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민청학련사건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피고인 사진(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영어표기
the Federation of Democratic Youths and Students in Korea(Mincheonghakryeon) Incident
한자표기
民靑學聯事件
발생일
1974년 4월 3일
종료일
1975년 2월 15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은 박정희( 朴正熙) 일인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서울, 경상도, 전남 등 전국 주요 대학 학생들의 주도 하에 재야 세력, 종교계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여기에 일부 고등학생까지 참여하여 ‘전국적인 일제 시위’를 추진하다 대거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비록 1974년 4월 3일로 예정한 일제 시위는 불발에 그치고 박정희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학생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 사건은 1970년대 후반 유신체제 철폐운동을 크게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된 많은 이들이 이후 1980, 90년대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민청학련사건은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동력을 배출하는 주요한 계기 중의 하나였다.

배경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이 터진 근원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계엄을 선포하고, 일인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체제를 수립한 데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서 대통령 중임제한을 없애고 대통령 선출 방식도 직접선거에서 간접선거 방식으로 바꾸었다. 유신헌법은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 민주공화제를 위한 삼권분립을 무력화하고,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1972년 12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8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식(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2년 12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접선거라는 형식적인 절차를 밟아 영구집권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집권 세력에게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의 분출을 막는 것은 당면 과제였고, 투쟁의 예봉을 우선 꺾기 위해 공안 당국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온 학생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은 3월에 전남대함성지사건, 5월에 고려대민우지사건을 터트린 후, 7월에 다시 고대생을 대상으로 검은10월단사건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당국은 전남대생과 고대생을 용공 세력으로 몰아 징역 10년에서 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고, 특히 검은10월단사건을 근거가 불분명함에도 공안사건으로 조작하고자 학생들에게 유례없는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이 사건 관련자는 결심 공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1974년 2월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은 학생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보다 오히려 정권의 폭력성과 반민주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새로운 저항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1973년 하반기부터 이른바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터져 나왔다.

원인

학생운동은 1971년 10월 위수령 이후 많은 학생이 강제징집을 당하며 크게 위축된 뒤 1973년 상반기 폭압적인 공안 조작 사건들까지 더해지며 침체를 이어갔다. 이 와중에도 주요 대학에서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인적 자원이 양성됐다.주)001 여기에 19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 1971년 학원병영화반대운동과 교련철폐 운동을 주도하다 강제징집이나 제적을 당했던 67·68학번 학생들이 복학하여 1970년대 초반 학번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생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73년 봄 서울대에서는 문리대, 상대, 법대에서 학생회가 재건되고, 후진국문제연구회와 기독교계열 학생들이 움직임을 갖고 있었다.

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가 수립된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벌어진 10.2반유신시위(신동호 제공)

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가 수립된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대학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학생들은 정보 폭압정치를 즉각 중지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라고 외쳤다. 당국은 서울대 10.2반유신시위 관련자로 215명을 대거 연행하고, 23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했다. 10.2반유신시위 직후 서울대 법대(10.4), 상대(10.5) 등에서 시위가 있었으나, 후속 시위가 없어 대학가의 반유신 투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국면을 전환한 계기가 경북대 학생들의 시위였다. 경북대 학생들은 10월 30일 1차 시위가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실패하자, 11월 5일에 2차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200여 명의 경북대 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 민주헌법 제정’, ‘살인적 고문기관 중앙정보부 해체’, ‘노동자·농민 저소득층 생존권 보장’, ‘부패 관권 부정 축재자 공개’ 등을 외치며 도청으로 행진했다. 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분명하게 요구했다. 11월 7일 서울대 각 단과대학에서 동맹휴학, 시험거부 등을 벌였다. 이는 한국신학대, 감리교 신학대, 서울신학대, 장로회 신학대, 한국외국어대, 중앙대, 연세대, 이대 등으로 확산했다. 대학가의 시위가 대규모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1월 12일 이화여대 학생 4000여 명이 비상총회를 개최하여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을 요구하고, 15일에는 고려대생 2000여 명이, 29일에는 연세대생 2000여 명이, 30일에는 중앙대학생 1000여 명이 자유민주주의 확립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1월 말부터는 시위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11월 29일 9개 대학에서 7000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다음날 30일에는 8개 대학 4천 명, 12월 1일에는 10개 대학 6000여 명, 12월 3일에는 7개 대학 40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에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들의 반감과 저항을 무마하고자 10.2반유신시위로 구속된 학생 전원과 이전 구속된 학생도 전원 석방하는 조치를 했다.

긴급조치 1, 2호 선포 보도(경향신문 1974.1.9.)

사회 각계에서도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973년 11월 5일 김재준(金在俊) 목사 등 15명의 재야인사가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날 시국선언과 경북대 시위를 보도하지 않은 데 항의해 동아일보 기자들이 철야 농성했다. 재야인사 시국선언은 개헌청원운동으로 모아졌고, 언론인의 저항은 이후 자유언론실천선언(1974.10)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새해에도 유신헌법 철폐 요구가 급격하게 확대하는 양상을 보이자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1, 2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물론 개정 주장도 금지했다. 긴급조치 위반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받고, 최고 징역 15년에 처벌될 수 있었다. 특히 중앙정보부가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한 구속 여부, 증거·증인 채택, 재판 진행과 형량까지 판단해서 군사법원 재판부에 통보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1974년 민청학련 투쟁이 전개된 직접적인 원인은 1973년 하반기 박정희 대통령 일인 영구집권체제에 대한 대학생들이 비판 의식과 국민적 저항의 움직임이 전면적으로 분출한 데 있었다. 이를 확인한 학생운동권은 민주화를 위한 대규모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개

전국적 일제 시위 추진과 대학간 연결

전국적인 학생 시위 필요성의 공유와 추진

1973년 11월 이래 독재체제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할 때, 서울대생 서중석(徐仲錫, 국사학과 67), 유인태(柳寅泰, 사회학과 68), 이철(李哲, 사회학과 69) 복학생 세 명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시위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주)002 이철은 11월 25일에 서울대 2학년생들인 이해찬(李海瓚, 사회학과 72), 권오걸(権五傑, 철학과 72), 정동영(鄭東泳, 국사학과 72) 등과 겨울방학 중에 조직을 강화하는 계획을 논의하고, 새 학기 시작 전에 문리대 2학년생 50여 명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주)003 11월 말 유인태, 서중석, 안양로(安亮老, 정치학과 68), 제정구(諸廷坵), 김효순(金孝淳, 정치학과 70) 등을 위시한 여러 명이 서울 돈암동 주점에서 회합했다. 이들은 새 학기에 유신체제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일제 시위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12월부터 이들은 본격적으로 타 대학 학생들의 연계를 추진하고 재야·종교계 인사들을 만나 유신철폐 의사를 모으는 작업을 했다.

