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승헌필화사건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받는 한승헌 변호사(한승헌 유족 제공)
유형
사건
분류
연관사건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해당사항 없음
영어표기
the Han Seung-hun Literature Scandal Case
한자표기
韓勝憲筆禍事件
발생일
1975년 3월 21일
종료일
1976년 11월 23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개요

1975년 중앙정보부에서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참여한 한승헌(韓勝憲) 변호사의 수상집 《위장시대(僞裝時代)의 증언》에 수록된 <어떤 조사(弔辭)-어느 사형수(死刑囚)의 죽음 앞에>의 내용을 문제 삼아 불법 구금 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하여 유죄 판결이 내린 사건

배경

유신체제에 반대했던 장준하(張俊河), 함석헌(咸錫憲), 천관우(千寬宇) 등 각계 인사들이 1973년 12월 24일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조직하고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에 나서자 이듬해 1월 8일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하여 유신헌법에 관한 논의 자체를 금지했다. 이어 봄 개학을 맞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이름으로 ‘민중‧민족‧민주선언’이 발표되고 각 대학에서 유신반대 투쟁을 전개하려 하자 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이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개헌만이 살길’이라는 띠를 두르고 농성을 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운데)와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4년 하반기에 들어 8월 23일 ‘선명 야당’을 내세운 김영삼(金泳三)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고, 각 대학의 유신반대 시위뿐 아니라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200여 명의 ‘자유언론실천선언’ 등 각계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재야인사들은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선언’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하여 커지는 유신 반대의 목소리를 결집하고 민주화운동을 확산시키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헌 논의는 용납할 수 없음을 누차 공언하며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다.

원인

1975년에 들어서 유신 반대 움직임이 활성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1월 17일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이었던 이병린(李丙璘)을 간통 혐의로 구속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 지부 관계자들에 대한 탄압을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1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 찬반과 대통령 신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야당과 재야 세력의 거부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를 강행하여 투표율 79.8%, 찬성률 73.1%로 가결된 것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의 ‘국민적 정당성’이 재확인된 것이라 평가하고,주)001 그 직후 다소 유화적 조치를 취했다. 2월 15일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형이 확정된 56명이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됐고, 2월 17일 대법원 형사부에서 지학순(池學淳) 주교와 김찬국(金燦國) 교수(연세대), 강신옥(姜信玉) 변호사, 이철(李哲) 등 재판 중인 피고인 23명 또한 구속집행을 정지하고 석방했다.
석방된 인사들은 이후 조사 과정에서 자행된 고문과 조작을 폭로하면서 민청학련사건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했다. 2월 15일 석방된 김지하(金芝河)는 《동아일보》에 2월 25일부터 3회에 걸쳐 <고행(苦行)…1974>를 연재하여 인혁당재건위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을 기술했고, 이로 인해 그는 3월 13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구속됐다. 국민투표 결과 직후 취해진 유화조치가 오히려 유신체제에 대한 항거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게 되자 박정희 정권의 유신반대운동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경해졌다.

전개

1974년 12월부터 광고주 협박을 통한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이 지속되는 가운데 1975년 3월 10일 문화공보부에 의해 《기자협회보》가 폐간되고, 3월 13일 김지하가 재구속되자 3월 15일 자유문인실천협의회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와 통분을 표명하는 ‘최근의 사태에 관한 문학인 165인 선언’을 발표했다.주)002 이러한 문학인 선언에는 과거 시집 《노숙(露宿)》(1967)을 출간하기도 했던 한승헌 변호사가 시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이자 구속된 이병린 대표위원의 변호사였고, 한국기자협회 고문변호사, 재구속된 김지하 변호인단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문학인 선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는 “시인 김지하 씨의 거듭된 수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기협회보 폐간은 한국 언론에 대한 제도적 탄압이라고 생각한다”주)003는 등의 발언을 하며 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앙정보부가 문제삼은 한승헌 변호사의 수상집(왼쪽)과 검찰 송치 문서 일부(한승헌 유족 제공)

1975년 3월 21일 중앙정보부는 한승헌 변호사를 연행하여 조사한 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이튿날 구속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1974년 12월 발간한 수상집 《위장시대의 증언》에 수록된 <어떤 조사-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주)004라는 제목의 글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해당 글은 《여성동아》 1972년 9월호에 실린 것을 단행본에 재수록한 것이었다. 발표한 지 2년 6개월이 경과한 글을 빌미로 삼았다는 점에서 시국사건 변호와 함께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나선 그를 겨눈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정보부는 <어떤 조사>라는 글이 1969년 5월 발표된 유럽‧일본거점간첩단사건으로 1972년 7월 13일 사형 집행된 김규남(金圭南)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당신의 소원이 명부(冥府)의 하늘 아래서 이루어지기 바란다. 당신의 죽음에 위로를 보낸다”고 기술하여 반국가단체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조사>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상대적 판단이 ‘절대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형제도를 성찰하며 그 폐지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 마지막 어구를 문제 삼아 반공법 제4조 위반으로 구속한 것이었다.

