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rch 1 Declaration for Democracy and National Salvation (The March 1 Myeongdong Incident)
한자표기
3.1民主救國宣言
발생일
1976년 3월 1일
종료일
1977년 3월 22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후기 ‣ 긴급조치 9호기 반독재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개요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재야 정치인과 종교인, 지식인들이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며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민주화운동 사건이다. 선언문은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 국민 기본권 보장, 정치범 석방, 민족의 자주성 회복 등을 요구했다. 정부는 이를 긴급조치 9호 위반 및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하여 관련자들을 구속·기소했으나,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 민주화운동 세력의 연대를 확대하고 종교계와 재야 정치세력의 공동행동을 촉진한 계기가 됐다.
배경
197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유신체제의 장기화와 긴급조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대통령 장기집권 체제를 제도화했으며, 국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정치활동과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후 정부는 긴급조치를 반복적으로 발동하며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운동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은 학생운동과 재야세력에 대한 대규모 탄압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전국적인 반유신운동을 북한의 배후 조종에 의한 국가전복 기도로 규정했으며, 수백 명의 학생과 재야인사를 연행·구속했다. 이어 1975년 4월 9일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집행되면서 국내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제정세의 변화도 유신체제의 통치 논리에 영향을 미쳤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정권이 붕괴하고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전쟁이 종결됐으며, 같은 해 4월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수립되고 12월에는 라오스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동남아시아 정세 변화를 한국 안보와 직접 연결시키며 이른바 ‘제2의 월남사태’ 가능성을 강조했다. 정부는 국가안보와 반공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면서 유신체제의 지속과 사회통제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 주장이나 관련 표현물 제작·배포, 집회·시위 등을 광범위하게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 또한 언론·출판·학술·종교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민주진영 내부에서는 유신체제의 억압적 통치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김지하(金芝河)의 ‘양심선언’ 발표(1975. 8.), 장준하의문사사건(1975. 8.) 등은 지식인과 종교계, 재야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긴급조치 9호 이후 정치적 반대의 표현 공간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민주주의와 국민 기본권의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종교계와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저항을 모색하게 됐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이 준비됐다.
원인
3.1민주구국선언은 유신체제의 장기화와 긴급조치 통치에 대한 재야 민주세력과 종교계의 위기의식 속에서 추진됐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했고, 긴급조치를 반복적으로 발동하여 정치적 반대와 비판을 억압했다. 특히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개정 요구 자체를 처벌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와 국민 기본권에 관한 공개적 논의를 사실상 차단했다. 1970년대 중반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민주구국선언의 직접적 배경이 됐다.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은 민주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김지하의 양심선언과 장준하의 죽음은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더욱 확산시켰다. 종교계 역시 이러한 현실을 단순한 정치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양심, 정의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개신교계에서는 긴급조치 국면에서 해직된 기독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저항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었다. 1975년 결성된 갈릴리교회는 문동환(文東煥)(한신대학교), 안병무(安炳茂)(한신대학교), 서남동(徐南同)(연세대학교), 이문영(李文永)(고려대학교), 이우정(李愚貞)(서울여자대학교) 등 해직교수들과 문익환(文益煥), 윤반웅(尹攀熊), 이해동(李海東) 등이 참여한 신앙공동체였다. 갈릴리교회는 독일 고백교회의 전통과 기독교 사회참여 정신을 바탕으로 유신독재에 대한 신앙적 저항을 추구했으며, 흥사단 강당과 한빛교회, 수유동과 방학동의 개인 주거지 등에서 예배와 토론을 지속했다. 문익환에게는 1975년 장준하의 죽음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장준하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었던 그는 장준하 영결식에서 기도문을 낭독하며 그의 뜻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고, 이후 성서번역 작업에 머물러 있던 삶에서 벗어나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1976년 초 민주구국선언 초안 작성으로 구체화했다.
