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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4호 선포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는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배경사건
동의어
대통령긴급조치 4호 선포
영어표기
the Declaration of Presidential emergency decrees No. 4
한자표기
緊急措置4號宣布
발생일
1974년 4월 3일
종료일
1974년 8월 23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74년 4월 3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오후 10시를 기해 학원사태와 관련해 대통령긴급조치 4호를 선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고무, 찬양하는 일체의 행위, 학생이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관계자 지도감독하의 정상적 수업 연구활동을 제외한 학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적 행위를 금하고 이 같은 규정을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배경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 동의 절차 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유신헌법은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유신헌법이 발효되고 박정희 유신체제가 등장하자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등을 통하여 민주 회복, 유신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포, 발동함으로써 ‘긴급조치(긴조) 시대’의 막을 올렸다.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과 그 배후조직으로 ‘조작’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사건’의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발동된 대통령긴급조치 4호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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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포했음에도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투쟁이 계속 번져나갔다.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지 이틀이 지난 1월 10일 유인태(柳寅泰), 이철(李哲), 나병식(羅炳湜), 서중석(徐仲錫) 등 10명이 모여 3월부터 대학별로 시위를 벌이다가 4월 초에 전국적으로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학생운동의 조직력이 강했던 서울대가 중심이 되어 전체 투쟁 총괄, 서울대 각 단과대 담당, 서울 시내 각 대학 담당, 지방 소재 대학 및 여자대학 담당, 기독교계 학생단체 담당, 사회인 및 재야 담당, 인쇄 담당 등 나름대로 역할분담을 했다. 하지만 체계적인 대규모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통혁당,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등 여러 공안사건에 대한 학습 효과로 학생운동 핵심들은 강령이나 규약은커녕 조직의 명칭조차 붙이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선언문 아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이란 명칭을 유인물에 명기했을 뿐이었다. 전국적인 시위는 4월 3일로 정해졌다. 최대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3월부터 대학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3월 21일 경북대, 3월 28일 서강대에서 시범적으로 데모를 벌였지만 결과는 크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3월 28일부터 대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돼 최초 주동자였던 서중석 등 수백 명이 끌려갔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고문해 전국적인 공산주의자 조직을 조작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약속한 4월 3일, 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고려대·서울여대·감신대·명지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서 유인물(‘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명의로 된 ‘민중·민족·민주선언’, 무기명의 시 ‘민중의 소리’와 ‘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 글’)이 뿌려지고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대 의대생 500명이 흰 가운을 입고 가두로 진출하려다 봉쇄됐고, 이화여대생 3000명이 채플 시간에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 중 40명이 청계천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압도적인 경찰 병력에 의해 곧 진압됐다. 예상보다 규모도 훨씬 작았고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긴급조치 4호 선포를 다룬 대한뉴스 제977호(국가기록원)

밤 10시가 되자 돌연 라디오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대통령 특별담화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화염병과 각목으로 시민폭동을 유발했으며, 정부를 전복하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란을 기획했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대통령긴급조치 4호가 선포, 발동됐다.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에 대해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수사도 하기 전에 이미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수행하려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민청학련의 실체가 무엇인지, 학생운동의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수사는 일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유인물이 배포된 당일 저녁에 단체의 실체와 배후까지 파악해 정부 전복의 위협에 대처하여 긴급조치를 발동한 것은 사전에 기획된 것이었다. 학생들의 순수한 민주화 시위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 폭력혁명으로 누명을 쓰는 순간이었다.

전개

대통령긴급조치권과 긴급조치 4호 선포

민청학련과 그 배후조직으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의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발동된 대통령긴급조치 4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이하 “단체”라 한다)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②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 도화·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 또는 판매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⑤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관계자 지도·감독하의 정상적 수업·연구활동을 제외한 학교 내외의 집회·시위·성토·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집단적 행위를 금한다. 단, 의례적·비정치적 활동은 예외로 한다. ⑥이 조치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선동·선전하거나 방송·보도·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⑦문교부 장관은 대통령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의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 결사 기타 학생단체의 해산 또는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처분을 할 수 있다. ⑧제1항 내지 제6항에 위반한 자, 제7항에 의한 문교부 장관의 처분에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⑨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긴급조치 4호는 학생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거나 수업과 시험을 거부해도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악법이었다.

