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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부정선거규탄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6.8부정선거 규탄운동
청년들이 6.8선거는 쿠데타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영어표기
The June 8th movement to condemn election fraud
한자표기
六八不正選擧糾彈運動
발생일
1967년 6월 9일
종료일
1967년 11월 29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6.8부정선거 규탄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정부와 여당의 부정으로 치러진 것에 항의해 벌인 시위를 말한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5월 3일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본격적인 장기 집권을 위해서는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해야 했다. 이를 위해 개헌선인 2/3 이상의 국회의원 의석을 확보해야 했던 정부와 공화당은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갖가지 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대해 선거 직후부터 강력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개되었다. 야당은 선거무효와 전면 재선거를 주장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장외 투쟁을 벌였으며, 대학생들도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 학원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배경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와 7대 국회의원 선거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1966년까지 야당은 분열되어 민중당과 신한당이 대립하고 있었다. 1966년 12월 통합논의를 시작한 두 당은 1967년 2월 7일 통합 야당 신민당을 창당했다.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尹潽善)이, 당수는 유진오(俞鎭五)가 맡았다. 1967년 5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116만 표 차이로 박정희 대통령이 승리를 거두었다. 박정희 정권은 7대 총선에서 개헌선인 2/3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서는 개헌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원인

7대의원선거 전국서 일제히 투표(경향신문 1967.6.8.)

박정희 정권은 1967년 6월 8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6.8총선)에서 2/3 이상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내무부가 앞장선 가운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공무원, 경찰 등 관권이 직접 개입해 여당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벌였고, 엄청난 선거 자금을 뿌리며 표를 사들이고 향응을 제공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은 지역개발을 약속하는 등 전국 순회 지원 유세를 펼쳤다.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은 선거운동을 하는 야당의 손발을 꽁꽁 묶었다. 특히 6월 8일 투·개표 당일에는 금권·관권·폭력 선거가 극에 달했다.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결과, 공화당이 130석(지역구 103석, 전국구 27석), 신민당 44석(지역구 27석, 전국구 17석), 대중당 1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공화당이 전체 의석(175석)의 74%를 장악해 개헌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웃도는 의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주)001

전개

선거 직후 부정 선거 규탄

선거 당일부터 신민당원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6월 8일 밤 신민당 순천 승주 지구당 관계자들은 참관인들을 철수시키고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또한 같은 날 밤 순천, 진주, 곡성, 남원, 온양, 청주에서 신민당원들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다. 신민당에서는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 후보들이 개표 참관인을 철수시켰으며, 9일 충주, 안동, 상주, 남해, 양평, 전주, 순천, 무안, 남원, 곡성 등 지방 각지에서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신민당원들과 시민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와 행진을 벌이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선거 다음 날인 6월 9일 6·8선거를 “3·15 정부통령 선거보다 더한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민주 반역의 반국시적 사상 최악의 불법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장송(葬送)을 예고”하는 것이라며 범국민규탄대회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강력히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10일 신민당 대표위원 유진오는 박정희에게 부정선거 지구에 대한 선거 무효화와 재선거 및 관련자 인책을 요구했다.
대학생들도 규탄시위를 벌였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 200여 명은 6.8총선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어 ‘부정으로 이루어진 6.8총선은 무효’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6.8총선을 암흑과 폭력, 금력으로 치러 민주주의를 타락시킨 정부는 총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주권을 뺏은 자들을 회개시키고 민권을 수호하자’고 호소했다. 문교부는 전국 대학 당국에 학생들의 데모 성토 행위가 나지 않도록 철저한 단속을 하라고 긴급 지시하는 한편, 그런 움직임이 있을 경우 일차적인 책임을 학교 당국에 묻겠다고 경고했다.
지방에서는 신민당원들의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군산에서 6월 10일 밤 10시 15분경 군산 신민당사에서 신민당원들이 스피커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주권을 행사하자”고 호소하자 시민 수백여 명이 합류했다. 경찰이 스피커를 철거하기 위해 당사에 진입해 충돌하면서 당원 10여 명이 부상당하고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군산의 신민당원은 다음날인 11일 밤에도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는데, 여기에 시민 3천여 명이 합류해 경찰과 충돌했다. 공개 투표 논란이 벌어진 전라남도 보성에서도 10일 신민당원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보성중·고등학교 학생 천여 명이 합세했다. 같은 날 목포, 광주, 제주에서도 ‘6.8부정선거 규탄하자’며 신민당원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었다.

