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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반대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한일굴욕외교 반대 현수막을 들고 가두행진하는 학생들
유형
사건
분류
학생 운동
유사어/별칭/이칭
6.3항쟁
영어표기
The Movement against the Talks for the Basic Relations Agreement between Japanese and the Republic of Korea
한자표기
韓日會談反對運動
발생일
1964년 3월 9일
종료일
1964년 6월 3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4년 3.24시위를 시작으로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과 5.25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거쳐 6.3시위에 이르기까지,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굴욕적인 대일교섭 자세와 한일회담 추진에 대해 항의하며 대학생들과 야당이 주축이 되어 벌인 시위를 말한다.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은 굴욕외교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6월 3일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시위는 진압되었으나 타결 직전까지 갔던 한일회담을 일시적으로나마 중단시켰다.

배경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를 통해 무력으로 장면(張勉) 정부를 붕괴시키고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다. 그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 회담을 제의했고,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됐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한일회담의 가장 큰 쟁점은 청구권 문제였다. 특히 청구권의 ‘명목’과 ‘액수’가 논란이 됐다. 양국은 지속적인 협상을 통해 액수 차이를 줄여나갔다. 계속된 협상을 통해 양측의 입장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최종적인 담판을 위해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이 회담했다. 1962년 10월 21일과 11월 12일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두 사람은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최종합의를 끌어냈다. 이 메모에는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이라는 총액의 대강이 명시돼 있었다. 반면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 한국은 이 자금을 청구권 자금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은 일관되게 경제협력 자금 및 독립 축하금으로 해석했다. 한일 양국은 1965년 체결된 청구권 관련 협정의 제목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라고 하여, 자금 명목에 대해 양국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 열어놓았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평화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평화선이란 1952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공표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으로, 대한민국과 주변 국가 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해양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일본 정부는 이전부터 청구권과 평화선의 상쇄를 주장하고 있었고, 박정희 정권도 청구권 협상이 성공적으로 해결될 경우 평화선 문제에 대해서는 대폭적인 양보를 할 용의가 있었다. 김-오히라 메모가 작성되기 직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훈령을 보내, 일본 측이 청구권 문제에 성의를 보이면 어업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오히라 외상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동안 평화선을 영해로 알고 있던 한국 국민들은 평화선과 청구권 상쇄를 국토의 일부를 돈을 받고 팔아먹는 행위로 간주했다. 장면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선 문제는 한일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원한 박정희 정권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이로 인해 협상 타결은 계속 유보되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 체결을 서두르면서 ‘매판’의 문제가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끌어와 경제개발에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은 한일회담이 굴욕적으로 타결되면 일본 자본의 경제 침략이 노골화하고 이로인해 한국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일본 자본과 결탁한 한국의 독점자본(재벌)을 매판자본으로 규탄했으며, 자본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매판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 결과 196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매판 담론이 만들어졌다.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신호탄이 됐던 1964년 3월 24일 시위에서 고려대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독점 자본가들이 이 국가를 경제적 식민주의의 질곡과 철쇄에 덮어씌우려 한다”고 규탄했고, 연세대 학생들은 “4.19이념과 민족자립경제의 반역적 망국 재벌을 처단하고 그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여 민족자본화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대 학생들도 “중지하라 매국외교 박멸하라 매판세력”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제국주의 매판자본’의 축출을 요구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3.24에서 6.3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이자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인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상계≫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5.16쿠데타 이후 점차 노골화하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반동화, 나아지지 않는 민생고, 대중들의 주요 비판의 표적이었던 4대의혹사건 등과 같은 신악 또한 주요 배경이었다. 6.3항쟁의 원인과 성격을 고찰할 때 한일회담 반대라는 외적 요인과 함께 내적 요인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만이 비로소 6.3항쟁까지 이어지는 4.19혁명의 영향력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6.3항쟁의 위상과 성격 또한 온전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5.16쿠데타 발발 당시 그에 대해 조건부 지지를 했던 ≪사상계≫는 장준하(張俊河) 사장의 1964년 5월호 권두언(‘유산된 혁명 3년’)을 통해 5.16 불가론을 제기하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규정했다.

“5.16 세 돌을 맞는 오늘 이 나라의 저류에서 이글거리는 위기의 지열은 자유당 지배 말기 증상과 거의 다름이 없는 한계점에 이른 감이 없지 않다. … 3년 전 집권 초기의 군정 주체는 그나마도 국민의 기대를 모을 수 있었고 강요된 기대나마 걸 수 있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군정으로부터의 3년지(年誌)는 강권지배, 4대의혹사건, 정치 및 학원사찰, 번의 선언, 정치자금의 남용, 대일 저자세 외교에다 천정을 오르는 물가고와 단군 이래 최악의 민생고로 점철되는 암흑지세를 결과하고 말았다. 역사상 혁명에 의한 과실의 표본처럼 지금 국민으로부터의 불신이라는 가혹한 심판 앞에 선 것이 5월혁명의 유산된 후예들이라 할 것이다.”주)001

원인

민정 이양을 위한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어렵게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한일회담 조기 타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물론 미국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1964년에 들어와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에 개입했다. 한일회담 타결 실패는 중국을 봉쇄하고 월남전에 발을 들여놓은 미국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협상의 걸림돌인 평화선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의 조기 타결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전개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시작: ‘범국민투위’ 결성 및 ‘3.24시위’

