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26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독재 정치와 부정선거, 그리고 무차별 발포를 자행한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 이 시위에 굴복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날은 4월 19일 ‘피의 화요일’과 대비해 ‘승리의 화요일’로 불린다.
배경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을 통해 재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통령선거 규칙을 바꾸어 재선에 성공했다.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대통령 3선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을 삭제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해 적용되지 않게 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연임 제한 없이 무한 출마와 종신 집권이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금권과 관권을 총동원하고 개표 과정에서 부정을 자행하여 3선 연임에 성공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 또다시 출마한 이승만은 1958년 ‘24파동’, 즉 날치기로 통과시킨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으로 유리한 선거 환경을 만들었고, 나아가 확실한 승리를 위해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선거에 단독 출마하게 되었지만 여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李起鵬)과의 동반 당선을 위해 이미 수립한 부정선거 계획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민주주의 의식이 계속 성장하고 있던 시민과 학생들은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장기집권, 그리고 부정선거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고 저항 의지를 드러냈다. 약 2개월간의 4월혁명 과정은 마침내 이승만 정권 퇴진으로 모아졌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하야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원인
4월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60년 대구의 2.28학생시위, 대전의 3.8학생시위 등 초기 시위에서는 주로 학원 자유를 요구하고 학생의 정치 도구화를 비판했다. 3.15정부통령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학생들은 점차 공명선거 실시를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치러진 3.15부정선거 직후 시위에서는 3.15마산의거 등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요구는 4월혁명 내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3.15마산의거 당시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시신 발견을 계기로 4월 11~13일의 4.11제2차마산 의거 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하야 주장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현 사태의 모든 책임이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즉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퇴진이 혁명의 최종 목표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4월 19일 서울, 부산, 광주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에서도 비록 주된 구호는 아니었지만 이승만 하야 주장이 계속 나왔으나 이승만 정권이 유혈 진압하면서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계엄령 선포로 4월 19일 시위는 군병력을 동원해 일단 진정되었지만 시민과 학생들, 자국민을 학살하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더는 용인할 수 없었다. 4월 20일 이후 전국 곳곳으로 확산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하야 요구는 4월 25일 대학교수단시위에서 최우선 목표로 수렴되었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시위를 계기로 재개된 대규모 시위는 다음 날 26일 아침부터 큰 규모로 점화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전개
시위의 전개
1960년 4월 25일 밤부터 26일 새벽까지 이어진 시위는 통금 해제 시간인 새벽 5시경부터 재개되었다. 국회의사당 앞, 세종로, 종로4가 주변, 미아리 방면, 을지로2가와 4가 등지에 모여 있던 군중은 7시 가까이 되자 본격적으로 시위 태세를 갖추고 행진을 시작했다. 7시 45분경, 1만 5000명가량이 동대문 부근에 집결했고, 8시 30분경에는 순식간에 7만 5000명가량의 군중이 동대문과 세종로 사이에 집결했다. 이들이 외치는 요구사항은 재선거와 이승만 퇴진, 경찰의 정치적 간섭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주)001
시내 곳곳에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시민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서울 지역 계엄사령관 조재미(趙在美) 사단장과 연락장교 이석봉(李錫鳳) 준장은 직접 지프차를 타고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앞에서 시위대에 포위되었다.주)002
4월 26일 오전 9시경, 의사당 앞과 광화문 네거리에 1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9시 20분이 되자 광화문 네거리는 인파로 가득 들어찼다. 약 200명가량의 군인은 횡대 2열로 서서 중앙청에 이르는 50m의 차도와 보도를 완전히 봉쇄했다. 이때 약 1개 중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군중 쪽으로 다가와 이들을 강제로 밀어버리려고 시도했다. 시민들은 탱크를 피해가면서도 비켜서지 않았다. 이때 소복을 입은 한 여성이 탱크에 기어 올라가 만세를 불렀고 그 찰나를 이용해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탱크를 장악했다.
4월 26일 오전 9시경부터 서대문에 있는 이기붕의 집 앞에도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선거를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라는 플래카드를 준비한 학생들이 이기붕 집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전날 25일 밤까지 이곳을 경비 중이던 군대는 서대문 네거리로 철수한 채 원형으로 수비진을 치고 시위대와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기붕의 집 안에는 일가족은 물론, 집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9시 30분경, 시위대 선두가 이기붕의 집 안으로 돌입, 문 앞에 세워진 지프차 한 대를 밀고 나온 후 50~60명가량이 실내에 난입했다. 그들은 호화로운 가구와 장식품을 한 점씩 들고나와 불을 질렀다.