신민당 화성군당 당원들이 6.8부정선거에 반발해서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11일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200여 명의 신민당원들이 ‘불탄 표 찾아내고 부정 원흉 처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시위를 벌이다가, 당사 앞에서 ‘부정선거 몰아내어 민주정치 바로잡자’는 등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군산에서는 신민당원 20여 명이 시민 3000여 명과 함께 당사 주변에 모여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벌였다.주)002

신민당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6.8부정선거 규탄 장외 투쟁

6월 12일부터 신민당은 장외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2일에 열린 당선자 회의에서는 ① 야당 당선구를 포함한 전 지역에서의 재선거 실시 ② 김종필 공화당 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엄민영 내무장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 부정선거 관련자의 문책 ③ 재선거 실시에 앞서 6대 국회를 소집해 선거법을 전면 개정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했고, 이와 같은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당선자 전원이 의원 등록을 거부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회의를 마친 뒤 유진오 당수와 당선자 44명을 포함한 100여 명의 당원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관훈동의 신민당사에서 광화문 중앙청까지 시위를 벌이다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광주·구례‧충무·보성·영천·장흥·대구·울산·양평‧군산‧부산 등 각지에서도 신민당원들이 민주주의 상여를 메고 시위를 벌이는 등 부정선거에 항의했다. 이날도 수원, 대구, 평택 등 전국 각지에서 신민당원들이 부정선거 규탄 거리 시위와 연좌데모를 벌였다.
서울대 법대생 500여 명은 긴급 학생 총회를 열고 “공무원을 사병화하고 국민을 매수, 사기, 협박, 기만하며 이루어진 6.8총선은 금력·타락·사기·폭력·부정·관제 선거로서, 빛나는 4.19정신의 모독이며 요컨대 선거가 아니었다”고 선언한 뒤, ‘막걸리 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사수하자’고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서울대 당국(총장 최문환(崔文煥))은 “부정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심정은 이해하나, 학원 질서를 보호하고 제자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부득이 취해진 것”이라며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11개 단과대에 대해 임시휴업조치를 내렸다. 경북대 법정대 학생 30여 명은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가졌다. 대광고 학생 1000여 명도 교정에서 “4.19 얼은 죽었는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6.8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가졌다.
6월 13일 충무, 군산에서 신민당원들이 계속 시위를 벌였으며, 신민당은 “6.8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를 구성해 투쟁을 주도하도록 했다. 14일 신민당 운영위원회는 당 운영위원과 지구당 위원장을 투쟁위원으로 선임해서 6.8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를 구성하되, 15명의 집행위원 인선은 당수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는 총선 무효 선언, 전면적 재선거 요구, 의원 등록 거부를 결의하는 한편, 각 지방에 부정선거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대규모의 선거 규탄 국민대회를 준비했다. 당수 유진오가 위원장이 된 6.8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이하 총선무효화투위)는 17일까지 각도에 지부, 지역구에 투쟁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13일 밤 통영시(당시 충무시) 당원 100여 명은 ‘횃불 데모’를 벌였고, 군산에서는 당원을 비롯해 4000여 명이 데모를 벌인 뒤 만세삼창을 하고 해산했다. 14일 신민당 청년 당원 40여 명이 장준하를 회장으로 하는 구국동지회를 결성해 선거 무효화 투쟁에서 별동대 역할을 자처했다. 17~18일은 음성에서 신민당원들이 시위를 벌였고, 20일에는 진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6월 13일 휴교령이 내린 서울대 법대·문리대·공대·상대·사대·농대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등 서울 시내 각 대학생들과 전남대 법대 학생들이 6.8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벌였다. 고려대 학생 2000여 명과 서울대 법대와 문리대 학생 250여 명은 거리시위를 전개,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 투석전을 벌였다. 고려대 교정에는 “사상 최악의 6.8부정총선이 우리로 하여금 4.18을 상기케 한다”는 내용의 격문이 곳곳에 나붙었으며, 학생들은 마이크를 통해 ‘학원은 민주수호의 최후의 진지’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6.8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데모가 번지기 시작하자 서울대에 이어 고려대, 연세대, 건국대, 성균관대, 경희대, 동국대, 중앙대, 한양대, 단국대 등 서울 시내 8개 대학교와 부산의 부산대 등 총 11개 대학교가 잇따라 임시휴업에 들어갔다.

