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부정선거와 김주열의 시신 발견, 그리고 고려대 학생 시위를 계기로 1960년 4월 19일 서울, 부산, 광주, 대구, 청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며 전개한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 이날 경찰의 집단 발포로 1백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4월혁명의 절정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배경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들어선 이승만 정권은 1950년대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 정치 파행과 거듭되는 선거 부정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미국 원조에 의존해 점차 재건되어가던 경제는 1950년대 후반 들어 미국 원조 감소로 급속한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와 경제적 침체는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반면에 1950년대 들어 전국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언론 발달과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민주시민 의식은 점점 성숙해갔다. 무엇보다 급속한 도시 팽창 결과, 1956년 정부통령선거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여촌야도 현상이 뚜렷해졌다. 즉, 농촌에서는 관권과 금권을 앞세운 여당이 유리했으나 도시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시민과 학생들을 기반으로 야당이 승리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일례로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 당시, 서울에서는 16개 의석 중 14석을 민주당이 차지했고 자유당은 1석밖에 얻지 못했다. 부산에서는 10개 의석 중 8석을 민주당이 차지했고 자유당은 겨우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광주에서도 3개 의석 중 민주당이 2석을 차지했고 자유당은 1석만 얻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러한 상황에서 치러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선거뿐만 아니라 부통령선거까지 동반 당선되어 확실하게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이 광범위하게 이반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선거로는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밀하고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 대통령과 부통령 동반 당선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행해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원인
1960년 3.15부정선거 당시, 대구, 대전,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이미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의 자유 보장, 학생의 정치 도구화 반대, 공명선거 실시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잇따랐다. 그러나 학생들의 요구에도 아랑곳없이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계획대로 치밀하고 광범위한 부정선거로 치러졌다. 그 결과 선거 당일부터 전국 곳곳에서 선거 무효를 선언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마산에서는 같은 날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이 일어나 격렬한 시위로 발전했다. 이 3.15마산의거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집단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부정선거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은 3.15마산의거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3.15마산의거 당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이 한 달 뒤 마산 앞바다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에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4월 11일에서 13일까지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서울의 대학생들을 움직이게 했다. 4월 18일 처음 시위에 나선 고려대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시내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았다. 피습을 당한 고려대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이 소식은 18일 밤부터 19일 오전 사이 다양한 매체와 언로를 통해 알려졌다.
4월 개강 이후 각 대학 캠퍼스에 모인 학생들은 그동안 일련의 사건들, 즉 학생의 정치 도구화, 노골적인 부정선거, 집단 발포로 인한 다수의 사망자 발생,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 발견 등에 분노해 대학마다 시위를 모색했다. 그러던 중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와 정치깡패의 테러가 발생하자 대학생들은 다음날인 19일, 곧바로 시위에 돌입했다. 고등학생 역시 침묵했던 선배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이에 동참해 거리로 나섰다. 대학생, 고등학생이 선도한 시위에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결합하면서 1960년 4월혁명의 절정인 4월 19일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전개
대광고 학생 시위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에 위치한 대광고 학생들은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 목격하고 그날 밤, 시위를 계획했다. 결의문 초안과 구호를 미리 성안한 후, 다음날인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대광고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동대문으로 행진했다. 학생들은 “1. 정부는 마산사건을 책임지라. 2.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3. 3.15협잡선거를 물리치고 정부통령을 다시 선거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주)001 종로5가에서 경찰과 반공청년단과 대치 중에 수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전 9시 10분경 교내에 남아 있던 200~300명의 학생들이 재차 시위를 감행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제지에 막혀 동숭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혜화동 로터리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였다.
서울대 학생시위와 국회의사당·대법원·중앙청 앞 진출
서울대 학생들은 1960년 4월 초순부터 시위를 준비해 4월 16일 밤, 서울 곳곳에 흩어진 11개 단과대에 연락을 취해 4월 21일 오전 11시 일제히 시위에 나설 것을 계획했다. 그런데 4월 18일 고려대 시위와 정치깡패 테러에 자극받은 서울대 학생들은 일정을 앞당겨 다음 날인 4월 19일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4월 19일 아침, 먼저 시위를 시작한 대광고 학생 시위대가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 앞으로 몰려왔다. 대광고 학생시위에 고무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도 오전 9시 30분경 곧바로 시위에 돌입했다.주)002 문리대 학생들은 “한국의 일천(日淺)한 대학사가 적색 전제(專制)에의 과감한 투쟁에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 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는 문장이 포함된 선언문을 발표했다.주)003
서울대 문리대 시위대는 종로구 이화동 입구에서 경찰과 처음으로 대치했고, 종로4가에서 경찰의 폭행으로 학생 일부가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숭동과 연건동의 서울대 법대·문리대·미대·약대·수의대 5개 단과대가 합류하여 종로2가까지 진출했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은 종로3가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앞에서 당일 처음으로 최루탄과 연막탄을 발사했다.