한일회담 중단을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재야인사들이었다. 김병로(金炳魯), 윤보선(尹潽善), 허정(許政), 이인(李仁), 이범석(李範奭), 장택상(張澤相),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박순천(朴順天), 백두진(白斗鎭), 전진한(錢鎭漢), 김법린(金法麟), 정일형(鄭一亨) 등 13인은 1963년 5월 1일 “한일회담을 선거로 새로 출범할 민간정부에 넘기라”는 성명을 냈다. 뒤이어 재야인사들과 야당은 ‘한일문제범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한일회담에 대해 주시해오던 야당과 학생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점차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9일 민정당, 민주당, 자유민주당, 국민의당, 한독당 등 5개 야당 대표들과 언론계, 학계, 종교 단체, 사회 문화 단체 등 야권 인사 200여 명은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위원장 윤보선, 범국민투위)를 결성, “박정희 정권의 대일굴욕외교를 분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구국선언문과 대정부 경고문을 채택하고 반대 투쟁에 총궐기할 것을 다짐한 뒤 전국 유세에 들어갔다. 범국민투위는 경고문을 통해 “조작과 강작(强作)으로 일관된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 신의의 추락과 대내적 실정을 메우기 위해 배출구를 친일 매국외교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이는 정권 연장을 위한 대일 항복이며 매국외교”라고 질타했다.주)002

1964년 3월 15일 부산 경남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첫 성토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범국민투위는 3월 15일 부산에서 개최된 최초의 대국민 반대 유세를 계기로 20일까지 목포, 마산, 광주 등 전국 12개 주요 도시에서 성토대회를 계속 열었다. 범국민투위는 3월 21일 3만 5000~4만 명의 청중이 모인 서울중고교 교정(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 시국강연회를 열고 “정부의 대일외교는 매국외교”라고 규탄,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고 주장했다. 윤보선, 조재천(曺在千), 이상철(李相喆), 조영규(曺泳珪), 함석헌(咸錫憲), 장준하 등 연사들은 ①필리핀만 하더라도 8억 불을 받았는데 36년간 지배받은 한국이, 더구나 숱한 의병과 독립열사들의 피의 대가가 고작 3억 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②평화선을 없애면 일본은 3년 안에 3억 달러어치의 고기를 잡아간다 ③현 정부가 추진하는 대일협상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④한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국가 백년대계를 그르칠 수는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대일외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청구액 27억 불, 전관수역 40해리를 내용으로 하는 야당 측 대안을 받아들일 것을 정부와 여당에 촉구했다. 시국강연회를 마친 뒤 범국민투위는 세종로 네거리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주)003

이에 맞서 공화당은 부산 토성국민학교 교정에서 시국강연회를 열고 “한일국교정상화는 국제정세로 보아 불가피하며 야당의 반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응수했다.

학생들의 반대 시위는 3.24시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2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은 “민족 반역적인 한일회담의 중지”, “동경 체재 매국 정상배(김종필) 즉시 귀국”, “평화선 사수” 등을 내세우며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는 한미행정협정을 촉구했던 1962년 6월의 시위, 1963년 3월의 군정연장반대시위에 이은 민정 이양 후 가장 치열한 최초의 대규모 가두투쟁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4월혁명 기념탑’ 앞에서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 500여 명이 동숭동에서 종로5가 입구까지 진출했다. 서울대 법대 학생 200여 명도 이에 가세하기 위해 가두로 진출했다. 고려대생 1500~2000명은 대광고 학생들과 합류해 가두로 진출했다. 연세대생 2500~3000명도 함석헌, 장준하의 강연을 들은 뒤 노고산동 로터리까지 나왔다. 많은 학생들이 부상하고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들 3개 대학의 시위는 사전에 조율됐고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이전 시위와는 달랐다. 집회와 가두데모 시간도 사전조율 됐는데, 서울대는 1시 반, 고려대는 3시, 연세대는 4시 등 순차적으로 가두로 나오면서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주장과 목표도 선명했고, 시위 방식도 과거보다 다양해졌다. 학생들 사이의 접촉은 1963년 말 겨울방학 때부터 이루어졌으나 구체적인 시위 모의는 3월 개강 이후에 진행되었다. 시위 모의에서 중심 역할을 한 조직은 서울대 문리대 내 학생 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였다.

대규모 학생 시위에 박정희 정권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단 정부는 연행 학생 석방, 평화시위 보장 등 유화책을 통해 학생들을 설득하려 했다. 다음날인 25일 문교부는 문교, 외교, 내무장관과 36개 대학 96명의 학생대표가 참여하는 간담회를 긴급 개최했다. 학생들은 간담회에서 ①한일회담의 무조건 중지와 회담 대표의 즉시 소환 ②박정희 대통령과의 연석회의 마련 ③구속학생들의 즉시 석방 등을 요구하고, 만약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계속 투쟁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간담회는 큰 성과 없이 끝났다.

3.24시위 후 한일회담반대운동이 확산한 가운데 신축 중이던 뉴코리아호텔이 시위대의 표적이 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위는 25일 전국 각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확대(대광고는 24일 시위 전개)돼 4만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의 시위대는 청와대 부근에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2개 중대와 대치했다. 야당도 국회에서 한일회담의 즉시 중지와 구속 학생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지만 자신은 재임 중 부과된 임무를 확고한 신념과 명확한 목표하에 추호도 변동 없이 수행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는 학생들을 자극하여 26일 시위 참가 인원은 전국 11개 도시에서 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경기고 학생 1500여 명은 수송중고교 뒷길에 집결하여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본 외자로 신축 중인 뉴코리아호텔로 몰려갔다. 이들은 애국가를 부른 뒤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더냐?”, “쪽발이는 물러나라”, “영토의 한 치도 줄 수 없다”라는 플래카드를 펴들고 “굴욕적인 한일회담 즉시 중지하고 매판자본 축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간판이나 포스터를 불태워버렸다.주)004 시위는 27일 지방 군소 도시로까지 확산했다. 결국 정부는 27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 소환을 발표했고 김 의장은 다음날 일본에서 귀국했다. 김 의장 소환 이후 학생 시위는 일단 소강상태를 보였다.

