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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네스티 한국지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1972년 3월 28일 한국위원회 형태로 창립됐다.(앰네스티 한국지부)
유형
단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유사어/별칭/이칭
앰네스티
영어표기
Amnesty International Korean Section
한자표기
Amnesty 韓國支部
결성일
1972년 3월 28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지역
서울, 대구, 전주, 광주, 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

개요

1972년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1961년 설립) 한국위원회 형태로 설립됐다. 세계인권선언에 기반하여 양심수 석방, 고문 방지, 사형 폐지, 국가보안법 반대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1970년대에는 특히 수감된 국내 양심수와 그 가족을 구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1980년 5월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간부 및 회원 다수가 구속되고 탈회를 강요받아 활동이 정지됐다. 1981년 3월 회원 재등록을 통해 활동이 재개됐다가 1985년 국제집행위원회의 한국지부의 기능 일시 정지 통보에 반발하여 스스로 해산했다. 1993년 한국지부가 재결성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1969년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연장을 위한 대통령 삼선개헌이 이루어지고, 1971년 박정희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2년에는 이른바 유신체제가 선포되어 박정희 정권의 종신 집권이 가능하게 되고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가 극도로 침해됐다. 1970년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 인해 시인 김지하(金芝河)와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夫琓爀)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사상계》는 폐간됐다.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PEN) 대회에 참석한 국내외 작가, 언론인을 통해 이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의 표현의 자유 문제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됐다.

설립 과정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1961년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넨슨(Peter Benenson)의 주도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당한 양심수 석방 운동을 펼친 것에서 시작되어, 세계인권선언에 기반한 국제적 인권운동을 목표로 발전했다.주)001 국내에서는 1970년 윤현(尹玄) 목사가 국제펜대회에 참석해 김지하 구명운동을 벌이던 과정에서 국제앰네스티의 활동을 접하게 됐다. 그는 이미 개인회원 자격으로 활동하고 있던 독일 출신 교수 브라이덴쉬타인(Breidenstein)과 캐나다 출신 선교사 베일리스(Baylis)를 만나 한국위원회 창설을 모색하며 규약안을 준비했다. 1972년 2월 6일, 영국에서 열린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회가 한국위원회 규약안을 인준하고, 같은 해 3월 28일 국제집행위원장 함마르베리(Hammarberg)의 입회 아래 한국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앰네스티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구속자 석방 환영대회에 참석한 조성우(가운데 국방색 셔츠 입은 이)와 이해찬(조성우 뒤 안경 쓴 이) 등 민주화운동가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위원회는 주로 종교계, 언론계, 학계의 민주화운동 인사 위주로 결성됐다. 창립총회에는 이사장 김재준(金在俊), 전무이사 윤현, 이사 양수정(梁秀庭), 민병훈(閔丙薰), 한승헌(韓勝憲)이 선출되었고, 문동환(文東煥), 백철(白鐵), 송지영(宋志英), 함석헌(咸錫憲), 최종고(崔鍾庫), 리영희(李泳禧) 등이 참석했다. 당시 국제앰네스티의 정관에 따르면 분담금을 납부하고 ‘결연 양심수’를 배정받아 석방 운동을 하는 그룹(group) 조직이 3개 이상 있을 때 국가 지부(section)가 설립될 수 있는데, 그러한 요건을 갖추지 못해 위원회(committee) 형태를 취하게 됐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 초기에는 서울에 위치한 사무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원주분회, 대구분회 등이 결성되기도 했다. 1977년 국제앰네스티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전국적인 순회 강연을 열었는데, 이를 계기로 지역 지부가 활발히 결성됐다. 1977년 12월에 광주지부, 전주지부, 1978년 1월 부산지부, 12월 인천지부, 1979년 10월 목포지부, 1980년 5월 대구지부가 결성됐다. 지역 지부에는 당시 지역을 기반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광주지부의 박석무(朴錫武), 조비오(曺備吾), 류연창(柳淵昌), 부산지부의 송기인(宋基寅), 김광일(金光一) 등이다.

단체 활동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를 소개하는 홍보물 표지(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0년대 한국위원회는 국제앰네스티 운동의 활동 원칙 가운데 하나인 국제연대를 통한 인권 활동에 기여하기 위하여 해외 양심수 석방운동, 국제적인 사형 폐지, 고문 방지 캠페인, 국제인권기준 비준 운동 등에 참여했다. 1973년에는 해외 양심수 35명을 위한 탄원엽서 3080통을 보내고, 재일 외국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본 출입국관리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고, 그해 국제앰네스티 국제 캠페인인 고문반대국제운동에 참여하여 1만 367명의 서명을 받아 국제사무국에 전달했다. 1977년에는 모든 양심수인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진정서 서명운동에 참여하여 6757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위원회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국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속·수감된 인사와 학생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국제앰네스티가 중립, 국제연대 강화, 회원 보호를 강조하며 만든 자국 문제 불개입 원칙에 따라 국내 양심수의 석방을 직접 요구하는 활동에는 제한이 있었다. 대신 한국위원회는 국제사무국이나 해외 지부가 주도하는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방한하는 조사관이나 해외 지부 간부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정치범의 공판을 방청해 국제사무국에 그 결과를 전달하고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활동을 했다.

