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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봄 학원민주화투쟁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1975년 고려대 3.31시위. 이날 학생들이 비상학생총회 후 4차 시위까지 벌인 후 성토대회와 농성을 이어가자 문교부가 경고 공한을 고려대에 발송했다.(고대신문사)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해당사항 없음
영어표기
the Spring 1975 Campus Democratization Struggle
한자표기
1975年 봄 學園民主化鬪爭
발생일
1975년 3월 1일
종료일
1975년 5월 13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75년 2월 15일 긴급조치1·4호 위반으로 구속됐던 학생과 교수가 석방된 것을 계기로 하여 1975년 3~4월 각 대학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됐다. 시위는 석방 학생과 교수의 복교와 복직을 요구하면서 시작됐고 점차 유신 반대 투쟁으로 격화했다.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가 확산하자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이를 막기 위해 긴급조치 7호와 9호를 발동했다.

배경

1974년 후반기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고조됐고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대한 여론 역시 악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통해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다. 1975년 1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과 대통령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주)001 민주화 세력들은 공정한 민주적 절차, 언론탄압 중지,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고 자유로운 찬반 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국민투표는 기만행위에 불과하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에 대응했다. 재야와 야당에서 국민투표 거부운동이 확산했다.

1975년 2월 15일 안앙교도소 앞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 환영 인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5년 2월 12일 일방적으로 실시된 국민투표에 총 유권자의 79.8%가 참여해 73.1%가 찬성했다. 1972년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기록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지지율에 비하면 상당히 저조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투표 다음 날인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압도적 다수표로 현행 헌법과 자신에 대한 신임이 확인됐다면서 “국민총화를 바탕으로 거국적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취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뒤이어 15일에는 긴급조치 1·4호 위반자 중 형이 확정된 56명을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17일에도 대법원 형사부는 23명의 피고인에 대해 구속집행정지를 결정하고 이들을 석방했다.

원인

1975년 2월 20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은 ‘민주수호 출옥투사 환영회’를 열고 “우리는 이겼다, 민주인사 만세”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 환영회에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Korean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은 유신철폐, 인혁당 인사들에 대한 인권유린의 진상규명, 고문·조작 담당자 엄벌, 중앙정보부 해체 등을 요구했다. 또한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 석방된 학생들은 석방 직후부터 자신들이 당한 고문 사실을 폭로하면서 유신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민청학련사건으로 복역하다 석방된 교수와 학생의 복교를 둘러싸고 문교부와 학교 당국이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1975.2.19. 경향신문)

1975년 봄 대학생의 반유신투쟁은 석방된 교수·학생들의 복교와 복직 문제가 계기가 되어 고조됐다. 2월 19일 문교부는 석방 학생은 형 집행 정지 중이므로 사면을 받아야 구제 가능하다고 각 대학에 통보했다. 연세대, 한신대, 서강대 등은 복교·복직 방침을 밝혔다. 연세대와 서강대는 총장이 문교부를 방문하여 학교의 입장을 전달했다. 특히 연세대는 석방 학생에 대한 전원 구제 방침을 미리 세우고 있었고 관련 교수들은 휴직 처리하고 구속 학생에 대해서도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문교부는 여러 차례 연세대에 복학 불허를 강력히 종용했으나 학교 당국은 석방 학생의 복교원을 접수했고 김동길(金東吉)·김찬국(金燦國) 교수의 새 학기 강의도 배정하였다. 이에 문교부는 2월 25일 석방 학생의 복학 불허 방침을 각 대학에 지시하고 불응할 경우 총·학장 임명을 취소하고 폐교 조치도 불사하겠다며 경고했다.

문교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신대의 김정준(金正俊) 학장은 3월 1일 문교부에 공한을 보내 “이 같은 조치는 국민총화정신을 문교 당국이 파괴하는 결과가 될 것으로 믿는다”라면서 “한국신학대학은 학생의 입학, 재학 등에 관한 권리와 교단이 위임한 의무 안에서 학생 4명을 복학시킬” 것이라고 통고했다. 또한 3월 13일 연세대 교무위원회는 석방 교수와 학생 전원의 복직, 복교를 결정했다. 박대선(朴大善) 연세대 총장은 복교 조치는 진실과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대학과 사회의 엄숙한 요청이며 대학은 법·정치를 초월해 교육적·인도적 결정을 내릴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다.

전개

문교부와 가장 첨예하게 대결한 연세대의 1975년 3.27시위(연세춘추 1975.3.31.)