서울대 시위대의 목표는 세종대로의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본관) 앞 집결이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시청을 거쳐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나머지 시위대는 종로2가의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을 지나,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에 당도했다. 그 수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을지로6가의 서울대 사범대 1000여 명은 상대적으로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고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 학생 2000여 명, 혜화동의 동성중고 500여 명도 여기에 합류했다. 더불어 안암동의 서울대 상대 학생 2000여 명도 교문을 나와 동대문을 통과하여 종로4가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세종로를 거쳐 오전 10시 55분경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했다. 오전 11시 30분경, 서울대학교 학생대표들은 대법원(현 서울시립미술관) 행정처장을 만나 아래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3‧15선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에 대한 대법원장의 답변을 요구한다.
선거 소송을 양심적으로 판결해주겠는가.
평화적인 데모를 하는 학생들에게 강권을 써서 본의 아닌 불상사를 일으킨 데 대해서 책임을 규명하라.주)004
한편 오전 11시 35분경, 서울대 의대·약대 1000여 명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중앙청 앞에서 시위를 감행했다.주)005 오후 12시 5분경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 학생 4000여 명도 한강대교를 건넜다. 이들은 “경찰은 자유당의 사병이 아니다”, “평화적 시위는 국민의 권리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으로 향했고, 노량진에서 경찰과 충돌했지만 용산을 거쳐 서울역을 지나 중앙청 앞에 도착했다.주)006
전날 시위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았던 고려대 학생들도 대광고 학생들의 시위에 고무되어 30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오후 1시 30분경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낭독했다. “우리가 이미 주장해오던 모든 요구를 관철하고 다시금 이 참상을 야기시킨 책임자들을 문책할 것은 물론, 당국은 금번 3.15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데몬스트레이션을 계속할 것을 엄숙히 결의한다.”주)007
동국대 학생 시위와 경무대 앞 진출
동국대학교의 경우 학생대표 11명이 1960년 4월 5일과 10일에 모여 시위를 기획했다. 전교생이 참석하는 백성욱(白性郁) 총장의 문화사 강의가 있는 4월 18일을 시위 날짜로 정했으나 강의가 연기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4월 19일, 동국대 학생들은 시위에 돌입했다. 오전 11시경 중구 장충동에서 출발한 동국대 학생 2000여 명은 을지로를 거쳐 미국대사관(현 서울시청 을지로청사), 시청을 거쳐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주)008
동국대 학생들은 이미 다수의 학생이 집결해 있던 국회의사당을 지나 세종로를 북상하여 경복궁 앞 중앙청을 지나 경무대(현 효자동 구 청와대)로 전진했다. 이들의 뒤를 따라 서울대, 동성중고 학생들을 포함한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경무대로 가는 행렬을 뒤따랐다. 낮 12시 5분경, 동국대 학생들이 통의동파출소 앞에 당도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 붉은색 물을 발사했다. 이때 학생 1명이 복부에 공포탄 피격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주)009 더불어 낮 12시 10분경, 대법원 옆 서울지방법원 앞으로 집결했던 동국대, 건국대 학생 500~600명도 경무대 쪽으로 향했다.
