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학생운동
- 영어표기
- The Garrison Decree of October 15th, 1971
- 한자표기
- 十十五衛戍令
- 발생일
- 1971년 10월 15일
- 종료일
- 1971년 11월 8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 지역
- 서울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서울 일원에 위수령으로 군을 동원해 교련 철폐, 부정부패자 처벌, 무장군인 학원난입 규탄, 중앙정보부 철폐 등을 외치며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위수령은 위수사령관이 재해 또는 비상사태시 병력을 출동시킬 수 있는 법령으로, 출동한 위수군은 무기휴업령이 내려진 서울대, 경희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국외대 등을 점령하고 학생들을 연행했다.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대다수 학교의 이념서클이 해체되고, 미등록 학내간행물의 발간이 금지됐으며, 170여 명의 학생들이 제적된 뒤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징집 당했다. 이후 학생운동은 장기침체에 들어가게 됐다.
1971년 초 박정희 정권은 교련 강화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1968년 안보위기 이후 추진한 학생군사훈련을 대폭 강화하여 학원을 병영화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새롭게 발표된 교련 강화 방침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4년간 전체 수업시간의 20%에 달하는 교련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학생들은 박정희 정부의 교련 강화 방침이 동서 화해 분위기에 들어간 국제정세에 역행하며, 위기를 과장하여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하고 장기 집권을 꾀하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학원병영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1970년 들어 사회 곳곳에서 드러난 경제개발의 폐해에 대한 비판의식과 어우러져 교련반대운동으로 촉발됐다.
1971년 한해 내내 학생들은 교련 철폐 구호를 선거 감시, 선거부정 반대, 사토수상 방한 반대, 부정부패 철폐, 민권 신장, 학원민주화 등 다양한 의제를 결합해 운동을 전개했다. 1971년 4월 27일, 3선에 간신히 성공한 박정희 정권에게 학원을 넘어선 민주·민권운동을 지향하고, 부정부패자 공개 요구, 무장군인 학원난입 규탄, 중앙정보부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는 학생운동은 가장 강력한 대항마였다. 따라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3선을 넘어 장기 집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학생운동을 무력화해야 했다.
1971년 7~8월 여름방학을 거치며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교련반대운동은 2학기 개강 직후 재개됐다. 9월 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교련백서’를 발간하여 “반역사적, 반민족적, 비지성적 군사훈련을 단호히 고발하며, 군사훈련 축출”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결의를 밝혔다. 9월 15일에는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등 4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교련의 ‘전면 철폐’를 재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 17일에는 고려대에서 성토대회가 열렸고, 20일에는 연세대 총학생회가 교련 수강 거부를 계속하겠다는 성명서를 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조된 분위기는 9월 28일부터 거리시위로 터져 나왔다.
10월 5일 고려대무장군인난입사건 이후 각 대학에서는 교련반대, 군인의 학원난입 규탄, 부정부패 특권분자 처단, 민중생존권 보장 등을 외치는 시위가 활발히 전개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조치를 강구했다. 10월 12일, 국방부와 문교부는 정당한 이유로 교련을 거부하는 학생이 아닌 경우 강제로 징집하겠다는 공동담화문을 발표했다. 14일에는 문교부가 전국 71개 대학 총학장회의를 긴급 소집하여 대학 내 미등록간행물을 금지하고 정치적 색채를 띤 학생단체들의 해체 및 처벌을 엄중 지시했다.
10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주모 학생 색출, 성토 및 농성 학생 제적, 비학술서클 해산, 불법간행물 폐간’ 등 총 9개 항을 골자로 하는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발표했다. 동시에 서울대 문리대·법대·상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경희대, 서강대, 외대, 전남대 등 총 8개 학교에 무기휴업령이 내려졌다. 특별명령 발표 직후 양택식(梁澤植) 서울시장은 “경찰병력만으로는 완전한 사회질서 확보가 어렵다”면서 군 당국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그날 아침, 유재흥(劉載興) 국방부 장관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작전통제권 해제를 요청했다. 유엔군사령관이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은 부대들이 시위 진압에 활용되어 미 국내 여론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자, 유재흥 장관은 “실탄은 발사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발포 여부에 대한 답변을 받은 유엔군사령관은 작전통제권 해제 요청서가 제출되자마자 승인해주었다.
군 동원은 1950년 3월 27일 대통령령 제296호로 제정된 ‘위수령(衛戍令)’에 의한 것이었다. 위수령 제12조는 “위수사령관은 재해 또는 비상사태에 제하여 지방장관으로부터 병력의 청구를 받았을 때는 육군 총참모장에게 상신하여 그 승인을 얻어 이에 응할 수 있다”는 규정을 가졌다. 군 동원이 이루어진 주인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교련반대운동은 고조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규모 면에서 4월 대통령 선거 이전의 시위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경찰력으로 충분히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위수령 제12조에 규정된 ‘비상사태’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10월 15일의 군 동원은 학생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사전적 조치에 가까웠다.
