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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악법반대운동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마산악법반대투쟁위원회의 시위현장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2대악법반대투쟁
영어표기
Struggle against Two Evil Laws
한자표기
二大惡法反對運動
발생일
1961년 3월 8일
종료일
1961년 4월 16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1년 3~4월 혁신정당과 진보적 학생단체 및 사회단체들은 장면 정부가 제정하고자 했던 ‘반공임시특별법(반공법)’과 ‘집회 및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데모규제법)’이 통일운동을 비롯한 진보적 사회운동을 탄압하려는 수단이라고 인식하고 그에 반대하는 항의와 시위를 전개했다.

배경

4월혁명 이후 혁신세력과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운동, 통일운동 등 각종 시위와 사회운동을 통해 정부에 사회개혁과 남북통일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특히 1961년 2월에는 한국 경제의 대미 종속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는데, 혁신계를 비롯한 진보세력은 7.29총선 이후 분열상태에 있다가 이때 다시 연대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면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다.

원인

장면 정부는 시위를 통해 제기되는 사회개혁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억압하려 했고, 특히 통일운동은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탄압하고자 했다. 1960년 11월 서울대에서 민족통일연맹(민통련) 발기대회가 개최되자 장면 정부는 국가보안법 개정 또는 보완 필요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61년 3월 8일 정헌주 정부 대변인은 ‘반공임시특별법(반공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데모규제법)’ 제정 문제를 임시 각료회의에 회부하기로 했음을 발표했고, 두 법의 시안이 3월 10일 민주당에 회부됐다.주)001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1일 제정된 ‘집회에 관한 법률’은 집회 및 시위를 하려면 24시간 전에 관할경찰서에 신고하도록 간단히 규정되어 있었다. 반면 장면 정권이 새롭게 제정하고자 한 데모규제법은 중요 건물 20m 이내 접근 불허, 동일 건물 앞에서 1시간 이상 시위 금지, 일몰 후 시위 금지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 법률을 ‘데모규제법’이라고 불렀다. 반공법은 1958년 이승만 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정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전개

장면 정부와 민주당의 2대악법 제정 시도에 대하여 학생단체들과 혁신정당, 진보적 사회단체들은 반대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1961년 2월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 연대하며 2대악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61년 3월 13일 11개 청년단체들은 ‘악법반대 전국청년단체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3월 16일에는 17개 학생단체들이 ‘악법반대 전국학생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학생공동투쟁위원회는 각 지방에서도 속속 결성되기 시작했다.

혁신정당들과 통일운동 단체,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들 역시 서로 연합해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1961년 3월 14일 10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이 ‘반민주악법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통일사회당도 2대악법반대운동에 동참했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결성 과정에서 분열했던 혁신정당 및 사회단체들도 연대하며 공동투쟁위원회에 동참했다.

서울지역에서 2대악법반대운동은 학생단체, 청년단체, 정당·사회단체들이 각각 결성한 공동투쟁위원회들의 연대로 진행됐다. 1961년 3월 19일 3개 공동투쟁위원회 실무자들이 민자통 사무실에서 만나서 서로 협조하며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고, 3월 20일 민자통 사무실에서 열린 실무자 연석회의에서는 3월 22일 횃불시위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1961년 3월 22일 ‘반민주악법반대성토 대강연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됐는데, 시민 1만 5000여 명이 여기에 참석했다. 강연회가 끝나자 학생 중심의 시위대 1000여 명이 횃불을 들고 시내 행진을 시작했는데, 이들은 서울시청에서 세종로 네거리, 종로, 동대문, 을지로를 거쳐 저녁 7시 30분경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해산했다. 그러나 일부 시위 참여자가 중앙청을 거쳐 명륜동 장면 총리 사저로 향하다가, 이를 저지하는 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때 두 법안의 제정에 찬성하는 반공단체들은 지프차에 스피커를 장착하여 집회장 주위에서 집회 방해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로 123명이 연행됐는데, 신현돈 내무부 장관은 횃불 시위가 공산당들의 수법과 똑같다고 비난했다.주)002
장면정부의 반공법 제정에 대한 반민주악법반대성토대회(국가기록원)

3월 23일 열린 내각 안보 회의에서는 시위가 폭력화하도록 만든 배후를 사찰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나오기까지 했다. 공동투쟁위원회는 3월 27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시위를 열고자 했으나 경찰의 봉쇄 조치로 인해 실패했고, 이후 서울에서는 더 이상 시위가 열리지 못했다. 다만 강원도 원주에서는 4월 1일 원주 공설운동장에서 악법반대대회가 열렸다. 경기도 수원에서는 4월 16일 범혁신동지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공설운동장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대법반대 통일촉진 성토 대회’가 개최됐다.