10.2반유신시위를 주동한 나병식(오른쪽 일어선 이)이 석방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4년 1월부터 서중석, 유인태, 이철 그리고 10.2반유시위를 주동한 나병식(羅炳湜)이 정기적으로 모여 투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4인은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된 직후인 1월 10일에 첫 모임을 했다. 이 자리에서 4인은 긴급조치 1호로 인해, 시위를 미루다가는 유신체제가 안정되어 저항의 기회를 찾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과감하게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불어 독재정권과 과감하게 투쟁할 세력은 학생밖에 없으므로 여러 대학이 조직적으로 일제 시위를 벌이는 게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서중석은 1973년 상반기 전남대함성지사건, 고려대민우지사건, 검은10월단사건 등이 모두 내란 사건,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된 점을 언급하며, 이러한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일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현실의 역량을 반영한 3·3·3원칙도 제안했다. 3·3·3원칙이란 서울대 내에서 조직력이 강한 문리대, 법대, 상대 3개 단과대학이 중심축이 되어 타 단과대의 투쟁을 선도하고, 서울에서는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3개 대학이 주축이 되어 시내 전체 대학으로 운동을 확산하고, 전국적으로는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 3개 대학이 중부권, 영남권, 호남권 대학으로 운동을 확산시킨다는 방안이다.

서울 시내 각 대학과의 연결

전국적 일제 투쟁과 3·3·3원칙을 제안한 서중석의 1975년 2월 17일 석방 장면(전민조 촬영, 서중석 제공)

1973년 12월, 서울대 유인태가 이화여대 서클 ‘새얼’ 1기의 핵심 회원이자 1969년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참여한 장하진(張夏眞)을 만나, 투쟁 계획을 설명하고 이화여대의 동참을 요청했다. 유인태는 장하진의 소개를 받아 1974년 1월 10일 이대생 오성숙(吳星淑, 새얼 회장)과 김은혜(金恩惠)를 만나 시위 준비를 협의했다.
연세대와의 연결은 1월 말에 이루어졌다. 연세대생들은 서울대 학생들과 연계되기 이전부터 자체적으로 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직후인 1월 9일 연세대생 김영준(金永晙, 경제학과 68), 김학민(金學珉, 경제학과 67), 송재덕(宋在德, 법학과 73), 이상우(李相禹, 정치외교학과 73) 등이 모여 향후 대책과 신학기 시위를 논의하고, 교내 주요 서클 ‘동곳회’를 비롯한 여러 서클의 참여를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월 22일 서울대의 유인태와 정문화(외교학과 70)가 연세대생 이상문(국문과)과 이대용(동곳회)을 만나 동참을 요청했다. 2월 말경에 서울대 유인태, 정문화(鄭汶和)와 연세대 이상문(李相文), 송무호(宋武鎬)가 모여 전국 시위 준비를 논의했다. 서강대와의 연결은 2월 초순에 이루어졌다. 이철이 경기고 1년 선배인 서강대생 박석률(朴錫律, 경제학과 66)을 만났다. 박석률은 1973년 11월 서강대 유신 규탄 단식투쟁을 이끌다가 강제 퇴학을 당한 이력이 있는 서강대 운동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박석률은 서강대 흥사단아카데미 회장인 황민수(黃珉洙, 무역학과 3년)를 이철에게 소개했다.

{{REF_MATERIAL ID:A-651 ALIGN:right SIZE:mini}}

2월 하순에는 서울대생 정문화, 정윤광(鄭允洸, 철학과 66) 그리고 성균관대 김수길(金秀拮, 행정학과 72)이 동국대생 이춘섭과 만나 일제 시위에 관해 협의했다. 3월 초 이철이 홍익대생 백운학(白雲鶴)을 만나 홍익대 동원을 부탁했다. 3월 25일에는 서울대생 김병곤(金秉坤, 경제학과 71)이 경희대 정외과생 이상희(李相熹), 김영수와 만났다.주)004 서울 시내 대학의 참여를 확대하려는 시도가 3월까지 꾸준히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973년 상반기 운동권에 큰 타격을 받은 고려대 운동권과의 연결은 잘 이뤄지지 않았다. 3월 말경(3.23)에서야 이철은 안양로로부터 대전고 동기인 고려대생 강박인(姜博仁, 사회학과 3학년)과 접촉할 수 있었다.주)005

전국 주요 대학 연결과 권역 대표 회의

전국 주요 대학과의 연결은 서울지역 대학 간 연결과 함께 추진됐다. 1973년 12월 말 유인태의 집에서 이철, 서중석, 나병식 등이 회합을 가진 뒤, 안양로에게 충남지역 운동권과의 연결을 부탁했다. 12월 29일 안양로는 대전에서 서울대생이자 이철의 대전고 후배인 강구철(姜求哲, 정치학과 72)과 만나 충남대 상황을 논의했고, 강구철은 충남대생 홍민선(화공과 4학년)과 시위를 준비해 나갔다. 강구철과 홍민선, 권영빈과 학생회 회장 이병조, 부회장 강원석이 시위를 위한 협의를 이어갔다.
경북대 운동권과 서울대 운동권의 교류는 일찍부터 있었다. 1973년 4월 경북대 학생운동의 선배 그룹인 여정남(呂正男, 정치외교학과 62)과 림구호(林久鎬, 물리학과 67)가 서울로 올라가 유인태를 만나 유신체제 수립 이후 끊긴 각 대학 간 연계망의 복원을 논의했다.주)006 여정남이 1973년 12월 하순 서울에서 몇 차례 유인태와 이철을 만난 뒤, 12월 30일 서울에서 경북대 여정남과 이강철(李康哲, 정치외교학과 66)과 유인태, 이철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전국의 대학교와 고등학교가 연합체를 결성하여 시위를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누었다. 1974년 1월 하순 여정남은 이철, 유인태에게 지역별로 긴밀한 상호 연락이 필요함을 언급하고, 서울대 대표와 경북대 대표가 만날 것을 제안했다.주)007 1974년 2월 10일 밤 서울대생 유인태, 김재근, 전홍표(全弘杓, 철학과 72)와 경북대생 이강철, 임규영(林圭映, 사회학과 71), 정화영(鄭華永, 정치외교학과 67), 황철식(黃哲植, 물리학과 71)이 만나 대구 달성군 강창 나루터 숙소에서 시위 준비를 깊게 논의했다. 이들은 고립적, 산발적 투쟁을 극복하고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위를 벌이자고 의견을 모았다. 서울·중부 지역은 서울대가, 영남 지역은 경북대가, 호남지역은 전남대가 각각 맡기로 확정하고, 3개 대학 연락 담당자가 대전에서 정기적으로 회합하여 전체적인 조정을 하기로 정했다. 또한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이 정보기관에 노출되어 있기에 되도록 시위를 늦추지 말 것과 전국적 단일 명칭은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받을 빌미가 있으니 쓰지 않고 대학마다 자체 명칭을 쓰기로 합의했다.주)008 2월 하순에 전국적인 대학 간 연결이 완료되고, 시위를 위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주)009

경상권 대학 연결은 경북대가 추진했다. 사진은 경북대의 1971년 4월 교련반대시위(경북대학교)