학교운동장에 모여 6.8 부정선거 시위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사람들의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14일 경희대 1000여 명, 동국대 1500여 명, 고려대 500여 명, 한양대 1700여 명, 중앙대 1500여 명, 연세대 2000여 명, 부산대 2800여 명의 학생들은 부정선거 규탄 성토대회 후 거리데모를 벌이다가 경찰의 제지로 해산됐다. 15일 숙명여대 학생 3000여 명은 임시학생총회를 열고 성토대회를 벌인 뒤 ‘부정선거 관련자 엄벌, 사퇴의 조속한 수습’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정부 결의문을 채택했다. 가톨릭의대 400여 명, 연세대 300여 명, 외국어대 1200여 명, 광운전자공대 600여 명, 홍익대 100여 명, 경기공전 500여 명 등 6개대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다. 이화여대 학생 4000여 명은 성토대회를 열고 15일부터 24일까지 동정휴학을 하기로 결의하고, 연세대, 고려대, 한신대, 건국대 학생들은 6.8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16일 덕성여대 학생 500여 명이 성토대회를 가졌으며, 재일교포 대학생들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지지·지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8일 미국 워싱턴 한국학생회는 “6.8선거부정은 비통한 역사의 악순환”이며 정부는 “더욱 과감하고 철저한 자가숙청”으로 국민에 대한 “책임감을 행동으로 입증해야 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6월 21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건국대 등 5개 대학 학생 대표 10여 명이 모여 ‘부정부패일소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6.8선거는 망국적 부정선거로, 일부 지역적 부정선거라는 정부의 주장은 부정을 자기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부정선거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처를 규탄하고, 범 대학·범 국민 차원에서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투쟁을 벌이는 데 합의했다. 이 합의는 휴교가 해제된 7월 3일과 4일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들이 공동명의로 성명을 내고 함께 시위를 전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7월 휴업을 풀자마자 다시 시위가 펼쳐지자 20개 대학이 조기방학을 실시해 더 이상 대규모 투쟁을 계속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부정선거가 근대화냐” 며 시위를 벌이는 서울대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전경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여름방학이 끝나고 8월 말 개학을 하자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와 상대 등 대학가의 부정선거규탄투쟁이 재개되었다. 8월 21일 서울대 법대 학생 300여 명은 학생총회를 열고 ‘7대 국회를 민의의 대표기관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제2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2학기 들어 부정선거 규탄 투쟁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방학 기간을 거치면서 부정선거 규탄의 열기도 식었고, 학생운동 내부에서도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동력을 얻기 힘들었다. 대학가에서는 9월 이후 6.8부정선거를 성토하는 대중적인 투쟁은 더 이상 전개되지 않았다.

한편 고등학생들도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했다. 6월 12일 대광고에 이어 14일 보성고 학생 1200여 명과 성남고 학생 1200여 명, 중동중·고교 학생 600여 명, 중앙고 학생 200여 명은 거리 데모를 벌이다가 기동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성동여자실업고 학생 2000여 명은 교정에 모여 성토대회를 갖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내용의 전단을 교내에 뿌렸다. 광주숭일중고 학생 800여 명과 고성여고 학생 130여 명도 데모를 벌였다. 청주상고 등 청주 시내 각 중·고교에 ‘6.8국회의원선거는 컴컴한 부정선거였다’는 제목의 유인물 수천 장이 뿌려졌다.
15일 동성고 800여 명, 배재고 400여 명, 양정고 1200여 명, 용산공고 500여 명, 동대문상고 100여 명, 덕수상고 1200여 명, 서울상고 800여 명, 삼선고 200여 명, 수송전기고 500여 명, 경희고 600여 명, 한성고 600여 명, 단국고 400여 명, 균명고 1000여 명, 중앙고 1000여 명, 대동상고 1500여 명, 청량리종고 1000여 명, 용산고 500여 명, 마포고 500여 명, 광운전자고 200여 명, 숭실고 500여 명 등 서울 시내 20개 고교 1만 4600여 학생들은 각 학교 별로 부정선거 규탄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데모를 벌였다. 19일에는 원주고교 학생 700여 명과 원주농고 학생 500여 명, 부산 배정고교 학생 700여 명, 경주고교 학생 750여 명, 제주 대정고교 학생 150여 명이 부정선거 규탄 성토대회와 거리 데모를 벌였다. 20일에는 대구고교 200여 명, 계성고교 1000여 명, 경주고교 750명, 제주제일고 150여 명의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열고 농성 또는 거리 데모에 나섰다.
고등학생 시위가 확산되자 문교부는 고등학교에도 휴업령이 내려 6월 17일까지 전국 150개 고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경북과 전남에서는 농번기 일손 돕기를 명목으로 휴업하기도 했다.주)003

