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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7호 선포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긴급조치 7호 선포와 함께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정문 앞을 군인들이 총을 들고 봉쇄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배경사건
동의어
해당사항 없음
유사어/별칭/이칭
해당사항 없음
영어표기
the Promulgation of Emergency Decree N. 7
한자표기
緊急措置7號宣布
발생일
1975년 4월 8일
종료일
1975년 5월 13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1975년 봄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개요

1975년 봄 고려대학교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반유신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4월 8일에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이에 따라 고려대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고려대 내에서의 모든 집회와 시위가 금지됐다.

배경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서울에서 발생한 최초의 학생운동 관련 사건인 고려대민우지사건(1973. 5.)으로 고려대는 당국의 직접적인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이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고, 같은 해 4월 3일 ‘민청학련’ 관련 활동 금지를 골자로 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면서 각 대학 학생운동은 침체기를 겪었다. 1975년 봄이 되면서 대학가는 반유신투쟁의 열기에 휩싸였다. 1975년 초반의 반유신시위는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교수·학생들의 복교·복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문교부는 석방 학생의 복교와 교수의 복직을 불허했으나 연세대학교, 한국신학대학, 서강대학교 등은 그들의 복교 및 복직 방침을 밝혔고 대학생들도 이들의 복교와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와 집회에 나섰다.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지지와 언론자유 실현도 당시 학생운동의 주요 쟁점이었다. 1975년 4월에 이르자 반유신투쟁은 매우 고조됐다. 4월 3일 연세대생 7000여 명이 긴급학생총회 후 시위에 나서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같은 날 새로 이전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도 서울대생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최루탄이 터지고 투석전이 전개됐다.

원인

대학가에서 반유신투쟁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려대생들의 투쟁이 더욱 두드러졌다. 1975년 3월 2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언론탄압과 석방 학생들의 복교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고려대 총학은 성명서에서 “현실은 행정부 일변도의 유명무실화된 삼권 분립, 억압과 기만 속에서 타락한 사이비 언론, 물리적인 힘만이 작용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인권 유린행위의 즉각 중지와 진정한 민주 체제의 확립’, ‘언론에 대한 즉각적인 탄압 중지와 언론인들 스스로의 일관된 자유언론투쟁의 계속’, ‘석방 학생의 조속 복교’, ‘《민우》지 관련 학우들의 석방과 《야생화》지 관련 학우들의 사면’ 등을 요구했다.

1975년 3월 31일 고려대 강당 집회(고대신문사)

그런데 성명서 발표 이상의 행동을 추구한 학생운동세력은 총학생회와 별도의 투쟁을 준비했다. 3월 31일 오전 10시 고려대생 1500여 명이 대강당에 모여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유신헌법 철폐, 미석방 학생 석방, 고문정치 원흉 처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의 행진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진압으로 강당으로 돌아갔고 학생 200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농성했다. 고려대생들의 시위와 농성에 대하여 문교부는 ‘학원질서의 확립과 지도 철저’라는 경고 공한을 고려대에 발송했다.

4월 1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긴급대의원총회를 열고 비운동적 방법과 함께 행동적 방법을 병행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경찰이 총학생회 간부와 민족이념연구회 회원들을 연행하여 지도부 공백이 발생했지만, 고려대생들은 현장에서 비상총학생회를 열고 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4월 7일 고려대생 1500여 명이 오후 5시에 대강당에 집결하여 ‘석탑선언문’을 채택했다.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기도했으나 교문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학생들은 밤 9시까지 교문 앞에 앉아서 농성을 벌이며 “민주헌정의 즉각 회복, 《민우》지, 《야생화》지 관련 학생 즉각 석방, 인권 유린 행위 중지” 등을 요구했고 500여 명이 남아 도서관에서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다음 날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8일 오전 9시 고려대생들은 대강당에 모여 비상총학생회를 열었다. 이들은 자유토론을 가진 후 오전 10시 30분경 교정으로 나가 시위를 벌이며 대치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주)001