긴급조치 4호 발동과 위반자 처벌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에 대해 실제로 사형 확정 판결을 내리는 민복기 대법원장(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 3일 대통령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고 치안국은 유인태(서울대 대학원 1년), 이철(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3년), 강구철(姜求哲,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년) 등 민청학련 주모자급 3명에 대해서는 1계급 특진과 함께 현상금 200만 원씩(50만 원으로 시작, 300만 원으로 인상)에 전국에 현상수배했다. 간첩신고 포상금이 30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민청학련을 주도했던 학생들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박정희 정권이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4월 4일 박정희 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이미 3월 28일의 서강대 시위 때 서중석, 최병두(崔炳斗), 이종구(李鍾久), 문국주(文國周) 등을 연행했고, 4월 9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직형(李溭炯) 총무, 안재웅(安載雄), 정상복(鄭相福) 간사, 나상기(羅相基) 등 26명, 서울대 공대 학생회장 이종원(李鍾元) 등 6명, 한양대의 이우회(李祐會)·이상익(李商翊), 전남대의 문덕희(文德熙), 이학영(李學永), 윤한봉(尹漢琫), 박형선(朴炯璇), 김상윤(金相允) 등이 줄줄이 연행됐고 4월 13일에는 수백 명이 수배됐다. 수사당국은 민청학련사건과 조작된 인혁당재건위를 연결시켜 학생운동을 공산혁명으로 몰고 갔다. 4월 24일 검거된 이철이 잡혀 들어가 보니 중앙정보부는 이미 민청학련의 배후로 한편으로는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 관련자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유인태를 인터뷰했던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와 통역 하야카와 요시하루(早川嘉春) 등을 통해 일본공산당과 조총련 등 국외 공산계열을 설정해놓고 있었다고 한다. 4월 21일 중앙정보부 수사상황 보고에는 관련자가 공산주의자임을 입증하라, 가족 중 부역자와 혁신계 등을 찾아내라, 친구나 선배 등으로부터 정부 전복을 교사받은 사실을 조사하고, 조직체계 전모를 규명하여 발본색원하라 등의 지시가 기재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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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1차 인혁당사건’(1964.8.14.)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申稙秀)는 중앙정보부장이 돼서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발표했다. 언론은 일제히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 전복 및 국가변란기도 사건은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 및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의 사주를 받았다”고 받아 적었다. 검찰이 제공한 조직도표까지 실었다. 하야카와가 제공했다는 폭력혁명 거사자금 액수는 고작 7500원이었는데, 이것은 거사자금이 아니라 인터뷰에 대한 사례비였다. 민청학련사건과 관련된 54명이 5월 27일 긴급조치 1,4호 위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혐의로 기소됐다. 7월 8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2심판부(재판장 박현식 중장)는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계열 21명 중 서도원(徐道源, 51세), 도예종(都禮鍾, 50세), 하재완(河在完, 42세), 송상진(宋相振, 46세), 이수병(李銖秉, 36세), 우홍선(禹洪善, 44세), 김용원(金鏞元, 39세) 등 7명에게 사형, 김한덕(金漢德, 37세) 등 8명에게 무기징역, 황현승(黃鉉昇) 등 6명에게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씩을 구형했다. 7월 9일에는 민청학련사건 관련 재판이 있었다. 이철, 김지하(金芝河) 등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이 6명이었다.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검찰이 사형까지 구형하자 비상보통군법회의 공판정에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김지하 외에 9명의 변론을 맡은 강신옥(姜信玉) 변호사는 준엄하게 질타했다.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 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살인’ 행위가 될 수 있다.” “유신헌법은 비민주적인 악법이다. 지금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서서 재판을 받고 싶을 정도다.”

