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5월 22일 서울대에서 열린 김상진추도식시위는 일체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사진은 1980년 4월 11일 5년 만에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열린 김상진 추모식(경향신문 포토뱅크)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김상진장례식시위, 오둘둘사건, 5.22사건, 오둘둘시위, 5.22시위, 오둘둘
유사어/별칭/이칭
해당사항 없음
영어표기
the May 22 Protest following the Memorial Service for Kim Sang-jin (the May 22 Incident)
한자표기
金相眞追悼式示威(5.22事件)
발생일
1975년 5월 22일
종료일
1975년 5월 22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후기 ‣ 긴급조치 9호기 반독재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개요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시국성토대회’ 도중 4학년생 김상진(金相眞)이 ‘양심선언문’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낭독한 후 칼로 자신의 배를 그어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인 12일 김상진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김상진 사망 직후 장례식도 없이 시신을 화장하자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의 장례식을 금지했지만, 서울대 학생들은 긴급조치 9호 발동 직후인 5월 22일 민속행사 형식으로 관악캠퍼스에서 장례식 및 추도식을 열었다. 이는 곧 대규모 학내 시위로 발전했다.
1975년 캠퍼스 종합화 계획을 완료한 서울대는 관악캠퍼스에서 첫 학기를 맞이했다. 연건캠퍼스에 의대, 공릉캠퍼스에 공대, 수원캠퍼스에 농대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서울대의 나머지 단과대학들은 모두 관악캠퍼스로 집결했다. 서울대의 종합캠퍼스가 서울의 가장 외곽 지역인 관악산 기슭의 골프장 자리에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대 종합캠퍼스 부지 선정에 직접 나서면서, 서울대를 외진 관악산 기슭으로 몰아넣어 정권에 비판적인 학생운동을 약화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서울대 앞에 ‘동양 최대의 파출소’(관악파출소)가 들어선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됐다. 물론 현재 그 진위 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975년 서울대의 관악캠퍼스 이전이 서울대 학생운동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동안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여러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집결하면서 학생운동의 역량이 하나로 합쳐지는 의도치 않은 효과가 나타났다.
1975년 서울대 캠퍼스가 관악으로 통합하기 전 서울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이념서클들은 분산된 단과대학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법대 서클로 ‘농촌법학회’(농법회), ‘경제법학회’(경법회) 등이 있었고, 상대 서클로 ‘한국사회연구회’(한사), ‘이론경제학회’(이경회), ‘농업경제학회’(농경회), ‘후진국경제연구회’(후경회), ‘국제경제학회’(국경회) 등이 있었다. 이들 이념서클은 19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설립으로 1학년들이 공릉동의 단일 캠퍼스에서 교육받으면서 단과대 울타리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1974년부터 계열별 모집이 이루어지고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및 종합화까지 더해져 범서울대 서클로 발전할 수 있었다.
1975년 이후 서울대 학생운동은 관악캠퍼스로 집결한 이들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캠퍼스 분산에 따른 물리적 거리가 좁혀지면서 선후배간 결속은 더욱 긴밀해졌고 교류도 활발해졌다. 당시 관악캠퍼스에서 각 서클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대체로 1971년 위수령 때 입대했다가 복학한 학생들이거나 아직까지 구속되지 않은 몇몇 학생들이었다.
1975년 1학기가 시작한 3월부터 주요 대학에서 학생들의 반유신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도 이념서클들을 중심으로 학생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는데, 각 단과대학이 합쳐지면서 그 규모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과거 단과대학별로 몇백 명 정도가 벌였던 시위는 이제 1000~2000명이 쉽게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바뀌었다. 다만 4월 중순까지 연일 반유신 집회와 시위를 이어 나가던 각 대학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강경 진압과 4월 30일 남베트남 패망 및 그 여파에 의한 총력안보의 광풍 속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5월 13일 과거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라 할만한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일체의 반유신 주장 및 저항을 금지하면서 이념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은 일시적이지만 크게 위축됐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운동의 활로를 뚫어준 것이 ‘민속’이었다. 1970년 전후로 몇몇 대학에서 탈춤을 직접 전수받고 이를 공연하고자 하는 일단의 학생들이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 인물인 채희완(蔡熙完)의 경우 대학 입학 전부터 탈춤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1970년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하자마자 민속가면극연구회, 곧 ‘탈춤반’(탈반)을 만들고 탈춤을 직접 배웠다. 채희완과 같이 민속에 열정을 가진 학생들의 노력과 교류의 결과 여러 대학에 ‘탈반’이 만들어졌다. ‘탈반’의 등장과 함께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도 민속에 관한 관심이 고조됐다. 이에 따라 캠퍼스마다 다양한 민속행사가 줄을 이었다. 가히 ‘민속붐’이라고 부를만한 현상이었다. 비록 대학 밖에서도 민속에 관한 관심은 이전보다 커진 상황이었지만, 대학만큼 그 정도가 강하진 않았다. 이제 민속은 청년문화가 그랬듯이 기성문화와 대학문화를 구별짓는 역할을 하게 됐다.