학생 시위가 잠잠해진 3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시내 11개 종합대학 대표들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한일회담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요구한 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를 약속했다. 다음날 38개 대학 57명의 학생 대표들에게 김-오히라 메모의 내용이 비공식적으로 공개됐다.

괴소포 배달 사건과 학원사찰 폭로

3.24시위 후 연행되었던 시위 주도 학생들에게 괴소포가 전달됐다. 학생 시위가 잠잠해진 4월 8일 3.24서울대학생시위를 주도한 김중태(金重泰)와 현승일(玄勝一)에게 각각 괴소포가 배달됐다. 4월 9일에는 고려대 박정훈(朴正勳)과 서진영(徐鎭英), 연세대 안성혁(安聖爀)에게 각각 괴소포가 배달됐다. 이들 괴소포의 발신 주소는 모두 부산이었고 발신자는 재일교포로 추정됐다. 소포 속에는 “당신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한다. 계속 박 정권 타도에 힘써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미화(美貨) 100달러가 들어 있었다. 시위 주도 학생들을 북한과 연계시키려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괴소포를 받은 학생들은 이를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규정하고 이를 언론에 폭로했다. 그리고 “매카시즘의 희롱”이라며 비난했다. 비슷한 내용의 소포가 야당 의원에게도 배달되자 야당은 즉각 학원 및 정치인 사찰 문제를 따지기 위해 장관들의 국회 출석을 요구했다. 여당인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미 학원사찰을 금지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오히려 그동안의 학원사찰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정부는 괴소포 사건을 조총련계 간첩의 소행으로 단정하면서도, 4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성명을 통해 중앙정보부의 지방 지부를 없애 조직을 축소 개편할 것을 약속했다. 17일에는 엄민영(嚴敏永) 내무부 장관이 직접 “학원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고 사찰 비슷한 것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정희 정권의 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원사찰 문제로 학생 시위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4월 17일 서울대 학생 200여 명이 학원사찰 중지와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학생들은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억압하지 말라”, “YTP를 비롯한 사이비 학생조직을 자진해서 해체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YTP’는 Young Thought Party(청사회, 靑思會)의 약자로 원래는 4.19 직후 KKP(구국당)라는 비밀결사에서 출발했다가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과 밀착한 극우 청년-학생 프락치 단체였다. 이미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은, 각 대학에 공화당과 연계한 YTP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박정희의 당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1964년 4월 중앙정보부의 학원사찰 문제가 불거지자 YTP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4.19혁명 4주년이었던 19일에는 각 대학에서 기념식과 함께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는 4.19 제5선언문을 통해 “한일회담은 정치, 경제, 문화의 제 영역에 있어서 일본의 모든 침투를 소화할 수 있는 민족적 자립의 토대를 완전 구축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평등한 입장에서 재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005 그리고 기념식 후 2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또 이날 시청 앞에서 기념식을 가진 17개 대학 1000여 명의 학생들도 “조국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일체의 굴욕 외교를 반대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주)006

20일과 21일에도 서울대, 성균관대, 동국대 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됐다. 시위 구호는 “학원사찰 중지”와 “한일회담 반대”로 모아졌다. 22일 정부는 연발하는 학생데모가 국가 기본 질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강경 진압책을 마련했다. 특히 문교부는 서울 시내 대학 총・학장 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 시위를 계속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학칙에 따라 강경한 조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4월 24일 서울 시내 28개 대학 총・학장들이 모여 학생들의 학원 복귀와 정부의 학원 자유 보장을 요구한 후 학생 시위는 일단 중지됐다. 그러나 정보기관을 동원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과 학원사찰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독재 수법이었다. 여기에 같은 시기 논란이 된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관련 부정부패 의혹도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의심과 반감을 키웠다. 1964년 3월 26일 김준연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1억 3000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4월 2일에도 박정희-김종필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2000만 달러를 받아 썼다는 등 13가지 의혹 사항을 제시했다.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을 허위 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 고발했고, 4월 26일과 27일 서울지검은 ‘허위 사실 유포’,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무고’ 등 3개 죄명으로 김 의원을 구속기소하고,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구형했다. 의혹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민주성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갔다. 결국 괴소포 배달 사건, 학원사찰 폭로, 부정부패 의혹 등을 거치면서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성격은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5.20시위’

3.24시위 이후 학원사찰 폭로, 그리고 부정부패 의혹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했다. 5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전면 개각을 단행하고 한일회담에 적극적이었던 정일권(丁一權)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정일권 내각 발족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은 침체에 빠진 한일회담을 5월 하순부터 재개한다는 원칙 아래 일본과 교섭을 준비했다. 그 결과 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어업, 평화선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한일 각료회담을 5월 20일경 열고 6월에 본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으나 한일협정 조기타결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반면 야당은 범국민투위 주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해 박정희 정권의 실정을 비판했다. 5월 9일 서울에서 개최한 시국강연회에는 약 2만 명의 청중이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범국민투위는 대일 굴욕 외교, 환율 인상, 학원사찰, 물가 상승, 국공유지 부정 불하 등을 들어 정부와 여당을 공격했다. 5.16군사쿠데타 3주년을 맞이한 16일도 역시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시국강연회를 열어, 군사쿠데타를 통해 총칼로 합헌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차지한 박정희 정권은 현 상황의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불과 반년 만에 박정희 정권은 퇴진 요구에 직면했다.

4월 말 이후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학생들도 다시 거리에 나섰다.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열렸다. 여기에는 서울대,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한양대 등 각 대학 학생과 시민 4000여 명이 참여했다. 이전까지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집회와 시위가 학교별로 진행된 것과 달리, 민비연 주도의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이날의 집회는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이 함께 참여한 연합 집회였다. 민비연 학생들은 4월 말 이후 각 대학 투쟁위원회 학생들과 접촉하여 강력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처음에는 5.16군사쿠데타 3주년인 5월 16일 집회도 고려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5월 20일로 집회 날짜를 변경했다. 그리고 집회 방식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결정했다.

