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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고려대학교도서관점거농성사건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1975년 고려대 4.7시위. 이날 시위에 이은 도서관 농성으로 고려대에 긴급조치 7호가 내려졌다.(고대신문사)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해당사항 없음
영어표기
the April 7 Korea University Library Sit-in Incident
한자표기
4.7高麗大圖書館占據籠城事件
발생일
1975년 4월 7일
종료일
1975년 4월 8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개요

1975년 4월 7일~8일에 걸쳐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구속 학생 석방과 인권 유린 행위 중지 등을 주장하며 격렬한 교내 시위를 벌였다. 7일 가두시위를 시도하다 경찰에 제지당한 고려대생들이 철야농성에 들어갔고 이는 8일까지 지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의 휴교와 고려대 내에서의 시위와 집회를 일체 금지하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배경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관련 활동 금지를 골자로 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된 이후 각 대학 학생운동은 침체기를 겪었다. 고려대는 그 전에 《민우》지·《야생화》지 사건으로 학생운동 핵심 세력이 구속되고 공안 당국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 조직적 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974년 전반기에는 고려대 학생운동 역시 침체 양상을 보였다.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1974년 4월 1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제2차 대의원 총회를 개최하여 ‘학생후생시설의 개선 보완, 방송시설 증설’ 등 학교 당국에 대해 총 21개 요구사항을 담은 종합건의문을 채택했다. 고려대생들은 폭압적인 정치 상황에 침묵한 총학생회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1974년 10월 이후 소강상태를 벗어나 다시 반유신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끈질기게 투쟁이 이어졌다.

1974년 10월 10일 고려대 교문앞 시위. 고려대는 10, 11일 연이은 대규모 시위로 일주일간 임시휴강에 들어갔다.(고대신문사)

1975년 봄이 되면서 대학가는 유신 반대 투쟁의 열기에 휩싸였다. 1975년 초반의 반유신 시위는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 석방된 교수·학생들의 복교·복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문교부는 석방 학생의 복교와 교수의 복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연세대, 한신대, 서강대 등은 복교·복직 방침을 밝혔고 대학생들도 이들의 복교와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와 집회를 계속했다.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지지와 언론자유의 실현 역시 당시 학생운동의 주요 이슈였다. 1975년 4월에 이르자 반유신투쟁은 더욱 고조됐다. 4월 1일 연세대생 500여 명이 ‘대학구국양심선언’을 발표했고 3일에는 연세대생 7000명이 참가한 긴급 학생총회를 열고 정문에서 투석전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같은 날 새로 이전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서울대생 2000여 명이 시위에 나서 최루탄이 터지고 투석전이 벌어졌다.

원인

1973년 11월 1일 고려대민우지사건 선고공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학가에서 유신 반대 투쟁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려대생들의 투쟁이 더욱 두드러졌다. 《민우》지·《야생화》지 사건으로 고려대 학생운동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로 인하여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학생이 적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은 고려대에서 조기에 학생운동 세력이 재건될 수 있는 요인이 됐다. 청년문제연구회, 민족이념연구회, 도산연구회 등의 서클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성장했고 이 서클들의 구성원들이 상호 교류하면서 학생운동의 구심을 만들었다. 조성우(趙誠宇)·함호철·심재훈·도천수(都天洙)·설훈(薛勲)·홍의락(洪宜洛) 등은 인천 영종도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고려대 학생운동 조직의 재건에 매우 큰 역할을 한 이는 조성우와 한경남(韓慶南)이었다. 이들은 일찍 군에 입대하여 1971년 위수령을 피할 수 있었다. 조성우는 1972년 청년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수 이념서클인 청년문제연구회를 학생운동 조직으로 변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청년문제연구회는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고 함호철, 설훈, 홍의락, 도천수 등이 가입하여 비밀결사를 맺고 반유신투쟁을 주도하는 조직이 됐다. 한경남은 민족이념연구회의 창립 회원이었다. 그는 고려대 내 다른 이념서클인 ‘한국민족사상연구회’(한사회)의 간사직 제의를 거절하고 ‘사회과학적 학생운동’을 지향하기 위하여 새로운 조직에 참가했다. 민족이념연구회는 한경남의 복학을 계기로 반유신투쟁에 주력하는 조직이 됐다. 또한 박계동(朴啓東), 최규엽(崔圭曄), 문학진(文學鎭), 신태식(申泰湜) 등이 가입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조성우 구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더불어 고려대생들의 사회 참여 의식 역시 고려대에서 이후 격렬한 시위가 발생한 주요한 요인이었다. 1975년 3월 25일 고려대 총학생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고려대생들은 총학생회의 사업에 대하여 ‘적극적 참여’ 16.4%, ‘소극적 참여’ 47.2%, ‘전혀 불참’ 15%, ‘관심 없음’ 20.5%로 참여 학생의 비율이 높았다. 다음 날 고려대 총학생회는 이러한 설문 결과를 반영하여 언론탄압과 석방 학생들의 복교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주)001

