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노동운동
- 영어표기
- Jeon Tae-il’s Self-burning Incident
- 한자표기
- 全泰壹焚身事件
- 발생일
- 1970년 11월 13일
- 종료일
- 1970년 11월 13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 지역
- 서울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한 사건이다. 전태일은 노동자도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바보회를 창립했으며, 삼동회를 조직하여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70년 10월 시위 방식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시위를 준비했지만 몇 차례에 걸쳐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자 했으나 업주와 경비원, 출동한 경찰대와 형사들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태일은 분신을 결심하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권을 사회 전면에 부각시켰으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재야운동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노동조합 조직을 하향식으로 재편성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출범시켰으며,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노동조합의 활동 범위를 제한하고 노동쟁의를 무력화시켰다. 또한 경찰력을 동원하거나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하부 기관을 개입시켜 노동운동을 통제했다. 이에 편승하여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고,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았다. 국가권력의 노동운동 억압은 1960년대 후반에도 강화됐으며, ‘선성장 후분배’를 내세운 경제개발정책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크게 위협받았다.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는 더욱 심각했다. 하지만 한국노총은 국가권력에 종속되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무력했으며, 끊임없는 내부 권력다툼으로 노동운동 본연의 임무를 등한시했다.
1961년 서울 청계천 일대에 평화시장이 건립되었고, 1968년과 이듬해 8월 통일상가와 동화시장이 각각 들어섰다. 이러한 세 개의 시장은 1970년 당시 전국적으로 기성복 수요의 70%를 공급할 정도로 확고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업장 규모는 가내공업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영세했으며, 그곳의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됐다. 이들 노동자는 미조직 상태에서 환기시설이 거의 없는 먼지 구덩이의 작업장, 허리를 펼 수 없는 비좁은 다락방, 법 규정보다 3배를 초과하고 있는 공동화장실, 휴일 없는 근로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혹사당하고 있었으며, 진폐증, 폐결핵, 위장병, 안질 등 직업병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전태일은 유해하고 비인도적인 작업장의 근로조건을 시정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자 건의와 진정, 그리고 몇 차례에 걸친 시위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번번이 좌절을 겪다가 ‘근로기준법 화형식(火刑式)’을 결단하기에 이르렀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과 그 파장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서울 청계천 국민은행 앞 공터에 전태일은 휘발유를 온몸에 끼얹고 불을 댕겼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다가 마지막 혼신으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잠시 후 그는 인근의 국립의료원으로 이송됐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은 순식간에 평화시장 일대에 퍼져나갔다. 삼동회원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십 명의 노동자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업주들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전개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들은 경찰의 곤봉에 머리가 깨어지고 구둣발에 짓밟히면서 경찰서로 연행됐다.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회생할 가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급보를 듣고 달려온 어머니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루어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는 그의 부탁을 꼭 들어주겠다고 맹세했다. 몇 시간 후 그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밤 10시가 조금 지나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영결식은 11월 18일 서울 성북구 창동의 창현교회에서 거행됐다. 장의위원회 위원장인 한국노총 최용수(崔龍洙) 위원장은 조사(弔辭)에서 “만일 당국이 좀 더 감독행정을 철저히 해주었더라면 오늘의 전 군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기업인은 물론 모든 국민이 냉철히 반성하라”고 호소했다. 또한 유족 대표로 나선 전태삼(全泰三)은 “가난한 종업원에겐 빵을 나눠주고 악한 업주에겐 죽음으로 항거한 형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가셨다”는 조사를 하면서 울먹였다.주)001
전태일 사건은 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의 죽음으로 평화시장의 참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사회 각계에서도 노동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추도식을 개최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국의 제지로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11월 20일 서울대 법대에서 평화시장 노동자와 시내 각 대학 학생과 청년, 종교단체 공동으로 추도식을 개최하려던 계획은 학교 당국의 제지로 무산되고, 법대생 200여 명만이 모여 추도식을 강행했으며, 이날 서울대 문리대, 고려대, 연세대에서도 개별적으로 추도식을 개최하였다. 22일에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40명은 전태일 분신에 대한 ‘참회와 호소의 금식 기도회’를 가졌으며, 23~24일 연세대 법정대학생 200여 명이 시국선언문을, 한국외국어대생 60여 명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서 26일 서울대 법대생과 문리대생들은 노동실태 조사단을 구성하여 겨울방학 동안에 조사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金大中)도 21일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는 차제에 전국의 근로실태를 전면적으로 파악해서 노동자의 정당한 지위 확립에 획기적 조치를 단행”하라고 촉구했다. 