동원된 위수군은 총 약 7000명이었다. 수도경비사령관이 위수사령관에 임명됐으며, 예하에 제1공수특전단과 제1유격여단, 제26사단 76연대가 배속되었다. 제1공수특전단과 제1유격여단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통제권 해제는 제26사단 76연대에 한해 이루어졌다. 10월 15일 오전 11시와 오후 12시 작전명령 제1호와 3호로 예배속 부대들에 대한 학교점령 명령이 내려졌다. 서울대와 경희대엔 제26사단 76연대가, 고려대엔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대가, 연세대와 서강대엔 제1공수전투단이, 성균관대와 한국외대엔 제1유격여단이 배치되었다. 학교를 점령한 위수군은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학교 운동장에서 총검술 훈련을 실시했다.주)001
위수군의 점령 과정에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제1공수특전단과 제2유격여단이 점령한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국외대에서도 별다른 충돌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대는 학교 안을 점령한 후, 정문 앞을 총검을 든 군인들을 세워 경비했다. 그러나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대가 점거한 고려대에서만은 달랐다. 사이카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학교에 들어온 수경사 군인들은 농성 중이 아닌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정상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을 구타하며 닥치는 대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학교 건물을 향해 최루탄을 쏘아대는 바람에 숨이 막힌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난간에 매달렸다가 중상을 입기도 했다. 군인들은 붙잡은 학생들의 손을 머리 뒤로 끼게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에 꿇어 앉혔다.주)002 이러한 진압 양상은 1965년 한일회담반대운동 당시 나타난 군의 진압보다 훨씬 폭력적이었다. 더욱이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은 이미 10월 5일 새벽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회관 5층에 머무르고 있던 학생들을 불법으로 납치하여 구타한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10월 15일, 위수군의 점령과 함께 7개 대학에서 연행된 학생들은 무려 1889명이었다. 학생 연행은 위수군이 점령한 대학 대부분에서 교내로 들어온 경찰이 주도했다. 연세대는 서대문경찰서, 서강대는 마포경찰서, 한국외대는 청량리경찰서 경찰들이 들어와 학생들을 연행해 갔다. 다만 고려대를 점령한 수경사 군인들은 직접 학생들을 연행했다. 당시 군이 대학을 점령하고 경비 작전을 시행하면, 경찰이 시위 학생들을 연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위수군은 직접 진압에 투입될 준비를 하기도 했다. 15일 이후 기존에 휴업령이 내려진 학교 외에 시위 움직임이 나타나는 학교들도 자진 휴업에 들어가 22일까지 14개 대학이 휴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10월 18~19일 서울대의 휴업령이 내려지지 않은 단과대(약대, 의대, 사대, 가정대, 공대, 교양과정부)가 수업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수도경비사령부 제33대대 2개 중대와 제26사단 76연대 2개 중대, 제1공수전투단 3개 대대가 수업 거부 움직임이 나타난 학교로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실제로 출동에 이르지는 않았다. 한편, 군이 진주하지 않은 한국신학대에서도 교직원들이 학생 제적을 거부하자 제1공수전투단에 대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실제 군 출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10월 21일 서울시경찰국 기동대가 학내에 진입했고, 학교는 학생 4명을 제적한 후 자진 휴업을 시작했다.주)003
10·15위수령 이후 다수의 학생 간행물은 발간이 금지됐고, 각 대학 이념서클이 강제 해산됐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제적됐다. 문교부는 모든 대학에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와 ‘제명 학생의 재입학 금지’ 등을 골자로 한 학칙 개정을 지시했다. 10월 22일, 7개 대학 학생회 기능이 정지됐고, 역시나 7개 대학에서 74개 단체가 해산됐으며, 5개 대학에서 14종의 미등록간행물이 폐간됐다. 또한, 23개 대학에서 174명이 제적됐으며, 35개 대학에서 교련 미수강자 6322명을 포함한 1만 3505명이 ‘학적 이동자’로 병무청에 신고됐다. 마지막으로 전국 84개 대학 전부에서 학칙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1971년 제적된 학생은 1학기 시위 과정에서 제적된 3명을 포함해 총 177명에 이르렀다. 그중 대다수는 수사기관에서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징집 됐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교련 미수강자를 모두 입영 조치하는 것은 가혹한 방침이라는 비난을 받자, 애초 제시한 안에서 한발 물러서 미수강자 학생들로 하여금 교련 이수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고, 위수령으로 제적된 서울대생 4명(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과 사법연수생(조영래) 1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위수령 이후 학원통제 체제를 공고히 한 박정희 정권은 더욱 강력한 집권체제 구축에 나섰다. 12월 6일 박정희 정권은 안보위기론을 앞세워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12월 27일 국가비상사태 선언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더욱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강행 처리했다. 이로써 학생운동은 완전한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박정희 정권은 본격적인 1인 독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주)004 한편 2018년 9월 11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위수령 폐지령안이 심의 의결돼 대통령령인 위수령은 제정 68년만에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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