비슷한 시각 종로구 안국동에서 카빈총으로 무장한 헌병대 300여 명이 중앙청으로 이동하였으나, 학생들의 투석으로 삼청동 방면으로 퇴각했다. 최루탄 투척, 권총, M1소총의 공중 사격 등 경찰의 진압 시도에도 시위대는 통의동 파출소를 점거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내부를 소각했다. 시위대에 함께 있던 청소년 300~400명은 경찰 사격에 저항하며 중앙청을 넘었고, 이들을 따라 시위대는 중앙청을 점거했다. 나아가 학생들은 종로구 창성동 국민대 앞을 지나 경무대로 향했고, 오후 1시 20분경 경무대 앞 마지막 바리케이드를 돌파했다.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첫 실탄 발포와 사상자 발생
오후 1시 30분경, 경무대 입구 경찰초소 앞에 집결했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실탄을 난사했다.주)010 이때의 사격으로 서울대 사대 손중근(孫重瑾)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20여 명이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되었다.주)011 서울대 문리대 김치호(金致浩)도 총격을 입고 수도육군병원(현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주)012 이때의 총격으로 서울대 학생 7명이 사망하고 7명이 총상을 입었다.주)013 또한 동국대 학생 노희두(盧熙斗)도 이때 총상으로 사망했으며, 경찰은 민가로 잠입한 학생들을 수색해 발견 즉시 무차별 구타했다.주)014
오후 2시경, 종로구 옥인동, 통의동 일대의 병원은 총상 환자들로 가득했다. 흰 가운을 입고 시위대에 합류했던 서울대, 연세대의 의과대학 학생들은 부상자 구호 활동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연세대 의대 최정규(崔正圭)가 총격으로 사망했다.주)015 이때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은 대통령 경호관 곽영주(郭永周)와 서울시 경찰국장 류충렬(柳忠烈)로, 곽영주는 경무대 앞에서 경관들에게 발사 명령을 내렸고 류충렬은 중앙청 앞 경찰기동대에 총격을 지시했다. 그리고 발포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내무부장관 홍진기(洪璡基)였다.주)016
서울 시내 비상계엄령 선포와 군의 개입
1960년 4월 19일 시위가 거세어지자 내무부장관 홍진기는 계엄령 선포를 건의했고, 국방부장관 김정렬(金貞烈)도 이에 동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승낙으로 오후 2시 30분경, 서울지구 일대에 국무원 공고 제82호로 경비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오후 1시로 소급 적용하여 선포되었는데, 오후 1시경에 이미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송요찬(宋堯讚) 중장이 임명되었고, 부사령관에는 장도영(張都暎) 중장이 임명되었다. 더불어 오후 2시 50분 경비계엄령은 비상계엄령으로 격상되었다.주)017
일찍이 3.15마산의거가 발생한 3월 15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에게 마산 지역의 작전통제권 해제를 요청한 바 있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이를 승인했으나, 마산 시내에는 헌병만 투입하고 전투 병력은 투입하지 않았다.주)018 또한 4.11제2차마산의거 발생 시에도 송요찬은 유엔군사령관에게 마산 지역 작전통제권 해제를 요청했다. 유엔군은 이를 재차 승인했는데, 군병력을 시위에 투입하지 않고 마산 외곽의 발전소 경비에 투입한 바 있었다.주)019
4월 19일 시위 당일, 국방부장관 김정렬은 비상계엄 선포 후 가평에 주둔한 국군 제15사단을 동원하고자, 하와이에 출장 중이던 매그루더 사령관을 대신해 유엔군부사령관 에머슨 커밍스(Emerson L. Cummings)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에 커밍스 부사령관은 제15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해제했다. 당시 에머슨 커밍스와 주한미국대사 월터 맥카너기(Walter P. McConaughy)는 “어떤 수용 가능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민들에게 발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주)020
시위의 격화
경찰의 총격에 분노한 시위대는 오후 2시 30분경, 중부소방서 및 중앙청 근처의 소방차, 경찰 백차와 군기관 지프차 등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세종로의 서울시경찰서 무기고(현 정부종합청사)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총격으로 좌절되었다.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세종로와 을지로, 종로 일대는 1만여 명의 학생으로 가득 찼다.
시위대는 남산에 위치한 서울중앙방송국 제1방송국의 점령도 시도했다. 김정렬은 방송국에 공병 2개 중대를 투입했고, 계엄령 선포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도는 좌절되었다.주)021 시위대는 오후 3시경 세종로의 반공회관을 점거, 방화했고, 오후 3시 40분경 태평로파출소에 진입, 방화했으며, 이윽고 자유당 기관지였던 세종로의 서울신문사를 급습, 시위대의 방화로 사옥이 전소되었다.
성균관대 학생 시위와 이기붕 집 앞 진출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은 본래 1960년 4월 20일 시위를 기획했으나, 4월 19일 당일 시위가 격화되어 오전 11시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나섰다. 광화문 앞에서 성균관대 학생들은 낮 12시 ‘제2경무대’라 불리던 서대문 소재 이기붕(李起鵬)의 집으로 향했다.주)022 이곳은 류충렬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기동경찰대와 헌병, 정치깡패들이 경비하고 있었다.