경상권을 책임진 경북대는 부산대와 연결을 추진했다. 경북대생 정화영이 2월 말 부산대생 김재규(金在圭, 무역학과 68)와 만나고, 이후 경북대생 이강철과 임규영도 부산대 학생들과 만나 긴밀히 연대하기로 했다. 3월 3일 부산에서 정화영과 김재규가 만나, 경북대가 준비하고 있는 유신헌법 철폐 시위에 맞추어 부산대도 시위를 벌일 것을 논의했다. 전남대를 중심으로 한 호남권 대학들과의 연결은 1973년 12월 24일 서울대생 나병식과 황인성(黄寅成)이 전남대생 김정길(金貞吉, 경영학과 71)과 만나면서 시작됐다. 권역별 연결은 이중, 삼중의 협력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서울에서는 광주일고 출신으로 광주에 지연이 있는 나병식이 조직 연결에 힘을 쏟았고,주)010 광주에서는 전남대 출신으로 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박석무(朴錫武)와 광주 출신이자 서울대 졸업생인 조학송(曺學松, 문리대 66)이 연결을 지원했다. 1974년 1월 중순에는 이철과 나병식이 광주에서 전남대생 고재덕(법대 4학년)을 만났고, 1월 말에는 광주가톨릭센터에서 서울대생 이철, 나병식과 전남대생 김정길, 이강(李鋼, 법대 69)이 회합했다. 2월 28일 이철은 지방대학 연결을 책임진 황인성과 함께 광주로 내려가 이강, 김정길로부터 윤한봉(尹漢琫, 축산과 71)을 소개받았다. 1974년 3월 2일 광주에서 윤한봉은 호남권을 맡아달라는 이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곧바로 이철과 전주로 이동하여 전북대생 김선중을 만났다.
윤한봉은 3월 5일과 9일, 서울대와 경북대 권역 대표들과 모임을 한 뒤 전라남북도 책임을 맡기로 확정하고 후배 김상윤(金相允)에게 광주지역 대학들과 전남대학교에 관한 책임을 맡겼다. 김상윤은 후배 고아석(高雅錫)과 그를 통해 알게 된 전홍준(全洪夋), 고재득과 시위 준비를 함께했다. 고아석은 1973년 서울 문리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광주지역 향토 사단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김상윤은 보안을 위해 윤한봉과 시위 준비 상황을 공유하지 않았고, 수사당국은 광주지역의 민청학련 전체 조직 윤곽을 전남대생들이 시위를 벌이기 직전인 4월 8일까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주)011 학생운동이 활발한 전남대는 농대, 상대, 문리대, 공대로 나누어 시위 준비를 추진할 수 있었으나, 조선대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조선대 의대생 전홍준이 나섰다. 그는 이미 장기표(張琪杓), 조영래(趙英來)와 연결되어 서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주)012 강원대와도 연결됐다. 2월 3일 유인태는 춘천에 연고가 있는 정성헌(鄭聖憲, 고려대 정외과 64), 윤무한(尹武漢, 고려대 사학과 65)을 만나 강원대 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했고, 2월 6일에 춘천에서 유인태, 정문화, 전홍표가 정성헌과 강원대생 정재돈(鄭裁墩, 국어교육과 73)과 만나, 전국적인 학생 시위에 강원대생을 참여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주)013
권역 대표 회의는 대구 강창모임에서 대전에서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기로 정한 뒤, 첫 모임을 3월 5일 가졌다. 3월 5일 대전역 부근에서 서울대 대표 황인성(독문학과 71), 경북대 대표 임규영, 전남대 대표 윤한봉이 만났다. 이들은 시위 준비 상황을 공유한 뒤, 다음 모임부터는 비상시를 대비해 한 사람을 추가 대동하기로 했다. 이후 4~5일 간격으로 여섯 차례 모였다. 3월 9일 충북 속리산 법주사 앞에서 서울대 황인성과 전홍표, 경북대 임규영, 전남대 윤한봉과 김상윤이 모여 시위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강조하기로 정했다.주)014 권역 대표의 모임은 거사 직전인 3월 29일 부산 회합까지 이어졌다.

재야 민주인사들의 참여와 지원

학생들은 전국적인 시위를 준비하며 재야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과 여러 인사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며 민청학련 투쟁의 실질적인 한 축을 맡았다. 학생들은 전국적인 시위를 구상하던 1973년 11월부터 재야 민주인사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11월 중순경 이철은 서울대 선배이자 저항 시인으로 유명한 김지하(본명 김영일)에게 투쟁 구상을 말하며 10만 원의 지원을 요청했다. 김지하는 기독교 학생회를 활용하여 전국적 시위를 준비하고 자금도 교회를 통해 지원받으라고 조언했다. 12월 초 서중석도 김지하를 찾아 전국적인 시위 준비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이후 장일순(張壹淳)과도 만남을 이어가며 원주 지역 민주인사(원주그룹)들의 참여가 이뤄졌다.주)015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김지하(오른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중석은 서울대 출신의 이현배(李賢培), 조영래, 손학규(孫鶴圭), 고려대 출신의 윤무한 등과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들 또한 사회 저명인사들과 폭넓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영래의 경우 김지하, 지학순(池學淳) 원주그룹과 연결되어 있었고, 기독학생운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서경석(徐京錫)과도 깊게 교류하고 있었다. 서중석은 중앙일보 논설위원 유근일(柳根一), 상록학원 강사 이현배, 변호사 조영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간사 서경석(徐京錫), 원주그룹, 장준하(張俊河)와 백기완(白基玩), 그리고 김윤수(金潤洙) 등 문인그룹 등과 폭넓게 접촉하며 거사에 관한 지원과 연합전선을 함께 만들어 나갔다.주)016 이현배는 1964년 김중태(金重泰), 현승일(玄勝一) 등과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이끌었고, 1971년에 졸업한 뒤 서울대 대학원 사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이현배는 1973년 8월 하순부터 전 동아방송 기자 이창홍(李昌弘), 백범사상연구소장 백기완, 소설가 남정현(南廷賢), 전 신민당 정책연구원 이수응, 통일촉진회측 인사 등과 만나며 정계, 언론계, 종교계, 학계 등 각 분야 인사를 참여시키고자 노력했다.주)017

연세대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돼 구속됐다 풀려난 김찬국 신학대학장(왼쪽 사진)과 김동길 교수(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연세대 김동길(金東吉), 김찬국(金燦國) 교수도 유신헌법 철폐를 추진하는 학생들을 적극 지지했다. 1월 2일 연세대생 김영준, 김학민은 김찬국 교수를 방문한 자리에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에 동참했다. 또한 김영준, 김학민은 1월 23일에 김동길 교수를 방문하여 긴급조치 1호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고, 김동길 교수는 “1·8 긴급조치가 독재정권을 영구히 하기 위한 최후수단”이라 비판했다.주)018 1974년 정초에 이현배는 박형규 목사에게 전국 시위 계획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사회 원로들의 동참을 요청했다. 박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한 직후인 1월 13일 새해 인사차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박목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대학생들이 독재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대운동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리고, 독재체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사회원로들도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개헌 서명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긴급조치 선포를 강하게 비판했다.주)019

