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nti-Yushin movement before the Presidential emergency decrees
한자표기
緊急措置 以前 反維新運動
발생일
1972년 10월 17일
종료일
1974년 1월 8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 이전 반유신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72년 10월 유신체제의 수립 직후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1973년 봄 전남대, 고려대 대학생들이 학생운동 조직을 복원하려고 노력하면서 지하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대거 체포됐고, 1973년 4월 일부 기독교인들은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유신체제 수립 후 1년 만인 1973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는 전국 대학에서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다. 대학생들의 시위 사태 속에서 재야인사들도 1973년 12월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에 나섰는데,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974년 1월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하여 이를 극단적으로 탄압했다.
배경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면서 헌법개정을 단행하였다. 명백한 헌정유린 사태이자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거행됐다. 국민투표는 여전히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군인들이 중요 도시에 진주해 있는 억압적 상황에서 진행됐다.국민투표에 총유권자의 91.9%가 참여하여, 91.5%가 찬성표를 던졌는데, 90% 이상의 찬성이라는 투표 결과는 자유와 다양성이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라면 절대로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계엄령은 1972년 12월 13일에 해제됐으며, 12월 25일 유신헌법에 따라 급조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유일 후보 박정희를 역시 90% 이상의 찬성으로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이틀 후인 27일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개헌, 개헌안 국민투표, 새로운 대통령 선출을 군사 작전을 진행하듯 2달 남짓 만에 모두 마무리한 것이었다. 당시의 엄혹하고 당황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신체제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단연 가장 암흑기라고 할 수 있었다. 유신 직후 박정희 정권은 대학생들이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는 것조차 국가보안법, 반공법을 동원해 내란음모 사건,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하며 철저히 탄압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공포 분위기 속에서 유신체제가 수립되는 중에도 일부 대학생들은 저항을 도모하며, 학생운동 조직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신체제에 선명하게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은 기존 정치권에서 남아 있기 어려웠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의 후보였던 김대중(金大中)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박정희 정권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73년 8월 8일 한국의 정보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김대중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됐고, 이는 잠재해 있던 민주화운동을 다시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전개
1972년 10월 17일 내려진 계엄령 하에서 유신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하는 사람들은 즉각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1972년 12월 13일 계엄해제를 단지 1시간 앞둔 밤 11시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殷命基) 목사가 철야 기도회 중 교인들 앞에서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은목사가 민주수호전북협의회 간부로 활동하고,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엄했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기독교 인사들은 은목사의 체포에 항의하는 진정서와 성명서를 내었고, 이는 일부 기독교 인사들이 반유신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직후 대구 시내 몇몇 고등학교에서는 유신쿠데타를 규탄하고 여기에 대한 항쟁을 선언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11월 22일 여전히 계엄령이 발동된 상태에서 전주고 학생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펼치고 시위를 시도하다가 7명이 검거되었다.
대학가 지하 간행물 《함성》, 《민우》 사건
1971년 10월 위수령 선포로 당시 민주화운동 주도하던 대학생들이 일제 검거되고, 이듬해 유신체제가 선포되는 상황에서 대학가의 학생운동은 거의 궤멸 상태였다. 그러나 삼엄한 조건 속에서도 일부 학생들은 학생운동 조직과 활동의 복원을 모색하며, 지하 간행물들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저항을 이어 나갔다. 전남대 대학생 이강(李鋼)과 김남주(金南柱) 등은 1972년 12월 박정희의 종신집권 획책을 비판하는 지하신문 《함성》 500부를 제작하여, 12월 9일과 10일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 시내 일부 고등학교에 뿌렸다. 또한 1973년 3월 지하 유인물 《고발》을 500부 만들어 배포하다가 주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고려대 이념서클 한맥 출신의 학생들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와 접촉하며 탄광노동자 생활을 체험하고, 노동야학을 하는 등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모색했다. 이들은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10월 말 NH회라는 새로운 학생 조직을 만들었다. 1972년 12월 NH회 회원 중 정진영(鄭進英), 박영환(朴永煥), 윤경로(尹璟老) 등은 고려대 정문에 걸려 있던 “한국적 민주주의 이 땅에 뿌리박자”라고 쓴 유신찬양 현수막을 대낮에 불태워버렸다. NH회는 민중의 벗이라는 뜻의 《민우》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1973년 3월과 4월 두 차례에 배포했고,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간첩단 사건으로까지 확대 조작까지 하여 탄압하였다.