난동은 이적이다(국가기록원)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 “축(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만장이 펄럭이는 가운데, 건(巾)을 쓰고 죽장(竹杖)을 잡은 네 명의 학생이 민족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관을 메고 입장했다. 학생들은 선언문을 통해 반외세, 반독재, 반매판의 민족 민주 정신과 민족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4.19의 부정으로 5.16을 규정했다. 이날 채택된 결의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일본에의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의 한일 굴욕 외교를 전면 중지하라. ②농민, 노동자, 소시민의 피눈물을 밟고 서서 홀로 살쪄만 가는 매판성 악덕 재벌을 처형하고 몰수하라. ③5.16 이래의 온갖 부정, 부패 사건을 자진 폭로하고 그 원흉을 조사, 처형하라. ④불법 상행위를 자행한 일인(日人) 상사를 즉각 추방하라. ⑤5월 군사정부는 5.16 이래의 부정, 부패, 독선, 무능, 극악의 경제난, 민족 분열, 굴욕적 한일회담 등 역사적 범죄를 자인하고 국민의 심판에 붙이라. ⑥5.16 이래 구속된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라. ⑦민족적 양심의 학생과 국민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피의 투쟁을 계속하려 한다.주)007

무엇보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당선된 박정희 정권을 직접 겨냥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1960년 4.19 이후 고양된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로 호명했고 자주와 자립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19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후보는 민족주의를 민주주의와 결합시킨 ‘민족적 민주주의’를 선전했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형식 자체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부정과 도전을 극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계기로 한일회담반대운동은 민주화운동, 반정부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9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이번 집회가 학생 총의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집회 참석 인원도 당초 예상보다 적은 편이었다. 심지어 일부 학교에서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규탄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는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해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통해 드러난 학생들의 인식 차이는 이후 학생과 박정희 정권 사이의 충돌이 격화하면서 점차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수렴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후 학생들은 관을 앞세우고 교문을 향해 나아가 이화동 삼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던 이날의 시위에서 경찰은 학생 87명, 시민 94명 등 181명을 연행하고 그중 107명을 구속했으며, 13명을 지명수배했다. 또한 경찰은 시위 학생들을 쫓아 서울대 미대 캠퍼스 안으로 난입하여 학생은 물론 교수에게까지 폭행을 가했다. 21일 새벽에는 법원에 무장군인들이 난입했다. 이들은 당직 판사의 집으로 쳐들어가 시위 관련자들에게 영장을 발부하라고 협박했다. 같은 날 YTP 내막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때 조사를 읽었던 학생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린치를 당했다. 22일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폭동으로 규정한 반면,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은 우국충정에 의한 우발적 행동이라고 옹호했다. 26일에는 양찬우 내무부 장관이 민비연을 4.19 직후 학생 통일운동을 주도한 ‘민통련’과 관련을 가진 ‘사회주의 찬동자’로 규정하고, 배후에 혁신계와 야당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강경 진압의 명분 조성을 위한 매카시즘적 공세를 강화했다.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과 무장군인을 동원한 사법부 협박은 비민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22일 고려대 법대 학생들은 군인들의 법원 난입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23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법의 존엄 수호 궐기대회’를 열었다. 야당은 현 난국의 책임이 일부 야당 정치인, 언론인, 학생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그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27일에는 서울대 교수 300여 명이 군의 정치적 중립과 학원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난국 수습 결의문’을 채택했다. 전남대 학생들도 박정희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28일 야당은 대통령에 대한 하야 권고 결의안을 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동안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했지만 비교적 친정부적인 입장에서 온건한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하던 학생들마저 박정희 정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와 집단 단식농성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곧 경찰의 수배를 받아 잠적하거나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각 대학 학생회들이 전면에 나섰다. 전국 30여 개 대학 학생회는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5월 25일과 26일 대학별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는 학생회라는 전체 학생의 공조직을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중심으로 이끌어냈다는 면에서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는 학생회가 운동의 구심점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 온건 노선을 지향하며 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 반민족성이 분명해지고 학생과 정부의 충돌이 격화하자 학생회도 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5월 25일과 26일 학생회들이 힘을 모아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가졌던 것이다.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는 대부분 학교에서 가두시위 없이 학내 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다. 여기서는 굴욕적 한일회담, 박정희 정권의 실정,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학원사찰 등을 규탄했다. 당시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에서 작성한 ‘구국비상결의선언문’ 역시 ①부정부패의 규명과 사죄 ②학원 난입 경찰 처벌 ③법원 난입 군인 처벌 ④구속 학생 석방 ⑤민생고 타개를 위한 독점・매판자본 몰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대회 행동강령에서 “금주 내 우리의 의로운 주창(主唱)이 관철될 획기적 전기가 없을 때는 4.19정신으로 실력투쟁도 불사할 것을 천명한다”고 명시하고 실제로 1주일간 행동을 유보하기로 함으로써 이후 대규모 항쟁의 여지를 열어놓았다.주)008 한마디로 이 1주일 유예는 6.3시위의 예고였다.