오전 9시 40분경, 광화문 방면의 시위 군중도 점점 늘어나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설치한 제1바리케이드를 뚫고 중앙청으로 돌진했다. 이때 경비병들이 최루탄 4개를 발사하고 공포(空砲)를 수백 발 쏘아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이를 실탄 발사로 오인해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이윽고 발포가 공포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광화문 쪽으로 집결했다.
한편, 시위가 점점 전 시가로 번져가고 있을 무렵인 오전 9시 45분, 파고다 공원(현 탑골공원)에 몰려든 수많은 시위 군중은 구호를 외치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보고는 “부숴버리자!”는 소리와 함께 굵은 철삿줄을 동상 목에 걸어 쓰러뜨렸다. 군중은 와이어를 맨 동상을 끌며 종로2가에서 화신백화점 앞을 거쳐 세종로로 몰려갔다.
오전 9시 50분경, 군중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광화문 시위대의 일부가 중앙청 쪽으로 꺾어 돌진했다. 시위대는 “경무대로 가자!”고 환호성을 올리며 제1바리케이드를 돌파, 국제전신전화국 앞까지 진출했다. 수많은 학생과 군중이 이들을 뒤따랐다. 그러자 중앙청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제2바리케이드에서 최루탄과 수백 발의 공포를 발사했다.주)003
오전 10시경, 시위 군중은 10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세종로에서 중앙로까지 도로를 가득 메웠다. 군대는 결국 반공회관 앞에 군용 트럭 4대로 경비병을 증강 시켜 제3바리케이드를 쳤다. 시위 군중은 “3000만 동포여, 총궐기하라”는 플래카드를 지프차 위에 내세우고 반공회관 앞까지 진출했다. 제4바리케이드인 경기도청 앞까지 군중이 진출하자 군에서 공포를 발사했고 시위대는 반공회관까지 후퇴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폭발적인 시위 양상은 미국이 직접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퇴를 촉구하도록 개입하게 만들었다. 월터 맥카너기(Walter P.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는 1960년 4월 25일 교수단 시위로 재점화된 시위가 26일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상황을 확인하고는 김정렬(金貞烈)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시급히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정부통령 재선거 문제와 이승만의 장래 역할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자신과 이승만 대통령의 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주)004 그리고 곧바로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 유엔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함께 경무대에 가줄 것을 제안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이를 수락했다.
긴박한 상황에 김정렬 장관은 곧장 경무대로 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 전날 25일에 신임 외무부장관이 된 허정(許政)과 함께 하야 문제를 깊이 논의했다. 이미 부정선거와 유혈 진압에 대한 항의 시위로 장면 부통령이 사퇴한 상황에 허정은 수석국무위원으로서 이승만 대통령 퇴진 시 권력을 승계할 위치에 있었다. 이승만은 아침 일찍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결심을 하고 비서관에게 하야 성명을 구술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구술을 하고 있을 때 송요찬(宋堯讚) 계엄사령관이 방문했다. 송요찬 사령관은 시국을 이대로 두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불가피하다고 보고하면서 시위 대표자들과의 면담을 부탁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계엄사령관을 만나러 육군본부로 갔던 일반 시민과 대학생, 고등학생 대표 14명은 조재미 사단장과 이석봉 준장의 안내로 오전 10시 10분경 경무대에서 송요찬 사령관을 만났다. 송요찬 사령관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자세히 듣고는 그중 5명만을 추려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했다.주)005 대표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작금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다”고 발언했다.
오전 10시 20분경, 처음으로 계엄사의 선무용 스피커가 이승만의 사임을 알렸다. 이어 10시 30분, 중대 발표를 예고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었다. 성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려고 공산당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고,
셋째는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행해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 발표가 이루어질 무렵, 월터 맥카너기 주한미국대사는 “이제는 미봉책을 쓸 때가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와 CIA 한국지부장 피어 드 실바(Pierre de Silva)와 함께 경무대로 향했다. 당시 경무대를 에워싼 군중은 주한미국대사 일행을 보고 환호했다.
