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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양심선언·자결사건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집회에서 양심선언문 낭독 후 할복 자결한 김상진(김상진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김상진할복자살사건
영어표기
the Kim Sang-jin’s Declaration of Conscience and Protest Suicide Incident
한자표기
金相眞良心宣言‧自決事件
발생일
1975년 4월 11일
종료일
1975년 4월 12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지역
경기도 수원시

개요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과대학 학생이었던 김상진(金相眞)이 교내 시국성토대회에서 박정희(朴正熙) 유신 독재 체제의 폭압성을 고발하고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실현을 절규하며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후 칼로 자신의 배를 그어 자결을 기도, 절명한 사건이다.

배경

1974년 하반기에 들어 대학가의 유신반대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8월 23일 신민당 신임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金泳三)은 ‘선명 야당’을 표방하며 민주헌정의 복귀를 주창하고, 언론계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비롯해 각계의 시국선언과 유신반대 운동이 터져 나오자, 재야인사들은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하고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결집, 확산시키고자 했다.

1975년 2.15석방조치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대거 석방되면서 대학가에서 이들의 복학, 복직 문제와 더불어 유신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각계의 유신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1월 22일 유신헌법 찬반과 대통령 신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유신체제 속 국민투표는 ‘행정투표’일 뿐이라며 야당과 재야 세력이 거부, 반대했음에도 국민투표를 강행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투표가 가결되자 유신체제의 ‘국민적 정당성’주)001이 재확인된 것이라 평가하면서 그 직후 다소 유화적인 조치를 취했다.
2월 15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형이 확정된 56명을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고, 2월 17일에는 대법원 형사부에서 지학순(池學淳) 주교 등 피고인 23명 또한 구속집행을 정지하고 석방했다. 그러나 석방된 인사들이 조사 과정에서 자행된 고문과 조작을 폭로하면서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했고, 1975년 상반기 대학가에서는 석방된 학생, 교수들의 복학‧복직 문제가 계기가 되어 유신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원인

2월 15일 유화 조치와 함께 문교부에서는 구제방안을 강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이를 번복하여 2월 18일에는 석방 학생, 교수의 복학‧복교는 불가하다고 천명했다. 그럼에도 연세대, 서강대, 한신대 등에서 복학‧복교를 승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문교부는 이들 대학이 복학‧복교 방침을 철회하지 않으면 총‧학장 임명을 취소하고, 폐교 조치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당국의 태도에 대해 3월 14일 연세대를 시작으로 4월 초까지 중앙대, 서강대, 한신대, 성균관대, 서울대, 고려대 등에서 석방 학우의 복학과 학원의 민주화, 자율성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경기도 수원시의 서울대 농대에서도 3월 28일 농대 비상총회가 열리는 가운데 300여 명의 학생은 “정치정략의 제물이 되어 해임된 교수, 제적학생을 복직, 복학시키라”, “부당하게 해직된 동아일보 기자를 복직시키라”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주)002 4월 2일에는 서울대 농과대학 학생회 명의로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투쟁으로 독재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하는 선언문이 배포됐다. 이어 4월 4일 오전 교내에서 열린 제2차 농대 비상총회에서 300여 명의 학생이 “석방학생 사면시켜 복교시키라” 등 3개 항을 결의한 후 “언론자유, 인권자유, 학원자유”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교내 시위를 벌였고, 오후에는 200여 명의 학생이 가두로 진출했다. 학생들은 수원 남문시장 근처 중심가에서 “유신헌법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주)003 경찰은 시위 주동 혐의로 농대 학생회장 농경제학과 4학년 황연수(黃延秀)와 학생회 체육부장 축산학과 4학년 김명섭(金明燮)을 연행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주)004

전개

4월 4일 가두시위에서 두 학생이 구속되자 서울대 농대 학생들은 구속 학생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서명운동과 함께 석방되지 않을 때 4월 10일 학생총회와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축산학과 학생들은 ‘축산학과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1974년 전역 후 복학한 4학년 김상진을 중심으로 시위와 농성을 준비했다. 학교 측의 종용으로 학생들은 단식농성을 하루 연기하면서 11일까지 회답할 것을 요구했다.

1975년 1월 서울대 농대 서클 한얼 수련회.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상진(경향신문 포토뱅크)

당시 학교 바깥의 시국은 유신반대운동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극심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었다. 3월 31일부터 4월 8일까지 대규모 유신반대시위가 벌어졌던 고려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발동, 군대가 진주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4월 9일에는 한신대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그 외 여러 대학에서도 휴강 조치가 이어졌다. 이와 함께 4월 8일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이 확정됐고, 이튿날 새벽 사형이 집행됐다.
그러한 시국 속에서 4월 10일 김상진은 ‘양심선언’‘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 등 선언문을 준비하면서 축산학과 학생들에게 자신의 양심선언 육성을 녹음하여 기독교방송(CBS) 등 방송국에 보내기 위해 녹음기를 준비해 줄 것, 선언문을 언론사에 배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 11일 집회와 시위를 준비했다.
4월 11일 심종섭(沈鍾燮) 학장은 재차 학생총회 연기를 요청했고, 과대표 회의에서는 16일로 학생총회의 연기를 결정했으나, 4월 11일 오전 11시부터 강당 앞 제3차 농대 비상총회가 열리고 대학강당 앞에서 시국성토대회가 시작됐다. 11시 10분경 김상진은 준비한 ‘양심선언’을 낭독했다. 그는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면서 당시 가두시위로 인해 구속된 농대 학생들과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들의 사형 집행을 규탄했다. 이어 그는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고 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에 다름 아닌 유신체제를 고발하는 것이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버리기에 아까움이 없노라!”하고 외치면서 미리 준비한 길이 20cm의 칼로 자신의 배를 그어 자결을 기도했다.