5월 29일 34개 대학 학생회장들은 ‘난국타개학생대책회의’를 갖고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의 결의사항을 재확인했다. 30일에는 대표 6명을 정일권 총리에게 보내 30일 밤 12시까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땐 과감한 실력투쟁을 벌이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시위에 법대로 대응할 것임을 천명했다. 학생과 정권의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서울대 문리대의 경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후 민비연 관련 학생들이 수배 혹은 체포되자, 그동안 온건・소극 노선을 견지하던 학생회가 전면에 등장하여 운동을 주도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회장 김덕룡(金德龍))는 민비연과 연합으로 5월 30일 ‘자유쟁취궐기대회’와 ‘최루탄 박살식’을 열어 시위 주도 학생에 대한 징계,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경찰의 학원 침입과 교수 구타, 중앙정보부의 학생 납치, 고문과 비민주적 시위 진압방식 등을 규탄했다.

‘최루탄 박살식’ 후 문리대 학생들은 집단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당시까지 유례를 찾기 힘든 학생들의 집단 단식농성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5월 30일 오후 1시 20여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단식농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동참 학생 수가 계속 늘었다. 특히 각 학교의 교내 방송뿐만 아니라 일간 신문이나 동아방송의 ‘앵무새’ 프로 등 라디오 방송이 단식 학생들의 상황을 수시로 전하면서, 단식농성은 그 자체가 운동의 효과적인 선동 방법이 될 수 있었다.

6.3시위의 전개

‘1주일 유예’ 결정에 따라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가 통고한 최후통첩 시한인 5월 30일 밤 12시가 지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고 학생들은 6월부터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6월 1일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 소속 서울 시내 19개 대학 학생회장 31명은 청와대 앞에서 집단 단식농성을 시도하다 연행됐다. 이들은 연행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8시간 동안 농성을 벌이다 문교부 장관이 요구 이행 약속을 하자 6월 3일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고 해산했다. 지방에서는 전북대와 청주대 학생들이 구속 학생 석방,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군인 깡패 엄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회장들이 6월 3일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으나 학생들은 이미 더 이상의 인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음날인 6월 2일 본격적으로 학생 시위가 재개됐다. 6월 2일 시위를 주도한 학교는 고려대였다. 그동안 온건・소극적인 총학생회와 노선을 달리하며 고려대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정경대, 법대, 상대 등 단과대 학생회는 6월 1일 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음날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전 11시 고려대 학생 2000여 명은 먼저 학내 집회를 했다. 이후 학생들은 경찰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며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격했다.

5월 30일 이후 집단 단식농성을 진행 중인 서울대 학생들도 가두시위에 나섰다. 서울대 문리대 집단 단식농성 참여자는 그 수가 6월 2일까지 2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6월 2일부터는 단식의 열기가 다른 대학으로 확산했다. 이날 서울대 법대 학생 500여 명은 학내에서 “사수하자 학원자유 지양하라 공포정치”, “누구를 위한 정권인가 국민은 배고프다” 등을 외치며 ‘자유투쟁궐기대회’를 가진 후 문리대를 방문하여 단식농성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시청 앞 광장 단식농성을 목표로 가두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전원 연행됐다. 이날 고려대 학생 2000여 명은 구국투쟁궐기대회를 열고 “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가두데모를 전개했는데 경찰에 의해 연행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저녁 서울대의 8개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다음날인 3일 단식을 중지하고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 30여 명은 시위 주도 학생에 대한 징계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사태가 수습되지 않으면 사퇴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학생 지지 결의문을 발표했다. 동국대 학생 500여 명도 교내 집회 후 60여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전남대 학생 500여 명도 성토대회를 열었다. 6월 2일 시위로 전국에서 학생 632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6월 2일 시위에 자극받은 학생들은 다음날인 3일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전면적인 항쟁에 돌입했다. 이미 계엄 선포설이 나돌고 있었으나 3.24학생시위 이래 운동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학생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6월 3일 비가 쏟아지고 있었음에도 서울 시내에서만 약 1만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제각기 교내에서 ‘박정희・김종필 민생고 화형식’, ‘5.16 피고 모의재판’ 등 행사와 성토대회를 연 다음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고려대 학생 2000여 명은 구국궐기대회를 연 뒤 “썩고 무능한 박 정권 타도”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동국대 학생 1000여 명은 도서관 앞에서 성토대회를 열었는데, 피고인 5.16에 대한 재판을 통해 5.16쿠데타 이후 저질러진 온갖 부정부패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판결했다.

거의 모든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자 각 대학 앞 경찰 저지선은 쉽게 뚫렸다. 많은 시민들이 학생들을 격려했고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항의했다. 일부 시민들은 학생 시위에 합세하기도 했다. 시위대는 지위 저지 임무가 경찰에서 수도경비사령부로 넘어간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울 시내 가운데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세종로 일대였다. 세종로 시민회관 앞의 경찰 제1저지선에 걸려 일단 멈춘 학생과 시민은 1만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철조망 1개를 50m가량 끌어내고 투석을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공수부대의 풍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2저지선(경기도청 앞)과 제3저지선(중앙청 정문 앞)을 연달아 돌파했다. 시위대는 제4저지선(조달청 앞)으로 밀려들어 청와대를 포위하고 오후 7시 30분경 경찰과 대치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충남대와 부산대 등 지방 대학에서도 시위가 전개됐다. 그동안 다양했던 시위 구호는 “박정희 하야”로 수렴되었으며, 정권 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점이 6.3시위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한마디로 6.3시위는 1960년 4.19를 방불케 하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최대의 민주 항쟁이었다.

6월 2일 시위 재개 후 정권 차원에서 계엄 선포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6월 2일의 학생 시위가 이전 시위보다 더 ‘극렬’하다고 판단했고, 특히 대통령 하야 주장과 반미 구호에 주목했다. 그리고 6.3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6월 3일 오후 4시 30분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위해 미국과 접촉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조했다. 주한미대사 버거(Samuel D, Berger)와 유엔군사령관 하우즈(Hamilton H. Howze)는 헬기로 청와대를 방문하여 계엄 선포에 따른 병력 이동 문제를 협의했다.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격화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시위 진압에 군을 동원했다. 6.3 계엄선포 보도.(경향신문, 1964.6.4.)

