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발표하는 윤주영 정부 대변인과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국가기록원)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국가비상사태 선언 및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 제정
영어표기
The Declaration of National Emergency and Enactment of 「the Act of the Special Measures for National Security」
한자표기
國家非常事態 宣言 및 國家保衛法 制定
발생일
1971년 12월 6일
종료일
1971년 12월 27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1년 선거투쟁
지역
전국
개요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0.15위수령 이후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장기 집권을 위한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현재 대한민국의 안보가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리고 국가비상사태의 법적 근거를 갖추기 위해 12월 27일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을 제정했다. 국가보위법은 기존 헌법의 대통령 긴급명령권이나 계엄선포권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긴급권을 보장하는 법령이었다.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국가보위법 제정은 유신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저항을 억압하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특히나 국가보위법 제9조는 유신체제 말기까지 노동권을 제약한 중요 법령으로 기능했다.
배경
1970년대 초는 국제관계, 남북관계, 내부 정치 모든 면에서 한반도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던 격변기였다. 1968년 안보위기 이후 박정희 정권은 주민등록증 제도를 실시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며,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 등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1969년 9월에는 공화당이 삼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1969년 하반기부터 북한의 대남무력공세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과 중국이 관계개선에 나서는 등 데탕트 분위기가 동아시아에도 파급됐다. 남북한도 1971년 9월부터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화와 접촉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전 세계적 차원과 동아시아 및 한반도에서 조성된 데탕트 국면이 국제정세 및 남북관계의 유동성과 예측불가능성을 높인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을 견제했던 야당, 학생 및 민주화운동 세력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기도와 안보위기론, 데탕트 위기론을 명분으로 한 국가 통제 및 군사주의적 동원에 맞서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 이후 민중생존권 투쟁이 분출했으며, 광주대단지사건, 한진 해외파견 노동자들의 KAL빌딩방화사건, 사법파동, 인턴레지던트파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급속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사회문제에 대한 다양한 저항이 나타났다. 1971년 한해 내내 학원병영화에 반대하며 전개된 교련반대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에 주목했고, 학원민주화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요구했다.주)001
한편, 1971년 4월 27일 열린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94만여 표, 득표율로는 7.6% 정도의 차이로 김대중(金大中) 후보를 누르고 간신히 승리했다. 이어 5월 25일 실시된 총선에서 공화당은 113석의 의석을 확보했지만, 신민당이 89석을 확보하며 개헌저지선에서 20석을 상회하는 의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는 더 이상 박정희 대통령이 합법적으로 집권을 연장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박정희 정권은 데탕트 위기론, 남북대화 위기론 등 ‘안보논리’를 내세우고 군대를 동원해 국가의 억압과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5일 위수령을 통해 군대를 동원해 학생들의 교련반대운동을 진압했고, 11월 13일엔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이라는 공안사건을 조작발표해 교련반대운동 주도 세력을 탄압했다.
원인
1969년 취임 직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닉슨 정부는 아시아에서 전반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축소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닉슨 정부는 1970~1971년간 주한미군 1개 사단 총 2만여 명의 병력을 감축했으며 1971년 7월에는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계획이 발표됐다.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로 남북한 역시 1971년 8월부터 남북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데탕트 분위기는 박정희 정권의 위기의식을 오히려 고조시켰다.
그 원인은 국내 상황에 있었다.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와 5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 대통령과 공화당은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뒀다. 야당은 비록 대선에서는 패했지만 총선을 통해 여당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는 의석수를 획득했다. 게다가 1971년 내내 10년 넘게 지속된 군사독재정권과 불균등한 국가 주도 경제성장이 낳은 사회 모순에 대한 저항이 각계각층에서 분출했다. 이처럼 대선과 총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이 도전받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데탕트 위기론과 남북대화 위기론을 내세워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해나가고자 했다.
1971년 10월 2일 국회에서 신민당이 광주대단지사건과 실미도사건을 이유로 제출한 오치성(吳致成)내무장관 해임안이 가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10.2항명파동’이었다. 삼선개헌 무렵부터 공화당에서는 김성곤(金成坤), 백남억(白南憶), 김진만(金振晩), 길재호(吉在號) 등 4인이 당의 요직을 차지하는 ‘4인체제’가 만들어졌는데 항명 파동은 이 4인이 자신들 계보에 속한 국회의원 20여 명에게 해임안에 박 대통령의 의지를 거슬러 찬성표를 던지라고 종용한 결과 나타났다. 4인은 중앙정보부에 불법 연행되어 고문까지 당했으며, 이후 공화당에서 축출됐다. 이후 공화당 내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은 완전히 소멸했고, 공화당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크게 축소됐다.주)002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활용해 군을 동원하여 교련반대운동을 종결시켰다. 이는 항명 파동 이후 정치·사회적 통제를 강화하는 두 번째 움직임이었다. 각 대학의 이념서클들은 모두 해체됐으며, 학생운동 주동자들은 대부분 제적되고 강제로 징집됐다. 연이어 11월 13일, 중앙정보부가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교련반대운동을 주도해 수배 중이던 이신범(李信範), 조영래(趙英來), 장기표(張琪標), 심재권(沈載權), 김근태(金槿泰) 등 서울대 학생 5명이 내란 음모를 저질렀다고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후 학생운동은 완전한 침체에 들어갔다.