경무대에 도착한 일행은 이승만 대통령, 김정렬 국방부장관, 허정 외무부장관을 만났다. 김정렬이 건네준 영어로 번역된 성명서를 보고 월터 맥카너기 대사는 4개의 조항을 하나하나 따져 물었다. 특히 성명서 첫째 항목에 들어가 있는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말에 대해 국민의 뜻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고 물으면서 사임 성명이 결정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 상황에서 애매한 말과 미봉책은 위험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며, 부정선거를 바로잡겠다고 반복해서 대답했다. 맥카너기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에 비유하며 한민족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추켜세웠고, 우회적으로 이승만의 사직을 권고했다. 회의가 끝나고 경무대를 떠날 때 맥카너기 대사는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주)006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전해지자 라디오는 임시 뉴스로 이 소식을 전했고, 각 신문은 즉시 특보를 제작해 벽에 붙이는 동시에 급히 가설된 마이크를 통해 이 사실을 전했다. 세종로 인파를 비롯한 도심지는 환호와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이 무렵 3.15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최인규(崔仁圭) 내무부장관의 신당동 집은 불길에 휩싸였다. 오전 11시 15분경 동대문경찰서 앞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정치깡패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경찰이 다시 발포하여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성난 군중은 경찰서 정문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오전 11시 45분에는 4월 19일 총탄에 급우를 잃은 수송국민학교 어린이 100여 명이 “국군아저씨들, 부모형제한테 총부리를 대지 마세요!”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오후 1시까지도 서울 시내의 법질서와 교통망은 완전 마비되었고, 주요 거리마다 꽉 차 있는 약 30만 명의 군중은 그칠 새 없이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살인 경찰 잡아내라”고 외쳤다.
1960년 4월 26일 오전, 4.19시위 이후 제2 규모의 시위를 벌이기 위해 한양대에 모여 있던 27개 대학 학생 대표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듣고 질서 수습이 우선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민권은 승리했다”, “질서를 지킵시다” 등의 내용이 담긴 플래카드를 만들어 앞세우고 거리로 나와 행진했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질서를 호소하는 한편, 시위대원들이 타고 있던 차량을 회수해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경무대 앞에 주저앉아 있던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종로4가 시위 군중에 끼어 있던 대학생 약 200명도 급하게 혈서로 “수습”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스크럼을 짜 “질서를 유지하고 건설하자”고 외치며 정연한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소방차에 ‘대학생 소방대’라고 써 붙이고, 불타고 있던 동대문경찰서 건물을 진화했다. 또한 경찰관들이 버리고 간 파출소에서 임시 질서유지반 집결소를 마련하고 파괴와 방화를 하는 일부 시위대의 파괴행위를 막았다. 대학생들의 질서 유지 호소에 시가지는 점차 안정을 찾았다.
결과/영향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 이후에도 4월 26일의 시위는 계속되었고 이에 따른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인천, 부산, 대구, 대전 등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 계엄사령부는 이날 전국적으로 24명이 사망하고 113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주)007
4월 26일 오후 2시부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2시간에 걸쳐 격론이 오간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즉시 하야 등 4개 항으로 된 시국수습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① 이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② 3.15정부통령선거는 이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③ 과도 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④ 개헌안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즉시 실시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또한 이날 서울대 등 서울 시내 26개 학생대표로 구성된 4.19의거학생대책위원회는 행정‧입법‧사법 등 삼부에 대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 행정부에 대하여
3.15부정선거의 원흉인 한희석, 최인규, 임철호, 장경근, 이존화, 전성천 등을 즉시 체포하여 엄중 처단할 것.
국제 여론을 오도하는 양유찬과 유태하를 즉각 파면할 것.
▶ 입법부에 대하여
반민주 악법인 보안법, 지자법(地自法)을 조속히 개정할 것.
경찰 중립화를 법제화할 것.
군정법령 제88호 등의 악법을 즉시 폐기할 것.
현 민의원 의원은 총사퇴할 것.
▶ 사법부에 대하여
사법부는 그 독립을 자존하여 행정부에 아부하지 말 것.
부정선거의 관리자인 김두일 대법관은 즉시 사퇴하여 법의 심판을 받을 것.주)008
이렇듯 대통령 사임은 기정사실화되었지만 이승만은 하야 성명 발표 때와는 달리 사임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 4월 27일, 비서들이 국회에 제출할 사임서를 초안해 내밀자 이승만 대통령은 서명을 거부했다. 여러 비서가 서명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사임하자마자 전국 혼란이 일어날 거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허정 외무부장관과 김정열 국방부장관이 수차례 만류한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굴복했다. “나 이승만은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사임서를 발표하고 국회로 보냈다. 이로써 이승만 정권은 11년 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어 수석국무위원인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 직무대행에 취임했다.