사업장의 감독행정을 방기하고 있던 노동청도 24일 담화를 발표하여 현행 근로기준법에 적용되지 않는 16인 이하의 고용기업체라도 연쇄적으로 밀집해 있는 사업장일 경우 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여 근로기준법을 적용할 것이며 근로감독관을 늘리고 노동청 안에 근로기준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청년노동자로서의 성장 과정과 노동 활동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음력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피복제조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인 아버지 전상수(全相洙)와 어머니 이소선(李小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54년 여름에 무작정 상경하였으며, 2년 동안 막노동의 고생 끝에 아버지는 재봉틀 한 대를 들여놓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이때 전태일은 남대문공민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아버지의 일은 한동안 잘되어 그 규모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 4월경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거리에 나앉게 됐다. 고등학교 체육복을 단체로 주문받아 목돈을 챙길 수 있었지만, 브로커가 학교로부터 받은 옷값을 가지고 도주하는 일이 벌어져 상당한 액수의 빚을 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태일은 남대문공민학교에서 남대문국민학교로 편입했지만 기울어진 가정형편으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때부터 그는 신문팔이로 나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석하는 일이 잦아져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1963년 5월에 대구 명덕국민학교 안에 있던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청옥에서의 생활은 끝나고 말았다.
1964년 봄,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시다(보조)로 취업해 노동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65년 가을에는 삼일사 미싱보조, 이듬해 가을에는 통일사 미싱사가 되면서 점차 청년노동자로 성장했다. 그는 재단사와 업주의 유착관계에 의해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임금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나도 어서 빨리 재단사가 되어서, 노임을 결정하는 협의를 할 때는 약한 직공들의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을 했으며, 폐병 3기의 여성노동자가 각혈을 하고 끝내 해고당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비정한 노동현실을 변화시키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주)002
그는 미싱사가 된 지 얼마 안되어 한미사 재단보조로 들어간 이유도 재단사가 되어 업주와 정당하게 임금 협의를 하겠다는 결의를 실천에 옮기려는 심산에서였다. 그는 재단보조가 된 지 4개월여 만인 1967년 1월경에 바라던 대로 재단사가 됐다. 하지만 재단사가 되어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2월 23일자 일기에서 “이 해 안에 안전한(완전한) 재단사가 되자”라고 적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식 재단사가 아닌 임시직 재단사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는 연합 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을 구입하고는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고 결심하기도 하고, 한미사에서 정식으로 재단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해고당했으며, 3월 2일 운왕사로 일자리를 옮겼다.주)003
1967년 4월 이후부터 1969년 8월까지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재단사가 되어 업주와 정당한 임금협의를 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그 대신에 새로운 실천방법을 모색하면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근로기준법에 의지하여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1968년 말경에는 노동자도 기계처럼 취급 받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재단사 모임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재단사 모임은 1969년 6월 말경에 이르러 바보회 창립으로 결실을 이뤘고, 전태일은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바보회는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에 집중하고,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입하여 공부하면서 노동실태 조사작업에도 나섰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이러한 움직임이 업주에게 발각되어 그는 해고됐고, 바보회도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깊은 좌절과 번민의 나날을 보내보면서도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재도전에 나서겠다는 각오를 가다듬었다. 공사판 막노동을 시작하면서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코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다져나갔다. 직접 발송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쓴 진정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이전에 만들어 놓았던 미완의 모범업체 설립계획을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그가 구상한 모범업체는 “종업원을 기업주와 하등의 차이도 없이 대우하고도 사업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기본을 보이기 위한 기업체”였다. 1970년 3월에 작성된 모범업체 설립계획서에 따르면, 설립 목적은 “정당한 세금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계통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여건 속에서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는 것이었다.주)004
1970년 9월, 전태일은 1년 만에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삼각산 기슭에 자리잡은 임마뉴엘 수도원의 신축공사 인부로 5개월 동안 일하다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평화시장을 찾은 것이다. 그는 8월 9일자 일기에서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라고 적고 있다. 평화시장에서 그는 왕성사 재단사로 취직했으며,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신문사, 방송국 등을 찾아다니며 노동실태를 알렸다. 9월 16일에는 바보회의 후속 조직으로 삼동회를 결성했다. 삼동회는 평화시장, 통일상가, 동화시장의 노동자가 합세했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며, 그 조직의 목적은 “연소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때에도 전태일이 회장을 맡았다.
