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부정한 방법으로 실시된 제4대 대통령선거, 제5대 부통령 선거를 가리킨다. 이승만 정권은 내무부와 여당인 자유당 주도하에 치밀한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경찰과 공무원은 물론, 정치깡패 등을 총동원해 선거운동에서 투표, 개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선거 당일 3.15마산의거 등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4월혁명 촉발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배경
1954년 사사오입개헌으로 연임 제한 없이 종신집권이 가능해진 이승만(李承晩)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두 야당 후보, 즉 민주당의 신익희와 무소속(진보당) 조봉암(曺奉岩)의 돌풍으로 선거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선거 막판에 신익희가 갑자기 사망한 상황에서 각종 선거 부정이 난무한 가운데, 이승만이 3선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승만이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선거와 함께 치러진 제4대 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 장면(張勉)이 여당인 자유당 후보 이기붕(李起鵬)을 꺾고 당선됨으로써 이승만 정권의 권력 연장은 더욱 어려운 국면에 처해졌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은 권력 연장을 위해 좀 더 확실한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에 옮겼다. 우선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사건’을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라이벌로 부상한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1958년 5월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재적의석 3분의 2 이상을 획득하지 못해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 연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개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에 1958년 12월 이른바 ‘24파동’을 통해 날치기 수법으로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역시 날치기로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지방자치단체장을 모두 정부가 직접 임명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이승만 정권에 유리하게 치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같은 맥락에서 1959년 4월에는 필화사건을 일으켜 야당지로 유명한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이런 기반 위에서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치밀하게 준비해나갔다.
원인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의 최대 목표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동반 당선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1959년 6월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각각 지명했다. 4년 전 1956년 정부통령선거 당시, 선거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까지 부통령 후보를 확정하지 못했던 자유당이, 이번에는 선거를 거의 1년 앞두고 조기에 후보를 지명한 것이다.주)001 그리하여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자유당은, 4년 전과 다르게 이기붕을 확실한 이승만의 후계자로 내세워 대통령선거는 물론, 부통령선거에서도 동반 당선을 계획했다.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에 맞서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趙炳玉)을,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각각 지명했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건강에 큰 이상이 생겼다. 조병옥은 선거 전에 병을 치료하고자 1960년 1월 29일 미국으로 떠났다.
1948년 5.10총선거를 비롯해 1960년 전까지 치러진 모든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항상 5월에 치러졌다. 당연히 1960년 정부통령선거도 5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일정에 맞춰 조병옥도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조병옥이 한국을 떠난 직후인 2월 3일, 1960년 정부통령선거일을 3월 15일로 앞당긴다는 발표를 했다. 명분은 농번기인 5월에 선거를 치르면 농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병옥이 건강 문제로 선거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겠다는 정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민주당은 항의했지만 이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민주당은 3월 15일 선거 일정에 맞춰 2월 7일 조병옥과 장면의 후보 등록을 마무리했다.
곧이어 민주당에 더 큰 불행이 찾아왔다. 2월 15일 미국에 있던 조병옥이 치료 도중에 사망한 것이었다. 1956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선거운동 도중에 사망한 이래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불행이었다.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교체하고자 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미 후보 등록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불허했다.
결국 1960년 대통령선거에는 야당 후보 없이 이승만이 단독 출마하게 되었다. 당시 헌법 규정에 따르면 단독 출마 시에는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의 지지만 받으면 당선이었다. 이승만의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던 상황이었지만, 경쟁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조직력만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득표 수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목표는 단순히 이승만 한 사람만의 당선이 아니었다.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도 함께 당선되어야 했다. 이승만 정권에게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이 절실했던 것은, 당시 이승만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60년 이승만은 만 85세였다.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이 60세가 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고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고 알려졌지만 과연 4년 임기를 온전히 채울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만약 임기 중 사망하게 되면, 결국 그 자리를 계승할 사람은 ‘대통령 승계권’을 갖고 있는 부통령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 입장에서는 이승만의 사망 시에도 권력을 연장할 수 있도록 이기붕을 대통령 계승권을 가진 부통령으로 반드시 당선시켜야만 했다.
