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동의어
- 원주선언
- 유사어/별칭/이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어표기
- the January 23 Wonju Declaration
- 한자표기
- 1.23原州宣言
- 발생일
- 1976년 1월 23일
- 종료일
- 1976년 1월 23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후기 ‣ 긴급조치 9호기 반독재민주화운동
- 지역
- 강원도 원주시
1976년 1월 23일 강원도 원주시 소재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열린 신·구교 일치주간(1월 18~25일) 기도회에 참석한 신·구교 성직자들이 전 민중과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그해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신구교 연합 종교인들의 '민주구국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이듬해 김대중납치사건을 계기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자 박정희 정권은 더욱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인혁당사건’주)001을 조작했고 이듬해 4월 관련자 8명에 대한 전격적인 사형을 집행했다. 이 사건은 반유신세력을 격분시켰으며, 특히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의 커다란 반발과 저항을 야기했다.
인혁당사건과의 연관하에 민청학련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에 관련된 김지하(金芝河)가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池學淳) 주교에게 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박정희 정권이 지학순 주교를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같은 해인 1974년 9월 원주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으로 이어졌다. 또한 개신교 지도자들도 시국사건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위로하고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반유신 세력을 제어하고자 했다. 이 같은 조치는 그해 1월 9일 밤 명동성당에서 민주수호기독자회 회장 윤반웅(尹攀熊) 목사 주도로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고, 기도회가 끝날 무렵 ‘민주수호기독자회의 개헌청원서명운동’이 전개되어 1천 2백여 명의 신도가 서명에 참여하는 등 반유신세력의 저항이 더욱 고조됐다. 천주교, 개신교 등 성직자들은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항거하는 입장 표명과 행동에 적극 나섰다.
1.23원주선언은 기독교 신·구교(개신교, 천주교) 성직자들의 연대 속에서 표명된 주장이라는 점에서 신·구교 연대의 역사적 연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과 교회 재일치 정신을 바탕으로 신·구교 일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구체적 행동의 일환으로서 세계성서공회연합회와 교황청 소속의 성서위원회가 성서의 공동번역 사업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1968년 천주교와 개신교 일부 교단이 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1977년에 번역, 출판을 완료했다. 문익환(文益煥) 목사 등이 이 과정에 적극 참여하면서 신·구교 성직자들의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이뤄진 측면 또한 중요한 배경이다.
1.23원주선언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1976년 1월 23일 원주교구 주교좌성당(원동)에서 개최한 기도회로부터 발단이 됐다. 당시 사제단은 매월 교구를 옮기면서 기도회를 개최했는데 1976년 새해 첫 기도회가 원주에서 열리게 됐다. 마침 교회력으로 ‘일치주간’이었으므로 신·구교 일치를 위한 기도회가 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개신교 측에서 많은 수의 신자와 성직자가 참석했다. 원주교구의 신현봉(申鉉奉) 신부가 강론을 맡았는데 일치주간에 치러진 행사였으므로 ▲일치란 무엇인가 ▲박정희 정부가 내세운 국민총화와 일치는 어떻게 다른가 ▲일치를 저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빈부격차·권력만능·언론부재의 현상과 부정부패의 만연 ▲신·구교의 일치문제 ▲일치를 위한 호소 등의 내용으로 강론했다. 이와 같은 강론의 내용이 선언문에 반영됐다.
1.23원주선언은 1976년 1월 23일 천주교 원주교구 성당에서 열린 신·구교 일치주간 기도회에서 행해진 신현봉 신부의 강론 요지를 성문화한 성명서이다. 성직자들은 기도회가 끝나고 교육원(기숙사)에 모여 제목 없는 성명서를 읽고 향후 적당한 시점에 언론에 발표하기 위해 서명했다. 성명서 발표는 사전에 합의한 것이 아니라 행사 후 참석자들이 대화하면서 이루어졌다.주)002 즉 기도회에 참석한 신·구교 성직자들이 서명한 이 성명서가 ‘원주선언’주)003이다. 서명자는 신교(개신교)측에서 문익환, 문동환(文東煥), 조화순(趙和順), 서남동(徐南同) 등이었으며 구교(천주교)측에서 함세웅(咸世雄), 신현봉, 김승훈(金勝勳) 등이었다. 따라서 1.23원주선언의 주체는 기도회에 참석한 신·구교 성직자들이었다.
1.23원주선언은 전문에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임을 거듭 확인하였다”라고 밝히면서 “전 민중과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우리의 견해”를 총 9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박정희 유신정부가 내세우는 ‘안보’와 ‘국민 총화’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안보니 총화니 하는 구호가 도리어 자유를 질식시키고 민주주의의 숨통을 끊음으로써 참된 안보와 총화를 해치게 하는 구실로 악용될 뿐”이라며 “안보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유보 내지는 사실상 포기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절도를 피하기 위하여 가진 재산을 모두 불태워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고 했다. 둘째,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민주주의 원칙을 제시했다. 즉 주권재민, 기본적 인권의 최고 우월성 보장, 인신 구속 영장제도, 죄형 법정주의, 비판적 언론의 자유, 신앙·사상·양심의 자유, 집회·시위·결사의 자유, 생존권 특히 노동 3권의 보장, 3권 분립의 원칙에서 특히 사법권과 입법권의 행정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정당 활동의 자유, 그리고 공명선거의 보장 등이다.