고려대 총학은 성명서에서 “현실은 행정부 일변도의 유명무실화된 삼권 분립, 억압과 기만 속에서 타락한 사이비 언론, 물리적인 힘만이 작용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인권 유린행위의 즉각 중지와 진정한 민주 체제의 확립’, ‘언론에 대한 즉각적인 탄압 중지와 언론인들 스스로의 일관된 자유언론투쟁의 계속’, ‘석방 학생의 조속 복교’, ‘《민우》지 관련 학우들의 석방과 《야생화》지 관련 학우들의 사면’ 등을 요구했다. 이 성명서에 대하여 청년문제연구회, 민족이념연구회, 불교학생연구회, 한국미래연구회, 기독학생회, 국제연합고려대학생회, 유네스코 고려대학생회, 자진근로반, 컴퓨터연구회, 도산연구반 등 14개 서클이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주)002

전개

4차례 교문 앞까지 진출한 1975년 3월 31일 고려대 시위(고대신문사)

성명서 발표 이상의 행동을 추구한 학생운동 세력은 총학생회와 별도의 투쟁을 준비했다. 3월 27일 권순성(權純成), 박구진(朴九鎭), 설훈, 김관회(金寬會), 문학진, 최규엽, 신태식, 신계륜(申溪輪) 등 고려대 2·3학년들은 시위 집행부를 구성하고 조직 동원과 선언문 작성, 시위대 선봉, 플래카드 관리 등의 역할을 분담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그리하여 3월 31일 오전 10시 고려대생 1500여 명이 대강당에 모여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유신헌법 철폐, 미석방학생 석방, 고문정치 원흉 처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4차례 교문 앞까지 진출했다가 경찰의 저지를 받고 강당으로 돌아갔고 학생 200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고려대생들의 시위와 농성에 대하여 문교부는 ‘학원질서의 확립과 지도 철저’라는 경고 공한을 고려대에 발송했다.

4월 1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긴급대의원총회를 열고 향후 학생운동의 방향을 발표했다. 그들은 강연회 등의 비운동적 방법과 함께 행동적 방법을 전 고려대인의 참여 속에 병행할 것을 예고했다. 경찰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총학생회 간부와 민족이념연구회 회원들을 사전에 연행하자 지도부의 공백이 발생했지만, 고려대생들은 현장에서 비상총학생회를 구성하여 시위를 밀고 나가기로 결의했다.

1975년 4월 7일과 8일 고려대는 연이틀 경찰과 충돌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대신문사)

4월 7일 고려대생 1500여 명은 오후 5시에 대강당에 집결했다. 이들은 “대학의 본령은 진리의 발견과 수호에 있다. 자유 정의 진리의 길을 막는 어떠한 불의와도 투쟁할 것”이라는 입장의 ‘석탑선언문’을 채택했다. 학생이 오후 6시경 교문 앞에 도착하자 정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3대의 가스차에서 학교 안으로 일제히 가스를 발사했고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학생들은 닫힌 문을 열고 가두시위를 기도했으나 교문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학생들은 밤 9시까지 교문 앞에 앉아서 농성을 벌이며 “민주헌정의 즉각 회복, 《민우》지, 《야생화》지 관련 학생 즉각 석방, 인권 유린 행위 중지” 등을 요구했고 500여 명이 남아 도서관에서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다음 날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8일 오전 9시 도서관에서 철야 농성한 500여 명과 아침에 등교한 500여 명 등 총 1000여 명의 고려대생은 스크럼을 짜고 교정을 한 바퀴 행진한 다음 대강당에 모여 비상총학생회를 열었다. 그동안 학생 수는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자유토론을 가진 후 오전 10시 30분경 교정으로 나가 시위를 벌이며 대치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결과/영향

고려대생들이 반유신투쟁을 격렬히 전개하자 박정희 정권은 4월 8일 오후 5시를 기해 고려대를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주)003 이에 따라 고려대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고려대 내에서의 시위와 집회는 모두 금지됐다. 휴교 조치 이후 학교에 진주한 군인의 경비가 실시되면서 학생과 교수들의 학교 출입이 금지됐고 교직원의 출입도 통제됐다. 김상협(金相浹) 총장은 4월 10일 긴급이사회에서 긴급조치 7호에 의한 휴교 사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또한 반유신시위에 참가하여 구속되거나 구류 처분 등을 받은 학생에 대해서는 제적 등 강경 조치가 취해졌고 고려대에서 총 41명의 학생이 제적당했다.주)004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늘어서있는 학생들과 취재진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001
《고대신문》, 1975. 4. 1. 
주)002
고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224-228쪽. 
주)003
<대통령긴급조치 7호 발동>, 《동아일보》, 1975. 4. 10. 
주)004
고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2005, 228-232쪽. 
멀티미디어
  • 1974년 10월 10일 고려대 교문앞 시위. 고려대는 10, 11일 연이은 대규모 시위로 일주일간 임시휴강에 들어갔다.(고대신문사)
  • 4차례 교문 앞까지 진출한 1975년 3월 31일 고려대 시위(고대신문사)
  • 1975년 4월 7일과 8일 고려대는 연이틀 경찰과 충돌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대신문사)
  • 1973년 11월 1일 고려대민우지사건 선고공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늘어서있는 학생들과 취재진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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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우 구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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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천수 구술(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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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구진 구술(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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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엽 구술(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고대신문》, 《동아일보》
  • 고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2009.
집필정보
집필자
정무용
집필일자
2024-11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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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고려대학교도서관점거농성사건
  • 설명 1975년 고려대 4.7시위. 이날 시위에 이은 도서관 농성으로 고려대에 긴급조치 7호가 내려졌다.(고대신문사)
  • 출처 고대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