문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이 더욱 이반되고 있던 1960년 상황에서, 이미 4년 전에도 장면에게 패배했던 이기붕이 다시 그와 맞서 이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조병옥 사망 전부터 대통령과 부통령 동반 당선을 위해 준비해놓았던 치밀하고 광범위한 부정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전개
최인규 내무부장관과 지방자치단체장 신규 임명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준비는 1959년 3월 최인규(崔仁圭) 내무부장관 임명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3월 20일 내무부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하고, 같은 달 내무부·외무부·재무부·법무부·교통부·체신부 장관으로 구성된 ‘6인 위원회’를 조직했다. 최인규는 취임사에서 “공무원들은 대통령선거에 있어 선거운동을 해도 관계없”으며, “이것이 나의 시정방침의 기본”임을 천명함으로써 공무원의 선거 개입 계획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주)002 그는 3월 26일 치안국장을 이강학(李康學)으로 교체했으며, 각 도 경찰국장과 총경급 인사를 대폭 물갈이했고, 5월 중 경북(1959. 5. 13.), 강원(1959. 5. 13.), 전북(1959. 5. 13.), 전남(1959. 5. 13.), 제주(1959. 5. 30.) 지역의 도지사를 새로 임명했다.
자유당과 내무부의 부정선거 준비
1960년 3.15부정선거에 쓰인 수법들은 그 직전에 치러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일종의 예행연습처럼 시도되었다. 그 시작은 1959년 6월 5일에 실시된 강원도 인제군의 국회의원 재선거였다. 선거 당일, 군인들의 외출 금지 실시, 군인을 동원한 검표 작업 등의 선거 부정을 통해 자유당 후보가 압승할 수 있었다.
최인규 내무부장관은 1959년 11월부터 각 시도 경찰국장, 지방자치단체장을 수시로 소환하여 선거 부정을 독려했다. 12월 5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그는 “대통령에 충성하지 않는 공무원은 정부에 둘 수 없다”고 발언했다.주)003 그리고 12월 22일, 자유당 제8차 중앙위원회에서 “명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이기붕 양 씨를 기필코 정부통령에 당선되도록 노력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주)004
1959년 8월 18일, 자유당은 당무회의에서 선거 부정을 위한 9인조 핵심 당원 조직을 비롯해, 일반 조직·노총 조직·여성 조직·특수 조직의 확대 강화를 결정했다. 나아가 1959년 8월 12일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을 제4대 민의원 신도환(辛道煥)으로 교체한 뒤 반공청년단체를 통합했다. 1959년 3월에는 임화수(林和秀)가 주도하는 반공예술인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단체는 모두 정치깡패들이 개입하는 어용 단체였으며, 3.15부정선거 과정에서 폭력 행사와 선전을 담당했다.
또한 자유당은 1959년 9월부터 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한희석(韓熙錫)을 임명했고, 선거자금 조달 및 부정선거와 관련된 대책 확립을 위해 1960년 1월 초부터 매일 1~2회씩 회합을 가졌다. 1960년 2월 24일 자유당 기획위원회 소속 한희석, 자유당 총무위원장 박용익(朴容益)은 반도호텔 809호실에서 최인규 내무부장관과 이강학 치안국장을 만났다. 여기에서 11억 1000만 환을 내무부 치안국에 교부하되, 각 경찰국에 500만 환(경남·경북·전남은 600만 환, 제주도는 200만 환), 각 경찰서에 200만 환, 각 경찰관 지서 및 파출소에 8만 환, 각 투표구 담당 경찰관에게 600만 환씩 배부하기로 합의했다. 이 금액은 곧바로 2월 25~26일 산업은행, 제일은행, 서울은행 융자를 통해 조달되었다.