3월 14일 연세대 총학생회는 노천강당에서 50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했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복직 복교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어떠한 외부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것, 15일 오전 10시까지 문교부가 계고장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15일 노천강당에서 다시 모일 것 등을 결의했다. 총학생회는 15일 제2차 비상총회를 열고 문교부 장관에게 복직, 복교 문제는 대학의 자율성에 위임하고 총장의 승인 취소 위협을 철회할 것 등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채택했다. 문교부는 3월 18일 연세대에 15일 내에 총장을 해임하고 석방 교수 해직과 학생 복교 절차 중지 등을 완료하고 보고하라고 요구했으나, 다음 날인 3월 19일 긴급교무위원회는 문교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또한 3월 19일 연세대 총학생회는 긴급임원회를 열고 문교부가 총장 해임 요구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문교부 장관 사임 요구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3월 24일 연세대 정법대, 신과대, 음대 학생들이 각 단과대학 앞에서 집회를 시작한 후 12시 대강당 앞에 집결하여 교내 시위를 벌이고 문교부 장관의 해임과 석방 교수와 학생의 복귀를 요구했다. 3월 27일 노천강당에서 학생 5000여 명이 참가한 제3차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복직 복교 과정에서 발생한 사태의 전면 백지화, 복직 복교를 대학 자율에 맡길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극한 투쟁에 돌입한다고 결의했다. 오후 1시 40분 학생들은 교내를 행진하여 교문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28일에도 정법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 300여 명이 교내 시위를 계속했다.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연대와 언론자유 실현도 1975년 봄 대학 학생운동의 주요 주제였다. 1975년 3월 14일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 300여 명은 자유언론실천대회를 개최하고 “언론탄압을 중지하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 해임을 백지화하고 즉각 복직시키라” “언론인들의 언론자유투쟁을 전폭 지지한다”는 3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22일에는 서울대 각 단과대학, 교양과정부, 여학생회 등이 발행한 학보의 편집위원 50여 명은 대학언론자유 실천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채택했다.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3월 18일과 19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직당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모금운동은 총학생회 부서별, 과별, 학회별로 진행됐고 문리대 학생회는 모금된 돈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석방 학생의 복교와 구속 학생 석방 요구는 연세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서도 나타났다. 3월 19일 중앙대 예술대 학생회는 교내 시위로 제적된 송기원(宋基元), 유성일(兪聖一) 등 문예창작과 학생에 대한 처벌의 백지화를 진정하고 24일까지 처벌이 철회되지 않을 시 모두 자퇴하겠다고 선언했다. 29일 중앙대 총학생회도 이들을 구제하라는 학생 2875명의 서명이 담긴 건의문을 총장에게 제출했다. 3월 20일 서강대 총학생회는 석방 학생 복교를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석방 학우 복교 문제의 즉각 해결, 학원 자율성의 최대한 보장 등을 요구했다. 서명운동은 22일 오전 11시까지 전개됐는데 전교생 2000여 명 중 996명이 참여했다. 성균관대 총학생회도 3월 25일 석방 학생의 복교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3월 24일 서울대생 1000여 명은 이전한 관악캠퍼스에서 ‘학원민주화를 위한 자유성토대회’를 개최하고 ‘서울대학교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의 발족을 선언했다. 28일에는 서울대 공대생 300여 명이 교내 집회를 개최하고 학원민주화선언을 발표했다. 한신대학교 총학생회는 3월 26일 오전 11시 ‘75 고난선언문’을 채택하고 “귀와 눈은 멀고 입은 재갈에 물려 있어 사방은 칠흙처럼 어둡다”라면서 유신헌법 철폐, 언론 탄압 중지, 석방 교수와 학생의 즉각 복교 복직 등을 요구하고 150여 명이 30여 분간 침묵시위를 했다. 고려대에서도 3월 31일 1500여 명이 학생이 모여 반독재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신헌법 철폐와 미석방 학생의 석방, 고문정치 원흉 처단, 독재 정치 중지 등을 요구했다. 고대생들은 가두 진출을 시도하였는데 경찰과 대치했고 학생 200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렇게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확산되자 문교부는 대학별로 시위 학생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며 압박했다.

개교 이래 최대규모 시위로 불리는 연세대 1975년 4.3시위(연세춘추 1975.4.14.)

그러나 4월 들어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은 더욱 고조됐다. 4월 1일 오전 연세대 정법대 강의실에 ‘대학구국양심선언’‘민중의 소리’라는 전단이 살포됐는데 이 전단들은 각각 “대학은 스스로 면학 분위기라는 구실로 스스로의 침묵과 도피를 합리화하지 못할 것”이니 전면 투쟁에 나서자고 촉구하면서 정권에게 “5.16 이후 권력형 부정부패 근절, 언론탄압 중지, 정보정치 포기, 학원 사찰 중지”를 요구했다. 11시에는 학생 1000여 명이 노천강당에 모여 집회를 개최했고, 600여 명이 교내 시위에 나섰다. 12시에 문과대 학생 100여 명도 합류하여 교문에서 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했다.