그리고 4월 28일 새벽, 경무대 관사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과 그의 일가가 자살했다. 같은 날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29일에는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 구속을 시작으로 국무위원과 자유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벌어졌다. 5월 3일 국회는 4월 27일 자로 제출된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선포했다.
5월 29일 이승만은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의 전송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통해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승만의 하와이행에 대해서는 독재와 부정선거, 유혈 사태 등의 원흉을 해외로 빼돌린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 후 이승만은 1965년 만 90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외부 반응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 각지에서 시위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관들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귀한 민주주의 투쟁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월터 맥카너기(Walter P.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는 개인 성명을 통해 “오늘은 한국과 그의 많은 우방들이 깊이 상기할 날”이라고 언급했다.주)009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 유엔군사령관은 4월 28일 합동참모부로 발신한 전문에서 “한국인들이 단지 미국인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책임하에 행동을 취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시위가 갖는 의의를 인정했다.주)010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은 4월 27일 성명을 통해,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창조된 개혁성안(改革成案)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민이 합심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주)011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4월 26일 석간 톱으로 <이 대통령 마침내 사임―그럼에도 50만 명 경성을 제압> 기사가 실렸고 4월 27일에는 <이 대통령 즉시 사임―한국 의회 결의안을 가결> 기사가 실리는 등 일본의 언론에서 4월혁명의 전개 양상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은 4월 27일 자 사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 성명이 나온 것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국 대중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주)012
주)001
“From COMUSKOREA to JCS”, Apr. 26, 1960, 19 April 2/2, Box 75, Central Decimal Files 1960, RG218, National Archive at College Park (홍석률,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 과정>, 《역사문화연구》 36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0, 167쪽에서 재인용)
주)002
조재미 사단장은 그 당시를 “그 소음은 마치 수돗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같았으며, 우리들은 이제 오도 가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죽음에 직면하였던 것 같은 공포를 어찌할 수 없었다”, “종로3가 근처에 이르자 지프차를 향한 박수 소리가 일어나고, ‘군인아저씨들 최고다!’는 외침이 들렸다”고 술회했다(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345쪽).
주)003
《동아일보》, 1960. 4. 27.(조간);《조선일보》, 1960. 4. 26.(석간);조화영 편, 위의 책, 163쪽. 조선일보는 “최루탄 10여 발을 쏘았으나 허사가 되자 약 3분간에 걸쳐 공포를 발사했다”고 보도했다(《조선일보》, 1960. 4. 26.(석간)).
주)004
홍석률, 앞의 논문, 170쪽.
주)005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4월혁명: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43쪽. 시위 군중 대표들이 이날 아침 이 대통령을 만난 사실은 분명한데, 모두 몇 명이며, 그들이 어떻게 선택되었고,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간인 대표로 경무대에 들어간 사람 중 하나로 알려진 유일라는 자신의 수기에서 군중 대표 14명 중 자신이 3명을 추려 민간인 3명과 학생 1명, 모두 4명이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 또한 대통령을 만나기 전, 송 장군이 “각하를 뵈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건 여기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각하와 직접 만나야 할 이야기들이니까요” 했다고 한다(유일라, <나는 대통령을 만나 하야를 권고했다>, 《실화》 6월호, 1960, 84쪽). 《동아일보》는 “시내 공설운동장 앞에서 시위를 하던 군중 대표 5명”이라 했고, 이들 중 유일라(25, 노동)와 김기일(34, 독학생)의 증언을 보도했다(《동아일보》, 1960. 4. 27.(조간)). 《조선일보》는 “시위 학생대표로 선발된 건국대 한규철, 경희대 김효영 및 시민대표 구경석 등 3씨는 …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라고 하였다(《조선일보》, 1960. 4. 26.(석간)). 몇몇 기록에서는 “계엄사령관을 만나려고 육군부대에 갔던 일반인·대학생·고등학생 대표 14명인데 그중 대통령을 만난 다섯 사람 중 선용, 한규철, 유일라, 김기일만이 알려졌을 뿐 나머지 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한국일보》, 1960. 4. 26.(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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