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노동운동
- 영어표기
- Hanyoung Textile’s Labor Union Suppression and the death of Kim Jin-su
- 한자표기
- 金珍洙死亡事件
- 발생일
- 1971년 3월 1일
- 종료일
- 1972년 5월 15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 지역
- 서울
1970년 12월 23일 전국섬유노동조합 서울의류지부 한영섬유분회가 결성되자 공장장 유해풍 주도로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다 조합원 김진수(金珍洙)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노동조합 탈퇴서를 받으려는 과정에서 폭력을 당한 김진수는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1971년 5월 16일 사망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한영섬유 분회와 함께 사건의 진상규명과 보상에 앞장섰으나 정작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무관심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이후 한국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1970년 11월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은 한국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특히 근로기준법 시행령 적용에 따라 상시 근로자 5인 이상 16인 미만인 사업체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의 일부만 적용되어 16인 미만 사업체의 경우 노조를 설립하더라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부각됐다.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려 한 대부분의 사업장은 노동조합 결성을 우선 시도하게 된다.
전태일의 분신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자 1970년 이후 노동조합 설립신고와 그에 따른 노동쟁의 신고 건수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러한 가운데 1971년 대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위기의 돌파 수단으로 그해 12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을 제정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특히 국가보위법 중 제9조(단체교섭권 등의 규제)는 직접적으로 노동권을 제약했다.
한편 도시산업선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노동 및 산업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 미조직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노동조합 조직화에 적극 조력했다.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영등포산업선교회도 1970년 4월부터 각 노조 지부와 협조하여 노동조합원 훈련을 시작했다. 영등포 지역 공장 중에는 편직 업종 공장이 다수였는데 편직업계를 위한 노사문제 세미나를 개최하여 노조를 결성할 수 있도록 조력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70~1971년 한영섬유, 다옥편물 등 5개 분회가 결성되어 전국섬유노동조합 서울의류지부가 결성됐다. 노동자들을 산별노조로 연계해 산별노조가 조직을 관장토록 하는 영등포산업선교회의 활동은 노동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서울 영등포에 소재하는 편직업계 종사 노동자들은 대다수가 연소노동자들로 1일 15시간~17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에 종사했다. 당시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자들 몇몇은 공장을 분담하여 노동자들과 교양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그룹 활동을 진행했다. 그 중 편직업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근로환경에 놓여 있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도 편직업 공장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편직업계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1970년 12월 6일에는 영등포산업선교회 주최로 편직업 노사문제세미나를 개최했고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한 결과 서울의류지부(지부장 박은양) 결성과 산하 양상사 영등포공장 분회, 마산방직 구로동편직공장분회, 한영섬유 분회, 다옥편물분회, 월성섬유 분회가 조직됐다. 서울의류지부는 1년도 못 되어 총 1500명의 조합원이 가입된 대규모 지부로 성장했다.
그러나 영등포 공장지대의 편직 공장들 대부분이 섬유부문 신흥 중소기업이었고 수출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었다. 따라서 제품의 선적기일에 따라 철야 작업이 비일비재했고 노동조합과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전파하고 있던 정당한 생활 유지를 위한 임금과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노동시간을 지키는 것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서울의류지부 산하 대다수의 분회에서 노조 결성 주도자들을 해고하거나 정직하고 노조를 인정하지 않자 영등포구청 주재 근로감독관이 진상조사에 나설 정도였다.주)001
한영섬유분회는 1970년 12월 28일 250명의 조합원 가입을 통해 결성됐다. 그러나 한영섬유는 서울의류지부 산하의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의류지부가 결성된 5개 기업체들은 1971년 1월을 기하여 노조활동에 주도적인 조합원들을 무기출근정지 시키거나 해고했다. 1971년 1월 13일 다옥편직이 노조 분회장을 해고하자 한영섬유도 다음 날인 1월 14일 4명의 분회임원을 취업규칙 위반 사유를 들어 해고했다.
서울의류지부 한영섬유분회의 결성과 김진수사망사건
회사측이 분회 간부들을 해고하고 노조 탈퇴를 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탈퇴를 종용하자 한영섬유분회는 한영섬유를 상대로 서울지방노동청에 부당해고무효신청서를 제출했다. 서울노동지방위원회에서 복직명령을 내린 후에도 한익하 사장은 이를 이행하지 않고 1971년 3월 쟁의발생신고서를 제출했다. 이 와중에도 공장장 주도하에 노동조합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기 위해 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 탈퇴를 종용했다. 공장장 유해풍은 폭행사건으로 퇴사된 적 있는 노동자 3인(정진헌, 홍진기, 최홍인)을 재입사시키면서 노동조합 탈퇴 작업을 맡겼다. 노조 탈퇴서를 받아오면 이들에게 수고비를 지급했다.