민청학련 학생들을 변론하다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 강신옥 변호사 석방 모습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구속됐지만 국내 신문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죄목은 긴급조치 4호 위반과 법정모욕죄였다. 사상 유례없는 변호사 법정구속 사건이 미국의 《뉴욕 타임스》 1면 기사로 보도되면서, 그리고 8월 7일 이봉성(李鳳成) 법무부 장관의 국회 답변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7월 13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판부(재판장 박희동 중장)는 검찰 구형대로 전원 같은 양의 형이 선고되는 이른바 ‘정찰제 판결’을 내렸다. 민청학련사건 학원 종교인 관계 피고인 32명 중 이철, 유인태, 여정남(呂正男, 경북대 법정대 학생회장 출신 64학번), 김병곤(金秉坤,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3년), 나병식(羅炳湜, 서울대 문리대 국사과 4년), 김영일(金英一,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명 김지하. 시인), 이현배(李賢培, 서울대 대학원 2년) 등 7명은 사형, 서중석(서울대 국사학과 4년), 황인성(黃寅成, 서울대 독문과 4년), 정문화(鄭汶和, 서울대 외교학과 4년), 안양노(安亮老, 서울대 정치학과 4년), 이근성(李根成,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무직) 김효순(金孝淳,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무직), 유근일(柳根一,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 7명은 무기, 정윤광(鄭允洸,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3년) 등 12명은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 윤한봉(전남대 축산과 4년), 김정길(金貞吉, 전남대 상대 4년), 구충서(具充書, 단국대 사학과 1년) 등 6명은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사건 관련되었다고 구속된 두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자유기고가)와 하야카와 요시하루(대학강사)는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의 선고를 받았다. 이철과 김병곤은 사형 언도를 받자 “반유신을 이유로 빨갱이로 몰지 말라. 나는 떳떳이 죽겠다”, “사형 구형을 받아서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사형과 무기징역을 제외하고도 기소자들의 형량 합계는 16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 세계 사법사상 신기록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의 항소는 모두 기각됐다.

민청학련과 관련해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영광입니다”라고 외쳤던 김병곤이 1988년 집시법 위반 사건 재판에 출정하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월 16일 비상보통군재 제3심판부(재판장 유병현 중장)는 민청학련사건의 배후 지원 혐의로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김동길 연세대 교수, 김찬국 연세대 신과대학장 등 4명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7월 18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관할관인 서종철(徐鐘喆) 국방부 장관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철, 유인태, 나병식, 김병곤, 김영일 등 5명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8월 1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는 민청학련 배후지원 혐의로 기소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8월 3일 신민당과 통일당은 긴급조치 1,2,3,4호의 해제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가운데 1,2호는 법사위에 상정됐지만 부결됐다. 8월 9일 비상보통군재 제3심판부는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지학순 주교에게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 김찬국 학장에게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으나, 사흘 뒤 윤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구형대로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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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편의상 유인물에 사용하던 조직 명칭에 불과했던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조작해내면서 민청학련이 정부전복을 기도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검찰 또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라는 비밀지하당과, 또 다른 통로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일본공산당 계열과 조총련계가 ‘공산폭력혁명’을 사주하고, 이를 위한 거사 자금은 한국의 전직 대통령·개신교·천주교 쪽에서 대고, 또 이 폭력혁명을 시민민주주의자 김동길·김찬국 교수가 촉구·선동하고, 개신교의 많은 젊은 교역자들이 함께했다”는 공소장을 발표했다. 이 조작된 공소장으로 인해 수백 명이 구속돼 고문을 당했고, 조작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8명은 하나뿐인 목숨을 사실상 재판도 없이 빼앗겨야 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인혁당재건위 관련 8명(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 여정남)에 대한 사형 판결을 ‘12대 1’로 확정했다. 민복기 대법원장 포함 대법원판사(민복기‧홍순엽‧이영섭‧주재황‧김영세‧민문기‧양병호‧이병호‧한환진‧임항준‧안병수‧김윤행‧이일규 등 13명) 가운데 ‘원심파기 소수의견’을 낸 사람은 이일규(李一珪) 판사가 유일했다. 재판은 10분의 판결문 낭독만으로 끝났고, 다음 날인 4월 9일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가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는 등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국가폭력이자 인권침해 사건으로 기억됐다. 사형집행 후 두 구의 시체는 가족들의 동의 없이 당국에 의해 화장됐다. 더구나 유가족들에게 제시된 유언장의 내용은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할 말이 없다”, “장례의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형을 선고받은 수형인의 유언이라기보다는 박정희 정권의 불편한 심경을 담은 조작된 메시지로 비쳤다.