전개

신문사 앞에서 긴급조치 7호 발포 소식이 실린 대자보를 보는 시민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려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반유신투쟁이 격렬히 전개되자 1975년 4월 8일 오후 4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제7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1975년 4월 8일 17시를 기하여 고려대학교에 대하여 휴교를 명한다.
  2. 동교내에서 일체의 집회, 시위를 금한다.
  3. 위 제1,2호를 위반한 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4. 국방부장관은 필요하다고 인정한때에 병력을 사용하여 동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일반법원에서 관할심판한다.
  7. 이 조치는 1975년 4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7호에 따른 고려대에 대한 휴교 조치는 교무행정과 학사행정 모두를 일제 중지하는 것이고 무기한 휴교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러한 휴교 조치에 대한 이유로 김성진(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은 “몇몇 대학의 학생들이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행위를 자행, 절대다수의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국가안보의 기본인 사회의 안녕질서를 파괴했다”라면서 “정부는 문교적 차원과 국가안보적 차원에서만 부득이 고대에 휴교를 명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앞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함으로써 국가안보를 해치는 학교에 대해서도 이를 주시, 대처할 방침”이라면서 “학교와 교직원 및 학부형들이 면학 분위기를 회복하는 뚜렷한 조치를 취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고대의 휴교령을 해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영향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7호를 통해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려 학생 시위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경고를 보내 다른 대학에서 시위가 전개되는 것을 막고 동시에 재야 세력의 유신 반대 활동을 제어하려고 했다. 긴급조치 7호의 발동에 따라 4월 8일 고려대는 휴업에 들어갔고 군대가 교정에 진주했다. 군대의 삼엄한 경비 속에 학생뿐 아니라 교수의 교내 출입이 금지됐고 교직원의 출입도 통제됐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4월 10일 김상협(金相浹) 고려대 총장은 “휴교 사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휴교 조치는 고려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4월 9일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에 휴업에 들어가라는 휴업령이 내려져 10일부터 휴업에 들어갔고, 서강대,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서울대 음악대학 등이 자진 휴강에 들어갔다.

긴급조치 7호 선포와 함께 고려대에 휴교령, 한국신학대학에 휴업령이 내려졌다.(1975.4.10. 경향신문)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던 날 대법원은 인혁당재건위조작사건 관련자 중 서도원(徐道源), 도예종(都禮鍾), 하재완(河在完), 송상진(宋相振), 이수병(李銖秉), 우홍선(禹洪善), 김용원(金鏞元)과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呂正男)에 대해 사형을 확정했고 형 확정 18시간 후인 4월 9일 새벽에 형이 집행됐다. 긴급조치의 발동과 사형 집행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대학 내 반유신투쟁은 지속됐다. 4월 9일 이화여대생 4000여 명이 대강당에서 결의문을 채택하고 농성에 들어갔고 서울대 음악대학, 한국외국어대학,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시위를 전개하다 경찰과 충돌하는 일이 있었다. 4월 10일에는 중앙대, 건국대학교, 경희대학교, 경북대학교, 경기대학, 숭전대학교, 인하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 등 전국 대학교에서 반유신시위가 확산하고 있었다.

대학가에서 반유신투쟁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4월 11일 경기 수원에 소재한 서울대 농과대학 학생들이 시국성토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축산과 4학년 재학 중이던 김상진(金相眞)이 3번째 연사로 등장했다. 그는 준비한 ‘양심선언문’을 낭독했고 낭독 후 스스로 자신의 배를 갈랐다. 그는 4월 12일 오전 8시경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결 이후 서울대 공과대학과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추모 집회와 시위가 열렸고 18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추도미사가 거행됐다.

그러나 긴급조치 7호의 발동은 1975년 봄 대학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반유신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긴급조치 7호의 대상인 고려대에서는 41명의 학생이 제적됐고 서울대에서도 1975년 4월 53명이 제명되고 16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또한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매일 같이 반공(안보)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나아가 5월 13일 박정희 정권은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7호가 고려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긴급조치 9호는 그때까지 발포한 긴급조치의 모든 ‘문제점을 보완’한 긴급조치의 최종판이었다.주)002

주)001
고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227-229쪽. 
주)002
앞의 책, 230-233쪽. 
멀티미디어
  • 1975년 3월 31일 고려대 강당 집회(고대신문사)
  • 긴급조치 7호 선포와 함께 고려대에 휴교령, 한국신학대학에 휴업령이 내려졌다.(1975.4.10. 경향신문)
  • 신문사 앞에서 긴급조치 7호 발포 소식이 실린 대자보를 보는 시민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4·9 선언문
  • 성명서[긴급조치 7호발동 및 인혁당관계인사 8명 사형집행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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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훈 구술(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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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천수 구술(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고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2009.
집필정보
집필자
정무용
집필일자
2024-11
최종수정일자
2026-08-26 09: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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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긴급조치 7호 선포와 함께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정문 앞을 군인들이 총을 들고 봉쇄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