민청학련 활동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던 지학순 주교(왼쪽 사진)와 박형규 목사의 석방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적인 시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절박한 것은 거사 준비를 위한 활동 자금이었다. 활동 자금은 크게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로부터 나왔다.주)020 3월 10일 나병식은 박 목사를 만나 학생들이 산발적인 시위를 극복한 전국적인 시위를 준비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알리고,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박 목사는 3월 14일 윤보선 전 대통령을 방문하여 거사에 필요한 50만 원을 요청하고, 학생들의 거사 전에 원로들이 먼저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되면 효과적일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주)021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자금 확보를 위해 정구영(鄭求瑛), 함석헌(咸錫憲), 김재준(金在俊), 지학순 등과 접촉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마련한 자금은 3월 18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사무실에서 안재웅(安載雄) 목사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를 맡고 있던 정상복(鄭相福)을 통해 나병식에게 전달됐다.주)022 지학순 주교도 120만 원에 달하는 거금을 지원했다. 지학순 주교가 모은 활동 자금은 김지하와 조영래를 통해 나병식과 서중석에게 전달됐다. 이후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지원 문제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연행, 구금, 구속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는 지학순 주교는 지원 사실을 밝히고, 민주헌법을 파괴한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고려대 김용준(金容駿) 교수도 정상복을 통해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요청을 직접 받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이후 김용준은 보안사로부터 일본 교환교수 방문을 위한 출국을 정지당했다.주)023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재판 과정에서 “거사 계획에 동원된 자금은 1000여만 원에 달하며 출처가 밝혀진 것만 해도 500여만 원에 이르고, 이들 중 상당 부분이 공산계열등의 불순 자금”이라고 발표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지학순 주교와 윤보선 전 대통령이 200만 원이 넘는 지원을 했고, 여타 지원과 학생들 스스로 등록금을 모아 마련한 돈까지 합쳐도 400만 원도 채 안 되는 정도였다. 시위를 준비하던 이들은 준비 과정에서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주)024 광주지역 재야 민주인사들도 대학생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김정길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 그룹과 홍남순(洪南淳) 변호사, 박석무(朴錫武), 전홍준, 양성우(梁性佑), 김세원 등이 함께 투쟁을 준비했다.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던 1960년대 학번 전홍준, 박석무 등은 서울의 조영래, 장기표, 이신범과 연결되어 있었다. 재야 세력과 민청학련에 참여한 학생들과의 연결은 박석무가 맡았다.주)025 김정길이 홍남순 변호사와 김세원을 만난 것도 박석무의 집이었다.주)026

1974년 3월, 전국 일제 시위의 준비

1974년 3월 초부터 역할 분담이 세부적으로 이루어지고 명칭 및 투쟁 계획에 대한 일정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3월 7일 전국적인 시위를 처음부터 함께 준비한 서중석, 유인태, 이철, 정문화, 나병식 5명이 유인태의 집에 모였다.주)027 이들은 진행 상황을 전체적으로 점검하고 향후 투쟁 방향과 역할을 조정했다. 이 자리에서 제1선 현장은 이철을 책임자로 하여 김병곤, 정문화, 황인성 등 1970년대 학번이 맡는 것으로 결정됐다. 제1선이 체포될 경우, 제2, 제3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유인태, 나병식, 서중석, 정윤광 등 복학생들이 제2선을 맡기로 했다. 또한 이철이 현장 전체를 책임지고, 정문화가 서울대 단과대학 간의 연결을, 황인성이 지방대학과의 연결을, 그리고 서울 시내 각 대학과의 연락은 김병곤이 맡기로 정했다. 이철, 정문화, 황인성, 김병곤은 3월 14일부터 삼양 극장 뒤편에 방을 하나 얻어 본격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유인물 제작과 배포는 정찬용(鄭燦龍, 대학원 언어학과 1학년, 문리대 70)의 주도하에 권오걸, 문국주(文國周, 사회학과 72), 최권행(崔権幸, 불문과 72), 송운학(宋雲鶴, 심리학과 71) 등이 3월 하순부터 맡아 준비했다.주)028

중앙정보부의 수사 발표를 토대로 구성한 민청학련 조직도(경향신문 1974.4.25.)

한편, 3월 7일 모임에서 시위에서 제기할 의제도 정리했다. 이 자리에서 ‘물가고와 석유 3사의 횡포를 규탄하는 문제’, ‘대일경제 예속화와 종속경제 탈피 문제’, ‘유신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해제 및 구속 학생 석방 문제’ 등이 주요 이슈로 제기됐다. 참석자들은 논의 끝에 세 가지 이슈를 모두 사용하되, 각 대학의 시위 담당자들이 대학 여건에 맞게 선택하기로 했다. 일제 시위 날짜는 각 대학의 사정을 보아가면서 확정하기로 하고, 선언문은 서울에서 작성해서 전국에 배포하기로 정했다. 화염병 사용도 제기됐으나, 참석한 이들 대부분이 반대했다.주)029
3월 9일 권역별 대표 모임에서 향후 시위에 관한 대략적인 계획이 잡혔던 것으로 보인다.주)030 한신대가 3월 10일 학생회장 이창식의 주도하에 첫 시위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날 저녁 모임에서 황인성은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에게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하는 방안 대신 지방에서 먼저 시위를 벌여 전국으로 확산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이에 동의한 이들은 여정남에게 경북대의 선도 투쟁을 제안했다. 여정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경북대 학생들은 3월 21일에 시위를 벌이고 뒤이어 영남대가 시위를 전개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3월 21일 벌어진 경북대 시위는 황철식(黄哲植), 조태수, 김시형 등이 주도했다. 경북대 학생들은 투쟁 주체의 명칭을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로 내건 6개의 문건을 준비했다. 이들은 배포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에서 ‘살인적인 물가로 파탄된 국민 생활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할 것’,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헌법을 제정할 것’, ‘남북대화를 집권 연장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모든 민주단체를 참여시킬 것’ 등을 요구했다. 3월 21일 경북대 시위는 정보기관에 사전 누설되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학생들도 예상보다 적은 200여 명이 참가했다.주)031 경북대 시위 다음 날인 3월 22일에 부산시 구포역 앞에서 서울대 황인성, 전남대 윤한봉, 경북대 이강철이 권역 대표 모임을 했다. 이강철은 경북대 시위가 사전 정보 누설과 유인물 배포에 대한 교수들의 저지와 만류 그리고 학생들의 외면 등으로 실패했다고 설명하고, 3월 말 4월 초에 서울에서 시위를 벌이면 경북대에서 조직을 정비하여 다시 시위를 벌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주)032 같은 날 이강철은 부산대 김재규를 만나 시위 실패를 알리고 부산대에 조속히 거사를 벌일 것을 요청했다.
경북대 시위마저 실패하자, 3월 23일 밤 서울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이들이 삼양동 합숙소에 모였다. 이들은 작년 10.2반유신시위와 같이 서울대 문리대가 나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애초 계획대로 한두 대학이 먼저 나서고 나머지 대학들이 함께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다. 3월 27일 밤, 삼양동 합숙소에서 이철, 정문화, 황인성, 김병곤 4인이 모여 여러 종류의 유인물을 나누어 작성했다. 이철은 전국 대학이 공동으로 사용할 공통 선언문인 “민중·민족·민주 선언”을, 정문화는 국민과 지식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 글”을, 황인성은 시위 현장에서 시위군중이 사용할 “격문”을, 김병곤은 시위 현장에서 채택할 행동 지침을 담은 “결의문”을 각각 맡아 작성하고, 유인물 끝에 투쟁 주체의 명칭으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써넣었다.주)033

