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8일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피고인 8명의 사형 확정 판결문을 읽고 있는 민복기 대법원장(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연관사건
동의어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조작사건
유사어/별칭/이칭
인혁당사건, 인민혁명당사건, 2차인혁당사건
영어표기
the fabricated case of the Committee for the Rebuilding of the People’s Revolutionary Party
한자표기
人革黨再建委操作事件
발생일
1974년 4월 3일
종료일
1975년 4월 9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 대구
개요
1974년 중앙정보부가 1964년의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사건 관련자를 검거하여 잔혹하게 고문하고 이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는 용공조직으로 구성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배후조종했다고 조작한 사건이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건 관련자 25명 가운데 8명(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에게 사형, 나머지에게는 무기징역 등 장기형이 선고됐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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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조치 이후 반공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한편 정치활동 금지, 언론, 출판의 자유 제한 등 폭압적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공포 정국 속에서 시민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극도로 제한하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감과 저항을 높여갔다. 대학생들의 반유신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정치인,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 등이 중심이 되어 유신헌법의 위헌성을 폭로하고 그 폐지를 촉구하기 위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을 전개했다.
박정희 정권은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반유신시위를 막기 위하여 1973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명의의 선언문이 대학가의 반유신시위에 뿌려지자, 민청학련만을 표적으로 겨냥한 조치였다. 1974년 4월 3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민청학련을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정체를 위장하고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한 지하조직으로 규정하고, 적화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불법 활동이 대두되고 있어 이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고 했다. 배후조직을 조작하겠다는 것을 염두에 둔 긴급조치였다. 박정희 정권 시기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은 학생들의 대규모 반유신시위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조작된 것만은 아니었다. 국제정세도 미군 철수, 북한의 도발, 포스트차이나(Post China)의 불안정성 등이 지속되어 정권의 불안정성이 심해졌다. 국내는 사회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정권의 장기집권과 유신체제 수립으로 시민들의 권력에 대한 이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권의 불안정성과 시민들의 반정부 정서는 공안사건 조작과 조작 사건 관련 사형수를 사법사상 유례없는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강행하는 배경이 됐다.
원인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는 특별담화에서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하조직’이란 말을 언급했다. 아직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누구도 검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인민혁명 수행 조직’이라는 언급은 1964년 한일회담반대시위 배후조직으로 조작됐던 ‘인민혁명당사건’에서 나온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면서 학생조직만으로는 국민을 설득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별담화는 대학생들의 반유신시위가 체제를 전복시키는 반정부 행위임을 시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용공조작사건을 만들려고 작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청학련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된 유인태(柳寅泰)와 이철(李哲)은 검거되자마자 1964년 인혁당사건(이하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배후조종과 관련된 진술을 강요당했다.
1974년 4월 25일 신직수(申稙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부장은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 중 이수병(李銖秉, 일어학원 강사), 김용원(金鏞元, 경기여고 교사), 서도원(徐道原,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都禮鍾, 삼화토건 회장)만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민청학련 배후에 공산계 불순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 조종을 받는 일본공산당 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세력 등이 관련되어 있다고 발표했다.주)001 이는 정권이 1964년 인혁당사건 관련자 중심으로 민청학련사건 배후조직을 조작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개