2월 28일에도 반도호텔 809호실에서 한희석, 박용익,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崔炳煥)이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내무부 지방국에 2억 4000만 환을 교부하되, 서울특별시 및 각 도의 내무국장에게 200만 환(제주도는 100만 환), 각 시장에게 70만 환, 각 구청장에게 100만 환, 민의원의원 선거구 2개 이상 보유한 군의 군수에게 100만 환, 기타 군수에게 70만 환, 각 읍·면장에게 2만 환, 교육감에게 30만 환, 내무부 지방국에 116만 환을 배부하기로 합의했다. 이 금액은 이튿날 2월 29일 제일은행으로부터 융자를 얻어 조달되었다.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 반공청년단에도 1억 8000만 환이 지급되었다.
부정선거 예행연습이 실시된 경북 영일, 영주의 재선거
1960년 1월 6일, 자유당 선거정책위는 서울시 및 각 도당 조직부장회의에서 공무원들이 각 지방에서 득표 공작을 하도록 지시했다.
1960년 1월 18일, 재선거가 예고된 경북 영일·영주 지역에 경북도청 공무원들이 대거 파견되었다. 1월 21일, 영일 을구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김익로(金益魯)가 자유당의 심한 견제로 사퇴했다. 1월 23일 경북 영일군 을과 영주군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투표 개시 전에 자유당에 기표한 투표용지 40%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두는 ‘4할 사전 투표’, 3명·9명이 짝을 지어 조장이 기표 사실을 확인한 후 자유당 선거위원의 검수 끝에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3인조·9인조 공개 투표’가 실시되었다.
영일군에서는 개표 시작 1시간 만인 오후 11시 20분경, 민주당 측이 개표 참관을 포기했다. 영주군에서는 개표 당일 무소속 박용만(朴容萬) 후보가 공개 투표에 항의해 사퇴했으며, 오전 11시 민주당 황호영(黃虎榮) 후보가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그 결과 이들 재선거에서는 자유당 후보가 압승할 수 있었다. 이런 수법은 이후 3.15부정선거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정부통령선거 후보 등록 방해와 야당의 선거 강연 및 유세 방해 공작
1960년 1월 25일, ‘전국 각 시도 경찰국 사찰과’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각 지역 경찰서장과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여하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 대업 수행을 위해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 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지시했다.주)005 또한 최인규 장관은 2월 11일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현행 법률에 위배되더라도 공무원은 목을 걸고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위법이어도 자신이 “목을 자르지 않”으면 된다고 언급했다.주)006
한편 2월 10일, 반독재민주수호연맹의 정부통령 후보 등록 서류가 괴한에게 탈취되어 후보 등록에 조직적인 방해공작이 이루어졌다. 민족주의민주사회당 등 혁신계 후보자들이 2월 13일, 입후보를 포기했다. 후보 등록 서류 탈취 사건을 취재 중이던 신문기자 2명이 괴한에게 구타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2월 15일,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심장마비로 급서했으나, 장면 부통령 후보는 선거를 완주할 것을 천명했다. 그 후에도 민주당의 선거운동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방해를 받았다.
정부통령 선거운동기간 동안의 민주당원 피해 현황
1960년 1월 11일, 영일군의 재선거에 출마한 무소속 김익로의 찬조연설을 한 연사가 연설 도중 괴한에게 폭행당해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주)007 3월 9일에는 민주당 여수시당 재정부장 김용호(金容鎬)가 깡패의 구타로 사망했고, 선전부장 김봉채(金鳳彩)가 중상을 입었다.주)008 3월 10일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서 공개 투표에 반대하던 민주당원 이상근(李相根)이 그 지역 반공청년단장에게 살해되었다.주)009 3월 13일 전북 김제군에서 선거 참관인 윤영환(尹永煥)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주)010 민주당 중앙당은 3월 14일 테러에 의한 민주당원 피해자 56명의 명단을 발표했다.주)011