이들과 대치한 시위대는 낮 12시 25분경 연좌시위를 시작했고, 낮 12시 40분경 신촌에서 출발한 3천여 명의 연세대, 홍익대 학생들이 합류했다. 오후 3시경, 경찰이 시위 학생들을 연행해 맞은편 동양극장에 수용했는데 폭행을 일삼자 시위대는 동양극장에 투석을 감행했다. 잇따른 경찰의 총격으로 시위대는 오후 4시 30분쯤 철수했다. 저녁 7시, 경찰은 서대문·충정로 일대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연행했다. 그 무렵 용산구 청파동에 소재한 선린상고 학생들은 원효로에 있는 자유당 정부통령선거 중앙대책위원회 위원장 한희석(韓熙錫)의 집을 급습하여 집 안의 집기를 파괴했다.
시위대의 내무부·서울시경 앞 진출과 무장경찰의 무차별 사격
을지로 입구의 내무부(현 외환은행 본점) 앞에서도 서울대, 건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다. 중앙청과 경무대 앞에서 실탄 발포가 발생하자 시위대는 내무부 점령을 시도했다. 중앙청 앞 시위 대열에 합류했던 중앙대 학생 2000여 명은 오후 4시경, 내무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고 결의문 낭독 후,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오후 5시 30분경, 계엄령 선포를 알리는 벽보가 붙었고, 학생들에게 탈취된 2대의 소방차가 내무부 정문을 향해 돌진했지만 경찰의 총격으로 좌절되었다.
오후 6시 5분경, 서울시청 쪽에서 2대의 경찰 장갑차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해 소총과 경기관총을 발사했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주)023 시위대가 탈취한 소방차는 오후 4시 30분경, 남대문에 소재한 서울시 경찰국 앞으로 돌진했으나, 2층에서의 경찰 총격으로 다시금 좌절되었다. 당시 중앙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에는 10만여 명의 군중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경, 을지로에 남아 있던 학생 200여 명은 경찰에 진압되어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계엄 선포 후 오후 5시경, 무장경찰대는 경무대에서 중앙청, 세종로에 이르는 거리에 2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사격과 소탕 작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계엄령에 힘을 얻은 경찰은 보복 발사를 자행했고, 시위대에 합류하지 않은 학생들도 무차별 연행했다. 이때 태평로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내던 한 국민학생이 경찰의 일제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을지로 입구 내무부 앞에서도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7명이 숨졌다. 결국 시위대는 동대문과 혜화동으로 후퇴했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을 나눠 탄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나자 경찰서 안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저녁 7시경, 시위대는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해 집기를 파손했고, 돈암동과 미아리 일대를 누비다가 성북경찰서 앞에서 6명이 희생되었다.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은 시위대의 버스를 타고 차창 밖으로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의 총격에 희생되었다.
이후 시위대는 저녁 7시 통금 조치에도 불구하고 종로 일대의 파출소를 습격했다. 40여 대의 차량을 탈취하여 밤거리를 달리며 시위하던 군중은 동대문, 청량리 주변 파출소를 습격해 불태우고 30여 정의 카빈총을 탈취했다. 이들은 서울 동북부를 누비며 미아리를 거쳐 의정부 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곳에서 시위대는 창동 지서 경찰들과 한참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 무렵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안암동 고려대학교 뒷산으로 퇴각했다. 계엄군은 이들을 포위해 고려대 캠퍼스 안으로 몰아넣었다. 고려대 안으로 밀려 들어간 시위대는 약 1500명 정도였다. 계엄군은 무장한 시위대를 무리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투항을 유도했다. 서울시 계엄군사령관 조재미(趙在美) 준장은 고려대 안으로 직접 들어가 시위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시위대는 무기를 버리고 자진 해산하였다.
반면에 고려대에 들어간 시위대 중 약 200명의 어린 소년들은 철조망을 뚫고 안암동 쪽으로 빠져나가 이튿날 4월 20일 아침 6시 45분경부터 신설동 로터리와 성북구청 사이에서 계엄군의 지프차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약 30분 간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3대의 버스와 12대의 택시를 탈취해 거리를 폭주하면서 구호를 외치다가 아침 7시 20분경 출동한 성북서 기동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밤새 도시 무장봉기나 다름없는 시위를 벌인 사람들은 대학생을 포함해 대부분은 야간중고등학교나 공민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고학생이나 도시 하층민이었다.