전개
1976년 2월 중순 문익환은 3.1절을 계기로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는 선언문 발표를 구상했다. 그는 2월 13일 함석헌(咸錫憲)을 만나 선언 계획을 논의했고, 이어 문동환·이문영·서남동 등 갈릴리교회 인사들과 초안을 검토했다. 유신체제 비판, 국민 기본권 회복, 경제적 불평등 해소, 민족의 자주성 회복 등의 내용을 담은 문익환 초안은 검토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정됐으며, 경제문제와 정치문제, 통일문제에 대한 표현도 보완됐다. 같은 시기 정치권에서는 김대중(金大中)이 별도의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2월 22일 정일형(鄭一亨)을 만나 선언문 초안을 논의했다. 김대중의 초안은 긴급조치 해제와 헌정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주)001
이후 문익환 초안과 김대중 초안은 통합의 방향으로 조정됐다. 윤보선(尹潽善), 정일형, 함석헌, 이우정 등은 문익환 초안을 기초로 선언문을 수정·보완하는 데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분야는 김대중, 경제문제는 이문영, 민족과 통일문제는 문익환의 의견이 주로 반영됐다. 최종 선언문은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 민주주의 회복, 국민 기본권 보장, 정치범 석방, 민족의 자주성 회복 등을 요구하는 공동선언의 형태로 정리됐다. 선언문 작성과 함께 서명자 확보 작업도 진행됐다. 서명자 명단에는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등 정치인과 함석헌,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이우정, 윤반웅 등 종교인·지식인이 포함됐다. 이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재야 정치세력과 갈릴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지식인 세력이 공동행동에 나섰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발표 장소는 서울 명동성당으로 정해졌다.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구속자 석방과 인권회복을 위한 3.1절 기념미사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함세웅(咸世雄)·신현봉(申鉉奉)·김승훈(金勝勳)·문정현(文正鉉) 등의 사제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문익환과 함세웅 등은 사전 협의를 거쳐 기념미사 뒤 열리는 기도회에서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했다.주)002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제57주년 3.1절 기념미사에는 신도와 민주화운동 관계자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기도회 순서에서 문동환은 설교를 맡아 민주주의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였으며, 이어 이우정이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선언문은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 민주주의 회복, 정치범 석방, 국민 기본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주)003
오늘로 삼일절 쉰 일곱 돌을 맞으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 세계에 울려 퍼진 이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그 아우성이 짱짱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선열의 피를 헛되이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이 민족은 또 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三權分立(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 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가고,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조차도 압살 당하고 말았다.
현 정권 아래서 체결된 한일협정은 이 나라의 경제를 일본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켜 모든 산업과 노동력을 일본 경제침략의 희생제물로 만들어 버렸다.
눈을 국외로 돌려보면, 대한민국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보기도 초라한 고아가 되고 말았다. ……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잃고 총 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야의 정치적인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민주주의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구실로도 민주주의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북 공산주의 정권과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이 마당에 우리가 길러야 할 힘은 민주역량이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 되어야 한다.
…현정권은 경제력이 곧 국력이라는 좁은 생각을 가지도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경제발전에 진력을 쏟아왔다. …농촌경제의 잿더미 위에 거대한 현대산업을 세우려고 한 것이 망상이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이 나라의 경제파국은 시간문제다. …사태가 이에 이르고 보면 박정권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밖에 다른길이 없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다.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겨례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 대헌장이다.… 승공의 길 “민족통일”의 첩경은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3·1운동과 4·19에 쳐들었던 아세아의 횃불을 다시 쳐드는 일이다.…
선언문 발표 직후 정부는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이우정이 가장 먼저 연행됐고, 이어 문익환·문동환·안병무·서남동·이문영·함세웅·신현봉 등 선언 관련 인사들이 차례로 조사받거나 구속됐다. 김대중·윤보선·정일형·함석헌 등도 수사 대상에 포함됐다. 1976년 3월 10일 서울지방검찰청은 관련자 20명을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민주구국선언을 단순한 시국선언이 아니라 체제 전복을 선동한 정치사건으로 규정했다. 특히 민주회복국민회의와 갈릴리교회를 배후 조직으로 지목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윤보선·김대중·정일형 등이 참여한 재야 정치세력의 연대기구였고, 갈릴리교회는 문익환·문동환·안병무·서남동·이문영·이우정 등 해직교수와 종교지식인들이 참여한 신앙공동체였다. 정부는 두 조직의 결합을 조직적 반정부 활동으로 해석했으며, 이를 통해 민주구국선언을 ‘명동사건’이라는 국가안보 사건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주)005
재판은 1976년 4월부터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유신헌법을 부정·비방하고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하여 국가안전과 공공질서를 위태롭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인들은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 기본권 보장을 요구한 평화적 정치 의사표현에 불과하며, 긴급조치 9호 자체가 헌법상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위헌적 조치라고 반박했다. 재판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민주구국선언의 성격과 긴급조치 9호의 정당성이었다. 검찰은 선언문을 정부 전복을 선동한 정치문서로 규정했으나, 피고인들은 민주주의와 국민기본권 회복을 위한 양심적 선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종교인 피고인들은 선언 참여가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신앙과 양심에 따른 사회적 실천이었다고 진술했다. 문익환·문동환·함세웅 등은 법정에서 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했으며, 재판은 유신체제와 민주주의를 둘러싼 공개적 논쟁의 장으로 전개됐다.