민주당의 ‘부정선거 비밀지령’ 폭로
1960년 2월 29일,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은 3월 2일 한강 백사장을 선거연설회 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서울시에 허가 신청을 냈다. 그러나 아무런 절차적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기획위원회는 서울시장 임흥순(任興淳)에게 압력을 행사해 장소 사용 허가를 취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3월 3일 민주당은 정부의 ‘부정선거 비밀지령’을 폭로했고, 자유당은 즉시 반박 담화문을 발표했다. 민주당의 폭로 내용 중 <3.15정부통령선거 전략 요지>의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은데, 이에 대해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고 평가했다.주)012
선거인 명부는 실재한 유권자 중 야당계와 사망자, 전거(轉居)자, 입대자를 조사하여 가공의 유권자를 약간 가입시켜 총 유권자의 4할은 당일 번호표를 주지 않을 방침이며, 3월 12일까지는 각 투표구 위원장의 인장함을 경찰에서 회수하여 여유 있는 투표용지에 전기 명부를 표식한 유권자 4할의 매수에 자유당 후보자에게 미리 찍어 놓았다가, 투표 당일 오전 3시경부터 투표구마다 씩씩한 반공청년단 50명, 자유당 50명으로 투표장 100m 주변을 철통같이 경비케 하고 당일 오전 6시 50분경, 일제히 자유당계 투표구 위원만 입회한 가운데, 4할을 투입시키고 나머지 6할은 오전 7시부터 투표케 하되, 경찰에서 조직해둔 9인조를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매수, 또는 위협하여 그중 3인조 조장이 조원 2명을 인솔하여, 기표소는 종전과는 달리 기표소 내에서도 서로 누구를 찍었는지를 볼 수 있게 칸을 막아놓고 조장이 자유당에 찍은 것을 확인한 뒤 용지를 접지 않고 투표함 옆에 있는 자유당계 위원이 재차 확인하여 투입 족족 몇 매가 투입되었는지 계산토록 공개 투표를 하여 최소 8할(무더기표까지 포함)을 자유당에 찍도록 하여 압도적 승리를 꾀하고 국제적으로 이 박사가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처럼 선전한다고 방안을 세웠음.
만일에 계획이 누설되면 제2안으로 투표함 운반 도중에 환표로써 전기 방법을 보충하고 섬에서는 이 방법을 감행함.
제3안으로 1, 2안이 뜻과 같이 못 되었을 때를 예측하여 미리 조작한 표로 환표를 하여 충당할 것임.
이 방법을 감행하는데 야당 위원이나 참관인은 사전에 못 나오도록 별 수단을 써서라도 제지하고 심하면 유혈극까지도 실행할 것임.
선거운동기간 중에는 자동차나 스피커, 연설 장소는 야당계에서는 일정 대차하지 않도록 할 것.
민주당은 1960년 3월 6일 오전,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에서 경찰, 면직원, 교직원이 유권자에게 훈련시킨 ‘3인조 심득상황(心得狀況)’ 부정투표 훈련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3인조 조원은 서로 간 성명을 암송합시다.
지정된 날은 다 같이 모의투표를 하여봅시다.
3인조 조장은 야당이 조원에 침투하나 철저히 감시합시다.
추모 투표는 절대로 하지 맙시다.
번호표는 대통령 투표가 끝나고 한 장은 종사원에게 제출하고, 부통령 투표가 끝나고 또 한 장은 종사원에게 제출하도록 합시다.
질서 있는 투표를 하여 시간별 동원에 복종합시다
첫 번째 투표는 작대기 2개 이승만, 두 번째 투표는 작대기 1개 이기붕에 도장을 찍도록 철저히 교양합시다주)014
나아가 3월 13일 민주당은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참관인 신고 불능, 자유당 공개 투표에 대한 대책 논의 끝에 ‘전국동포여! 민주구국운동에 나서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통령선거 전야와 당일 부정선거 양상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를 하루 앞둔 3월 14일 전국 각지의 선거 부정 진행 상황은 앞의 폭로 내용에서 예고한 바와 대동소이했다. 1) 유권자 번호표 일부만 교부. 2) 3인조·9인조 훈련과 참관인 공작. 3) 헌병·깡패 동원한 살벌한 분위기 조성. 4) 이중투표함, 비밀투표소 설치. 5) 강제 택시 징발, 시간제 투표 지시 등이다.