6.8부정선거 규탄 움직임은 야당과 학생 외에도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6월 11일 춘천에서는 시내 기독교회 교역자 20여 명과 신도 200여 명이 ‘6.8부정선거 규탄 춘천 기독교인 궐기대회’를 열고 박정희 대통령과 신민당 유진오 당수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및 결의문을 채택한 뒤 12일부터 시위를 벌였다. 14일에는 4.19 부상자 대표단이 총선 무효화와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광주기독교연합회도 성명을 발표해 정부와 여당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태도를 버리고 혼란의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 16일에는 4.19혁명 세대로 구성된 청년문학가협회가 반민주적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정부와 공화당은 미봉책에 급급하지 말고 근본 대책을 수립할 것’과 ‘정당한 의사 표시에 대한 탄압과 학원 휴업 조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20일에는 대한변호사협회가 개표 부정과 함께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국무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 및 지역구 행정책임자 사임과 범법 공무원의 엄벌 등을 요구했다. 30일에는 4.19회 회장 이홍배 등 회원 5명이 6.8부정선거 무효화 성토대회를 열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7월 7일에는 가칭 ‘6.8 부정선거규탄 4.19동지회’ 회원 20여 명이 모여 부정선거 규탄 선언문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6월 21일 오전을 기해 서울시경은 데모사태로 인해 12일 내려졌던 갑호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정상 근무에 들어갔다.

6.8 부정선거규탄시위를 벌이는 사람과 이를 진압하는 전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부 여당의 미온적인 정국 수습책과 신민당의 강경 대응

신민당의 총선 결과 전면 무효화 및 전면 재선거 주장과 의원 등록 거부는 정부와 여당에 충격을 주었고, 대학과 기독교계 등 각계각층의 부정선거 규탄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미온적이나마 정국 수습책을 마련해야 했다. 공화당은 부정선거가 두드러진 보성과 화성의 당선자를 선거 부정으로 제명했으며, 6월 15일 당선자 대회에서도 선거 과정에서 부정이 드러나면 사퇴하겠다고 결의했다. 6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은 일부 지역의 선거 과열과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이미 제명된 화성과 보성 외에도 평택, 군산·옥구, 영천, 고창, 서천·보령, 화순‧곡성 등의 선거구 당선자를 제명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선거의 부정은 민주시민으로서 규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규탄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법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뒤, 정부의 조처와 법의 심판을 믿어달라고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유체이탈 화법’으로 호소했다. 공화당은 당기위위원회(당원의 징계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하는 위원회-편집주)를 열어 모두 9명의 당선자와 낙선자를 제명하는 한편, 신민당과 접촉해 정국 정상화를 시도했다.

