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사건은 학생운동권이 천주교를 보호막으로 삼아 활동한 사건이다. 사진은 민주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한 서울 명동성당(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가톨릭전국학생연맹사건, 명동가톨릭학생총연맹사건, 명동성당학생사건, 가톨릭명동사건
유사어/별칭/이칭
7인위원회사건
영어표기
the Incident of the National Catholic Student Federation for Justice
한자표기
天主敎正義具現全國學生總聯盟事件
발생일
1975년 6월 3일
종료일
1975년 12월 2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후기 ‣ 긴급조치 9호기 반독재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개요
1972년 유신체제 출범과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1975년 4월 서울대생 김상진(金相眞)이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자결했다. 김상진의 죽음을 추도하는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을 대거 구속하고 이 시위의 배후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을 지목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관련자 23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은 유죄 판결을 받아 형을 살았으며 2013년 긴급조치 9호에 대한 위헌·무효 결정(헌법재판소 2013. 3. 21., 대법원 2013. 4. 18.)에 따라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배경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 공포로 유신체제가 들어섰다.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이 현실화 되자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정적(政敵)이었던 김대중(金大中)이 납치되는 사건이 1973년 8월에 발생하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반유신운동이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974년에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을 조작하여 대학생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의 저항 운동을 강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오히려 전국의 학생들과 종교인, 지식인 등의 연대를 불러왔다.
한편 민청학련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池學淳) 주교가 구속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직 교구장 주교가 구속된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되는 등 한국 천주교회의 전면적인 사회 참여를 불러왔다. 특히 명동성당은 학생운동과 천주교회가 만나는 주요 거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이어 벌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관련자들을 지속적으로 연행·구속해 나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75년 4월 11일경 서울대 농과대 학생 300여 명이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에 참석했던 김상진이 유신 헌법과 독재 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자결했다. 그는 곧바로 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음날(12일) 사망했다.주)001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여론은 더욱 커져갔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를 벌였는데,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시위가 5월 22일에 일어난 김상진추도식시위(일명 오둘둘사건)였다.주)002 박정희 정권은 이 시위에 참여한 학생 가운데 300여 명을 연행하고 56명을 구속시켰다. 이어서 이 시위의 배후를 밝힌다는 명목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과 지학순주교양심선언 등을 계기로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지자, 그 중심 공간으로 명동성당이 떠올랐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청년들이 신자와 비신자 가릴 것 없이 명동성당에 모여들어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주)003 특히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청년들 사이에서는 1975년 4월부터 전국 대학 간의 민주화운동을 연결하는 협의체를 만들기 위한 논의가 오갔다. 이에 서울시내 12개 대학과 지방 6개 대학이 연대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만들어진 협의체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 ‘천주교정의구현청년전국연합’, ‘7인위원회’ 등으로 불렸고, 별도의 조직 명칭을 정하지 않았다는 당사자들의 증언도 있다(여기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으로 통일).주)004 이들은 각종 선언문을 제작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김상진추도식시위 배후 조사 과정에서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중앙정보부는 5월 하순 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과 관련된 이들을 검거했다. 이때 학생들을 비롯한 관련자 23명이 구속됐고, 이들과 공모한 혐의로 명동성당 보좌 이기정(李基精) 신부와 성당 사무원이었던 데레사(Teresa),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교수였던 함세웅(咸世雄) 신부도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이기정 신부는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에게 세례를 줄 정도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주)005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함세웅 신부는 관련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이유로 이 사건의 배후로 의심을 받았다. 두 명의 신부와 사무원은 며칠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지만, 학생운동 관련자들은 계속 구금됐다.
중앙정보부는 그들을 고문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했다. 검찰은 6월 3일경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김상진추도식시위 후속 시위를 도모한 혐의)로 그들을 기소했다. 기소된 이들은 부당하고 무리한 조사와 재판에 강력히 저항하며 재판을 거부했다. 그 결과 재판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재판을 받았던 이명준(李明俊)의 증언에 따르면, 판사 곁에 중앙정보부원이 앉아서 피고인의 형량을 판사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주)006 1975년 12월 2일 서울형사지법이 이들에게 선고한 형량은 다음과 같다.주)007
심지연(沈之淵):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박홍석(朴洪錫):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이명준(李明俊):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
김용석(金用錫):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
한경남(韓慶南):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
선경식(宣炅植):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조성우(趙誠宇):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강기종(康祺宗):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김헌웅(金憲雄):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박계동(朴啓東):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이정국(李正國):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6월
정민수(鄭敏洙):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이명복(李明馥): 징역 단기 4년, 장기 6년 자격정지 6년
우영제(禹英濟):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송영길(宋榮吉):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6월
박진선(朴鎭先):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최열(崔冽):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
서상섭(徐相燮):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여석동(呂錫東): 징역 3년6월 자격정지 3년6월
장성효(張星孝):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형을 살았던 청년과 학생들은 2012년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 사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4월 18일에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유죄를 받았던 그들의 공소사실도 전부 무죄로 인정되어 무죄 확정 결정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제2의 민청학련사건’으로 만들고, 이 사건에 천주교회가 연루되었다는 점을 부각시켜 민주화 세력을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그래서 정권은 체포된 23명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활동하던 7명을 들어 이 조직을 ‘7인위원회’, 이 사건을 ‘가톨릭명동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정권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사건을 축소하는 쪽으로 마무리했다. 사건을 키우게 되면 민청학련사건 이후에도 학생운동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되고 가톨릭교회와의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어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침체될 것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예상을 깨고,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학생운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한편 이 사건은 명동성당이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민주화운동의 핵심 공간으로 인식되어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명동성당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과 1987년 ‘박종철고문치사사건’ 은폐 조작 폭로 등으로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주)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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