더불어 선거 당일에 감행한 부정선거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민주당 참관인의 투표소 입장 및 참관 방해. 2) 투표 시작 시간 전에 새벽부터 참관인 없이 진행된 사전 투표(지역에 따라 사전 투표율은 75~80%에 달했음). 3) 민주당 참관인에 대한 폭행과 축출. 4) 유권자와 취재기자 폭행. 5) 한 기표소에 3명이 함께 들어가는 3인조 공개 투표. 6) 투표하지 못하게 번호표를 교부하지 않음. 7) 참관인석에서 볼 수 없는 위치에 투표소, 기표소를 설치함. 8) 대리 투표와 무더기 투표 등.주)015
일례로 혁명재판 기록에 나오는 3.15부정선거 당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가) 1960년 2월 초순경,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면사무소 내에서 (…) 6명의 조원에 대하여 4할 사전 투표를 위하여 선거인 명부에 허위 사실을 기재할 것을 지시하여 (…) 동면 제3투표구의 선거인 명부를 공동으로 작성함에 있어 그 선거인 명부 등재자 1980인 중 ① 미기류자(未寄留者)를 1할(154인), ② 기전출자(旣轉出者)를 1할 5푼分, ③ 노쇠약자를 1할(172인), ④ 유령 유권자를 5푼分, 계 4할(704인)을 허위 기재케 하고,
나) 1960년 3월 15일 오전 4시경부터 같은 날 오전 6시 30분경까지 동면 눌노리 정관호의 집(전기 투표소인 파산국민학교 옆집) 건넌방에서 (…) 5명이 모여 투표구 선거위원회로부터 정부통령 투표용지 각 704매와 동 투표함 각 1개를 운반하여 놓고, 각 투표용지의 이승만 및 이기붕 란에 붓두껍과 인주로써 기표하여 그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 봉인하여, 동일 오전 6시 30분 그 투표함을 전기 투표소로 운반하여 민주당 참관인이 투표소에 들어오기 직전인 오전 6시 59분부터 일반 유권자로 하여금 투표케 하는 방법으로 투표를 위조하여 그 수를 증가시키고,
다) 1960년 3월 초순경 (…) 동면 금파리에 있는 동면 사무소에 자유당 유권자 이건태 등 242명을 모아놓고 27개의 9인조와 81개의 3인반을, (…) 동면 눌로리 파산국민학교(현 용연초등학교)에서 자유당원 유권자 권장오 등 371명을 모아놓고 41개의 9인조와 124개의 3인반을 (…) 각각 편성한 후, 동인 등에게 각각 투표 당일 자유당 완장을 착용하고 공개 투표하는 방식을 교양한 후, 자유당 완장을 각 9인조장에게 9매씩 분배하여 주고, 1960년 3월 14일, 또는 15일 오전 중에 각 조원에게 분배, 착용케 하여 동월 15일, 전기 제3투표소에서 사전 교양한 방법대로 전원 공개 투표케 하고,
라) (…) 1960년 3월 15일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전기 면내에서 소집한 자유당원 60명에게 자유당 완장을 착용케 하여 전기 투표소 100m 앞 주위에 배치하여 자유당의 위세를 보임으로써 타인의 투표에 영향을 주고,
마) 1960년 3월 15일 오전 9시경, 전기 제3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 심의설(沈宜卨)이 투표 개시 전에 투표함을 뒤집어 보이지 않고, 또한 참관인이 들어오기 전에 투표하였다는 이유로 부정선거 증명을 하여 달라고 선거위원장 이호창(李鎬昌)에게 요구하고, 대통령 투표함을 깔고 앉아 투표를 하지 못하게 하자, 이호창이 퇴장 명령을 하였으나 불응하므로 밖에 있던 성인경 순경을 불러, 동인을 퇴장케 함으로써 직권을 남용하여 동인의 참관권 행사를 방해하고,
바) 1960년 3월 15일 오전 5시 5분경, 동군 파평면 제3투표구 선거위원회 사무실에서 동 위원장 이호창은 동일자의 동인 명의의 선거위원회 투표록을 작성함에 있어 전기 나)항과 같이, 동인 자신이 대통령 및 부통령 투표 각 704매를 위조 투입하였으므로 사실상 투표자 수는 선거인 명부 등재자 1980인 중에서 기권자 57인과 전기 위조 투표 수 704인을 공제한 1219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의 목적으로 위조 투표 704인을 포함한 1923인이 사실상 투표한 것처럼 가장하여, 투표자 수가 1923인이라는 내용의 대통령 및 부통령 투표록 각 2통씩 허위로 작성하여 마치 진정한 것처럼 가장하여, 그중 1통씩은 동일 하오 8시 30분에 파주군 아동리에 소재한 파주군 개표구 위원장에게 제출하고, 잔여 1통씩은 그 시(時)경부터 파주면 사무소에 비치하여 각 행사함.주)016