1975년 4월 11일 김상진 할복 후 강의실에 들어가 단식농성하는 서울대 농대생들(경향신문 포토뱅크)

그의 ‘양심선언’을 듣고 있던 주변 학생들은 자결 기도에 놀라 막으려 했지만 이미 선혈은 쏟아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를 업고 부축하여 택시를 태워 인근 변외과의원으로 갔다.주)005 하지만 상태가 심각하여 다시 수원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도립병원에서 1차 수술을 받았으나 상태가 악화되어 12일 새벽 2차 수술이 진행됐다. 이 또한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고, 그는 12일 오전 8시 10분경 서울대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구급차에서 숨을 거뒀다.주)006
김상진의 양심선언‧자결이 유신반대운동의 기폭제가 될 것을 우려한 경찰과 서울대 당국 등은 서울대학교 병원 영안실에 있던 시신을 신속히 화장하라고 유가족을 압박‧종용했고, 장례식과 추모식을 거행하지도 못한 채 결국 사망 당일인 12일 밤 그의 시신은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됐다.

결과/영향

김상진의 ‘양심선언’ 등이 실린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1975년 4월 15일자 스크랩(청주도시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상진의 양심선언‧자결 직후인 1975년 4월 15일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民主前線)》(제138호)에서 김상진의 ‘양심선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싣는 등 고인의 뜻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4월 22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명동성당 구내 문화관에서 ‘고(故) 김상진 군의 추도식’을 거행하고자 했지만, 당국의 통제와 방해 속에서 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사건 직후 서울대 농대는 기숙사마저 닫고 휴강 조치하여 학교가 폐쇄됐다. 긴급조치 제7호 발동과 더불어 대학에 대한 휴교‧휴업령, 대학 당국의 휴강 조치가 이어지면서 김상진의 자결을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확산하기 어려웠다. 나아가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안보궐기대회를 연이어 개최하여 안보정국을 조성하는 가운데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하여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일체의 집회‧시위와 정치 관여 행위를 금지하는 등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을 노골화했다.

그럼에도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첫 유신반대시위가 5월 22일 서울대생들에 의해 김상진 열사 장례식‧추도식이라는 이름으로 결행됐다. 또한 이 시위 직후 서울 명동성당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학생운동 세력이 ‘반독재투쟁선언문’과 함께 ‘고 김상진의 죽음을 추모하는 조사(弔辭) 및 조시(弔詩)’를 배포하려는 등 유신반대 시위의 확산을 꾀하다 대거 검거되는 사건(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사건)이 일어났다. ‘김상진양심선언‧자결사건’은 긴급조치 9호의 폭압에도 굽히지 않은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주)001
<박대통령 특별담화전문>, 《경향신문》, 1975. 2. 15. 
주)002
<학생복학 등을 요구 서울농대 3백여명>, 《경향신문》, 1975. 3. 29. 
주)003
<서울대 농대생 가두데모>, 《동아일보》, 1975. 4. 5. 
주)004
<가두시위 주동혐의 서울 농대생 둘 구속>, 《경향신문》, 1975. 4. 7. 
주)005
<할복을 기도, 농대생 농성하다>, 《경향신문》, 1975. 4. 11. 
주)006
김상진기념사업회, 《긴 겨울 얼음 뚫고: 김상진의 삶과 죽음》, 녹두, 1995, 183쪽. 
기념 계승 현황
[기념 시설]
김상진 추모비
기념 단체
사단법인 김상진기념사업회
주소
서울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김상진추모광장
기념 단체
사단법인 김상진기념사업회
주소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호로89(서울대학교농업생명과학대학)
시설배치
서울대학교농업생명과학대학 앞 잔디밭에 설치(2025. 4. 11.)
김상진홀
기념 단체
사단법인 김상진기념사업회
주소
서울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융합관, 205호
[기념 행사]
김상진열사 추모제
기념 단체
사단법인 김상진기념사업회
인정 내용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확정일
2001.01.08
인정 내용
- 민주화운동 및 민주화운동가 인정(명예)
· 1975년 4월 11일 유신헌법 등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자유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할복자살한 사실 인정(박정희정권 반대 할복자살)
· 제3·4공화국 반독재운동 인정사건

- 출처
· 《민주화운동백서: 인명편》1, 2005, 제10차 회의.
· 《민주화운동백서: 위원회편》, 2015, 148쪽(인터넷 제공판).
멀티미디어
  • 1975년 1월 서울대 농대 서클 한얼 수련회.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상진(경향신문 포토뱅크)
  • 1975년 4월 11일 김상진 할복 후 강의실에 들어가 단식농성하는 서울대 농대생들(경향신문 포토뱅크)
  • 1975년 2.15석방조치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대거 석방되면서 대학가에서 이들의 복학, 복직 문제와 더불어 유신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김상진의 '양심선언' 등이 실린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1975년 4월 15일자 스크랩(청주도시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옥중서신[아아, 김상진]
  • 김상진
참고문헌
  • 《경향신문》, 《동아일보》
  • 김상진기념사업회, 《긴 겨울 얼음 뚫고: 김상진의 삶과 죽음》, 녹두, 199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2009.
  • 서울대 민주열사 추모사업위원회 편, 《산자여 따르라: 4인열사추모집》, 거름, 1984.
  • 이재오, 《해방 후 한국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
집필정보
집필자
홍정완
집필일자
2024-12
최종수정일자
2026-08-26 13: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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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집회에서 양심선언문 낭독 후 할복 자결한 김상진(김상진기념사업회)
  • 출처 김상진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