1974년 4월 17일 민청학련사건 주모자로 여정남(呂正男, 전 경북대 학생회장)이 검거됐다. 여정남은 경북대학교 학생운동가로 정보기관의 엄중한 감시를 받던 인물이었다. 유신체제하에서 정보기관의 집중적인 감시로 활동이 어려워진 여정남은 전국 대학과 연계활동을 활발히 하기 위해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인 하재완(河在完)의 지원을 받아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다. 당시 대구지역의 혁신계는 ‘투쟁론’과 ‘장기항전론’으로 입장이 나뉘어 논쟁이 진행됐고, 투쟁론의 입장에 섰던 하재완(건축업)이 여정남의 서울행에 적극 개입했다. 이후 하재완의 부탁으로 여정남을 이수병에게 연결한 인물은 5.16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함께 수형생활을 한 서도원이었다. 이수병은 1974년 1월경 여정남을 자신이 근무하는 일본어학원에서 수업하는 학생으로 위장시킨 후 자신은 정보기관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김용원에게 여정남을 부탁했다. 중정은 여정남을 검거한 후 강도 높은 강압수사로 서울로 온 배경에 하재완, 이재문(李在汶), 이수병, 김용원이 관련 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다음 날인 4월 18일 이수병과 김용원이 검거됐고, 이들로부터 도예종과 서도원이 여정남 서울행에 관련이 있다는 진술을 받아내는 과정을 밟았다.주)002 4월 20일 도예종과 서도원이 대구 북부경찰서 대공과에 체포됐다. 중정은 이들이 모두 1964년 인혁당사건 관련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조작의 구도를 기획했다. 이런 기획은 4월 25일 신직수 중정부장의 ‘민청학련 배후에 인민혁명당 조직이 있다’는 발표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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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지명수배됐던 하재완이 1974년 4월 28일 체포되면서 북한방송 청취 노트가 압수됐다. 하재완으로부터 방송 청취 노트를 회람한 명단을 진술받으면서 사건의 규모는 확대됐다.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와 반유신시위 경력이 있는 경북대 출신 인사들이 5월 2일부터 줄줄이 검거됐다.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구성을 북한방송 청취 노트를 회람한 사람 중심으로 확정했다는 세간의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이들 중 실제 노트를 본 사람도 있지만 보지도 않았는데 진술 과정에 이름이 거론되어 체포된 사람도 있어 노트 회람자는 하재완이 심한 고문 과정에서 거명한 사람들로 구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지역 인사는 이수병과 김용원이 4월혁명 시기 학생민통련과 민족자주통일협의회를 중심으로 교류했던 인사 중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를 중심으로 검거했다. 사건 관련자 26명(전국 수배 이재문 포함) 외에도 1차인혁당사건의 주요 관련자인 김금수(金錦守), 박중기(朴重基) 등 총 41명이 중정에서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다.
1974년 5월 27일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禹洪善,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宋相振, 양봉업), 전창일(全昌一), 라경일(羅慶一), 강창덕(姜昌德), 이태환(李台煥), 김한덕(金漢德), 이성재(李星載), 유진곤(柳震坤), 김종대(金鐘大), 조만호(曺萬鎬), 정만진(丁滿鎭), 이재형(李在衡), 림구호(林久鎬), 황현승(黃鉉昇), 이창복(李昌福), 전재권(全在權), 이현세(李鉉世), 장석구(張錫求) 등 최종 25명이 기소됐고 이재문은 전국 수배됐다. 이들은 1960년 4월혁명 시기 대구와 서울을 중심으로 통일운동,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전개해 온 민주인사들이다.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하재완은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맹을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이수병, 김용원은 학생민통련, 우홍선은 통일민주청년동맹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모두 민족자주통일운동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과 2대악법(‘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반대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서도원과 이수병은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혁명재판을 받은 후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 수형생활을 했으며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김용원, 하재완은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이다. 라경일은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관련자, 강창덕은 사회대중당 경북도당 당원, 이태환은 남로당 문학가동맹원, 김한덕은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로 사회대중당 당원, 김종대는 남로당 문학가동맹, 조만호는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맹원으로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 정만진은 2대악법반대경북학생투위원장으로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이며 나머지 인사들도 학생운동 경력 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67년 6.8부정선거규탄운동과 19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대구지역 관련자는 1971년 4월 민주수호경북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하재완, 라경일, 이재형이 운영위원, 이재문이 대변인, 정만진, 림구호, 여정남이 청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 조사는 중정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서 진행했다. 