학생들 사이에서 민속에 관한 관심이 확대되면서 이에 비례하여 민속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의식이 각성했다. “가면극은 민중의 연극”이며 “우리 전통예술의 여러 영역 중에서 가면극만큼 민중의식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를 비판하는데 과감한 태도를 보인 것은 없다”는 조동일(趙東一)의 말은 당시 학생들이 생각한 민중과 민속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고통받는 민중에 관한 관심의 고조가 민속극의 애호로 표현됐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민속의 배경이 되는 민족과 민속의 주체가 되는 민중은 하나로 결합했다. ‘민중적 민족의식’이라든지 ‘민족적 민중의식’이라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중과 민족을 동일 개념으로 파악하는 대학의 민속 운동은, 식민주의적 불평등구조가 지속적인 억압상태로 되어 있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민속붐에 앞장선 학생들은 1975년 초 학생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일례로 1975년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연세대학교 탈춤연구회, 이화여자대학교 가면극회 학생 50여 명이 서울 서대문구 성산동 무허가 판자촌인 둑방부락에서 봉산탈춤 등 민속놀이를 벌여 주민들을 위로했다. 1975년 2월에 있었던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때에도 국민투표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문화행사를 시도했다. 1975년 3월 28일 <서울대 이전 대안택 축원 지신제>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 500여 명이, 전년도인 1974년 10월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직당하는 4개월간의 과정을 극화한 <진동아굿> 공연 직후 교문 앞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자 학생운동과 민속의 결합은 극단적 억압 속에서도 지속적인 저항을 가능케 하는 유용한 방법으로 더욱 강화됐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에서 300여 명의 학생이 유신체제를 규탄하는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연사로 나선 4학년생 김상진이 ‘양심선언문’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낭독한 후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인 12일 김상진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의 장례식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5월 13일 긴급조치 9호 선포를 통해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반대행위와 학내 집회·시위를 전면 금지했다. 김상진 자결 사건 후 그의 시신이 가족 몰래 화장되고 암장됐다는 소문이 번지자 서울대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시신이 없더라도 그를 추모하는 장례를 제대로 치러야 한다는 의견이 학내에 팽배했다. 하지만 1975년 1학기 시작부터 계속된 시위로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학생들이 다수 구속 및 도피, 그리고 제적된 상황이었다. 특히 긴급조치 9호는 학생운동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더욱 좁혔다.
대신 김상진의 장례식 및 추도식 준비를 위해 인문대 중심의 민속가면극연구회와 문학회, 사범대 중심의 야학문제연구회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주로 68, 69학번의 학생운동 선배 그룹과 접촉하면서 집회와 시위를 준비했다. 선배 그룹은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탄압을 우려하며 신중론을 펼쳤으나 주도 학생들의 의지가 매우 강했다. 이에 선배 그룹의 자문과 도움 속에서 주도 학생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해 김상진 장례식 및 추도식을 준비해 나갔다. 주로 민속가면극연구회 등 인문대 학생들이 <진오귀굿>과 ‘만장’, ‘조사’, ‘조시’ 등 장례식 및 추도식 행사를 준비했고, 야학문제연구회 등 사범대 학생들은 유인물 제작과 인원 동원 등 시위를 준비했다.주)001
1975년 5월 22일 오후 12시경 서울대 관악캠퍼스 곳곳에서 화재 비상벨이 울렸다. 잠시 후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김도연(金度淵), 박연호(朴連鎬)가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 말이냐”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뛰쳐나가자 도서관 앞의 중앙계단은 순식간에 학생, 교직원, 기관원의 난투장이 됐다. 그사이 신속하게 마이크가 설치됐고, 김상진의 장례식이 시작됐다. 김도연은 ‘장례선언문’을 읽고 김정환(金正煥)은 ‘조시’를 읽었으며 천희상(千熙常)이 ‘조사’, 박연호가 ‘반독재선언문’을 낭독했다.
그중 ‘조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너지고 쓰러지고 다시 강풍에 몸을 눕힌 민중의 얼룩진 꿈을, 새붉은 4월의 피를, 전태일과 김상진의 죽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 그것은 정녕 갚고 갚지 않으면 안 될 우리의 부채였다. 멍에였다. 죽을 수조차, 죽어서 모면할 길조차 없는 질곡이었다.
(중략)
아! 김상진 동지여, 믿으라! 다시금 터져 나올 그 눈물겨운 함성을, 그대 위대한 민중의 승리를 믿으라!”주)002
이때 모여든 학생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혼란한 상황에서 <진오귀굿> 등 김상진 장례식 및 추도식을 제대로 치르기 어렵게 되자, 그중 500여 명은 애국가, 정의가,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나갔다. 그러나 이미 경찰기동대가 출동해 교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를 뚫고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역부족으로 20여 분 후 강제 해산당했다.주)003
결과/영향
사건 당시 경찰은 서울대 관악캠퍼스는 물론 강의실까지 난입하여 유인물을 가진 학생은 무조건 구타, 연행했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후의 첫 시위였던 만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서울대생 300여 명이 연행되고, 56명이 구속됐으며, 24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구속된 학생들은 긴급조치 위반 혐의가 적용되어 형사소송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3개월간 외부 면회가 금지되는 등 인권침해를 당했다. 재판에 회부된 학생들도 1심 재판이 종료되기까지 7개월이 소요됐다.