1973년 7월 경찰은 한맥과 더불어 대표적인 고려대 이념서클이었던 한국민족사상연구회(한사회)를 계승한 ‘등림회’ 회원들이 이른바 ‘검은10월단’을 조직하여 불온 지하신문 《야생화》를 등사해 배포했다고 발표하였다. 《야생화》는 등림회 회원들이 다른 지면에 발표한 글을 수록하였지만, 간행 주체가 모호한 정체불명의 유인물이었고, 거기에 발행자로 명시된 ‘검은10월단’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테러 활동을 했던 ‘검은9월단’을 연상시키는 작명이었다.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용공조작사건임이 명백했다.
기독교 인사들의 저항: 남산부활절연합예배사건
유신체제는 시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제약했다. 종교적 자유조차도 온전치 않았다. 일부 진보, 개혁적 성향의 종교인들은 1969년 삼선개헌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적 행태를 비판하였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등의 기독교 단체들이 반독재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통해 빈민 선교에 관여하고 있던 서울제일교회 목사 박형규(朴炯圭)와 전도사 권호경(權皓景) 은 수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부활절 연합예배 때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기로 하고, 동조자를 규합했다.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서글픈 부활절 통곡하는 민주주의”, “민주주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와 전단지 2000여 장을 인쇄했다. 1973년 4월 22일 새벽 5시부터 서울 남산야외음악당 광장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다. 예배 중 준비된 플래카드는 펴지 못했지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원들이 귀가하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주모자 권호경, 박형규 등은 6월과 7월에 검거되어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등 기독교인들은 정권의 용공조작에 맞서 진상조사 작업을 진행하며 여기에 대응했다.
1973년 10.2 반유신 시위의 분출
박정희 정권의 각종 용공조작을 비롯한 철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73년 가을부터 대규모 학생운동이 분출되었다. 같은 해 8월 발생한 김대중납치사건 등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발생한 유신반대 시위로부터 시작하여, 12월 초까지 전국 각 대학과 일부 고등학교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집회, 시위, 농성, 동맹휴학 및 시험거부 등이 연달아 발생했다. 1973년 12월 7일 박정희 정권이 이들에 대한 처벌을 철회하면서 일단 시위는 잦아들었다. 1973년 10월 2일 250여 명의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6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도심 진출을 시도하다가 교문 앞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자 연좌시위로 이어졌다. 10월 4일에는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이 ‘유신반대선언’을 하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인 5일 서울대 상대에서도 300여 명의 학생이 15일까지 시한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11월까지 서울대에서는 동맹휴학 결의, 시험거부 운동을 전개했다.
경북대 학생들은 1973년 11월 5일 월요일 아침에 기습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박정희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200~300명이 스크럼을 짠 채 후문을 나아가 가두로 진출하여 도청 앞 다리 중간까지 이르렀다. 이후 경북대에는 교내시위, 농성, 시험거부가 이어졌다. 유신체제기 삼엄한 언론 통제하에서 10.2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비롯한 학생 시위는 신문 등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매일신문》은 11월 5일 경북대생의 시위를 4단 기사로 크게 보도했고, 《동아일보》도 짤막하게나마 시위 사실을 보도했다. 이를 통해 유신반대시위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대학가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10월 5일부터 고려대생들은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동맹휴학과 농성, 교내시위 등을 전개하였다. 1973년 11월 15일 고려대생 2000여 명은 “구속 학생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 진출을 시도하며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격렬한 시위를 했다. 연세대 학생들은 1973년 11월부터 동맹휴학과 교내시위에 돌입했다. 11월 29일에는 연세대생 2000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교문 진출을 시도해 일부는 가두로 진출했다. 10.2 서울대 문리대 시위 때부터 많은 여학생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1973년 가을학기 학생 시위에서 여학생, 여대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973년 11월 12일 이화여대생 4000여 명은 대강당에서 채플을 마친 후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6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하고, 유신체제기 억압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검은 리본을 달기로 결의했으며, 이후 동맹휴학과 수업거부, 교내시위로 이어졌다. 11월 28일 이화여대생들은 대규모 시위 대열을 형성하여 교문에서 대학 입구 로터리에 이르는 도로 300미터를 점거하고, 유신철폐 구호를 외쳤다. 이화여대생 500여 명은 12월 3일에도 시청 앞에 모여 검은 리본을 달고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 등을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1973년 11월 29일 숙명여대생 200명은 교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1973년 11월 26일 서울여대 학생 500여 명이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험거부에 돌입했으며, 수도여사대 학생 500명도 11월 29일 교내시위를 전개했다. 덕성여대 학생들도 11월 30일 500여 명이 기말시험 거부에 동참하고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12월 1일에는 상명여사대와 동덕여대에도 저항 활동이 있었고, 12월 4일 대구효성여대 학생 300명이 교내시위를 전개했다. 1973년 11월 말에는 시위 참여 학교가 늘어나고 그 양상도 더욱 격렬해졌다. 인하대, 숭전대, 서강대, 성균관대, 동국대, 한양대, 건국대, 경희대, 감신대, 영남대, 홍익대, 단국대 등에도 시위 또는 농성, 시험거부 등 저항이 발생하였다. 과거 시위가 잘 발생하지 않았던 대학에서도 시위가 확산되는 양상이었다.