2대악법반대운동은 전국에 걸쳐서 수도권보다 더욱 강력하게 전개됐는데, 특히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의 대도시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다. 먼저 1961년 3월 13일 경북도의회는 두 법의 즉시 철회를 건의하는 대정부 및 국회 긴급 동의안을 가결(재석 55명 중 가 30, 부 12)했다. 사회당 경북도당은 지역 정당, 사회단체, 학생단체, 언론 등에 공동투쟁위원회 결성에 대한 초청장을 발송했고, 3월 14일 사회당 경북도당사에서 11개 정당·사회단체·학생단체들과 함께 ‘반공특별법 및 데모규제법반대 경북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궐기대회·공청회·가두선전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투쟁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대구 지역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 역시 ‘2대악법반대 경북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1961년 3월 18일 경북학생투쟁위원회 주도로 전국에서 최초로 규탄 대회가 개최됐는데, 이때 시민 1만여 명이 대구역 앞 광장에 모였다. 학생들은 2대악법 철폐뿐만 아니라 반공단체 해산, 국가보안법 철폐, 장면 정부 퇴진 등을 주장했고, 규탄 대회 후에 시내에서 행진하며 횃불 시위를 벌이는 한편 조재천 법무부 장관 집에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1961년 3월 21일에는 경북공동투쟁위원회 주최 하에 진보적 학생 단체와 정당, 사회단체 등 총 11개 단체 연합으로 대구역 앞 광장에서 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됐는데, 여기에는 통일사회당과 사회당 중앙간부들이 대거 참석했고 시민 1만 5000여 명이 모였다. 대회를 마친 후 시위대 3000여 명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경북도연맹의 선전차를 앞세워 시내를 행진하며 가두시위를 이어갔다.

1961년 3월 24일 경북학생투쟁위원회는 2차 궐기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에는 학생과 시민 3만여 명이 참석하여, 이 지역에서 4월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집회로 기록됐다. 학생들은 장면 정부의 탄압이 제2의 이승만의 만행이라고 규탄하는 의미로 이승만과 장면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가장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두 법이 반공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들을 빨갱이라고 몰아가려는 악법이라고 규정하면서 국회 심의 거부, 연행 학생 석방, 장면 정부 퇴진 등의 내용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대회를 마친 후 학생 1000여 명이 횃불시위를 진행했다.

안동과 상주와 같은 경북 지역 중소 도시들에서도 반대집회가 개최됐다. 1961년 3월 27일 안동에서는 민민청 안동군 준비회의 주도하에 악법반대궐기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시민 2000여 명이 참석했고, 같은 날 상주에서는 경북 민자통의 주도로 악법반대궐기대회가 개최됐는데 마찬가지로 시민 2000여 명이 여기에 참석했다.

경북학생투쟁위원회는 투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도 펼쳤다. 정만진 위원장은 서울을 오가며 악법반대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와 함께 연대투쟁에 관하여 논의를 했고, 3월 26일 경북대 학생 10여 명은 부산과 마산에서 상경한 학생들과 함께 서울에서 학생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경북학생투쟁위원회의 활동은 보수 학생 단체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시내각대학민주수호학생회와 4월혁명학생동지회 등의 단체들은 3월 하순부터 대구 지역 주요 일간지들에 반공법 제정을 찬성하고 경북학생투쟁위원회의 활동을 비난하는 호소문을 연달아 게재했고, 경북학생투쟁위원회 주도의 궐기대회가 열리던 3월 24일에는 다른 우익 단체들과 연합하여 반공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대악법반대운동이 점점 격렬해지고 비판 여론 또한 점차 확산되자 장면 정부와 민주당은 반공법 제정을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을 추진했다. 이에 1961년 3월 31일 경북학생투쟁위원회와 경북공동투쟁위원회, ‘2대악법반대 노조연합투쟁위원회’는 ‘2대악법반대연합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4월 1일에는 대구노련 경북지부와 노동조합연합회 주최로 노동회관 앞 광장에서 집회가 진행됐는데, 노조원 5000여 명이 시위와 가두행진에 참여했다.