한승헌 변호사가 구속·수감되자 수많은 변호사가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여 그의 변호인단은 모두 129명에 이르렀다. 변호인단은 ‘변호인 의견서’에서 문제의 글은 특정인을 지적하지 않았으며, “오판의 위험성과 인명 경시의 풍조를 개탄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일반론을 수필로 호소한 것”주)005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5월 19일부터 1심 공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안수길(安壽吉), 유주현(柳周鉉), 이어령(李御寧) 등 3명이 그의 수필감정서를 제출하여 변호인 측의 주장을 옹호했다. 이외에도 이우정(李愚貞), 강원용(姜元龍) 등이 피고인 측 증인으로 증언했으며, 한국기자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를 비롯하여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한변호사협회, 서울제일변호사회, 일본의 종교인‧교수‧법조인‧언론인 등 400여 명이 진정서를 냈고, 앰네스티 국제본부 및 각국 지부의 항의 또는 진정이 이어졌다.

재판장에 들어가는 한승헌 변호사(한승헌 유족 제공)

1975년 8월 21일 제10회 공판에서 변호인 측이 피고인 건강 문제로 공판 절차의 정지를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다.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5년 8월 28일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정경식(鄭京植) 검사는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고, 9월 11일 서울형사지법 이영범(李永範) 판사는 피고에게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9월 13일 한승헌 변호사는 이에 불복, 항소했다. 12월 18일 서울형사지법 항소9부는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당일 9개월간 수감 중이던 서대문 구치소에서 출감한 한승헌 변호사는 12월 22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1976년 11월 23일 대법원 형사부는 한승헌 변호사에 대한 반공법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의 원심을 확정했다.

결과/영향

한승헌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됨에 따라 변호사 자격이 박탈됐다. 실업자가 된 그는 수감 중에 이어령의 권고에 공감하여 저작권법 문제를 독학했던 것을 바탕으로 1976년 12월 한국저작권연구소를 개설하고 소장이 되어 여러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1979년 3월 윤보선(尹潽善)‧함석헌(咸錫憲)‧김대중(金大中) 등이 공동의장이었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집행위원이 되어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나아가게 되고, 같은 해 5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전무이사로 선출되어 단체를 이끌었다.

주)001
<박대통령 특별담화전문>, 《경향신문》, 1975. 2. 15. 
주)002
<언론사태 우려 표명 자유실천문인협 ‘165인선언’>, 《동아일보》, 1975. 3. 15. 
주)003
<한승헌 변호사 구속>, 《동아일보》, 1975. 3. 24. 
주)004
한승헌, 《위장시대의 증언》, 범우사, 1974, 51-55쪽. 
주)005
<“한승헌씨 수필집 사형폐지 일반론”, 변호인단 의견서>, 《조선일보》, 1975. 4. 15. 
멀티미디어
  • 중앙정보부가 문제삼은 한승헌 변호사의 수상집(왼쪽)과 검찰 송치 문서 일부(한승헌 유족 제공)
  • 재판장에 들어가는 한승헌 변호사(한승헌 유족 제공)
  • '개헌만이 살길'이라는 띠를 두르고 농성을 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운데)와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민통련 서화전에 작품을 낸 한승헌 변호사
  • 김대중 후보 유세 연단에 선 김종철, 이해찬, 박영숙, 한승헌
  • 통일시대국민회의 한승헌 감사원장 취임 축하행사에서 휘호를 선물하는 지선
  • 우리의 주장[최근 독재체제 심화로 보이는 몇가지 사태에 대해]
  • [송건호 선생 자필 원고 3]
참고문헌
  •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 김삼웅 편저, 《한국필화사》, 동광출판사, 1987.
  • 김삼웅, 《한승헌 평전》, 범우, 2003.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2009.
  • 한승헌, 《위장시대의 증언》, 범우사, 1974.
  • 한승헌,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한승헌 자서전》, 한겨레출판, 2009.
  • 한승헌선생 화갑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분단시대의 피고들: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범우사, 1994.
집필정보
집필자
홍정완
집필일자
2024-12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4:27
일반사건 + 더보기
1975년 봄 학원민주화투쟁
4.7고려대학교도서관점거농성사건
김상진양심선언·자결사건
김지하양심선언사건
연관사건 + 더보기
한승헌필화사건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탄압사건
배경사건 + 더보기
긴급조치 7호 선포
연계자료 + 더보기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담당 변호인 한승헌 씨 전언 "「민주회복회의」 손떼라"(동아일보 1...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정보부 22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한승헌 변호사 구속(동아일보 1...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한승헌 씨 수필집 사형 폐지 일반론"(조선일보 1975.04.15.)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문제된 한승헌 씨 수필 북괴 고무-찬양 아니다"(조선일보 1975...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한승헌 씨 집유 3년 반공법 항소심 선고(경향신문 1975.12.18.)
[한승헌 유족]중앙정보부가 문제삼은 한승헌 변호사의 수상집(왼쪽)과 검찰 송치 문...
[한승헌 유족]재판장에 들어가는 한승헌 변호사(한승헌 유족 제공)
'개헌만이 살길'이라는 띠를 두...
우리의 주장[최근 독재체제 심화...
[송건호 선생 자필 원고 3]
민통련 서화전에 작품을 낸 한승...
김대중 후보 유세 연단에 선 김...
통일시대국민회의 한승헌 감사원장...
...

#
한승헌필화사건
  • 설명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받는 한승헌 변호사(한승헌 유족 제공)
  • 출처 한승헌 유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