청와대에서 계엄 선포 시기를 모색 중이던 박정희는 6월 3일 오후 5시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 밤 9시 50분에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투입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1500여 군인들은 청와대를 포위한 시위대를 세종로 방면으로 압박하면서 해산 작전에 들어갔고, 자정 무렵 시위대는 완전히 해산했다. 6.3시위로 체포된 학생과 시민이 1200명이 넘었고 그중 91명이 구속되었다. 학생 부상자도 200여 명이 되었다. 계엄 선포 다음날인 4일에도 경희대 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시도하다가 해산당했고,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은 지방 대학에서도 소규모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3.24학생시위 이후 약 2달 반을 지속하던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은 계엄령 선포 이후 물리적 탄압과 처벌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서울 일원의 비상계엄은 7월 29일 해제됐다.

결과/영향

6.3항쟁을 진압, 사태를 수습한 박정희 대통령은 6월 5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6월 6일 공화당은 당무 회의와 의원총회를 통해 계엄 기간 중 여당으로서 추진해 갈 정책을 발표했다. 첫째, 중앙정보부를 전면적으로 해체하고, 둘째 한일회담 대표를 전면 개편하며, 셋째 부정 폭리 취득자에 대해 특별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넷째 ‘파괴행동방지법’을 입법화하는 것 등을 결정해 정부에 건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화당의 발표 내용은 6.3항쟁 이후 민심 수습을 위한 임시방편적 조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6.3항쟁의 선봉에 섰던 학생운동, 교수, 언론 등을 탄압했고, 반공과 국가안보에 대한 임무 수행을 명분으로 중앙정보부를 존속시켰다.

학원에 대한 통제 강화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반대운동으로 구속된 학생 다수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문에 따라 집회・시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가 제약받았으며, 각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시위 관련 학생들에 대한 체포와 처벌이 이어졌다. 먼저 6월 5일 문교부는 서울 시내 각 대학 총・학장들을 소집하여, 사직 당국에 기소된 학생은 퇴학 처분, 기타 시위를 주동했거나 기물 파손 등을 한 학생은 그 정도에 따라 퇴학 또는 무기정학 처분을 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학생 시위에 영향을 줄 만한 언동을 했거나 학생 지도에 비협조적인 교수는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파면 혹은 엄벌에 처할 것을 함께 지시했다. 이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진원지인 대학에서 저항의 싹을 완전히 도려내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7월 30일까지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각 학교에서 징계 처분을 받은 학생은 모두 352명에 이르렀다. 서울 지역 대학생이 80명(퇴학 8명, 무기정학 71명, 유기정학 1명), 지방대학생 125명(퇴학 14명, 무기정학 82명, 유기정학 29명), 고등학생 147명(퇴학 23명, 무기정학 84명, 유기정학 40명)이었다. 그중 224명이 구속되었는데, 많은 학생에게 내란죄가 적용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학생 징계, 그리고 학생 시위에 대한 내란죄 적용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잘 보여줬다. 정권의 극단적 조치에 맞서 학생들은 구속 학생의 석방을 요구했다. 비록 계엄군의 총・칼 앞에서 강력한 운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지만 서명운동이나 탄원의 방법으로 구속 학생 석방운동은 계속됐다. 덕분에 구속 학생 숫자는 9월 10일경 36명 정도까지 줄어들었고, 12월 말까지 전원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속 학생 석방이 박정희 정권의 학원 장악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보다 근본적인 조치를 통해 대학을 확실히 통제하려 했다. 대표적인 것이 각 대학의 ‘학칙’ 개정과 ‘학원보호법’ 제정 시도였다. 먼저 문교부는 6월 19일 학원 내에서 정치 활동을 하거나 할 목적으로 조직이나 선동을 한 자 및 학장의 허가 없이 집단적 행위로 수업을 방해한 자 등에 대하여는 교수회의를 거치지 않고 총장이 직접 퇴학을 명할 수 있도록 각 대학에 ‘학칙’ 개정을 지시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문제 학생을 직접 처벌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음해 한일협정반대운동 때는 개정된 학칙에 의한 학생 처벌이 줄을 이었다. 또한 문교부는 개강을 앞둔 8월 14일 전국대학 총・학장 회의에서 학생 지도, 교권 확립, 학사행정, 교수회 운영 등에 대한 지시 사항을 하달했다. “학생들의 요구로 징계 내용을 수정하지 말 것”, “학생들에게 시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것” 등의 세세한 규제는 대학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7월 29일 비상계엄을 해제하자마자 공화당은 ‘학원보호법’이라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의 명분은 학원사찰을 금지하고 학원 생활과 학생단체 활동의 보장하는 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활동의 금지’ 규정을 통해 교원과 학생의 정치 활동 관여를 실질적으로 금지하는 법이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학생 시위나 집회는 물론 정치적 이슈에 대한 학내 토론도 모두 위법 행위였다.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사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이러한 발상은 곧 여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공화당은 몇몇 독소 조항을 삭제한 수정안을 다시 내놓았고 박정희 대통령도 직접 나서 학원보호법 통과를 희망했다. 하지만 여론의 역풍으로 결국 9월 초 법안 처리를 포기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한 언론에 대한 통제 시도

박정희 정권은 학원과 함께 언론도 통제하려 했다. 국가적 혼란의 원인이 무책임한 언론의 선동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공화당은 7월 30일 학원보호법과 함께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은 학원보호법과는 달리 8월 2일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야당이 계엄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이 법안의 통과를 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법안의 골자는 ‘언론윤리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언론사를 가입시키고 여기서 언론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언론윤리위원회 운영에 정부가 관여할 여지가 있다는 점과, 만약 언론윤리위원회에서 제명될 경우 결국 해당 언론사는 정간 혹은 폐간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법안 통과 이후 언론은 거세게 반발했다. 언론인들은 8월 10일 ‘전국언론인대회’를 열고 언론윤리위원회 철폐 투쟁에 나섰다. 신문・잡지 발행인들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일체의 정부 선전물을 게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자 정부는 공무원의 특정 신문 구독 중지, 은행의 대출 금지, 그 밖에 각종 편의 제공 중단 등 보복 조치를 취했다. 언론 역시 각계 대표자들로 ‘자유언론수호국민대회 발기준비회의’를 구성하고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제신문인협회(IPI)가 이 법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전문을 발송하자 정부는 언론의 자율 규제를 조건으로 9월 9일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을 전면 보류했다.