6.8 부정선거규탄시위를 하다 잡힌 학생을 세 명의 전경이 잡아끌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러나 신민당은 전면적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면서 장외 집회를 계속 추진했다. 6월 19일 정오 ‘6.8 부정선거 전모 개요’를 발표한 신민당은 서울시가 장소 사용을 허가하지 않자, 오후 4시 관훈동 당사 옥상에 연단을 마련해 유진오, 윤보선(尹潽善), 장준하(張俊河), 김형일(金炯一), 함석헌(咸錫憲), 김대중(金大中)이 연설을 한 뒤 결의문을 채택하고 거리 행진에 나섰다. 경찰은 신민당사 근처를 차단하고 최루탄을 쏘며 행진을 저지했다. 결의문의 내용은 ① 총선거 전면 무효화와 재선거 실시 ② 부정선거 책임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사과와 부정선거 가담 전국의 공화당 후보와 공무원 및 폭력배의 구속과 처단 ③ 적반하장의 전국 선거보복 즉각 중지과 관계자 엄단 ④ 검찰의 전면적이고 철저한 수사, 학생과 민주시민의 항쟁에 대한 탄압 즉각 중지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부정선거 조치 등 4개 항이었다. 이날 ‘6.8부정선거 무효화 궐기대회’에서 유진오 신민당 당수는 전면 재선거와 부정선거 책임자 처단, 박정희 대통령의 인책만이 대책이라고 했으며, 장준하는 박정희 대통령이 책임지고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신민당은 강경한 전면적 재선거 방침을 고수했으며, 전국 지부들은 규탄 집회와 단식투쟁, 선거소송투쟁을 지속했다. 23일에는 신민당 경북도지부가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었고, 27일에는 청주에서 신민당 충북도당이 규탄시위를 벌였다. 충북규탄대회를 마치고 거리시위에 나선 김상현(金相賢) 의원(당 선전부위원장)은 청주경찰서에 끌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신민당은 6월 30일부터 6대 대통령 취임일인 7월 1일까지 중앙당사와 전국의 131개 지구당에서 24시간 기한부 단식농성을 벌였다. 또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과 동시에 당사 옥상에서 ‘민권선언대회’를 열었으며, 대표위원 명의로 ‘박정희 씨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다. 당사 옥상에서 취임식장인 중앙청 방향으로 연설을 계속하자, 스피커와 현수막을 철거하려는 경찰이 당사에 난입해 저지하는 당원들과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공화당은 협상을 제안했으나 신민당은 전면 부정선거를 시인할 것을 요구하며 거부했고, 법정 투쟁을 병행할 것을 결의했다. 7월 8일 대법원에 7대 국회의원 선거의 전면 무효 소송과 전국 131개 지역구 선거관리위원장을 피고로 하는 일괄 선거소송을 제기했다. 신민당은 선거무효 소송 소장을 통해 “6.8선거의 부정 양상은 전국적으로 동일하여 공화당, 행정 기관 및 폭력단으로 편성된 연합군에 의해 무방비한 국민 대중의 주권은 완전히 압살되고 민주주의는 장송(葬送)되었다”고 주장했다. 7월 10일 공화당과 공화당에서 제명된 무소속 의원들만으로 헌정사상 초유의 7대 국회 개원식이 감행됐다. 신민당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등록을 거부하고, 단독 국회 개원이 무효임을 선언하며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5일 신민당은 박정희 정권을 향한 경고문을 발표해 투쟁의 진위를 왜곡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경찰의 선거보복 중지를 요구했다. 7월 8일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최대 규모의 간첩 조작 사건’인 동백림 사건이 발생하자 장준하, 부완혁(夫琓爀) 등이 신민당 간부들이 수사 기관에 영장 없이 연행되기도 했다.주)004

6.8총선 전면부정 아니다(경향신문 1967.8.1.)

8월 이후에도 신민당은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6.16성명 발표 이래 45일이 넘도록 침묵을 지켜오던 박정희 대통령이 8월 1일 진해 기자회견에서 “6·8 총선거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데 대해 그 원인이 어디 있든지 간에 행정부의 책임자로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의 뉘앙스가 풍기는 말을 했다. 하지만 6.8총선이 전면 부정선거는 아니며 여당만의 책임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정치협상을 통해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천만하다”고 못박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더 이상 시국 수습을 위한 단안이 없다고 하자, 8월 2일 김대중 신민당 대변인은 간부회의의 승인을 거쳐 대통령의 회견 내용을 반박하는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① 대통령 이하 전 각료가 총동원되고 그들의 지휘 아래 일선 행정기관들이 선거운동에 투입되었음은 물론, 투표 과정에서 전 선거구가 부정이 자행된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전면 부정선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② 야당후보에 의한 지역적 탈선이 있었다 해도 이를 어떻게 정부와 여당이 자행한 전면, 원천적 부정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더욱 지금 국민이 규탄하는 부정의 핵심 사실은 관권 선거와 투표권이 박탈 유린되었다는 두 가지 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③ 새로운 단안이 없다는 것은 완전한 책임 회피이며 국민을 무시한 발언이다. 신민당은 8월 14일 『6.8부정선거백서』를 발간하여 그동안 수집한 공화당의 사전선거운동, 부정·불법 선거, 투표 부정, 투표함 수송 부정, 부정 개표 등의 사례들을 망라해 발표했다.

