참여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 결성에도 이희승(李熙昇), 박두진(朴斗鎭), 이호철, 김지하 등이 함께했다. 이러한 흐름은 1974년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 지지 선언’으로 확대됐다. 서울 명동 코스모폴리탄 다방에서 안수길(安壽吉), 박연희(朴淵禧), 이호철, 천승세(千勝世), 백낙청(白樂晴), 김지하, 한남철(韓南哲), 송영(宋榮) 등의 문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의 제도적 보장을 요청하고 헌법개정을 청원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다음 날인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발동하여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행위 일체를 금지했다. ‘문인 61인 개헌 지지 선언’의 대표자였던 이호철이 1월 14일 보안사로 연행됐고, 이어서 정을병(鄭乙炳), 장백일(張伯逸), 임헌영(任軒永), 김우종(金宇鍾) 등의 문인들도 연행된 가운데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을 적용한 ‘문인간첩단조작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백낙청은 ‘동료 문인 구명을 위한 진정서’를 작성했고, 고은, 이문구, 박태순 등은 동료 문인들이 진정서 제출에 동참하도록 독려하여 당시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문인 중 절반에 가까운 295명이 진정서에 서명했다. 이는 향후 ‘문학인101선언’ 및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바탕이 됐다. 4월 3일 박정희 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고, 문인 중에는 김지하가 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74년 8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를 해제하는 긴급조치 제5호를 발동함에 따라 일시적인 유화 국면이 조성됐다. 9월부터는 유신체제하 문학인의 역할과 책무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됐고, “이제는 문학인이 나서야 할 차례”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주)001 10월 24일 언론인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감행한주)002 가운데 문인들 사이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요구와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11월에 접어들면서 고은, 백낙청, 신경림(申庚林) 등을 중심으로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문인선언’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11월 14일 귀거래다방에서 고은, 박태순, 백낙청, 염무웅(廉武雄), 이문구 등이 회합한 가운데 11월 18일 월요일에 선언을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선언문 기초는 염무웅, 실무책임과 행사 진행은 박태순, 선언문 낭독은 고은, 조직 구성은 이문구가 맡았다. 이들은 일회적인 선언을 넘어 새로운 문학운동단체를 만들자고 뜻을 모았고, 그 명칭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 결정했다. 문학인 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관건은 최대한 많은 문인의 참여를 이끌어 연서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조직화를 도모한 끝에 이희승, 이헌구(李軒求), 박화성(朴花城), 김정한(金廷漢) 등 문단의 원로부터 이청준(李清俊), 김종철(金鍾哲), 임정남(林正男), 강은교(姜恩喬), 김형영(金炯榮)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101명의 문학인이 선언에 동참하게 됐다.
선언문을 발표할 시간과 장소는 11월 18일 오전 9시 30분 서울 광화문 네거리 비각 뒤 의사회관(현재 교보빌딩 자리)으로 확정됐고, 행사 전날인 11월 17일 오후 2시 한국문학사 사무실에 고은, 박태순, 백낙청, 염무웅, 양성우(梁性佑), 이문구, 이성부(李盛夫), 황석영(黃晳暎) 등이 모여 준비 사항을 점검했다. 선언문의 표제는 최종적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으로 결정됐다. 고은, 양성우, 이문구가 선언문을 등사하고, 염무웅, 이성부, 박태순은 언론사에 보도를 요청했으며, 행사에 사용할 현수막은 고은과 박태순이 준비했다.

11월 18일 당일 예정된 시간보다 늦은 9시 50분 고은의 신호에 따라 광화문 주변 세 곳의 다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이호철, 염무웅, 황석영, 양성우, 백낙청, 조태일(趙泰一), 최민(崔旻), 한남철, 조해일(趙海一), 조선작(趙善作), 송영, 이시영(李時英), 송기원(宋基元), 윤흥길(尹興吉), 석지현(釋智賢), 임정남, 김국태(金國泰), 김년균(金年均), 백도기(白道基), 이문구, 박태순 등이 의사회관 현관으로 집결했다. 문인들은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 “시인 석방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펼쳐 들고 선언문을 배포하면서 거리 시위를 감행했다. 내외신 기자 20여 명이 이 광경을 취재하는 가운데 고은이 선언문을 낭독했고, 때마침 몰려든 무장경찰이 고은에게서 선언문을 탈취하자 황석영이 이어서 낭독을 계속했다.
선언문은 선언의 불가피함을 피력하는 전반부와 구체적인 결의 사항을 드러내는 후반부로 구성됐다. 전반부에서는 “왜곡된 근대화정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하여”, “대다수 민중들은 기초적인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박정희 정권하에서 추진되고 있던 근대화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국민의 “지혜와 용기”가 반영될 수 있는 민주적 정치체제로의 변화를 촉구했다. 후반부에서는 구속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서민 대중의 생존권 보장 및 노동법 개정, 헌법개정, 인권보장 등 다섯 가지 결의 사항을 밝혔다.

선언문 낭독 후 문인들은 ‘유신헌법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 시위를 벌였지만 경찰에 의해 제지당했고, 고은, 박태순, 이문구, 송기원, 윤흥길, 이시영, 조해일 등 7명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이호철, 황석영 등 남겨진 문인들은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에서 철야농성을 하며 연행된 문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는 미국의 제럴드 포드(Gerald Rudolph Ford Jr.) 대통령의 방한(11월 22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연행된 7명의 문인은 19일 오후 3시에 전원 방면됐다.
유신체제 철폐를 겨냥한 ‘문학인101인선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의 계기가 됐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은 선언 당일부터 연행된 문인의 석방까지 선언을 둘러싼 사건들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문인들의 반유신투쟁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문인단체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유신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언론인들의 연대와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지식인들의 호의적 관심이 더해지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영향력은 증폭됐다. 문단사적으로는 한국문인협회라는 순수문학 지향의 보수적 문인단체가 오랫동안 문단의 주도권을 행사해 오던 가운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등장으로 인해 문단 내 대립각이 형성됐고, 점차 사회적·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중심으로 문단이 재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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