또 국내에서 모금되거나 해외 지부가 기탁한 ‘임시구호기금’으로 변호 비용, 영치금, 가족생계보조금, 석방 이후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한 재교육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 김지하, 긴급조치 1호 위반 장준하(張俊河), 백기완(白基玩), 1975년 고려대NH회(민우지)사건 정진영(鄭進英), 함상근(咸相根), 긴급조치 9호 위반 이부영(李富榮), 김덕룡(金德龍), 긴급조치 4호 위반 유인태(柳寅泰), 반공법 위반 한승헌(韓勝憲),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 김대중(金大中), 계훈제(桂勳梯), 최열(崔冽), 김철(金哲), 문동환(文東煥), 함세웅(咸世雄), 문정현(文正鉉) 등이 이러한 지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구호기금의 지원을 받은 다수 인사들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회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1976년 6월에 국제집행위원회의 정식 승인을 받았다.

1997년 3월 28일 열린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25주년 기념식 및 앰네스티 언론인위원회 결성식. 왼쪽부터 혜진 스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해리 우 부부, 허창수 앰네스티 한국지부장, 남영진 한국기자협회장(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편 국내외 인권상황을 고발하기 위한 대중강연회도 다수 개최했다. 1972년 ‘그리이스의 정치정세’(리영희), ‘필화사건과 창작의 자유’(한승헌), ‘시민적 자유의 수호’(윤현), 1973년 ‘인권과 자유’(김용구, 부종혁, 안병무, 장룡), 1974년 국제양심수인주간 기념 ‘신념과 박해’(홍성우, 오글 George E. Ogle), 세계인권선언의 날 기념 ‘1974년의 인권’(함석헌, 이우근, 윤현) 등이 개최됐다. 이러한 활동 가운데 한국위원회의 간부 및 회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1975년 3월, 한승헌 회원이 쓴 글로 인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국제사무국 대표가 방한하여 재판을 방청하고, 유죄 선고를 받자 국제집행위원회 차원의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1979년 8월 이재오(李在五) 사무국장이 기도회 연설이 문제 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 한국위원회는 ‘한국앰네스티 간부 등의 구속사태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여 자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여기에 대해 국제사무국에서는 한국위원회에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17일,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전무이사 한승헌이 체포되고, 사무국장, 간사를 비롯하여 다수의 임원진과 회원이 수배되거나 정보기관에 의해 국제앰네스티 탈회를 강요받았다. 사무국이 폐쇄되면서 한국위원회의 활동이 중단됐다. 수배 중이던 사무국장 강기종(康祺宗)은 비밀리에 한국위원회의 통장과 장부 등의 서류를 나길모(羅吉模, Most Rev. William McNaughton, M.M., D.D.) 이사장(미국 출신)에게 넘겼다. 회원 명단은 전주지부 배영근(裴永根, Rev. Joseph Feyen) 신부(벨기에 출신)가 보관토록 맡겼다. 같은 해 8월 구속 또는 수배되지 않은 이사진을 중심으로 긴급이사회가 열렸고, 회원 재등록을 받아 활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때 이전에 600명이었던 회원은 170명으로 줄었다.

결과/영향

《국제앰네스티》 1990년 7, 8월 복간 10호(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1년 2월 28일, 총회를 통해 윤현 이사장을 선출하고 규약을 개정해 과거 개인회원 중심의 위원회 체제를 결연그룹(group) 중심의 한국지부 체제로 전환했다. 활동이 재개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국제집행위원회가 제시한 자국문제 불개입원칙을 준수하고, 지역별로 새로이 결성된 결연그룹들을 중심으로 해외의 양심수 석방 운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1985년 국제집행위원회는 한국지부가 ‘지부의 정치적 독립과 활동의 자유’, ‘전국적 규모의 캠페인 등 헌장과 활동지침에 따른 행동수행’ 등 활동지침의 수행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여, ‘한국지부 기능의 일시 정지’를 통보했고, 이에 대응하여 한국지부는 자진 해산을 결의했다.

지부 해산 이후 결연그룹들은 국제사무국 직할로 활동을 이어갔는데, 1988년 구미-대구에서 활동하던 2그룹, 서울에서 활동하던 4그룹 등이 지부가 없는 상태에서 연락위원회를 결성하고, 1990년에는 한국지부 재결성을 위한 조절위원회로 전환하여 1991년 11월 대구에 사무실을 개소했다. 1993년 1월 17일, 정기총회를 통해 한국지부가 재결성되어 3월에 국제집행위원회의 정식 인준을 받아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현재(2024년)까지 사형제도 폐지, 국가보안법 개정폐지, 국제인권기준 비준, 인권교육, 차별금지법 제정, 집회·결사·표현의 자유, 여성인권 운동 등을 이어오고 있다.

주)001
이정은, <한국 인권운동의 토대 형성 –해방 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역사비평》 103, 2013, 85쪽. 
주)002
Buchanan Tom, ‘The truth will set you free’: The making of Amnesty International,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37, 2002, p. 575. 
멀티미디어
  • 1997년 3월 28일 열린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25주년 기념식 및 앰네스티 언론인위원회 결성식. 왼쪽부터 혜진 스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해리 우 부부, 허창수 앰네스티 한국지부장, 남영진 한국기자협회장(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앰네스티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구속자 석방 환영대회에 참석한 조성우(가운데 국방색 셔츠 입은 이)와 이해찬(조성우 뒤 안경 쓴 이) 등 민주화운동가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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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를 소개하는 홍보물 표지(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국제앰네스티》 1990년 7, 8월 복간 10호(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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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한국 앰네스티 30년! 인권운동 30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30년 약사》,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2002.
  • 이정은, <한국 인권운동의 토대 형성 –해방 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역사비평》 103, 2013.
  • Buchanan Tom, ‘The truth will set you free’: The making of Amnesty International,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37, 2002.
집필정보
집필자
김철효
집필일자
2024-11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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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앰네스티 한국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