{{REF_MATERIAL ID:A-655 ALIGN:right SIZE:small}}

이 자리에서 투쟁 주체의 이름으로 ‘반파쇼민주학생연맹’, ‘반독재전국민주학생연맹’ 등도 제안되었으나, 참석자들은 반대를 표방하는 명칭보다 지향과 정체성이 분명한 명칭이 좋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특히 명칭에 ‘학생’ 대신 ‘청년’을 쓴 것은 시위를 대학생에게 국한하지 않고, 사회로 진출한 선배 학생 운동가, 교회 청년을 포괄하고 나아가 전 계층을 포괄한 투쟁을 만들려는 의도였다.주)034 이들은 선언문에서 부패한 권력과 소수 특권층에 의한 정치와 경제의 파탄으로 민중이 크게 고통받고 있고, 남북대화가 영구집권의 장식물로 쓰이며 폭력정치와 민중 수탈체제가 공고화되는 상황에서 통일의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의문에는 학생들이 학생·민중·민족의 의사를 대변하며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민중적·민족적·민주적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궐기했다고 밝혔다. 또한 민중 그리고 지성인, 언론인, 종교인 등에게 함께 궐기하기를 촉구했다. 이들이 제기한 민중, 민족, 민주의 과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 의제가 되었다.
3월 28일 서울에서 서강대가 처음으로 시위를 벌였다. 서강대를 책임진 황민수는 3월 19일 이철, 김병곤과 만나 논의한 뒤, 1973년에 단식투쟁을 함께한 임성균(任成均, 영문과), 박호용(朴昊用, 무역학과)과 시위를 추진했다.주)035 3월 28일 12시 30분, 서강대 교내에서 영문과 김윤(金潤), 임성균, 사학과 허운홍, 무역학과 박호용(朴昊用)이 유신철폐 주장을 담은 결의문과 선언문을 학생들에게 배포하며, 1시에 유신규탄대회가 개최됨을 알렸다. 규탄대회에 서강대생 300여 명이 동참했고, 10여 명이 구속됐다.

{{REF_MATERIAL ID:A-656 ALIGN:left SIZE:small}}

서강대 시위가 있던 날 밤 전국 시위 준비를 주도해 왔던 이들이 모여 거사 날짜를 4월 3일 수요일로 결정했다. 선봉에 선다는 의사를 밝혀온 연세대가 4월 1일 데모하고, 이틀간의 간격을 두고 동원을 준비한 뒤 4월 3일에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확정했다.주)036 그러나 공안당국이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준비를 인지하고 핵심 인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회장 곽성문(郭成文)과 간부 일부가 중앙정보부에 집단 자수하면서 그간 진행 상황과 주요 활동가 명단이 모두 넘어갔다. 3월 27일에 이화여대생 박혜숙(朴惠淑)이 검거되고 28일에 서울대생 윤혜영, 29일에 서울대생 서중석,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서창석(徐昌錫, 회장), 이직형(李溭炯), 차선각(車善角) 등이 검거됐다. 30일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최민화(崔敏和), 나상기(羅相基), 구창완(具昌完), 이재웅(李在雄)과 서울대생 최병두(崔炳斗)가 잡히고, 31일에 서울대생 이종구(李鍾久), 연세대생 김영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안재웅 등이 연행됐다. 당국은 이철, 정문화, 정윤광, 유인태, 황인성, 안양로, 강구철 등 주요 인물 수십 명에 대한 체포도 시도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3월 29일 전체 진행을 총괄 해온 이철과 서울 시내 대학 연락 담당 김병곤, 성균관대 대표 김수길, 연세대 대표 송무호, 이화여대 대표 오성숙, 고려대 대표 강박인 등 6명이 경기도 양주군 사릉에 모였다. 이철의 사회로 각 대학의 시위 준비 상황을 교환한 뒤, 시위 날짜, 가두 진출 방법, 공동선언문 명칭과 유인물 사용에 대해 논의하고, 선언문의 주체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으로 정한 이유를 공유했다.주)037

{{REF_MATERIAL ID:R-562 ALIGN:right SIZE:small}}

서울 주요 대학 대표 모임이 열릴 때, 부산에서도 권역 대표 모임이 열렸다. 경북대 이강철, 황철식이, 전남대 김상윤이 참여하고, 서울대 황인성이 올 예정이었으나 참여하지 못했다.주)038 이 모임에서 4월 3일 서울 시내 대학이 일제히 시위하기로 한 것과 시위 주체 명칭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으로 정했음이 전달됐다. 단체 명칭을 다는 것에 관해 사전에 상의가 없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이강철이 선언문을 발표하려면 단체명이 있어야 했기에 급하게 명칭을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설명하며 정리됐다.주)039
고등학생을 동참시키기 위한 시도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철의 경기고 후배로 단국대에 재학 중인 구충서(具充書)가 고등학생의 참여 사안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3월 5일 이후 구충서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서울 시내 고등학생들과 만나며 고등학교 조직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경기고 3학년 이선복과 이호근, 경복고 졸업생 김의권과 3학년 김동식, 용산고 학생회장 강대흥 등의 동참을 끌어냈고, 보성고, 대광고 학생과도 연결됐다. 3월 29일 각 학교 대표 모임에 경기고 이선복과 이호근, 경복고 김동식, 보성고 이기종, 용산고 강대홍이 참석했다. 4월 1일 밤에 이철이 내수동 중앙제과에서 고등학생 대표들과 만났다. 이 자리에 경동고 김형래도 참석했다.주)040 이철은 고등학교 대표들에게 4월 3일 전국적으로 4·19와 같은 대규모 학생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알리고 고등학생도 4·19 때와 같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은 자신들이 제작한 유인물 3종류를 나누어 주었다. 다음날 구충서가 학교당 200장씩 유인물을 배포했다.

4월 3일 일제 시위의 실패와 당국의 탄압

4월 1일 연세대가 앞장서 시위를 벌였으나 송무호가 채플 시간 구호를 외치고 체포되면서 끝났다. 일제 시위를 벌이기로 한 4월 3일 아침 일찍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주도하여 서울 시내 고등학교(경기고, 중동고, 휘문고, 경복고, 동성고, 보성고, 대광고, 신일고) 앞에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을 배포했다. 같은 날 연세대생 홍성엽(洪性燁, 사학과 73)과 조형식(趙亨植, 사학과 74)이 개헌 청원을 막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을 배포했다. 4월 3일 배포된 “결의문”은 2시 시청 광장과 청계5가 네거리를 집결지로 공지했다. 하지만 그 시간 시청 광장은 수천 명의 형사, 기동대, 향토예비군과 무장 차량, 장갑차로 가득 찼다.주)041 이날 서울대, 성균관대, 서울여대, 이화여대, 동국대, 고려대, 감리교신학대학, 명지대 등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시도됐으나, 어느 대학도 집결지를 향한 가두 진출은 하지 못했다. 이화여대의 경우 시위를 주동한 학생들이 채플 시간 직후 대강당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려 했으나 즉시 연행됐다. 동국대에서도 여익구(呂益九), 이춘섭, 반재만 등이 유인물을 배포했으나, 애초 계획한 교외 진출은 실패했다.주)042 성균관대생 김수길, 박영석(朴永錫, 정치외교학과 72), 신형철(申炯澈, 법대 72)은 김병곤으로부터 받은 민청학련 이름으로 작성된 선언문을 토대로 ‘성균관대학교 반독재 투쟁위원회’ 명의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독재타도’를 적은 머리띠를 제작했다. 박영석 등은 4월 3일 선언문을 낭독하고 준비한 선언문을 배포했다.주)043 이후 성균관대생 400여 명은 교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면서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서울대는 4월 3일 10시 30분 문리대에서 이해찬의 주도로 정해일, 박용훈(朴容勳), 정진태(鄭鎭兌) 등이 강의실을 돌면서 시위 참석을 호소했으나 학생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해찬은 “10월 유신 철폐하라! 독재정권 물러나라!”라고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에게 선언문을 뿌렸다. 각 대학에서 “삼민선언”, “민중의 소리”, “국민에게 드리는 글” 등이 배포됐다. 서울대 이근성(李根成, 동양사학과 70), 윤혜영(동양사학과 71), 정진성, 최정복 등은 문건 배포를 책임졌고, 이들은 당일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청계천과 서울역 일대에 유인물을 배포했다. 상대에서는 장원영(張元榮, 경제학과 72), 이구락(李邱落, 경제학과 72), 임상택(林尙澤, 무역학과 71)이 긴급학생총회 명의로 학생 300여 명을 모아 ‘반독재구국성토대회’를 개최하고 가두 진출을 시도했고,주)044 의대생 150여 명도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주)045

긴급조치 4호 선포 보도(경향신문 1974.4.4.)