계엄군의 서울 진입
계엄사령관 송요찬은 1960년 4월 19일 오후 5시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고, 저녁 7시 10분 다음의 항목이 포함된 매우 강력한 내용의 포고문 제2호를 발표했다. 저녁 8시에는 계엄 부사령관 및 각 지역 계엄사무소장을 임명하는 포고문 제3호를 포고했다.
오후 6시 30분부터 중랑교에 집결한 계엄군은 밤 10시경 사이렌을 울리며 서울로 입성했다. 이는 국무위원들이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서울 시내 군 투입 시각을 19일 밤으로 조정한 데 따른 것이었다.주)026 계엄군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1개 연대, 덕수궁에 1개 연대, 경복궁에 1대 연대가 배치되었다. 병력 배치 중 계엄군이 고려대학교를 포위한 뒤, 조재미 준장이 시위대 대표를 만나기 위해 대학 안으로 부관들과 함께 진입했다. 시위대 대표에게 고위 당국자와의 접견을 알선하겠다고 제안했으며, 시위대는 이를 받아들여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했다.주)027 계엄군은 비교적 조용하게 서울에 입성했는데, 시위대 중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무리도 있었고, 군인들 중 몇몇은 시위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주)028
송요찬은 서울에 진주한 15사단에 통금 해제 시각인 이튿날 20일 오전 5시 전까지 시위로 생겨난 각종 잔해를 청소하고, 탱크와 병력을 철수시켜 시민들의 눈에 띄지 말 것을 긴급명령으로 하달했다. 또한 4월 20일 새벽 3시 40분, 송요찬은 포고문 4호를 통해 무기나 ‘폭도’를 은닉한 자를 엄벌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주)029
또한 이날 오전 송요찬은 치안국장에게 아래 내용의 지시각서를 송부했다. “4월 19일에 일어난 데모 군중이나 학생들을 경찰이 수사함에 있어 1. 감정을 갖고 하지 말 것. 2. 인권을 존중하고 고문 같은 것을 하지 말 것. 3. 학생 혐의자에게는 조속히 흑백을 가려 정상이 경미하거나, 또는 혐의가 없는 자는 즉시 석방할 것.”주)030
결과/영향
피해 현황
《동아일보》는 1960년 4월 20일 자 기사를 통해 4월 19일 사망자 6명, 부상자 19명의 명단을 발표했다.주)031 계엄사령부는 4월 21일 오전 8시 현재, 서울에서 4.19시위와 관련된 94명의 사망자 명단을 발표했다. 수용 병원별 사망자 수는 수도육군병원(현 국군수도병원) 8명, 세브란스병원 22명, 경찰병원 2명, 백병원 5명, 성모병원 4명, 시립동부병원 10명, 수도의대부속병원 9명, 이대부속병원 9명, 서울대의대부속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 11명, 중앙의료원 7명, 시체로 인도된 7명 등이다. 더불어 서울 지역 민간인 부상자는 4월 19일 456명, 20일 3명으로 집계되었다.주)032
외부 반응
1960년 4월 19일 밤, 주한미국대사 월터 맥카너기(Walter P. McConaughy)는 경무대의 이승만을 접견한 자리에서 시위 군중에 대한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되며, 부정선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현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주한미국대사관 명의로 발표했다.주)033 미국 국무부장관 크리스천 허터(Christian A. Herter)는 주미한국대사 양유찬(梁裕燦)을 만난 자리에서, 비상계엄령이 바람직한 해결 방법이 아니며, 《경향신문》의 복간, ‘24파동’ 때 개정된 지방자치법 및 국가보안법의 폐지, 부정선거에 대한 인정 등의 권고 내용을 담은 각서를 전달했다.주)034 4월 19일 당일, 뉴욕의 모든 신문은 한국의 시위 상황을 보도했고 한국 경찰의 태도에 유감을 드러냈으며, 4월 19일 런던 발 《AFP통신》은 한국의 시위가 부정선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특별재판·혁명재판 및 발포 명령자 처벌
1960년 7월 7일, 서울지방법원은 4.19시위 당일, 성북경찰서 관내 미아리 북선파출소 부근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성북경찰서 서선파출소 정완종(鄭玩鍾) 순경과 성북경찰서 길음지서 권희용(權熙鎔) 순경에게 사형을 언도했다.주)035 특별재판소가 설치된 후 재심 공판이 진행 중이던 때에 1961년 5.16쿠데타가 발생했다. 혁명재판부가 구성된 뒤, 1961년 9월 26일 현장 검증이 실시되었으며, 10월 30일 정완종에게 징역 7년, 권희용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 12월 22일 상소 기각으로 정완종에 대한 원심이 최종 확정되었다.주)036 또한 4.19시위 당일 태평로파출소 앞에서 발포한 전 남대문경찰서 김종호(金鍾浩) 순경, 심영구(沈泳求) 순경, 이태수(李泰洙) 순경에 대해 서울지방법원은 7월 28일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961년 10월 7일 혁명검찰부는 서울역 앞 발포사건 용의자로 기소된 전 남대문경찰서 경사 백기순(白基淳), 순경 최재만(崔在萬), 야경원 신번규(辛鐇圭)에 대한 공소 취소를 신청했고, 혁명재판소는 이를 받아들였다.주)037 한편 경무대 및 통의동파출소 앞 발포 명령자에 대한 공판은 1960년 7월 13일 처음 개최되었고, 7월 20일 현장 검증이 실시되었다.