2대악법반대연합공동투쟁위원회는 1961년 4월 2일 궐기대회를 계획했고, 경북학생투쟁위원회는 교원노조와 함께 선전물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하지만 당국은 집회를 불허했고, 이에 주최 측과 시민 5만여 명이 대구역 광장에 모이면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격렬하게 충돌이 일어나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때 경찰은 병력 2500여 명, 경찰 트럭 7~8대, 최루탄 차량 등을 투입하여 시위를 막고자 했다. 대구역 광장에서 충돌이 심해지자 시민들은 시내 곳곳으로 흩어져 횃불 시위를 진행했다. 이 사건으로 박지수·강창덕 등 혁신정당 인사와 학생 등 40여 명이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긴급 구속됐고, 경북학생투쟁위원회 간부 12명은 정권 타도를 목표로 다른 지역 학생투쟁위원회들과 모의했다는 혐의로 수배됐다.주)003

4월 2일의 대충돌 이후에도 대구 지역 항의와 시위는 계속됐다. 1961년 4월 4일과 5일에는 한국교원노조와 경북노조가 대구에서 개최된 전국교원노조대의원대회 자리에서, 4월 2일 집회 때 구속된 김문심 교원노조위원장의 석방과 2대악법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4월 7일에는 2대악법반대연합공동투쟁위원회가 수성천변에서 개최한 ‘2대악법반대 및 구속자석방요구대회’에 8000여 명이 집회를 가졌고, 집회 후 시위대는 수성천변에서 반월당까지 가두시위를 진행했다.주)004 4월 10일 한국교원노조는 대구여자중학교 강당에서 궐기대회를 가진 후 대구역 광장을 거쳐 경북교원노조 사무실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경북학생투쟁위원회는 4월 14일 수성천변에서 ‘악법반대 및 구금학생석방 궐기대회’(3차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 5000여 명이 참석하였다. 학생들은 대회 후 법원을 거쳐 대구역 광장까지 가두행진을 벌이며 횃불 시위를 이어갔는데, 시민 1만여 명이 여기에 동참했다.

부산지역에서는 대학생들이 결성한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 고등학생들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연대가 이루어졌다. 1961년 3월 23일 ‘악법반대 경남 학생 총궐기대회’에는 시민과 학생 총 1만여 명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시위 후 민주당사 앞까지 행진을 했다. 3월 25일에는 경상남도 정당·사회단체 공동투쟁위원회 주최로 부산역 광장 앞에서 악법반대궐기대회가 개최됐는데 여기에도 시민 1만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지프차 3대와 트럭 1대를 앞세워 행진을 했다. 4월 13일에는 다시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 주최로 악법반대성토대회가 열렸는데, 부산 시내 각 고등학교에서 학생 수천 명이 참가했다. 집회 후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은 연합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한편 부산지역 고등학생들은 독자적으로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3월 23일 총궐기대회 후 경남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용두산 공원에서 일으킨 야간 촛불 시위, 3월 24일 부산상업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이 마이크를 단 지프차를 앞세워 구호를 외치며 행한 시위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산에서도 3월 23일과 25일 2대악법반대집회가 개최됐다. 3월 23일에는 학생 2000여 명과 시민 수천 명이 참석하였고, 3월 25일에는 시위대 3000여 명이 지프차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했다.