경북대 학생들이 반독재 민주구국 선언서 5000매를 배포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해산됐다.주)046 전남대 학생들은 4월 3일이 아닌 9일에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 김상윤, 박형선(朴炯璇), 문덕희(文德熙) 등이 모여, 전국 조직의 하부 조직으로 ‘자유수호 구국 비상 광주학생총연맹’을 결성하기로 하고 시위 날짜도 3월 28일로 정했으나 시위는 연기됐다. 이후 4월 2일로 예정한 시위도 준비 부족으로 미뤄졌다.주)047 시위를 준비하던 학생들은 정부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자수 기간을 8일까지로 제시하자, 자수 기간이 끝나는 바로 다음 날에 기습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4월 9일 드디어 전남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선언문에는 긴급조치 4호를 독재정권의 최후 발악이기에 전면 부정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4월 3일 당일 밤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을 ‘인민혁명’을 추진하는 조직으로 규정한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지기도 전에 이미 사건의 성격이 정해졌다. 긴급조치 4호에 따르면 직접, 간접으로 민청학련과 관련된 기구나 사람들은 모두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의 대상이자,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의 대상이었다. 정부는 자수 기한을 8일까지로 공표하며 학생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이철, 유인태, 강구철 등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위축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문을 곧바로 반박하는 선언문을 제작, 배포했다. 서울대 정윤광, 나병식, 정문화, 이근성, 황인성 등이 모여 반박 선언문을 작성하고, 유인물 살포팀을 구성했다. 정찬용, 권오걸, 강구철, 최권행이 신촌과 명동에 반박문을 배포했다.주)048

민청학련 수배 전단(민청학련동지회)

수사 당국은 처음에 민청학련의 배후로 유근일, 조영래, 이현배, 김효순, 김지하 등 과거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지목하고, 전국 조직을 가진 한국기독학생회연맹이 핵심 조직이라고 판단하여 연맹 회장 서창석과 여러 회원을(김형기(金亨基), 최민화, 윤관덕(尹觀德), 김경남(金景南), 구창완(具昌完), 이원희(李元熙), 정명기(鄭明基), 장영달(張永達), 이재웅(李在雄), 신대균(申大均), 권진관(權鎭琯) 등) 대거 구속했다. 조사 과정에서 이들 대부분은 민청학련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비상군법회의는 이들에게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긴밀히 협의하며 전국적인 폭력데모를 준비했다는 사유를 만들어 징역 15년, 10년에 달하는 중형을 선고했다. 중앙정보부는 이철과 유인태가 12월 말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 하야카와 요시하루(早川嘉春)와 인터뷰한 사실을 확인하자 일본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했고, 뒤이어 4월 17일 체포된 여정남을 조사하면서 혁신계 인사들 이름이 나오자 완전히 방향을 바꿔 인민혁명당(인혁당)을 배후 조종 세력으로 만들었다. 중앙정보부는 이철과 유인태로부터 여정남과 인혁당으로부터 조종받았다는 진술을 끌어내고자 했으나, 이들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실제 전국 일제 시위는 서울대가 먼저 제안하기는 했어도 대학들의 관계는 지휘하고 지휘받는 상하관계는 아니었고, 여정남은 전국적인 상황을 잘 아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주)049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申稙秀)는 기자회견을 열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은 공산계 불순단체인 인혁당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혁신계 등으로부터 사주를 받으며 노농정부 수립을 목표로 국가변란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주)050 공안당국은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국가변란 사건으로 조작했다.

결과/영향

긴급조치 제4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로부터 수사를 받은 인원은 모두 1024명이고, 이 중 자진 신고자가 266명, 검거자가 732명이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1024명 중 745명을 훈방하고 2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했고, 군검찰부는 180명을 기소했다. 대대적인 용공 조작을 위해 주동자로 분류된 이들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등 인권을 말살하는 수사를 벌인 뒤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 위반 외에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 선동,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죄명을 씌웠다. 민청학련 구속자들은 재판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며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6월에 시작된 재판은 경고, 휴정과 퇴정 명령이 반복되며 10월까지 이어졌다. 민청학련사건 구속자들에 관한 변호는 주로 강신옥(姜信玉), 홍성우(洪性宇), 황인철(黃仁喆)이 맡았다. 결심 공판일 홍성우와 함께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은 재판장에서 ’애국 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아 사형,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것은 곧 사법살인이라고 비판했다. 검찰은 강신옥을 법정 모독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법정 구속했다. 변호사의 법정 변론을 문제 삼아 법정 구속한 것은 사법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974년 9월 7일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 공판(경향신문 포토뱅크)