중정이 전체 사건을 지휘했지만 사실상 공식적 담당은 합동수사본부였다. 중정 차장인 김재규(金載圭)가 본부장을 맡았으며, 경찰, 보안사의 차출 요원들로 구성됐다. 한편 1974년 당시 사건 조사를 책임졌던 중정부장은 신직수였으며, 이 사건을 맡은 중정 6국 국장은 이용택(李龍澤)이었다. 1차인혁당사건 당시 신직수는 검찰총장이었으며, 이용택은 중정 5국 대공과장이었다. 1차인혁당사건과 1974년 인혁당재건위사건의 담당 중정 수사팀이 같다는 점은 ‘(1차)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라는 정권의 사건 조작에 유리했다. 송치 이후 조사는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서 진행됐지만 여전히 중정 6국에서 조사를 받았고 더러는 구속돼 있는 서울구치소에서 이루어졌다. 검찰 조사 과정에 중정 요원이 입회하여 그동안 받은 조사 내용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관련자들이 중정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부인하면 다음 날 중정으로 끌려가서 협박과 고문을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사건 조작을 위해 반인권적인 고문이 행해졌고, 조작 시나리오에 맞추어 각종 조사기록이 작성됐다. 2002년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조사 장소, 조사 일시, 검찰조서, 공판조서, 도예종 등 8인의 유언이 모두 조작됐으며, 재판도 위법한 과정으로 진행됐다고 밝혔다.주)003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들은 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구성된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1심 재판은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서 1974년 6월 17일 오전 9시에 개시되어 7월 11일 선고공판까지 총 7번 진행됐다. 2심 재판은 8월 22일 오전 10시 육군본부 비상고등군법회의 법정에서 개시됐다. 민청학련사건과 병합심리로 진행된 2심 재판은 피의자만 53명이었다. 2심은 5번만 진행됐는데, 사건 관련자들에게는 2번의 재판 기회만 허용됐다. 사건 관련자들은 8월 23일의 2차 공판과 8월 30일 4차 공판만 참석했다. 첫 번째 인정신문 후 바로 결심으로 가는 2번의 재판 절차는 관련자들에게 법이 허용하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가족 중 1인만 방청이 허가되어 사실상 비공개 상태로 재판은 진행됐으며, 법정에는 헌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재판 과정에 외신기자들의 방청이 금지됐다. 국제사면위원회(국제앰네스티)의 ‘1975년 한국보고서’는 재판 이전부터 재판 진행까지 부당한 요소들이 많았음을 보고하고 있다.주)004 국제앰네스티는 보고서를 통해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긴급조치가 해제됐는데도 불구하고 관련자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받고 있는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진행됐다. 법정에는 가족, 기자, 국제앰네스티를 대표하는 변호사 등 약 70여 명으로 선발된 방청객만이 참석했다. 여전히 외신기자는 방청을 허락받지 못했다.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는 한 사람도 법정에 출정하지 못했다. 대법원은 사건 관련자 39명에 대한 법정형을 확정했다.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여정남은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됐다. 이들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한 번도 감형되지 않았으며 종심인 대법원 전원재판부(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건 관련자들의 법정형 확정 판결문을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들에게 부여한 범죄사실은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 선동, 반공법 위반, 뇌물공여 위반이었다.주)005 사형을 언도받은 이들의 법 위반사항은 북한방송을 몇 번 청취했다는 것과 북한방송을 녹취한 노트를 돌려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현행법으로 반공법에 해당하며 선고형량도 몇 년에 그칠 정도의 범법행위였다.
결과/영향
대법원 판결 후 18시간이 지난1975년 4월 9일 오전 4시, 서울 서대문형무소 교도관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을 사형 집행장으로 이동시켰다. 집행은 오전 4시 55분 서도원을 시작으로 30분 간격의 차이를 두고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으로 진행됐다. 군법회의법 제494조, 제497조, 제499조와 제500조에 의거하여 집행됐지만, 군법회의법 제460조에 보장돼 있는 재심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채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2007년 1월 23일 열린 서울중앙지법 재심 선고 공판에서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숨진 도예종 등 8명에게 1975년 당시 대법원이 선고한 법 조항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공판 무죄선고는 당시의 사법부가 정권의 하수인이었음을 시인하는 것이며,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권력의 폭력성을 동원하여 반인권적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임을 다시 한번 밝히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주)001
<신 정보부장, 폭력데모로 노농정권 수립 기도>, 《동아일보》, 1974.4.25.
주)002
이수병은 1974년 4월 19일 조사과정에서 1973년 12월경 서도원으로부터 현 정부 타도 투쟁방법으로 학생 이용문제를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는 한편 상경한 여정남을 김용원에게 인계하였다고 진술하여 중정은 서도원의 긴급체포 명령을 대구경찰서로 보냈다:이수병 2차 진술서(중앙정보부, 197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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