민주당 선거 무효 선언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선거가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부정선거로 치러지자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당일 오전 10시 30분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마산시당이 내건 선거 부인 사유는 다음의 7개 조항이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치러진 선거의 여당 측 득표율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후보가 88.7%, 부통령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를 기록했다. 1960년 3월 18일, 선거 결과가 국회에 보고되자,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 무효 선언문을 낭독했다. 하지만 야당 의원이 모두 퇴장한 후 자유당 단독으로 정부통령 당선자를 공표하였다.
부정선거 이후 민주당원 시위
선거 후인 1960년 3월 16일, 서울 인사동 민주당 중앙당부 앞에서 3~500명의 시민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를 진행했다. 3월 18일 민주당 국회의원 50여 명이 3.15부정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국회에서 퇴장한 뒤, 국회의사당에서 서린동까지 침묵 시위를 전개했다. 3월 19일 민주당 목포시당원들이 3.15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유인물을 살포했는데, 이 과정에서 11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960년 4월 5일 민주당·민권수호국민총연맹·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 측은 민주당 의원부 연락처에서 철야농성을 감행했으며, 이튿날 6일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개최하여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날 현장에는 400여 명이 운집했고, 그중 수십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선언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정부는 집정 12년간에 거듭한 악정의 결과, 민심이 완전 이반되어 자유선거로는 도저히 정권을 연장할 수 없게 되자, 이번 3.15선거에 있어 최후의 발악으로 모든 불법과 극악수단을 무소불위로 구사하여 민주주의의 초석인 선거제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이번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바로 국민주권의 강탈행위이다. 그러므로 3.15선거는 전적으로 불법이고 무효임을 거듭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주)019
한편 1960년 4월 8일 밤부터 민주당 경남도당원들은 부산의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이튿날 9일 오전에는 100~200명의 당원이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진행했다. 또한 4월 11일 밤부터 대구 민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대구의 민주당원 100~200명이 이튿날 가두시위를 진행했고, 민주당원을 포함해 일반 시민 3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같은 날 저녁, 민주당 충북도당원 20여 명이 청주의 민주당 당사에서 15일 오전까지 농성했다. 4월 13일 민주당 경남도당원 50여 명이 부산에서 시위를 기도했지만, 경찰의 저지로 실패했다.