삼동회는 결성 후 곧바로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를 상대로 바보회 때 시도했던 설문작업을 재개하고, 노동실태를 파악하는 일을 추진하여 설문지 126매를 수합했다. 다음으로 노동청에 제출할 진정서를 작성하고 90여 명의 서명을 받아내서 10월 6일 이를 노동청에 제출하는 데 성공했다. 바보회 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업주의 눈을 피해가며 힘겹게 노동실태 조사작업에 나섰던 삼동회원들의 눈에는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그다음 날인 10월 7일에는 ≪경향신문≫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근로조건 영점…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게 되어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기도 했다.주)005
신문 보도가 있던 다음날 전태일과 김영문, 이승철(李承喆) 등 세 사람이 삼동회를 대표하여 작업시간(여름: 오전 8시~오후 7시, 겨울: 오전 9시~오후 8시), 일요일마다 정기휴일, 건강진단 1년에 2회 실시, 시다들의 월봉 100% 인상,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조명시설 개선, 여성 생리휴가 보장,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의 요구조건을 담은 건의서를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조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전태일과 삼동회원을 대상으로 한 업주와 근로감독관의 집요한 회유가 시작됐다. “취직을 하면 일주일 내로 다 개선”해 주겠다는 근로감독관의 약속에 따라 이미 왕성사에서 해고당했던 전태일은 서둘러 삼미사 재단보조로 들어갔으며, 임현재와 최종인도 곧바로 취직했지만 근로감독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이 어긋나자 전태일은 진정과 건의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투쟁, 즉 시위를 통한 획기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10월 20일 노동청 앞 시위를 계획했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무산됐다. 다시 24일 국민은행 앞에서의 시위를 계획했으며, 업주에게만 시위계획을 비밀로 하면서도 경찰과 언론에는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경찰을 믿은 것은 고용주와 노동청과 경찰의 유착관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과오였다. 시위 당일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어 시위는 어이없이 무산됐으며, 11월 7일까지 요구조건을 들어주겠으니 데모하지 말라는 회유에 말려들어 또다시 불발로 끝났다. 전태일은 이러한 배신을 당하면서 고용주와 노동당국과 경찰의 유착관계를 끊어내고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노동실태를 폭로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져나갔다. 또한 투쟁의 대상을 고용주만이 아니라 노동당국으로 삼기 시작하였으며, 시위의 한 방식으로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위 당일, 출동한 경찰대가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고, 업주와 경비원들은 노동자들의 시위 참여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삼동회 회원 몇 명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 감금된 상태였다. 전태일과 또 한 명의 회원이 옷 속에 숨겨온 플래카드도 형사들에 의해 찢겨져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태일은 분신을 결심하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다.
분신사건 후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과 활동
한국노총 노조 간부들은 경제성장정책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할 노동조합이 자기 역할을 등한시했다는 점에서 전태일분신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분신사건 이후 한국노총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이하 청계피복노조) 결성에 기여한 점이 주목된다. 장례식이 거행된 지 이틀만인 11월 20일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칭) 결성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그 뒤 1주일 만인 27일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 결성대회가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정도 한국노총의 지원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계피복노조가 빠른 시일 내에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전태일 분신에 의한 사회적 여론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아들의 유업을 잇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이소선은 고용주와 노동 당국에 노조 결성 지원을 포함한 일요일 휴가제 실시, 8시간 노동제, 이중 다락방 철폐 등 8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세웠고, 그녀의 완강한 태도와 사회적 여론에 의해 이승택 노동청장이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하게 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설립 이후 노동조건 개선 활동, 소모임 활동, 교육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으며, 1970년대 후반기부터 조직 활동에 두각을 드러냈다. 1975년 2월 7일 노동교실 점거농성을 통해 노동교실의 정상화를 이루었으며, 11월에는 ‘근로기준법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12월 23일부터 단식농성을 감행함으로써 근로시간 단축과 다락 철거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1976년 3월에는 견습공 임금직불제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여 관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청계피복노조는 다른 사업장의 투쟁을 지원하거나 격려하는 연대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76년부터 1977년 중반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섬유업체 사업장에서 전개된 체불임금투쟁, 임금인상투쟁, 노동조합 결성 등을 지원하는 투쟁을 벌였다. 1977년 7월 10일에는 협신피혁 노동자 민종진의 질식사에 항의하는 노동청 점거투쟁을 전개했다.