한일회담의 중단과 1965년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3.24-6.3에 이르는 학생과 시민들의 투쟁은 한일회담이 계엄 선포 이후 무기 연기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타결 직전까지 갔던 한일회담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까지 발동했지만 한일협정 체결에 실패했던 것이다. 아직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대운동의 불씨는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었다. 이는 1965년의 한일협정 조인 반대, 비준 반대, 비준 무효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6.3항쟁의 의의

6.3항쟁으로 상징되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첫째, 5.16쿠데타 및 박정희 정권의 성격과 실체를 드러낸 점이다. 3.24-6.3항쟁은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있던 학생과 시민들이 한일회담을 통해 드러난 정권의 반민족성과 반동성의 노골화에 직면,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민주적 요구를 복원시키고자 전개한 저항이었다. 그것은 “5월 군부쿠데타는 4월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 탄압의 시작이었다”는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의 선언문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주)009 박정희 군부는 6.3항쟁의 진압을 계기로 5.16쿠데타 이후 그들이 공공연히 내세웠던 “4.19민주혁명의 계승”과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부담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게 되었다. 즉 5.16쿠데타는 4.19혁명과의 적대적인 위상을 분명히 드러내게 된 것이다.

둘째, 한국 민족주의가 평화통일과 외세로부터의 자립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박정희 정권은 6.3항쟁을 진압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최소한의 민족적 요구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셋째, 권력 내부의 갈등과 관련해 6.3항쟁은 협상을 주도하며 차기 대권을 노리던 김종필 전 공화당 의장의 배제와 박정희 대통령 친정체제가 강화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문화적 퍼포먼스를 통한 한일회담반대운동의 대중화 및 고양의 계기

한일회담반대운동은 그 과정에서 계속 새로운 운동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장례식, 집단 단식농성, 투쟁가, 화형식, 마당극 등의 운동 문화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의 대중화와 고양에 일조했고, 이후 민주화운동 속에 확산해 뿌리를 내렸다.

첫째, 대학생들의 축제를 통한 현실 풍자와 문화적 퍼포먼스로서 ‘장례식’

5.16쿠데타로 대학생들의 현실 참여는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그리고 한동안 군사정권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현실 참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4월혁명으로 고양된 학생들의 현실 참여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군사정권 하의 여러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축제와 같은 대학 내 문화적 행사를 활성화하여 자신들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리고 일부 학생들은 축제에서 정치적 메시지가 분명한 현실 풍자 프로그램들을 지속적으로 시도함으로써 대학생 일반의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각성을 유도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한 시기에도 이러한 문화적 수단을 통해 학생운동의 역량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몇몇 대학에서 시작된 축제는 1960년대 거의 모든 대학으로 확산했다. 이러한 축제의 확산은 5.16쿠데타 이후 더욱 가속화했다. 1962년부터는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경희대 등에서 대규모 축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축제의 여러 프로그램 중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행사가 바로 연세대의 ‘가장행렬’이었다. 연세대의 가장행렬이 주목되는 이유는 그들이 현실 풍자와 비판을 위해 ‘장례식’이라는 퍼포먼스를 기획했기 때문이다. 1963년 축제 때 행해진 가장행렬에서는 학생들이 ‘장례식’을 거행했다. 관 속에 드러누운 시체는 ‘구악(舊惡)’ 공(公)으로, 상여꾼들은 목소리도 구성지게 ‘구악’ 공의 행적을 주워섬겼다. 그 밖에도 “아버지가 배울 때나 아들이 배울 때나 똑같은 대학교수의 노트”, “79년간 강의실에 쌓인 담배꽁초”, “허벅지까지 오르는 여대생의 스커트” 등이 장례의 대상이었다. 만장들 가운데는 서울대 학생으로서 군 입대 후 자신을 괴롭히고 모욕했던 상사를 살해하고 처형당한 “최영오 일병을 쏜 소총”도 끼어 있었다. 이 행사 역시 정치는 물론 학생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익살과 풍자로 표출한 것이었다.

이처럼 4월혁명 직후 ‘장례식’을 정치적 의사 표시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계몽운동 과정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장례식’이라는 문화적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1960년 7월 6일 결성식을 가진 서울대 국민계몽대는 결성식을 마친 뒤, 과거의 낡고 썩은 정치 세력의 재대(再擡)를 엄계(嚴戒)하는 ‘고 반혁명세력지구(故反革命勢力之柩)’라는 상징적인 유해를 앞세우고 무언의 장례 시가행진을 했다. 이 상징적인 관(棺)에는 “비현실적 선동을 일삼는 혁명세력”, “은둔위장으로 참여하는 무소속세력”, “제1공화국의 아부자의 정치참여”, “舊자유당 핵심분자의 정치참여”, “과도정부의 미봉책” 등의 글발이 적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세대 축제의 가장행렬에서 다시 등장한 ‘장례식’ 퍼포먼스는 4월혁명 당시의 문화적 의례를 한일회담반대운동 당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집단 단식농성