11월 30일 유재흥(劉載興) 국방부장관은 북한이 20일 내에 서울을 점령한다는 ‘20일 군사 작전’을 채택했기 때문에 “지금은 준전시” 상태라고 규정하고 정부가 지금까지의 경제우위 정책을 국방우선주의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 1971년 11월부터 남북대화는 남한의 중앙정보부 간부와 북한의 조선로동당 간부가 비밀 대화채널을 구축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상태였다. 로저스(W. P. Rogers) 미 국무장관도 유재흥 장관의 발표에 대해 북한의 군사행동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고 하면서, 주한미대사에게 위기를 강조한다면 아시아에서 긴장완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과 남북대화의 분위기를 해칠 것이라는 우려를 한국 정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주)003
전개
국가비상사태 선언 및 내용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현재 대한민국은 안전보장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선언은 국가안보회의 의결 1호 국무회의 의결 1125호로 결의됐으며, 전 국무위원 및 안보회의 위원들이 부서했다. 국가비상사태 선언 6개 항은 다음과 같았다.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태세를 확립한다.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절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소를 배제한다.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야 한다.
모든 국민은 안보상 책무수행에 자진 성실하여야 한다.
모든 국민은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하여야 한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
1971년 11월부터 남북대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통해 데탕트는 핵 교착상태를 통한 현상유지 정책에 불과하며, 북한이 강대국의 이러한 행동의 제약을 이용하여 노골적으로 남침 책동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중대한 안보위기 상황이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에서 내적으로는 향토예비군이나 대학 교련에 대한 시비가 분분하고, 일부 언론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이용하여 무책임한 논의를 퍼뜨리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 제정 및 내용
12월 21일 공화당은 국가비상사태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12월 27일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한 야당 의원들을 피해 국회 제4별관에서 여당 및 무소속 의원들에 의해 처리되어 국회를 통과했다. 총 12개 조문으로 이루어진 국가보위법은 국가비상사태 선포권을 규정하고, 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이 경제 규제, 국가 동원, 특정 지역 입주, 옥외집회 및 시위, 언론 및 출판, 노동자 단체행동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특히나 이 법은 제9조에 비상사태하에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1970년대 말까지 노동권을 제약한 가장 중요한 특별법으로 기능했다. 국가보위법의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제4조 (경제에 관한 규제) ①비상사태하에서 대통령은 재정 및 경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물가, 임금, 임대료 등에 대한 통제 기타 제한을 가하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
제5조 (국가동원령) ①비상사태하에서 국방상의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전국에 걸치거나 또는 일정한 지역을 정하여 인적, 물적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거나 통제 운영하기 위하여 국가동원령을 발할 수 있다.
제6조 (특정지역에의 입주 등) ①비상사태하에서 군사상의 목적 또는 국민의 생명ㆍ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대통령은 일정한 지역을 지정하여 그 지역에서의 이동 및 입주 또는 그 지역으로부터의 소개 및 이동에 대하여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제7조 (옥외집회 및 시위) 비상사태하에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대통령은 옥외집회 및 시위를 규제 또는 금지하기 위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제8조 (언론 및 출판) 비상사태하에서 대통령은 아래 사항에 관한 언론 및 출판을 규제하기 위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제10조 (예산 및 회계) ①비상사태하에서 군사상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대통령은 세출예산의 범위내에서 예산의 변경을 가할 수 있다.
국가보위법은 국회의 사후승인권이나 해제요구권을 적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 긴급명령권 계엄선포권을 규정한 기존 헌법의 국가긴급권에 비해 훨씬 강력한 법령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각 조항에 “명령을 발할 수 있다”거나 “필요한”, 혹은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구체적인 조치를 시행령에 위임했다. 따라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 행사를 주무관청에 미리 조정 신청해야 한다는 제9조를 제외하고는 당장 법적 조치가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행령 제정을 통해 조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끝날 때까지 시행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대신 1972년 3월 14일, 정부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의특별조치등에관한대통령령’을 공포했다. 해당 대통령령은 제2조에서 국가보위법에 규정된 “특별조치, 필요한 조치, 특별한 조치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의 특별조치로서 한다”고 규정했다. 이를 통해 국가보위법의 시행령은 따로 제정할 필요 없이 대통령 특별조치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관보에 게재하기만 하면 바로 법률적 효력을 갖게 됐다. 이후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과 관련된 특별조치는 한 번도 발표되지 않았다.주)004
결과/영향
1972년 5월 남북 수뇌부의 비밀 대화채널을 활용하여 남한의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朴成哲) 제2 부수상이 각기 비밀리에 평양과 서울을 방문했고, 김일성(金日成) 주석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 결과 1972년 7월 4일 남북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 하에 통일을 추구하기로 합의했다는 남북공동선언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됐다. 남북한 비밀협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무렵인 1972년 4월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에게 부여된 비상대권과 권한을 한층 강화하여 영구집권을 추구하는 개헌 작업에 들어갔다. 이것이 그해 3월 14일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의특별조치등에관한대통령령’이 공포되었음에도 관련한 특별조치가 한 번도 발표되지 않은 이유였다.주)005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은 1981년 12월 17일에 이르러서야 폐지됐지만, 애초에 이 법이 목표했던 내용은 유신헌법의 긴급조치권 등에 흡수됐다. 따라서 국가보위법의 노동권에 관한 제9조를 제외한 여타 조항의 실질적인 법적 효력은 오래 발휘되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국가보위법 제정은 유신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저항을 억누르고 위기감을 조성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71년 10.15위수령, 국가비상사태 선언, 국가보위법 제정 등 일련의 사건 이후 야당과 학생운동 세력 등의 저항이 일체 불가능해지면서 국내 정세가 극도의 침묵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주)001
홍석률, 〈유신체제 수립 직전의 정치와 남북관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이전 민주화운동 사료집 일지》2, 2019, 1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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