흔히 ‘오둘둘’ 사건 혹은 시위라고도 불리는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학생들의 김상진 장례식 및 추도식 사건은 긴급조치하에서 언론 등을 통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에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에는 큰 충격과 당혹감을 줬다. 그 결과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심석(韓沁錫) 서울대 총장이 사표를 제출했으며, 집회와 시위를 막지 못한 치안본부장과 남부경찰서장이 경질됐다. 나아가 서울대 학생운동에 대한 감시, 사찰, 통제가 대폭 강화되어 이후 1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집회와 시위가 사실상 봉쇄됐다.
또한 이 사건은 민속행사 형식으로 기획됐고 실제로 탈반 학생들이 적극 가담했다. 민속의 지배층 비판과 민중성 강조로 인해 이후 학내 민속행사 과정에서 학생들과 학교 당국의 충돌이 빈번했다. 일례로 서울대에서는 1976년 봄 공대 축제에서 인간문화재들을 초청해서 봉산탈춤을 공연했는데, 이때 학교 당국의 압력으로 말뚝이가 양반을 풍자하는 마당이 생략된 바 있었다. 1977년 봄 축제 때에도 공대 민속극연구회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준비했으나, 학교 당국과 시간 관계로 다투다가 예정된 8막 중 3막까지만을 공연하고 해산당했다. 1978년에는 학생들과 학교 당국의 갈등으로 서울대 민속제가 무산됐다.
학교 당국이 학생들의 민속행사에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 내용도 문제였지만, 종종 민속행사가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김상진 열사 장례식 및 추도식 당시의 시위뿐만 아니라 1976년에는 서울대 가을 축제 때 치러진 마당극 <허생전> 공연의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이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돌발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학교 당국의 검열과 통제가 갈수록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민속행사에는 갈수록 더 많은 학생이 모여들었다. 대학생들의 민속에 관한 관심 및 이를 바탕으로 한 학생운동과 민속의 결합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대중화 추세 속에서 ‘축제’가 ‘대동제’로 바뀌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주)001
유용태, 정숭교, 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서울대 학생운동 70년》1-2, 한울, 2020, 156-157쪽.
주)002
긴급조치9호 철폐투쟁 3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 <조사>, 《30년 만에 다시 부르는 노래: 유신독재를 넘어 민주로》, 자인, 2005, 521-522쪽.
주)003
유용태, 정숭교, 최갑수, 앞의 책, 2020, 157쪽.
인정 내용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확정일
2001.03.06
인정 내용
- 민주화운동 및 민주화운동가 인정 · '故김상진 추도식' 개최 및 유신철폐 시위 주도자 등(박정희정권 반대시위주도) · 제3·4공화국 반독재운동 인정사건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집결하면서 서울대 학생운동의 역량이 하나로 모아졌다. 서울대 종합캠퍼스 계획 보도(1970.3.16. 경향신문)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서울대 학생운동은 일시적이지만 크게 위축됐다.(1975.5.13. 경향신문)
1975년 3월 28일 동아일보 기자 해직사태를 극화한 서울대생들의 <진동아굿> 공연(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서울대 농대 서클 한얼 수련회에 참가한 김상진(김상진기념사업회)
일본 《아사히신문》 1975년 5월 23일자 김상진추도식시위 기사. 당시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을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9호 위반이기 때문에 외신 열람도 제한했다.
김상진추도식시위는 국내 언론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지만 남부경찰서장, 서울시경 기동대장, 서울대 총장, 치안본부장, 서울시경국장 등이 줄줄이 경질된 보도의 행간을 통해 서울대에 중대 사건이 일어난 것을 읽을 수 있다.(1975.5.24., 5.26., 5.27. 경향신문)
부속도서관 자료들을 서울대학교이전 긴급수송차량에 옮기는 모습
당분간 휴강에 들어간다는 서울대학교 내 공고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전경들
조사(弔詞) [고 김상진열사 추모 내용]
김상진[약력, 사건개요,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 양심선언문]
자료집을 내면서[고 김상진 열사관련]
[고 김상진군의 할복 결심과정]
[원고-김상진군의 죽기 전 과정]
참고문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1970년대 사건편>, 2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 후반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 일지연구>
긴급조치9호 철폐투쟁 3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 《30년 만에 다시 부르는 노래: 유신독재를 넘어 민주로》, 자인, 2005.
농촌법학회50년사발간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난의 꽃봉오리가 되다: 서울대학교 농촌법학회 50년사》, 서울대학교 농촌법학회, 2012.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서울대학교, 2006.
신동호, 《70년대 캠퍼스: 군사독재와 맞서 싸운 청년들의 이야기》1, 도요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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