5.16쿠데타 후인 1961년 9월 5일 혁명재판부에 의한 현장 검증에서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郭永周)의 발포 지시가 확인되었다. 12월 21일 혁명재판소는 전 내무부장관 홍진기에게 무기징역,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에게 사형, 서울시경찰국장 류충렬에게 징역 20년, 서울시경경비과장 백남규(白南圭)에게 징역 3년을 확정했다. 이중 사형이 확정된 곽영주에 대해서는 당일 서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주)038 더불어 1960년 10월 12일 잠적한 전 내무부 치안국장 조인구(趙寅九)는 5년 후인 1965년 11월 5일 서울지방법원에 자수했다. 1968년 8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은 원심을 깨고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주)039
주)001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벅찬 젊은 가슴을 가다듬고>,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111~112쪽; 홍영유, 《4월혁명통사》, 4권, 천지창조, 2010, 239쪽.
주)002
《조선일보》는 시위 시작 시각은 9시 30분경으로, 《동아일보》는 오전 9시, 《기적과 환상》은 오전 9시 20분으로 기록했다. 《조선일보》, 1960. 4. 19.(석간);《동아일보》, 1960. 4. 19.(석간);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26쪽.
주)003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82~83쪽.
주)004
《대학신문》, 1960. 5. 2.;《동아일보》, 1960. 4. 20.(조간)
주)005
서울대학교 의과학생자치위원회, <백색 까운들의 수기>, 이강현 편, 위의 책, 157쪽.
주)006
중앙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젊음과 사랑과 조국과>, 이강현 편, 위의 책, 173~188쪽;《중대신문》, 1961. 4. 20.
주)007
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236~237쪽.
주)008
《동대시보》, 1960. 4. 30.;동국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동국 건아의 민주 기록>, 이강현 편, 위의 책, 133~153쪽.
주)009
《조선일보》, 1960. 4. 19.(석간);《동아일보》, 1960. 4. 20.(조간, 석간) 《4월혁명 투쟁사》는 이 때 경찰이 쏜 것이 권총이라고 기록했다.
주)010
발포 시각에 대해서는,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김정렬의 회고록에서는 1시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오후 1시 20분경으로, 《4월혁명 투쟁사》는 오후 1시 25분으로, 《동성춘추》는 오후 1시 40분으로 기록했다. 김정렬, 《김정렬 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 234~238쪽;《조선일보》, 1960. 4. 19.(석간);《동아일보》, 1960. 4. 20.(조간, 석간);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93쪽; 《동성춘추》, 1960. 5. 15.
주)011
《동아일보》, 1960. 4. 20.(조간, 석간)
주)012
《조선일보》, 1960. 4. 24.(석간)
주)013
《대학신문》, 1960. 5. 2.
주)014
《동대시보》, 1960. 4. 30.
주)015
《연세춘추》, 1960. 4. 27.
주)016
4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 4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483~484쪽; 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132~140쪽.
주)017
김정렬, 위의 책, 235~245쪽.
주)018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전문번호 732>, 1960. 3. 16.,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
주)019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전문번호 841>, 1960. 4. 12.,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
주)020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전문번호 952>, 1960. 4. 25.,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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