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유사어/별칭/이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어표기
- the Kim Chi-ha’s Declaration of Conscience
- 한자표기
- 金芝河良心宣言事件
- 발생일
- 1975년 8월 4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 지역
- 전국, 국외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75년에 풀려난 김지하(金芝河)를 재구속하고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면서 생명을 위협했다. 김지하와 민주화운동 세력은 합력하여 ‘양심선언’을 작성하여 국내외에서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김지하에 대한 구명운동이 국외에서 광범하게 전개됐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에서의 시위를 시발로 유신반대운동이 대학가 전체로 확산했다. 재야민주화운동 세력도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유신정권은 유신반대운동을 거세하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중앙정보부는 다수의 학생을 구속하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인혁당)라는 단체를 고문으로 조작하여 이들이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것으로 몰아갔다.
긴급조치 1호와 4호의 발동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잠시 주춤했으나 1974년 하반기에 이르러 점차 확산, 강화됐다. 12월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조직됐다. 유신체제에 대한 국내외 여론이 악화하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은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했으며, 2월 15일과 17일에는 긴급조치 1·4호 위반자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이때 풀려난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은 자신들이 겪은 강압 수사와 인권유린, 혹독한 고문을 폭로하는 것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앞서 종교계에서는 인혁당 관계자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유린을 세상에 알렸으며, 2월 24일에는 ‘인혁당사건(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에 대한 당시 지칭)’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했다.주)001
1974년 4월 25일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김지하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이듬해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하지만 3월 13일 오전 10시경 서울 성북경찰서 정보과 직원에 의해 다시 연행되어 중앙정보부로 넘겨졌다. 당일 오후에는 중앙정보부 직원이 김지하의 자택과 처가인 박경리(朴景利) 집을 수색하여 옥중수첩과 그가 보관하던 책, 편지 등을 압수해 갔다.

당시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고행…1974>라는 제목으로 1975년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회에 걸쳐 기고하면서 인혁당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고, 민청학련과 인혁당사건이 비인간적인 고문에 의해 날조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는 민청학련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인혁당 관계자 하재완(河在完)과 이수병(李銖秉)과의 대화 내용을 알리고, 인혁당사건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의 결과”였다고 주장했다.주)002 지면을 통한 활동 외에도 그는 <인혁당사건 진상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찾아가 증언하였으며, 3월 1일에는 일본 교토통신 특파원 등 내외신 기자와의 회견에서 “정부는 조속히 인혁당 관련자를 비롯 구속자 전원을 석방하고 석방자 전원을 사면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튿날에는 일본 산케이신문(産経新聞) 서울특파원과의 일문일답 회견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인혁당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폭로했다.주)003
이것이 김지하를 또다시 연행하여 구속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김지하보다도 앞서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관계자들이 인혁당사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공개재판하라고 주장했는데도 김지하만이 구속됐다. 이에 대한 논란은 3월 17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도 제기됐다. 송원영(宋元英) 신민당 의원은 “김씨와 똑같은 주장을 한 정의구현사제단 인사와 민주회복국민회의 인사들도 재구속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황산덕(黃山德) 법무장관은 2월 24일의 기자회견을 통해 인혁당을 찬양 고무하게 되면 반공법으로 다스리겠다고 발언한 것을 거론하며 “김지하 시인 한 사람만이 공공연하게 인혁당을 찬양하는 말을 해서 구속한 것”이라고 답변했다.주)004
김지하는 연행된 바로 이튿날인 3월 14일 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김지하가 재구속되자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본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전문을 발송하고, 김지하의 석방을 촉구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도 한국기자협회 사무실에서 김지하의 재구속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최근의 사태에 대한 문학인 165인 선언’을 발표했다.주)005 3월 18일에는 일본 문학평론가 아오치 신(青地晨), 사회학자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한국 작가 정경모(鄭敬謨), 미국의 한국인인권옹호위원회 대표 니콜라 가이거(Nicola Geiger) 등이 참석하여 회견을 갖고 김지하와 정치범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주)006