청계피복노조는 당시 종교단체보다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와 연계됐다는 점에서 1970년대 여타의 민주노조와 다른 특징을 지닌다.주)006 전태일의 장례식을 학생장으로 치르는 문제를 놓고 평화시장과 관계를 맺었던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은 이후 청계피복노조와 연계하여 활동했다. 장기표(張琪杓), 이재오(李在五), 이영희(李泳禧), 김세균(金世均) 등은 노조 집행부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이소선과 장기표를 잇는 라인을 통해 청계피복노조 운영이나 투쟁 방향 등에 개입했다.
학생운동과 재야민주화운동에 미친 영향
전태일분신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동현실에 주목하여 ‘민중’ 주체의 운동이념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16일 서울대 법대생이 ‘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열고,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그 개선을 정부에 건의하자고 호소한 것이나 18일 서울대 상과대학생이 학생운동을 노동운동과 연계시켜 추진하기로 결의한 것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드러내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후 학생운동의 방향은 근로조건 개선운동으로 결집됐으며,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학생들은 노동실태 조사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학생들에게 역사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와 민중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1971년 학생운동은 교련반대와 학원자유 수호운동을 전개하면서 노동운동의 민주화, 민중생존권을 주창하였으며, 전국학생연맹은 ‘민족’, ‘민주’와 함께 ‘민중’을 학생운동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전국학생연맹에서 내세운 민족, 민주, 민중의 이념은 1974년에 이르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삼민이념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4월 3일 배포된 ‘민중, 민족, 민주선언’의 결의문에서 근로대중의 최저생활 보장, 노동악법 폐기 등을 내세우는 등 학생운동에서의 ‘민중’ 지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 후반기에는 변혁운동의 주체로 민중을 내세우면서 노동자대중의 의식화와 주체화를 주창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1975년 긴급조치 제9호 발동 이후 학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고 민주화투쟁이 위축되면서 학생운동가 사이에서는 ‘현장론’이 강조됐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야학에 참여했으며, 노동현장에 직접 투신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한 민주노조에서 전개하는 근로조건 개선과 생존권 투쟁에 직간접적으로 연대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전태일분신사건은 지식인과 종교계, 법조계, 언론계, 제도권 바깥의 정치인 등 재야세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 분산적으로 존재하던 재야는 전태일분신사건에 영향을 받아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연대하여 4월 19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출범시켰으며, 이를 중심으로 선거감시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운동은 4월 27일 실시된 선거에 영향력을 미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창립될 때까지 재야운동의 상설기구로 존재했다.
전태일분신사건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기초조사와 연구,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운동을 지원하고자 했으며, 노동조합 투신,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을 통해서 노동운동과의 결합을 시도했다. 전태일분신사건을 계기로 노동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낸 종교계도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으며, 도시산업선교회나 크리스챤아카데미,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종교단체는 노동문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여 노동교육 실시와 함께 민주노조 설립을 지지, 지원하는 한편 민주노조와 연계하여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 각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죽음을 통한 저항은 당시 외면받았던 노동자의 권리와 민중의 생존권을 사회 전면에 부각시켰다.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역사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와 민중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학생운동세력과 재야운동세력이 노동문제에 깊이 개입하여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연대하기 시작했다.
전태일분신사건의 영향으로 1970년 노동쟁의가 165건이던 것에서 1971년 1656건으로 폭증하고, 이후의 쟁의도 1970년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또한 권력과 자본에 예속된 한국노총을 비판하는 민주노조들도 생겨났다. 청계피복노조를 비롯한 동일방직노조, 원풍모방노조, 반도상사노조, YH무역노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태일분신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으로 결성됐던 청계피복노조는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 투쟁, 교육활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다른 사업장에 대한 지원과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81년 1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뒤 법외노조로 존재하면서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한 합법성쟁취투쟁을 전개했으며,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쳐 1988년 5월에 이르러 합법성을 쟁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태일분신사건은 지속적으로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 이래 매년 11월에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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