4월 14일 진주 민주당원 20명이 시위를 했으며, 같은 날 저녁에 민주당 전북도당원들이 전주 민주당사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4월 15일 민주당 함안군 당원들 10여 명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같은 날 민주당 전북도당원 100여 명이 전주에서 “불법 선거 무효”를 외치며 시위했고, 3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4월 16일 민주당 인천시 당원, 옹진군 당원 100여 명이 인천시 을구당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이튿날 시위를 감행하였고,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4월 17일 민주당 진주시당원들이 시위를 시도하였으나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남 창녕에서도 민주당원의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좌절되었다. 진해에서도 민주당원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경찰의 제지로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결과/영향
결과
1960년 3.15부정선거로 4대 대통령에 자유당의 이승만이, 5대 부통령에 자유당의 이기붕이 당선되어, 이승만 정권은 그들이 목표로 한 동반 당선을 통한 권력 연장에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선거 당일부터 민주당원들은 물론, 시민과 학생들이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저항을 계속했다. 이는 결국 4월혁명으로 발전하여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부정선거 관계자 처벌
4월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후,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1960년 5월 3일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5월 4일 치안국장 이강학, 5월 7일 자유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한희석이 각각 구속되었다. 1960년 7월부터 3.15부정선거 및 4월혁명 관계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3.15부정선거 실행 관계자로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 전 내무부차관 이성우(李成雨), 전 치안국장 이강학, 전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이 기소되었으며, 부정선거 자금 관계자로 전 재무부장관 송인상(宋仁相), 전 자유당 총무위원장 박용익, 전 한국은행 총재 김진형(金鎭炯), 전 산업은행 총재 김영찬(金永燦), 전 한국은행 부총재 김영휘(金永徽), 배제인(裴濟人)이 기소되었다. 부정선거 방조 관리 혐의로 전 공보실장 전성천(全聖天), 전 심계원장 최하영(崔夏永), 전 농업은행 총재 박숙희(朴璹熙)가 기소되었고, 부정선거에 가담한 자유당 기획위원으로 전 자유당 중앙위 부의장 한희석, 전 민의원 부의장 이재학(李在鶴), 임철호(任哲鎬), 전 자유당 정부통령선거 사무장 박만원(朴晩元), 전 자유당 조직위원장 이존화(李存華), 전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 정기섭(鄭起燮), 전 자유당 감찰위원장 정존수(鄭存秀), 전 자유당 선전위원장 조순(趙淳), 전 자유당 원내총무 정문흠(鄭文欽), 전 자유당 기획위원장 이중재(李重宰), 전 자유당 당무위원 유각경(俞珏卿)이 기소되었다.
또한 부정선거 기간 ‘6인 위원회’ 구성 등에 참가한 국무위원으로 전 문교부장관 최재유(崔在裕), 전 부흥부장관 신현확(申鉉碻), 전 농림부장관 이근직(李根直), 전 보사부장관 손창환(孫昌煥), 전 상공부장관 구용서(具鎔書), 전 교통부장관 김일환(金一煥), 전 체신부장관 곽의영(郭義榮)이 기소되었으며, 그 밖에 전 서울시장 임흥순 등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1960년 10월 8일, 4.19혁명일 경무대 앞 발포사건 관련자 2명을 제외하고는 부정선거 관련자에게 낮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그러자 여론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국회는 이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고자 먼저 1960년 11월 29일 제4차 개헌을 통해 ‘소급 입법’의 헌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이에 기초해 1960년 12월 13일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2월 31일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이 공포되었다. 1961년 4월 17일 특별재판소가 3.15부정선거 당시 내무부 관련자에 대한 1심 판결을 내렸다. 최인규에게는 사형을, 이강학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이후 자유당 관련자에 대한 1심 공판이 진행되던 도중에 5.16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이후 1961년 6월 21일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조직법’을 통해 4월혁명과 관련된 책임자를 비롯해 혁신계, 쿠데타 주도세력 중 ‘반혁명’ 세력을 함께 처벌하는 법률이 공포되었고, 7월 1일 ‘특별법의제에 관한 법률’에서 제2공화국기 부정선거와 관련된 처벌법의 계수를 천명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7월 21일 ‘특별법운영에 관한 규칙’을 통해 부정선거 관련자 중 죄상이 중한 인사만 처벌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9월 20일 혁명재판소 제4부는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61년 10월 14일 혁명재판소는 충남과 제주 지역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해, 전 충남도지사 김학응(金學應)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전 충남내무국장 윤승구(尹勝九)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전 충남경찰국장 전장한(全璋漢)에게 징역 5년, 전 제주도지사 전인홍(全仁洪)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언도했다.주)020 10월 16일에는 경남 지역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해, 전 경남도지사 신도성(愼道晟)에게 징역 6년, 전 경남내무국장 이수응(李秀應)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경남경찰국장 최남규(崔南奎)에게 징역 7년을 언도했다.주)021 더불어 1961년 12월 8일 혁명재판소는 전 경북도지사 오임근(吳琳根)에게 징역 6년, 전 경남북경찰국장 이정용(李正鎔)에게 징역 17년의 형을 확정했다.주)022
1961년 12월 21일 혁명재판소는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형을 다음과 같이 확정 발표했다.