서울대 문리대의 자유쟁취궐기대회의 뒤를 이어 열린 ‘최루탄 박살식’에서는 “회개하라 최루탄아 죽음이 가까우니 생전에 이룩한 죄 능지처참 대죄(大罪)로다”라는 내용의 ‘최루탄 조사’와,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가사를 “탄아 탄아 최루탄아 8군으로 돌아가라 우리 눈에 눈물 나면 박가분(朴哥粉)이 지워질라”로 개사(改詞)한 ‘최루탄가’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 시위 진압 방식을 풍자했다. ‘최루탄 박살식’ 후 문리대 학생들은 “반매판 반외세 반봉건 반전제를 지향하는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지 모른다”고 선언하고 요구 관철 때까지 집단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당시까지 유례를 찾기 힘든 학생들의 집단 단식농성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5월 30일 오후 1시 20여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단식농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동참 학생 수가 계속 늘었다. 특히 각 학교의 교내 방송뿐만 아니라 일간 신문이나 라디오 방송이 단식 학생들의 상황을 수시로 전하면서, 단식농성은 그 자체가 운동의 효과적인 선동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속속 단식농성에 합류했다.

셋째, 소각식과 풍자극

그 자체가 새로운 시도였던 집단 단식농성은 그 과정에서 계속 새로운 운동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단식농성 이틀째인 31일에는 단식 24시간 돌파기념으로 ‘반민주 요소 소각식’이 거행되었다. 여기서는 검은 안경을 쓴 황소와 매카시가 악수하는 그림이 불태워졌다. 동시에 학생들은 “사찰 폭력 사형(私刑) 기만”, “통일대책 없는 무능”, “소영웅적 민주정치”, “조국 없는 매판자본”, “주체 잃은 외세의존”, “무르익는 일본예속”, “불온문서 연구서적” 등의 항목을 써서 노끈에 나란히 걸어 놓고 하나씩 뜯어내 박수 속에 소각했다. 이날 밤에는 풍자극 <위대한 독재자>가 공연됐다. 박정희 대통령을 연산군에 빗댄 박산군(朴山君)과 김종필 전 공화당 의장을 상징하는 이완용을 등장시켜, 썩은 쌀, 민족적 민주주의, 한일회담, 4대의혹사건 등을 비꼰 일종의 마당극이었다.

이후 한일회담반대운동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을 풍자하는 문화적 퍼포먼스는 수시로 등장했다. 1964년 6월 1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단식 중인 학생들이 ‘국민총궐기호소대회 및 학원 침입, 민생고 책임자 매장식’을 진행했다. 여기서 학생들은 짚으로 만든 학원 침입자와 민생고 책임자들의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조사를 낭독했다. 다음날인 6월 2일에는 서울대 상대에서 300여 명의 학생들이 ‘매판자본’을 신랑으로, ‘가식적 민족주의’를 신부로, ‘제국주의’를 주례로 한 결혼식과 화형식을 가지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학생 시위가 절정에 이른 6월 3일 성균관대생 1000여 명은 ‘박정희 씨’와 ‘민생고’라는 이름의 꼭두각시 인형을 앞세우고 중앙청 부근 종각으로 진출했다.

문화적 퍼포먼스를 통한 저항은 1965년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1965년 6월 22일 연세대생들은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시간에 맞춰 ‘매국노 황제추대식’을 갖고 박정희 정권을 풍자했다. 한일협정이 여당만의 일당 국회에서 조인된 후 8월 21에는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매국 국회, 매국 문서, 매국 정부’의 화형식을 가졌고, 같은 날 고려대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모형에 불을 지르는 ‘일당 국회 화형식’을 거행했다. 이틀 뒤인 23일에는 전북대생 800여 명이 교정에서 한일협정 문서를 소각하는 화형식을 갖고 시위에 들어갔다. 이후 위수령 발포로 학원이 군인들에 의해 유린당하자 1965년 9월 6일에는 서울대 상대 학생 400여 명이 ‘학원 방위 및 한일협정 무효 성토대회’와 함께 ‘군화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이렇듯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다양한 문화적 퍼포먼스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풍자를 통해 한일회담반대운동의 대중화와 고양에 일조하였다.

주)001
<권두언>, ≪사상계≫, 1964년 5월호, 30~31쪽. 
주)002
<범국민투위서 ‘구국선언’>, ≪동아일보≫, 1964. 3. 9. 
주)003
<한일협상, 정국에 큰 파란>, ≪조선일보≫, 1964. 3. 22. 
주)004
<번지는 ‘규탄의 함성’>, ≪동아일보≫, 1964. 3. 26. 
주)005
<(자료) 시국선언문-민주 자유의 메아리>, ≪사상계≫, 1969년 5월호, 48~49쪽. 
주)006
<시국선언문 등 채택>, ≪동아일보≫, 1964. 4. 20. 
주)007
<결의문>, ≪대학신문≫, 1964. 5. 21. 
주)008
<학생들 ‘난국타개 궐기대회’>, ≪동아일보≫, 1964. 5. 25. 
주)009
<불허 무릅쓰고 강행>, ≪경향신문≫, 1964. 5. 20. 
멀티미디어
  •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격화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시위 진압에 군을 동원했다. 6.3 계엄선포 보도.(경향신문, 1964.6.4.)
  • 김종필-오히라 메모
  • 1964년 3월 15일 부산 경남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첫 성토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3.24시위 후 한일회담반대운동이 확산한 가운데 신축 중이던 뉴코리아호텔이 시위대의 표적이 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반대운동으로 구속된 학생 다수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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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헌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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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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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08-14 10: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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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반대운동
  • 설명 한일굴욕외교 반대 현수막을 들고 가두행진하는 학생들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