4월 2일 문교부가 연세대에 대한 감사를 시작하고, 4월 3일 박대선 총장이 사표를 제출하면서 연세대 학생들의 투쟁은 정점에 이르렀다. 박 총장은 사표를 제출하기 전 복교원을 승인했고 학교는 복교 허가 통지서를 발부했다. 총장이 사직하자 오전 10시 7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호소문’과 ‘성명서’를 낭독한 학생들은 “문교 장관 즉각 사퇴하라” “학사 감사 즉각 중지하라” “이사회는 박총장의 사표를 즉각 반려하라” “8천 연세인이여, 연세를 사수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오후 12시 40분부터 6시까지 교문 진출을 시도했고, 돌과 최루탄이 오가는 시위가 전개됐다. 시위는 격렬했다. 2시 50분경 문교부 장관 허수아비를 정문으로 가지고 와 화형식을 거행했으며, 일부 학생들은 수위실 옥상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소방전을 정문까지 가지고 왔다. 여학생 500여 명이 백양로에 연좌했다. 백양로 시위를 끝낸 총학생회는 대강당에서 3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6시 30분부터 집회를 진행했고, 학생회관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4월 3일 문교부는 연세대에 질서 회복 경고문을 보냈으며, 교무위원회는 자진 휴강을 결정했다. 그러나 4일 교정에 학생들이 등교했고, 철야 농성했던 학생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총장과 면담한 후 시위에 돌입하여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한편 휴교로 교내에 진입할 수 없었던 학생들은 굴다리와 신촌로터리 사이에서 가두시위에 전개했다. 이화여대 입구에 집결한 학생들은 경찰의 페퍼포그에 쫓겨 이대 안으로 들어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이대생들과 함께 연좌시위를 전개했다. 4월 3일과 4일의 투쟁으로 연세대생 120여 명이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됐다. 유지준(柳志浚, 총학생회장), 조붕래(趙鵬來, 총학생회 총무부장), 김규복(金奎福) 등 3명은 구속됐고 김건만(金建晩) 등 2명도 15일간 구류처분을 당했다. 대규모의 연행과 구속으로 연세대 학생운동은 한동안 침체됐다. 주)002

관악캠퍼스로 이전 후 가장 격렬했던 서울대 1975년 4.3시위(대학신문 1975.4.3.)

4월 3일 서울대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관악캠퍼스에서 처음으로 최루탄이 터지고 투석전이 전개됐다. 2000여 명 서울대생은 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수감 중인 우리의 동료 이현배(李賢培), 유인태(柳寅泰), 김효순(金孝淳), 이강철(李康哲)을 즉각 석방하라” “모든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을 즉각 사면·복교시키라” 등을 결의했다. 교문에서 투석전이 전개되었고 일부는 후문을 통해 교외로 진출했다. 이날의 시위로 100여 명이 연행됐다. 4월 7일 재차 시위에 나선 서울대생들은 가두 진출을 시도하며 경찰의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섰다. 이 시위로 서울대는 장기 휴강에 들어갔다. 4월 초까지 벌어진 일련의 시위로 서울대에서 박인배(朴仁培) 원혜영(元惠榮) 등 13명이 구속됐다.

이렇듯 대학가에서 유신 반대 투쟁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려대 학생들의 투쟁이 더욱 두드러졌다. 1975년 3월 2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언론탄압과 석방 학생들의 복교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 “현실은 행정부 일변도의 유명무실화된 삼권 분립, 억압과 기만 속에서 타락한 사이비 언론, 물리적인 힘만이 작용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인권 유린행위의 즉각 중지와 진정한 민주 체제의 확립’, ‘언론에 대한 즉각적인 탄압 중지와 언론인들 스스로의 일관된 자유언론투쟁의 계속’, ‘석방 학생의 조속 복교’, ‘《민우》지 관련 학우들의 석방과 《야생화》지 관련 학우들의 사면’ 등을 요구했다. 주)003

1975년 4월 7일 대강당에 집결해 석탑선언문을 채택하는 고려대생(고대신문 1975.4.8.)

3월 31일 오전 10시 고대생 1500여 명이 대강당에 모여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유신헌법 철폐, 미석방학생 석방, 고문정치 원흉 처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의 행진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진압으로 강당으로 돌아갔고 학생 200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농성했다. 고대생들의 시위와 농성에 대하여 문교부는 ‘학원질서의 확립과 지도 철저’라는 경고 공한을 고려대에 발송했다.