전 서울시장 임흥순 형 면제(징역 12년에서 감형), 전 서울시경 사찰과장 강남희(姜南熙) 징역 7년, 전 경기도지사 최헌길(崔獻吉) 징역 5년, 전 경기도경찰국장 박사일(朴士一) 징역 7년, 전 경기도사찰과장 고종엽(高鍾燁) 징역 3년 6월, 전 전북지사 박정근(朴定根) 징역 7년, 전 전남도지사 이하영(李夏榮) 징역 5년, 전 전남경찰국장 양재철(梁在鐵) 징역 7년, 전 강원도지사 홍창섭(洪滄燮) 징역 6년, 전 강원경찰국장 손계천(孫繼天) 징역 7년, 전 강원내무국장 유진하(兪鎭河) 징역 1년 6월, 전 충북도지사 정인택(鄭麟澤) 징역 5년, 전 충북사찰과장 김상기 징역 3년(이상 부정선거 관련 지자체장 및 지역 경찰국 수뇌부),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 사형, 전 내무부 치안국장 이강학 무기징역, 전 내무부차관 이성우 징역 10년, 전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 징역 8년(이상 부정선거의 핵심 관련자인 내무부 수뇌부), 전 자유당 기획위원장 한희석 무기징역, 전 자유당 기획위원 이중재 징역 7년, 박만원 징역 7년, 박용익 무기징역, 이존화 징역 15년, 정기섭 징역 3년 6월, 정존수 징역 7년, 이재학 징역 3년 6월, 임철호 징역 15년, 조순 징역 7년, 정문흠 징역 3년 6월, 유각경 징역 3년 6월(이상 자유당 기획위원회 인사), 전 재무부장관 송인상 징역 15년, 전 부흥부장관 신현확 징역 3년 6월, 전 문교부장관 최재유 징역 3년 6월, 전 농림부장관 이근직 징역 7년, 전 보사부장관 징역 3년 6월, 전 상공부장관 구용서 징역 7년, 전 체신부장관 곽의영 징역 7년, 전 교통부장관 김일환 징역 2년 6월(이상 부정선거 관련 국무위원), 전 산업은행 총재 김영찬 징역 12년, 전 한국은행 총재 김진형 징역 12년, 전 한국은행 부총재 김영휘 징역 10년, 배제인 징역 10년(이상 부정선거 자금 관련자).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1963년 5‧16 2주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기소되었던 다른 사람들도 1963년 11월 25일 ‘정치범 석방 대상자’로 분류되어 대부분 석방되었다.
외부 반응
1960년 3월 16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는 기자회견에서 폭력으로 얼룩진 한국의 정부통령선거를 비판했고, 크리스천 허터(Christian A. Herter) 국무부장관 또한 유감을 표명했다.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는 1960년 3월 17일 사설 「썩은 승리」를 통해 선거 조작을 비난했으며, 《AP통신》은 3월 20일 <3.15선거와 한국 민주주의―고목에 핀 곰팡이>에서 투표장을 목격한 외교관과 외국 참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3인조·9인조 공개 투표의 진상을 폭로했다. 같은 날 《런던타임즈(London Times)》는 “이번 선거가 국민의 의사 표시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구절이 포함된 사설을 발표했다. 《뉴욕포스트(New York Post)》는 3월 18일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4선 확정이 “동남아 지역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하등의 명예도 되지 못한다”라고 논평했다. 《타임(Time)》 지는 3월 21일 사설 <경찰 통제하의 3인조 선거>를 통해 민주당 선거 강연회에서의 사복경찰에 의한 린치와 민주당원의 구타 사망 사실을 폭로했다. 《이코노미스트(Economist)》도 3월 21일 사설 <이 박사의 희미한 승리>에서 3.15부정선거의 구체적인 기법을 소개했다.
주)001
오제연, <1956~’60년 자유당 과두체제의 형성과 운영>, 《한국사론》, 50권, 2004, 450~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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