비상군법회의 재판정은 7월 13일, 1심 재판에서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천문학적 형량을 선고했다. 배후 인물로 지목된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에게도 15년 형을 선고했다. 민청학련 관련자 탄압 사실은 외신을 타고 일본, 미국 등지에 보도되고 해외 여론을 움직였다. 민청학련사건의 진상 전파에 외국 선교사들이 만든 “월요모임”이 큰 역할을 했다.주)051
민청학련 관련자 2심 재판이 9월 7일 끝나고, 2학기 개강이 시작되며 대학생들은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과 집회, 농성 등이 확대됐다. 9월 17일 고려대 총학생회가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제작했다가 사전에 압수당했고, 9월 23일에는 이화여대생 4000여 명이 모여 구속자 석방, 불법 체포·구속·고문 금지를 결의했다. 서울대, 홍대, 한신대 학생들도 서명운동, 모금운동을 시도했다. 10월부터는 서명운동과 함께 집회, 시위, 농성이 전개되었고, 투쟁이 전국 대학으로 확대됐다. 경북대의 경우 10월 4일 단과대 학생회장단이 ‘구속학생 사면 공개탄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고, 총학생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이 10월 15일 서울까지 올라와 석방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10월 16일 경북대에서는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주)052 민청학련 관련 구속자 석방 요구는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시위로 바뀌었다. 하루에도 5~6개 대학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10월 말부터는 고등학생들이 참가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는 10월 20일 광주일고 학생 500여 명이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11월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19일 광주 시내 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11월 23일 경기고 40여 명이 벌였고, 동성고 1,500여 명이 가두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제지로 학교로 돌아와 농성을 벌였다.주)053 민청학련 투쟁은 종교계, 언론계, 문학계에서도 반유신 민주화와 인권 수호를 위한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민청학련사건 직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만들었고,주)054 가톨릭은 9월 2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10월 24일 언론인들은 독재정권에 언론의 자유가 말살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학생, 종교인 등의 정당한 의사표시가 보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11월 문인 101명도 긴급조치로 구속된 지식인, 종교인, 학생의 즉각 석방과 헌법개정을 요구하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했다. 재야인사들도 11월 27일 구속된 민주인사 석방, 유신헌법 폐기와 민주주의 체제의 회복을 강력히 요구하며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했다.
1975년 2월 12일 박정희 정권은 1974년 하반기 고조된 유신체제 철폐 투쟁을 유신헌법 신임 국민투표 시행이라는 기만적인 방식으로 대응한 뒤, 2월 15일, 17일에 민청학련사건 구속자 대부분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주)055 이날 석방된 김지하, 김동길, 박형규, 백기완, 김정길, 나병식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민청학련사건이 온갖 고문을 통해 조작된 사건임을 밝혔다.주)056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 실형을 받은 이들은 2009년 9월 이후 진행된 민청학련사건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주)001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학련: 유신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를 외치다》, 메디치미디어, 2018, 157쪽. 이하 《민청학련》으로 약함. 
주)002
《민청학련》, 216~217쪽;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비상보통군법회의 판결문집》,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1994, 224~225쪽, 이하 《판결문집》으로 약함. 
주)003
《민청학련》, 219쪽; 《판결문집》, 1273쪽. 
주)004
《판결문집》, 278, 812, 336쪽. 
주)005
《판결문집》, 328쪽; 전국적인 시위를 준비하던 이들은 고려대 학생운동권을 참여시키고자 일찍부터 다각도록 접촉을 시도했다. 1973년 11월 서울대생 이철과 유인태, 경북대생 여정남이 고려대생 이상수(법학 67)와 만나 논의하고(《민청학련》, 214~215쪽), 서중석도 고려대 출신 윤무한을 통해 이상수와 접촉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사료관, 《(유신 전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 구술채록) 12. 구술 녹취문 서중석》, 2021, 54쪽. 하지만 고려대는 전반기 민우지사건과 검은10월단사건 탄압으로 학생운동의 동력이 상실된 상태였고, 이상수도 개인 사정을 동참하지 않았다. 
주)006
여정남기념사업회, 《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5~1979》, 삼천리, 2017, 226~227쪽. 
주)007
《판결문집》, 238, 253쪽. 
주)008
여정남기념사업회, 앞의 책, 247쪽. 
주)009
유인태, 「내가 겪은 민청학련사건」, 《1974년 4월 : 실록·민청학련》 2, 학민사, 2004, 31쪽. 
주)010
이재호, 《나병식 평전- 걷고 또 걸었다 풀빛으로》, 풀빛, 2023, 153쪽. 
주)011
김상철 엮음, 《1974 전남대 민청학련 실록》, 미디어민, 2019, 26~27쪽. 
주)012
김상철 엮음, 앞의 책, 78쪽 
주)013
《판결문집》, 258, 260, 1164, 1236쪽. 
주)014
《판결문집》, 210, 212, 1242쪽. 
주)015
《판결문집》, 223, 227쪽. 
주)016
이철, 「내가 겪은 사건: ‘민청학련사건에서 사형수가 되기까지」, 《역사비평》 16, 1991, 248~250쪽. 
주)017
《판결문집》 193쪽. 판결문에는 이현배가 ‘10인 협의회’란 기구를 구성하고자 시도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현배는 이후 구술에서 이는 수사 당국이 철저히 조작한 것임을 밝혔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사료관, 《(유신 전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 구술채록) 12. 구술 녹취문 이현배》, 2021, 72쪽). 
주)018
《판결문집》, 750~752쪽. 
주)019
《민청학련》, 261~263쪽. 
주)020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부른 민주주의 만세」,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 2, 범우사, 2006, 375~378쪽. 
주)021
《판결문집》, 740~742쪽. 
주)022
《판결문집》, 485, 742~743쪽. 
주)023
정상복, 「고문으로 조작된 KSCF 운동」, 《1974년 4월: 실록 민청학련》 1,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학민사, 2003, 204쪽. 
주)024
김지하는 구속된 후배들에게 더 많은 사회지도자가 연계되어야 용공 조작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서 사회 인사들과의 접촉 사실을 있는 대로 모두 진술하라고 조언했다(《민청학련》, 464쪽). 수사 당국은 시위 학생들을 배후 조종했다고 발표한 인혁당 인사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일체 받은 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 
주)025
김상철 엮음, 앞의 책, 77~79쪽. 
주)026
《민청학련》, 291쪽. 
주)027
《민청학련》, 297쪽; 《판결문집》, 289쪽; 판결문에 따르면 이 자리에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생으로 활빈교회 청계천 지역센타 책임자인 제정구(정치학과 66)가 함께 했다(《판결문집》, 976~977쪽). 
주)028
《민청학련》, 298~300쪽; 《판결문집》, 209쪽. 
주)029
이철, 앞의 글, 252쪽. 
주)030
판결문에 따르면 이미 3월 9일 속리산에 열린 권역 대표 모임에서 각 대학 현황을 검토하고 대략적인 투쟁 계획을 수립했다. 즉, 대표들은 3월 9일 모임에서 3월 11일경 한국신학대학(한신대)에서 시위가 예정되어 있으니, 그 뒤를 이어 경북대가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시위를 벌이면, 이를 이어받아 서강대가 궐기하고, 4월 초에 서울대와 전남대가 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이다(《판결문집》, 1242쪽). 다만 판결문의 이 서술은 공안당국이 심문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짜 맞추어 작성했을 여지도 있다. 
주)031
《판결문집》, 320쪽; 《민청학련》, 307쪽; 시위와 관계된 황철식, 이광하, 장성백, 강기훈, 윤규한, 김진규 등이 이후 비상군법회의에서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판결문집》, 1176쪽). 
주)032
《판결문집》, 218쪽. 
주)033
이들은 결의문에서 부패 특권족벌의 치부를 위한 경제정책 시정과 부정부패 특권의 원흉 처단, 서민의 세금 대폭 감면과 근로대중 최저생활보장,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운동 자유 보장, 애국인사 즉각 석방과 유신체제 폐기·진정한 민주주의체제 확립, 정보 폭압 정치의 원천인 중앙정보부 즉각 해체, 반민족적 대외의존경제 청산과 자립경제 확립 등을 투쟁의 이슈로 내걸었다. 
주)034
《판결문집》, 345; 이철, 앞의 글, 253쪽; 정윤광, 《저항의 삶: 내가 살아온 역사》, 백산서당, 2005, 30쪽. 
주)035
《판결문집》, 318; 《민청학련》, 331쪽. 
주)036
3월 28일에 아닌 29일 모임에서 연세대가 4월 1일 월요일에 먼저 시위를 벌이고, 다른 대학들은 4월 3일 일제히 시위를 벌이기로 정했다는 언급도 있다(《판결문집》, 350쪽). 
주)037
《민청학련》, 346, 349쪽. 
주)038
서울대 황인성이 참석했다는 언급도 있다(《민청학련》, 350쪽). 
주)039
김상철 엮음, 앞의 책, 30쪽. 
주)040
《민청학련》, 352쪽; 《판결문집》, 362쪽. 
주)041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 속의 횃불: 7,80년대 민주화운동의 증언》 1,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1996, 28쪽. 
주)042