4월 1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긴급대의원총회를 열고 비운동적 방법과 함께 행동적 방법을 병행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경찰이 총학생회 간부와 민족이념연구회 회원들을 연행하여 지도부 공백이 발생했지만, 고려대생들은 현장에서 비상총학생회를 열고 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4월 7일 고려대생 1500여 명이 오후 5시에 대강당에 집결하여 석탑선언문을 채택했다. 학생들은 거리시위를 기도했으나 교문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학생들은 밤 9시까지 교문 앞에 앉아서 농성을 벌이며 “민주헌정의 즉각 회복, 《민우》지, 《야생화》지 관련 학생 즉각 석방, 인권 유린 행위 중지” 등을 요구했고 500여 명이 남아 도서관에서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다음 날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8일 오전 9시 고려대생들은 대강당에 모여 비상총학생회를 열였다. 이들은 자유토론을 가진 후 오전 10시 30분 경 교정으로 나가 시위를 벌이며 대치한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했다.주)004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유신반대시위가 격렬히 전개되자 1975년 4월 8일 오후 4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였다. 긴급조치 제7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주)005

  1. 1975년 4월 8일 17시를 기하여 고려대학교에 대하여 휴교를 명한다.
  2. 동교내에서 일체의 집회, 시위를 금한다.
  3. 위 제1, 2호를 위반한 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4. 국방부장관은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 병력을 사용하여 동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일반법원에서 관할심판한다.
  7. 이 조치는 1975년 4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7호에 따른 고려대 휴교 조치는 교무행정과 학사행정 모두를 일제 중지하는 것이고 무기한 휴교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러한 휴교 조치에 대해 김성진(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은 “몇몇 대학의 학생들이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행위를 자행, 절대다수의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국가안보의 기본인 사회의 안녕질서를 파괴했다”라면서 “정부는 문교적 차원과 국가안보적 차원에서만 부득이 고대에 휴교를 명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앞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함으로써 국가안보를 해치는 학교에 대해서도 이를 주시, 대처할 방침”이라면서 “학교와 교직원 및 학부형들이 면학 분위기를 회복하는 뚜렷한 조치를 취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고대의 휴교령을 해제할 것”이라고 말했다.주)006

긴급조치 7호 발동과 함께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정문 앞을 무장한 군인들이 봉쇄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7호를 통해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렸다. 학생 시위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경고를 보내 다른 대학에서 시위가 전개되는 것을 막고 동시에 재야 세력의 유신 반대 활동을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7호 발동에 따라 4월 8일 고려대는 휴업에 들어갔고 군대가 교정에 진주했다. 군대의 삼엄한 경비 속에 학생뿐 아니라 교수의 교내 출입이 금지됐고 교직원의 출입도 통제됐다. 4월 10일 김상협(金相浹) 고려대 총장은 “휴교 사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휴교 조치는 고려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4월 9일 한국신학대학(한신대)에 휴업령이 내려졌고, 서강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대 음대 등이 자진 휴강에 들어갔다.

결과/영향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된 날 대법원은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 중 서도원(徐道源), 도예종(都禮鍾), 하재완(河在完), 송상진(宋相振), 이수병(李銖秉), 우홍선(禹洪善), 김용원(金鏞元)과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呂正男)에 대해 사형을 확정했고 18시간 후인 4월 9일 새벽에 형이 집행됐다. 긴급조치의 발동과 사형 집행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대학 내 유신 반대 투쟁은 지속됐다. 4월 9일 이화여대생 4000여 명이 채플 후 ‘4.9선언문’을 채택하고 “유신체제 철폐, 언론탄압 중지, 긴급조치 7호 철폐”를 요구하면서 농성했다. 이 일로 이대학보 편집장 김선숙(金善淑)이 제적됐고 ‘4.9선언문’을 게재한 《이대학보》는 배포가 중단됐다. 또한 이대는 4월 10일부터 휴강에 들어갔고 29일 만에 개강했다. 서울대 음대, 한국외대, 중앙대학, 한양대 학생들이 교내에서 시위를 전개하다 경찰과 충돌하는 일이 있었다. 4월 10일에는 중앙대, 건국대, 경희대, 경북대, 경기대, 숭전대, 인하대, 장신대, 감신대 등 전국 대학교에서 반유신 시위가 확산했다. 1975년 봄 민주화운동에는 서울 신일고, 광주중앙여고, 광주제일고 등 고등학생도 참여했다.