변호인단 역시 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적극 부각했다. 변호인단에는 한승헌(韓勝憲), 이돈명(李敦明), 김창국(金昌國), 조준희(趙準熙), 황인철(黃仁喆) 등 재야 법조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민주구국선언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표현이며 긴급조치 9호가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선언문 낭독 자체보다 국가권력이 이를 범죄로 규정하는 논리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1976년 8월 28일 1심 선고에서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주요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민주구국선언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고 판단했으나, 피고인들은 즉시 항소했다. 검찰 역시 일부 형량이 가볍다고 판단하여 항소함으로써 사건은 항소심으로 이어졌다.
항소심에서도 민주구국선언의 성격과 긴급조치 9호의 정당성이 핵심 쟁점으로 다루어졌다.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은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 기본권 보장을 위한 정치적 의사표현이 처벌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긴급조치 자체의 위헌성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반면 검찰은 국가안보와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긴급조치가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사건은 법정 안에 머물지 않고 국내외 시민사회와 종교계를 통해 확산됐다. 구속된 피고인들의 가족들은 구명운동과 석방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朴容吉),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孔德貴) 등은 재판 방청과 탄원 활동, 국내외 인권단체 접촉을 통해 사건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단순한 가족의 역할을 넘어 유신체제의 인권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민주화운동의 주체로 활동했다.
기독교계 여성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이우정을 비롯한 여성 신앙인들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여성위원회 관계자들은 구속자 가족 지원과 국제연대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여성교회 네트워크는 해외 교회단체와의 연락망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19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에서 여성들이 독자적인 정치·사회적 행위자로 등장하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됐다. 국제사회의 반응도 이어졌다. 선언문 낭독 직후 연행된 이우정은 연행 직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신변 상황을 알렸고, 이 소식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관계자들을 통해 해외로 전달됐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아시아교회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CA), 미국교회여성연합회(United Church Women, UCW) 등 국제 교회기구들은 사건 경과를 공유하며 관련자 석방과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성명과 항의서한을 발표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는 한국의 긴급조치 체제와 정치적 탄압 상황을 국제 교회 네트워크에 알렸으며, 미국과 유럽의 주요 교단들은 현지 주재 한국대사관과 정부 관계기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으로 규정했으나, 사건은 결과적으로 유신체제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운동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결과/영향
3.1민주구국선언사건은 유신체제하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공개 저항운동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선언 참가자들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이를 ‘명동사건’으로 규정했으나, 사건은 오히려 유신 후반기 민주화운동 세력의 연대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윤보선·김대중 등 재야 정치세력과 문익환·함석헌·안병무·서남동·문동환 등 종교지식인들이 공동 행동에 나서면서 정치인과 종교지식인의 연대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이는 이후 민주회복국민회의 활동과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또한 이 사건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아우르는 에큐메니컬(Ecumenical)주)006 연대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갈릴리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개신교 지식인들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성직자들은 선언문 발표와 재판 과정에서 공동 대응을 전개했으며, 이는 이후 19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에서 종교계 연대가 확대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특히 문익환·문동환·안병무·서남동·이문영·이우정 등 갈릴리교회 인사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이후 인권·민주주의·통일운동의 핵심 주체로 활동하게 됐다.
해외 교회와의 국제연대 역시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였다. 사건 직후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교회협의회(CCA), 미국교회여성연합회(UCW) 등 국제 교회기구와 해외 선교사 네트워크는 관련자 구속 사실과 재판 과정을 공유하며 한국 정부에 항의서한과 석방 요구 성명을 전달했다. 이를 통해 3.1민주구국선언사건은 국내 정치사건의 범위를 넘어 유신체제의 인권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이 국제적 연대망과 결합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한편 3.1민주구국선언은 당시 민주화운동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선언 참가자 대부분은 정치인, 종교인, 교수, 언론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었으며, 운동 방식 역시 선언문 작성과 서명운동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대중적 참여와 조직적 대중운동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한 한계를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긴급조치 체제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받던 사회에 공개적 저항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종교지식인과 재야 정치세력의 연대를 통해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나아가 3.1민주구국선언은 19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의 재결집과 국제연대 확대를 촉진했으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주진영 연대 형성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특히 유신체제에 대한 공개적 저항이라는 의미를 넘어 종교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인권운동 네트워크 형성과 국제적 연대의 확산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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