하지만 중앙정보부는 김지하를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로 얽어매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옥중수첩에 기술된 사회주의 관련 어휘들을 문제 삼아 김지하를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신문을 거듭했으며, 5-6회에 걸친 조서 작성 과정에서 당국의 목적은 관철되어 갔다. 김지하의 회고대로 “결국은 피로감의 절정에 이르러서 잠을 재워준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라는 그들의 주장에 반쯤 동의하는 형식”으로 취조가 끝났다.주)007 3월 19일 서울지검에 김지하를 송치한 중앙정보부는 송치의견서에서 “공산주의자의 활동을 인류애의 표현인 것처럼 주장, 선전”했다고 적시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김지하 자신이 “우리가 잘살 수 있는 길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무산계급의 혁명에 의하여 현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자필로 진술했다고 밝혔다.주)008
차츰 김지하의 생명을 위협하는 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4월 9일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전격적으로 처형했으며, 이 무렵 검찰은 최고 7년 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반공법 제4조에 더하여 같은 종류의 범죄를 여러 차례 저질렀을 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도록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주)009 5월 13일에는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했다. 또한 당국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김지하를 완전히 매장하기 위해서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는 제목으로 김지하의 진술서를 외국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배포했다.주)010
이러한 불길하면서도 위급한 상황에서 민주화운동 세력이 그를 살리기 위해 먼저 시도한 것이 재판부 기피신청이었다. 제1차 공판을 앞두고 변호사 접견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통해 김지하와 통신을 하면서 재판부 기피신청을 준비했다. 마침내 5월 19일 열린 공판에서 김지하가 직접 “재판장이 인혁당을 재판한 판사로서,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나의 발언이 문제된 이 사건에서, 인혁당사건에 대한 예단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만큼 재판부 기피신청을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로써 재판이 연기되고 위기의 순간을 한 차례 넘길 수 있었다.주)011 하지만 보다 확실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재판부 기피신청에 따라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면서 고안한 것이 바로 ‘김지하의 양심선언’이었다. 교도소에서 김지하가 양심선언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밖으로 가져와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 구명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이었다. 한마디로 ‘양심선언’이라는 것은 제도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진실을 알리려는 것인데, 이러한 계획을 누가 발상했는지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김지하는 윤형중(尹亨重) 신부의 착상에서 나온 것으로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지만주)012 조영래(趙英來)의 발상이었다는 견해도 있다.주)013 당시 김지하와의 접견이 엄격히 제한된 상황에서 양심선언문을 밖으로 반출시킬 수 있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민주화운동에 우호적이었던 몇몇 교도관의 도움으로 극비리에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감옥 안에서 김지하가 작성한 것을 밖에서 다시 문장을 수정하여 안으로 들여보내는 일을 거듭하면서 양심선언이 완성됐다.

양심선언문 작성에는 조영래의 역할이 중요했다. 김지하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영래 아우는 나의 이 친한 벗들이 물어다 준 글자들을 한자 한자 줄을 세워 꿰맞추고 거기에 엄청나게 아름답고 격조 높은 문장을 가필하여 어느 날 드디어 ‘양심선언’을 완성했다”고 회고한 것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감옥 안과 밖을 거치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어 완성된 것인 만큼 일종의 집단창작물로 볼 수도 있다.주)014
양심선언문은 무사히 감옥 밖으로 반출됐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국외로의 이송도 성공했다. 마침내 8월 4일 일본의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 소마 노부오(相馬信夫) 주교의 주선에 의해 양심선언 전문이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세상에 공표됐다.
양심선언은 ①내가 공산주의자인가 ②민주주의와 혁명과 폭력에 관하여 ③혁명적 종교에의 꿈-‘장일담’의 세계 ④나는 반공법을 위반하였는가? ⑤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등 5항목으로 구성됐다. 김지하는 이러한 양심선언의 5항목을 통해 구체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면서, 박 정권의 억압자들이 자신을 “가톨릭에 침투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로, 민주주의자를 위장한 공산주의 음모가로 몰아”가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는 바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과 민주회복국민회의 및 일체의 청년학생운동을 용공으로 몰아 암살하려는 대탄압의 예비작업”이라고 강조했다.주)015
공안 당국은 양심선언이 작성되어 외부로 유출된 경위를 밝히기 위해 혈안이 됐다. 발표 당일 중앙정보부에서 김지하를 불러 추궁했고, 교도관들도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미 각본을 짜놓은 상태에서 일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구체적인 경위를 파악할 수 없었고, 다만 김지하가 갇혀 있던 사동에 근무했던 교도관들이 파면, 좌천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양심선언이 발표되자 국내외에서 김지하 구명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됐다. 1975년 9월 10일 독일의 신학자 요한 메츠(Johann Baptist Metz)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을 비롯하여 15개국 신학자 200여 명이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하기 위한 성명서에 서명했으며, 9월 12일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아서 밀러(Arthur Asher Miller),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등 세계적인 문인과 지식인들이 김지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뒷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비롯한 인사들은 김지하 석방을 위한 여론을 조성했다.주)016
양심선언이 발표된 지 한 달 뒤인 9월 중순 경 김지하의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됐다. 법원은 1975년 2월 15일에 있었던 긴급조치 1·4호 위반의 무기징역 형집행정지결정을 취소하고 재수감하는 형식을 취했다. 김지하는 양심선언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1980년 12월 11일 석방될 때까지 장기간 수감생활을 했다.주)017
본 자료의 경우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표시기준(공공누리)” 제4유형을 적용하여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항에 따라야 합니다.
멀티미디어, 연계자료의 경우 해당기관 또는 사이트의 저작권 방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 저작권 정책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