1975년 봄 민주화운동에는 고등학생도 참여했다. 4월 30일 광주제일고 시위 관련 구속 보도(1975.5.10. 경향신문)

대학가 반유신투쟁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4월 11일 수원 소재 서울대 농과대학 학생들이 시국성토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축산과 4학년 재학 중이던 김상진(金相眞)이 3번째 연사로 등장했다. 그는 준비한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후 스스로 자신의 배를 그어 4월 12일 오전 8시경 숨을 거두었다. 김상진은 서울대 농대 이념서클 한얼 소속이었다. 한얼, 개척농사회, 흥사단아카데미, NSD 등이 연합한 농촌문제연구회가 농대 학생회를 주도하면서 3월 28일, 4월 4일, 11일 연속 집회를 열었다. 그 가운데 김상진은 11일 집회 이전에 ‘양심선언’,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준비하고 자신의 육성 녹음 테이프를 제작하여 CBS 등 방송국에 보냈다. 김상진이 병원으로 이송된 후 농대생들은 거리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강의실에서 단식 농성을 했으나 곧 해산당했다. 그의 자결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추모집회와 시위가 열렸고 18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추도미사가 거행됐다.

긴급조치 7호 발동은 1975년 봄 대학에서 결렬하게 전개된 유신 반대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긴급조치 7호의 대상인 고려대에서는 41명이 제적됐고 서울대에서도 1975년 4월 53명이 제명되고 16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또한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자 박정희 정권은 매일 같이 반공(안보)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나아가 5월 13일 박정희 정권은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7호가 고려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긴급조치 9호는 이전까지 발포한 긴급조치의 모든 ‘문제점을 보완’한 긴급조치의 최종판이었다.

대한뉴스 제1031호 긴급조치 9호 선포 보도(한국정책방송원_e영상역사관)

주)001
<현행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박대통령,국민투표안공고>, 《동아일보》, 1975. 1. 22. 
주)002
이기훈, <1970년대 전반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학림》48, 2021, 56-64쪽. 
주)003
《고대신문》, 1975. 4. 1. 
주)004
고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227-229쪽. 
주)005
<대통령긴급조치 7호 발동>, 《동아일보》, 1975. 4. 10. 
주)006
위의 기사, 《동아일보》, 1975. 4. 10. 
인정 내용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확정일
2001.01.08
인정 내용
- 민주화운동 및 민주화운동가 인정
· 1975년 4월 9일 반독재 및 학내 민주화 시위 주도자 등(한국외국어대 등)(박정희정권 반대시위주도)
· 제3·4공화국 반독재운동 인정사건(광주제일고사건 등)

- 출처
· 《민주화운동백서: 인명편》1, 2005, 제10차 회의 등.
· 《민주화운동백서: 위원회편》, 2015, 148쪽(인터넷 제공판).
멀티미디어
  • 1975년 4월 7일 대강당에 집결해 석탑선언문을 채택하는 고려대생(고대신문 1975.4.8.)
  • 민청학련사건으로 복역하다 석방된 교수와 학생의 복교를 둘러싸고 문교부와 학교 당국이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1975.2.19. 경향신문)
  • 문교부와 가장 첨예하게 대결한 연세대의 1975년 3.27시위(연세춘추 1975.3.31.)
  • 개교 이래 최대규모 시위로 불리는 연세대 1975년 4.3시위(연세춘추 1975.4.14.)
  • 관악캠퍼스로 이전 후 가장 격렬했던 서울대 1975년 4.3시위(대학신문 1975.4.3.)
  • 1975년 봄 민주화운동에는 고등학생도 참여했다. 4월 30일 광주제일고 시위 관련 구속 보도(1975.5.10. 경향신문)
  • 1975년 2월 15일 안앙교도소 앞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 환영 인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긴급조치 7호 발동과 함께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정문 앞을 무장한 군인들이 봉쇄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당분간 휴강에 들어간다는 서울대학교 내 공고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전경들
  •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어 기뻐하는 김해룡
  • '4.9선언문' 발표 후 휴강에 들어간 이화여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플레이버튼
    대한뉴스 제1031호 긴급조치 9호 선포 보도(한국정책방송원_e영상역사관)
참고문헌
  • 《고대신문》, 《동아일보》
  • 고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2009.
  • 이화민주동우회 이화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운동사: 시대의 가치를 향하여》, 백산서당, 2021.
  •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현대사: 서울대 학생운동 70년》2, 2020.
  • 한국신학대학 민주화운동동지회, 《서서 죽기를 원한 사람들: 한국신학대학 민주화운동사》, 대한기독교서회, 2023.
  • 이기훈, <1970년대 전반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학림》48, 2021.
집필정보
집필자
정무용
집필일자
2024-11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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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고대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