야당 투쟁의 종료와 등원

대통령의 진해 기자회견 다음날인 8월 2일 신민당은 “여야 긴장 상태가 장기화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당선자의 등록 거부 등을 유지하며 장기 투쟁하겠다고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점차 야당 내부에서 협상론이 강해지면서 10월 2일 신민당 운영위원회는 여당과 접촉을 승인했다. 10월 30일 김종필(金鍾泌) 공화당 당의장이 국회 정상화를 위한 대표회담을 제의하자 신민당은 이를 수정해 전권 대표자 회담을 제의했다. 11월 2일 김종필이 유진오 신민당 대표위원을 자택으로 방문, 여야 전권 회담의 방법 등에 대해 협의했다. 11월 6일 공화당의 백남억(白南檍), 김진만(金振晩), 신민당의 윤제술(尹濟述), 김의택(金義澤) 사이에 회담이 열렸고, 11월 20일 김종필과 유진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합의의정서에 서명했다. 의정서는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를 여야가 추천하는 각 3명씩으로 할 것, 각급 선관위의 권한 강화, 선거법 조항의 검토와 개정, 기탁된 정치자금의 의석별 배분, ‘6.8선거부정조사특별위원회’ 설치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신민당 내부에서 원래의 투쟁원칙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일단 등원하기로 결정했다. 11월 29일 신민당 당선자들은 11월 29일 국회에 등원해 의원 선서를 마쳤다. 12월 1일 국회는 ‘정국수습을 위한 여야대표자회담 의정서’를 채택했다. 주)005

결과/영향

박정희 정권은 공권력과 금권을 총동원해 1960년 3.15부정선거에 버금가는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를 저질러 야당과 학생들의 강력한 저항을 초래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투쟁은 방학으로 중단되었고, 방학 중 일어난 동백림 사건, 민비연 사건으로 2학기에도 규탄투쟁은 지속되지 못했다. 등원을 거부하던 야당도 11월 여당과 합의해 국회가 정상화되면서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주)001
심지연, 2004,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197~201쪽 
주)00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3선개헌반대운동사료집 일지 1>> <<3선개헌반대운동사료집>>. 358~370쪽 
주)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한국민주화운동사 1>>, 499~508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한국민주화운동사 1>>, 364~471쪽 
주)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한국민주화운동사 1>>, 468~519쪽 
주)00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한국민주화운동사 1>>, 594~637쪽 
멀티미디어
  • 7대의원선거 전국서 일제히 투표(경향신문 1967.6.8.)
  • 총선 뒤처리로 정국 경화(경향신문 1967.6.12.)
  • 6.8부정에 철퇴(경향신문 1967.6.12.)
  • 6.8총선 전면부정 아니다(경향신문 1967.8.1.)
  • 신민당 화성군당 당원들이 6.8부정선거에 반발해서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학교운동장에 모여 6.8 부정선거 시위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사람들의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부정선거가 근대화냐" 며 시위를 벌이는 서울대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전경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6.8 부정선거규탄시위를 벌이는 사람과 이를 진압하는 전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6.8 부정선거규탄시위로 휴교한 가운데 어깨동무를 하고 시위를 벌이는 서울대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6.8 부정선거규탄시위를 하다 잡힌 학생을 세 명의 전경이 잡아끌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6.8 선거는 쿠데타라며 시위를 벌이는 청년들의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고지수, 2018, <1960년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의 조직과 특성>, 사림 63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삼선개헌 반대운동 사료집 일지 1>>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삼선개헌 반대운동 사료집 사료영인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엮음, 2008,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 서중석, 2007, <<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서중석, 2008,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역사비평사
  • 이기택, 1987, <<한국야당사>>, 백산서당
  • 손호철, 2003, <<현대 한국정치 1945~2003>>, 사회평론
  • 심지연, 2004,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 조희연 편, 2002, <<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 함께 읽는 책
  • 조희연, 2007,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2001,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2002, <<박정희 시대 연구>>, 백산서당
집필정보
집필자
이기훈
집필일자
2022-06
최종수정일자
2024-06-27 08: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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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사]6.8부정에 철퇴(경향신문 196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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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부정선거규탄운동
  • 설명 청년들이 6.8선거는 쿠데타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