《판결문집》, 1211~1212쪽. 
주)043
《판결문집》, 807~808쪽. 
주)044
《판결문집》, 1097~1098쪽. 참여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서울대 상대생 1백여 명이 성토대회를 열었다는 언급도 있다. 
주)045
다음 날 4월 4일에 서울대 공대생 이종원, 양태열, 백경진이 학생들을 빨갱이로 모는 처사를 국민에게 사죄하고 구속 학생을 즉시 석방할 것, 긴급조치 1호, 4호를 즉시 철회할 것 등을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열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판결문집》, 1071~1072쪽). 
주)046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262쪽. 
주)047
《판결문집》, 398~399쪽; 《민청학련》, 412쪽. 
주)048
유인태, 앞의 글, 321쪽. 
주)049
이철, 앞의 글, 259쪽; 《민청학련》, 457~458쪽. 
주)050
「신정보부장, 폭력데모로 노농정권 수립기도」, 《동아일보》 1974.4.25. 
주)051
《민청학련》, 473쪽; 짐 스텐츨 역, 《시대를 지킨 양심: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나선 월요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참조. 
주)052
여정남기념사업회, 앞의 책, 271쪽. 
주)05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9, 142~150쪽. 
주)054
김창희 엮음, 《민청학련 50주년에 다시 듣는 세상을 바꾼 목소리들》, 한울, 2024, 36쪽. 
주)055
정부는 학생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현배, 여정남, 유인태, 김효순, 이강철 6명은 석방에서 제외했다. 당시 이현배는 대학원생이었으나 문교부 장관은 학생이 아니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렸다. 이강철이 1982년 8월 마지막으로 석방되어 민청학련 관련자 중 최장기 복역수가 됐다. 그는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민청학련》, 610~611쪽). 
주)056
《동아일보》, 1975.2.17. 김지하는 이후 신문 지상에 옥중수기를 발표해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재차 폭로했다(《동아일보》, 1975.2.25.-2.27). 이로 인해 김지하는 3월에 재수감 됐다. 
멀티미디어
  • 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가 수립된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벌어진 10.2반유신시위(신동호 제공)
  • 긴급조치 1, 2호 선포 보도(경향신문 1974.1.9.)
  • 이화여대 1973년 11월 28일 가두시위(이대학보 1973.11.30.)
  • 경상권 대학 연결은 경북대가 추진했다. 사진은 경북대의 1971년 4월 교련반대시위(경북대학교)
  • 중앙정보부의 수사 발표를 토대로 구성한 민청학련 조직도(경향신문 1974.4.25.)
  • 민청학련 전국 시위 책임자 중 한 명인 이철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아직 출감하지 못한 이현배의 어머니와 포옹하고 있다.(민청학련동지회)
  • 긴급조치 4호 선포 보도(경향신문 1974.4.4.)
  • 민청학련 수배 전단(민청학련동지회)
  • 1974년 9월 7일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 공판(경향신문 포토뱅크)
  • 1974년 11월 27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식(김대중평화센터)
  • 연세대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돼 구속됐다 풀려난 김찬국 신학대학장(왼쪽 사진)과 김동길 교수(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전국적 일제 투쟁과 3·3·3원칙을 제안한 서중석의 1975년 2월 17일 석방 장면(전민조 촬영, 서중석 제공)
  • 민청학련 활동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던 지학순 주교(왼쪽 사진)와 박형규 목사의 석방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72년 12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8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식(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다함께 만세를 하며 기뻐하는 보석으로 풀려난 서울대생들
  • 10.2반유신시위를 주동한 나병식(오른쪽 일어선 이)이 석방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구속됐던 서강대 김윤이 1975년 2월 17일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하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김지하(오른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로 작성한 격문(전태일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전국 거사일 전인 1974년 3월 28일 서강대에 배포된 유인물(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사료관, 《(유신 전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 구술채록) 12. 구술 녹취문 서중석》, 2021.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사료관, 《(유신 전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 구술채록) 12. 구술 녹취문 이현배》, 2021.
  •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비상보통군법회의 판결문집》,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1994.
  •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 속의 횃불: 7,80년대 민주화운동의 증언》 1,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1996.
  •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 김상철 엮음, 《1974 전남대 민청학련 실록》, 미디어민, 2019.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부른 민주주의 만세」,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 2, 범우사, 2006.
  •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학련: 유신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를 외치다》, 메디치미디어, 2018.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9.
  • 여정남기념사업회, 《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5~1979》, 삼천리, 2017.
  • 유인태, 「내가 겪은 민청학련사건」,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 2, 범우사, 2006.
  • 이재호, 《나병식 평전- 걷고 또 걸었다 풀빛으로》, 풀빛, 2023.
  • 이철, 「내가 겪은 사건: ‘민청학련사건에서 사형수가 되기까지」, 《역사비평》 16, 1991.
  • 정상복, 「고문으로 조작된 KSCF 운동」, 《1974년 4월: 실록 민청학련》 1,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학민사, 2003.
  • 정윤광, 《저항의 삶: 내가 살아온 역사》, 백산서당, 2005.
  • 짐 스텐츨 역, 《시대를 지킨 양심: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나선 월요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집필정보
집필자
허은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5-09-16 17:16:20
상위사건 + 더보기
긴급조치 1­-4호기 민주화운동
주요사건 + 더보기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긴급조치1호반대투쟁
서울대·연세대의대생반유신시위
민청학련사건
지학순주교양심선언
민청학련변론투쟁
민청학련구속자석방운동
오글목사·시노트신부추방사건
유신헌법찬반국민투표반대운동
연관사건 + 더보기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문인간첩단조작사건
1974년 울산현대조선노동자시위사건
단체 + 더보기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구속자가족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민주회복국민회의
배경사건 + 더보기
긴급조치 1·2호 선포
긴급조치 4호 선포
연계자료 + 더보기
[경향신문]긴급조치 1, 2호 선포 보도(경향신문 1974.1.9.)
[경향신문사]긴급조치 4호 선포 보도(경향신문 1974.4.4.)
[경향신문사]중앙정보부의 수사 발표를 토대로 구성한 민청학련 조직도(경향신문 1...
[경향신문 포토뱅크]1974년 9월 7일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 공판...
[이대학보]이화여대 1973년 11월 28일 가두시위(이대학보 1973.11....
[신동호]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가 수립된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
[전민조 촬영, 서중석 제공( 본 이미지 자료의 무단 사용을 금함, 이용 관련 사업회로 문의)]전국적 일제 투쟁과 3·3·3원칙을 제안한 서중석의 1975년 2월...
[경북대학교]경상권 대학 연결은 경북대가 추진했다. 사진은 경북대의 1971년 ...
[민청학련계승사업회]민청학련 전국 시위 책임자 중 한 명인 이철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
[민청학련계승사업회]민청학련 수배 전단(민청학련동지회)
[김대중평화센터]1974년 11월 27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국민회의 ...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세대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돼 구속됐다 풀려난 김찬국 신학대학장(왼...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청학련 활동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던 지학순 주교(왼쪽 사진...
1972년 12월 27일 서울 ...
10.2반유신시위를 주동한 나병...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구속됐던 ...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로 작...
전국 거사일 전인 1974년 3...
다함께 만세를 하며 기뻐하는 보...
...

#
민청학련사건
  • 설명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피고인 사진(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