한편 12월에 접어들면서 일부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전개했다. 1973년 12월 1일 서울 경기고와 대광고 학생들이 시위를 시도하자 학교 당국은 조기방학을 실시했다. 12월 5일에는 광주일고 학생 100여 명이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12월 8일에는 서울 신일고 학생 120명이 언론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집회와 시위 과정에서 정보정치의 배격, 자유민주주의 실현과 기본권 보장, 학원과 언론의 자유, 김대중납치사건 진상규명, 종속된 경제구조 비판, 민중 생존권 확보 등을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과 교육 당국은 학생들의 저항에 당황하여 조기 방학을 실시하였고, 시위가 두 달 넘게 이어지자 1973년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학생 시위와 관련되어 구속된 학생들을 전원 석방하고 처벌도 백지화할 것을 지시했다. 10.2반유신시위는 유신체제하에서도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후 극단적인 억압 상황에서도 저항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경험으로 작용했다.
유신정권의 보도통제와 언론자유수호운동
1973년 10월 대학가에서 시위가 발생했을 때 국내 언론들은 정권의 통제에 막혀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반면 외국 언론들은 이를 주목하여 보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71년부터 언론 자유화 운동을 전개했던 기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항의하는 행동에 나섰다. 《경향신문》에서는 1973년 10월 19일과 23일 일부 기자들이 모여 당국의 검열로 보도되지 못한 기사를 기록물로 보관할 것을 결의하고, 신문사가 공안기관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학생 시위 기사가 당국의 압력으로 계속 누락되자 철야농성을 벌이고, 1973년 11월 20일 밤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여기서 “정부는 언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하지 말고 모든 언론인은 용기와 신념으로 외부의 압력을 배격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달 11월에 《한국일보》, 《조선일보》, <문화방송>, 《중앙일보》 기자들도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10.2시위가 조성한 저항의 분위기는 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쳐서 1973년 12월 13일 재야 세력이 중심이 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이 시작됐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결성했던 재야 세력들은 같은 해 열린 대통령선거 때 공정선거 감시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지만, 유신선포를 전후하여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1973년 10월 학생들의 시위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같은 해 11월 민수협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 공포정치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민수협은 1973년 12월 13일 각계의 원로 재야인사들로 구성된 시국간담회를 열었고, 12월 24일, 시국간담회 참석자들이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구성하고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이날 참여자들을 대표하여 장준하(張俊河)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야당인 신민당도 여기에 합류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결과/영향
1973년 10월부터 12월에 걸쳐 학생시위와 개헌청원운동이 전개되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규정된 긴급조치권을 활용하여 탄압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그 내용은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그 개정과 폐지를 발의하고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됨에 따라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와 백기완(白基玩)이 구속됐고,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한 각계 인사들이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저항은 1974년에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으로 계속 확대되어 이어졌다.
멀티미디어
1973년 11월 5일 경북대 시위 유인물(여정남기념사업회)
1973년 11월 이화여대생 시위(이화민주동우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대중납치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됐다. 1973년 11월 1일 사건 처리 결과를 발표하는 김용식 외무장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3년 11월 1일 열린 고려대민우지사건 선고공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독학생연맹이 내란음모를 꾸몄다며 당국이 공개한 플래카드, 삐라 등 증거 자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3년 12월 21일 서울 YMCA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함석헌, 김수환 등 재야인사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백기완
공판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민주인사들과 담소 나누는 장준하
[Fact Sheet2-서울문리대 시위사건(1973.10.2) 사건개요]
[나병식, 강영원, 정문화의 공소에 대한 선언문]
[구속 기독학생을 위한 모금과 사건 경위서]
유신체제 홍보 영상 <유신의 횃불>(국가기록원)
참고문헌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학련-유신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를 외치다≫, 메디치, 201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2-유신체제기≫, 돌베개, 2009.
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청춘, 시대를 깨우다-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 삼천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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