셋째, ‘국민총화’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국민총화의 적은 바로 부패와 특권이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억압과 착취의 질서이며 그로 인한 민권과 민생의 위축과 지나친 사회불균등이다. 총화는 침묵이 아니며 총화의 적은 비판과 저항이 아니다.” 넷째, 베트남의 티우와 크메르의 론놀주)004의 해외 도주 사례를 깊이 음미해야 한다고 하면서 “배는 난파되어도 선장용의 구명 보트만은 안전했다는 사실은 압제자의 운명과 민중의 운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일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섯째, 안보독재체제 강화를 위한 형법 개정, 전시상태 선언, 긴급조치 선포, 민방위대 조직, 사회안전법 제정, 방위성금의 강제징집과 방위세 신설 등 각종 조세의 중과, 국민에 대한 사찰과 통제의 강화, 민주인사와 학생의 투옥 등 극단적인 억압정책의 철회·취소·중지를 주장했다.
여섯째, 김대중에 대한 선거법 위반 재판, 박형규(朴炯圭) 목사에 대한 선교자금 횡령사건 재판, 김지하 사건, 김철(金哲) 구속 등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과 투옥된 민주인사, 애국학생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일곱째, “국민경제의 대외예속, 관료 독점자본주의의 부패성과 특권성, 그리고 이들로 인한 필연적 귀결인 물가고와 저임금, 중과세를 기초로 한 대중 핍박정책 등으로 도탄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권경제 폐지, 민중 생존권 보장 등을 주장했다. 여덟째, “외세에 의해 갈라진 조국을 재통일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존엄과 화해의 정신에 입각한 자주 외교를 펴야 한다. 이는 오늘날의 세기사가 동서간의 긴장완화와 모든 민족이 자주적 이익을 주장하는 시대로 향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지상과제다”라고 했다. 아홉째, “한반도에서의 핵전쟁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방지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냉전상태와 휴전협정의 불안정한 지속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화와 민족의 재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남북대화를 진전시켜야 된다”고 촉구했다.

위와 같은 내용의 1.23원주선언은 3.1민주구국선언사건 직전까지 서명이 진행되던 중 2월 중순경 일본의 정의평화협의회에서 이 선언을 원문과 일본어로 먼저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따라서 국내 정보 당국도 이 사실과 해당 문안을 입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23원주선언은 그 후 당국에 의해 3.1명동사건이 문제시되면서 그 와중에 하나의 사건으로 부각됐다. 애초에 신현봉 신부의 강론은 정보 당국의 기관원에 의해 고스란히 녹음됐고, 이 녹음을 기초로 신현봉 신부에 대한 입건 여부가 검토됐으나 최종적으로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는 비공식적인 통보가 있었다.주)005 그 후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구속된 신현봉 신부에게 1.23원주선언의 내용에 해당하는 강론에 대해 신문하고 이를 공소 사실로 기재하여 재판 과정에서 다툰 사실을 통해 볼 때, 1.23원주선언의 사건화는 3.1민주구국선언사건을 통해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3원주선언은 그로부터 37일 후 발생한 ‘3.1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두 선언의 주체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내적 연관성이 있으며, 당국 또한 3.1민주국선언 사건화 과정에서 1.23원주선언을 소급하여 공소 사실로 삼았기 때문에 두 사건은 외적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 원주기도회에 참석하고 1.23원주선언에 서명한 개신교 목사들은 그에 상응하는 개신교 측의 독자적인 선언을 준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에 따라 문익환 목사를 중심으로 한 3.1민주구국선언이 준비되기 시작했으며 발표로 이어졌다.주)006 이 점에서 볼 때 3.1민주구국선언의 원천과 배경은 1.23원주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23원주선언 서명자 8명 가운데 조화순 목사를 제외한 전원이 3.1명동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다. 3.1명동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18명 가운데 1.23원주선언 서명자가 7명이었다. 따라서 1.23원주선언과 3.1민주구국선언은 내용적 동일성뿐만 아니라 시간적 연속성과 참가자들의 중첩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같은 맥락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검찰 당국 역시 1.23원주선언과 3.1민주구국선언의 상관성에 대해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함세웅 신부, 신현봉 신부 등 1.23원주선언 서명자인 동시에 명동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검찰 측이 원주기도회 및 강론 등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질의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검찰은 3.1민주구국선언 기소문에 1.23원주선언의 내용(강론 내용)을 적시하여 공소 사실로 삼았으나 실제 사실(신현봉 신부의 강론 내용)과는 완전히 달랐다.주)007

본 자료의 경우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표시기준(공공누리)” 제4유형을 적용하여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항에 따라야 합니다.
멀티미디어, 연계자료의 경우 해당기관 또는 사이트의 저작권 방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 저작권 정책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