결과/영향

대통령긴급조치 4호는 1호와 함께 1974년 8월 23일 대통령긴급조치 제5호(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동 제4호의 해제에 관한 긴급조치)로 해제됐다(8.23조치). 박정희 대통령은 8.23조치 담화를 통해 “국민총화가 굳건히 다져졌음을 볼 때 나는 적이 든든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따라서 나는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할 시기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구속자들을 석방하지는 않았다.

긴급조치 1,4호 해제 대자보를 바라보는 시민들

수사당국은 민청학련-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과 관련, 민청학련 이름으로 검거된 732명을 포함한 1024명을 연행해 745명은 훈방하고 253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그중 169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1심인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무기징역을 제외하고 선고된 형량만 1650여 년에 달했다. 긴급조치 1호·4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외에 내란예비음모·내란선동까지 죄목도 다양했다. 군법회의에서 이런 중형을 선고받고도 피고인들의 절반 가까이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상고해봤자 소용없다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1975년 2월 15일 심각한 국내외 여론을 의식한 박정희의 석방 지시 등에 따라 풀려났다. 그러나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들은 끝내 공포정치의 희생물이 됐다.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열풍과 함께 민청학련사건의 진실규명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1993년 11월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가 발족됐다. 1995년 봄, 서울의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전국 5대 도시의 현직 법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유신 치하의 민청학련사건 등 긴급조치 사건 판결들이 ‘수치스러운 판결’ 제1위로 조사되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2005년 12월 7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민청학련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라고 왜곡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공표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은 도예종 등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희생자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8인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긴급조치가 입법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했고 참정권, 표현·신체의 자유, 영장주의,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2013년 5월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긴급조치 제4호에 대해서도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는 발동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목적상 한계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영장주의, 법관에 재판받을 권리, 학문의 자유 및 대학의 자율성 등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위헌·무효”라고 밝혔다. 이어 “유신헌법 제53조에 근거한 긴급조치 제4호가 합헌이라는 취지로 판시한 기존 대법원 판례는 모두 폐기한다”며 판례를 변경했다.

멀티미디어
  • 긴급조치 4호 선포 보도(경향신문 1974.4.4.)
  •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8명 사형집행 보도(경향신문 1975.4.10.)
  •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에 대해 실제로 사형 확정 판결을 내리는 민복기 대법원장(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하는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 민청학련 학생들을 변론하다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 강신옥 변호사 석방 모습
  • 민청학련과 관련해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영광입니다"라고 외쳤던 김병곤이 1988년 집시법 위반 사건 재판에 출정하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긴급조치 1,4호 해제 대자보를 바라보는 시민들
  •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열린 민청학련 사건 희생자들의 영정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
  • 석방된 학생과 마중 나와 우는 어머니
  • 국회에 긴급조치 1,2,3,4호 해제 건의안을 제출하는 신민당 총무간사
  • 긴급조치를 위반하여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가족들
  • 플레이버튼
    긴급조치 4호 선포를 다룬 대한뉴스 제977호(국가기록원)
참고문헌
  •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2005.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동아일보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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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학련: 유신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를 외치다》, 메디치미디어, 2018.
  • 진실화해위원회, <기록분석 보고-긴급조치위반 판결분석 보고서>,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007.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1, 2》,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 한홍구, 《사법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돌베개, 2016.
집필정보
집필자
조현연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5-09-16 17: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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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4호 선포
  • 설명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는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