대전지역에서는 혁신당 충남준비위의 주도로 1961년 3월 24일 악법반대 충청남도공동투쟁위원회가 조직됐고, 이들은 3월 26일 혁신계 정당, 사회단체, 교원노조 등에 공동투쟁을 제안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대전시노조연합회는 3월 25일 보안법 개악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했고, 대전교원노조는 3월 27일 악법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1961년 3월 30일 충남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하는 악법반대 성토대회가 대전천 백사장에서 개최됐는데, 이 대회는 원래 대전역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당국의 불허로 목척교 아래에서 진행됐고 시민 1000여 명이 참석했다. 다른 지역 시위에서 다양한 혁신계 인사들이 연사로 나온 것에 비해 대전 시위에서는 혁신당 인사들만 연사로 나온 것으로 보아 대전 내 혁신계 간의 공동 투쟁이 이 시기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이날 성토 대회는 가두시위로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는데, 여기에는 대중 강연 등을 통한 평화로운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혁신당 당수 장건상(張建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전라북도 전주에서는 혁신계 인물들의 주도로 1961년 3월 25일에 집회가 열렸는데, 시민 3000여 명이 여기에 참석했고 집회 이후 시가행진이 이어졌다. 3월 30일에도 2대악법성토대회가 개최됐다.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사회당 전남도당이 연합하여 만든 ‘2대악법반대 전남공동투쟁위원회’는 1961년 3월 25일 광주에서 악법반대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시민 5000여 명이 여기에 참석했다. 이들은 4월 1일에도 2대악법반대성토대회와 시가행진을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시민 6000여 명이 참석했다. 시위대는 ‘반민주장송’이라고 쓴 상여를 앞세워 가두시위를 벌였다.

결과/영향

장면 정부는 처음에는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961년 3월에는 두 법의 제정을 강행하려고 하였으나, 반공법은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대신에 기존의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식으로 처리하고자 했다. 1961년 3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안’이 정식으로 발표됐는데, 특히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반국가단체에 대한 선전·찬양 금지 조항과 예비 음모 조항이 강화됐다.

1961년 4월 국회 회기 이내에 두 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정부와 민주당의 강경 방침에도 불구하고 1961년 4월에 이르러서도 전국적으로 시위가 이어지자, 야당인 신민당은 다른 현안들을 먼저 처리하고 두 법에 대한 심의를 미룰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안’ 제정은 장면 정부가 두 법안의 국회 상정을 포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무산됐다.주)005
마산악법 반대투위의 고교생들이 무학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해인대학 학생회장의 격문을 경청하고 있는 광경(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대악법반대운동은 1960년 7.29총선 이후 분열되어 있던 혁신계와 진보세력들이 다시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과 2대악법반대운동 때 연대하게 되는 것을 계기로 진보세력은 단합된 모습으로 통일운동을 펼칠 수가 있었다.

이후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반공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군사정권은 진보적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여 혁명재판에 회부했는데, 이때 2대악법반대운동은 ‘특수 범죄’로 규정되어 이를 주도한 학생들은 가중처벌을 받게 됐다.

주)001
《동아일보》, 1961. 3. 8.(석간) 
주)002
《동아일보》, 1961. 3. 23. 
주)003
《동아일보》, 1961. 4. 4. 
주)004
《조선일보》, 1961. 4. 5. 
주)005
《조선일보》, 1961. 4. 24. 
멀티미디어
  • 장면정부의 반공법 제정에 대한 반민주악법반대성토대회(국가기록원)
  • 마산악법 반대투위의 고교생들이 무학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해인대학 학생회장의 격문을 경청하고 있는 광경(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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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선미, <4월혁명 시기 부산지역 고등학생의 현실인식과 실천 : 시위 참가자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5,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권 :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오승용, <제2공화국 민주주의와 혁신세력 : 전남지역의 조직결성과 활동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제8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8.
  • 윤애리, <4월 혁명기 대전지역 혁신세력의 조직과 활동>,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0.
  • 윤정원, <제2공화국 시기 대구지역 통일운동의 조직과 활동 : 민주민족청년동맹경북도맹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통권 108집, 한국사회사학회, 2015.
집필정보
집필자
이정민
집필일자
2021-11
최종수정일자
2023-09-08 10: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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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장면정부의 반공법 제정에 대한 반민주악법반대성토대회(국가기록원)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학생과 경관들 한때 난투>, 《조선일보》, 1961.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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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악법반대운동
  • 설명 마산악법반대투쟁위원회의 시위현장
  • 출처 3.15의거기념사업회(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