공장장 유해풍은 이들 3인의 활동을 독려하였고 이들은 1971년 3월 18일 오후 5시쯤 공장 밖 술집에서 노조 탈퇴를 공작할 주요 인물에 대해 상의하다가 김진수가 노조의 주요 인물이니 김진수에게 시비를 걸기로 의견을 모았다. 회사는 김진수를 폭력 사건에 휘말리게 할 경우, 김진수를 해고 처리하고 이들 3인의 신변은 회사가 보장해주기로 약속받았다. 만취 상태로 공장 3층으로 올라간 이들은 김진수에게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했고, 김진수가 이에 불응하자 시비 끝에 정진헌이 드라이버로 김진수의 머리를 찔렀다. 의식을 잃은 김진수는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이들이 부상 상황에 대해 의사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사건을 숨김으로써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김진수는 사경을 헤매다 결국 5월 16일 숨을 거두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주도의 진상규명과 장례 투쟁
김진수의 사망 직후에도 회사 측은 노조탈퇴활동을 한 3인을 불러 개인 간 우발적 사건 발생임을 강조하면서 신변 보장을 약속했다. 김진수는 1960년대 말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실무자 김경락 목사가 심혈을 기울여 교육하고 조직한 노동자였다. 사건 발생의 전모를 파악한 한영섬유 분회원들은 이것을 회사측의 소행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섬유노조와 한국노총은 1971년 4월 10일 “김진수 상해치사사건 조사”를 통해 본 건이 부당노동행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우발적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분회원들은 4월 15일 “노총을 규탄한다”라는 구호를 적은 러닝셔츠를 입고 노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노총 섬유노조 간부들과 가까운 관계였던 산업선교 실무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회사 측의 노동조합 탄압과 부당노동행위, 그리고 상해치사 사건의 배후에 회사가 있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각계각층에 성명서를 보내고 사건을 알려 나갔다. 영등포산업선교회와 대책위원회는 김진수에 대한 치료가 진행 중이었던 4~5월 사이, 회사측에 ①부당노동행위 철회와 노동조합 활동 보장, ②충분한 피해 보상과 치료비 제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달 후인 5월 16일 김진수는 결국 사망했다. 사망 직후 영등포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은 개신교 각 단체와 기독교청년운동단체, 노동조합과 연대해 사건의 진상을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회사측과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이러한 연대단체들에 힘입어 1971년 6월 19일에서야 영등포산업선교회 측이 회사 측, 유가족 측, 노동조합 측,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를 비롯한 기독교 학생회 대표 등으로 구성된 8명과 연석회의를 개최해 치료비의 전액 보장, 장례비의 일부 부담에 합의해서 6월 25일 가까스로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영산회관에 노동회관 이름으로 사무실을 건 섬유노조 지부를 내쫓기 위해 ‘영등포 노동운동 진상 폭로대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김진수 사건을 계기로 기성 노동조합인 한국노총과 산업선교회는 대결 국면으로 치닫게 됐다.
산업선교회와 한국노총의 대립
김진수사망사건은 산업선교회로 하여금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위해 기존의 노동조합에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깨닫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노조와 산업선교의 우호적 관계는 끝이 났다. 산업선교회는 기성 노동조합 간부들을 가리켜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동료 노동자를 괴롭히고 창녀처럼 회사에 웃음을 판다”고 직접 비난할 정도였다. 산업선교회를 통해 조직을 확보하던 노조도 산업선교회를 “조직을 파괴한다.”, “노동조합이 교회인가?”라며 직접 비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내내 산업선교회는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하는 조합이어야 한다는 점과 산업선교회 산하 팀은 “조합원을 위한 노동조합 형성”을 강조했다. 김진수사망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이 사건 이후 조지송 목사의 주도 아래 교회와 노총에 기대지 않는 독자적 길을 추구했다. 조 목사는 1972년 “산업선교는 더 이상 공장주의 허락을 얻어 종업원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사업이나 자선기관이 아니다”라며 앞으로 산업선교회는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들의 구체적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산업선교회와 한국노총의 관계가 대립, 갈등으로 치달을 무렵 산업선교회 협력자로 부상한 단체는 기독교 학생운동 단체들이었다. 1970년 11월 전태일분신사건으로 노동자 문제에 눈을 뜬 대학생들은 1970년대 산업사회의 부조리와 사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았다. 학생운동이 노동자와 노동문제에 관심을 둔 것은 이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과 EYC 소속이면서 산업선교회를 매개로 노동자훈련 경험을 가진 기독학생들이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인천산업선교회는 기독교학생단체를 매개로 매 학기 방학 중 지원자를 모집해 공장 파견과 노동 체험 행사를 운영했다. 김진수사망사건에 연대한 기독학생들의 실천에 힘입어 EYC 및 KSCF 대표들도 연석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사건 이전에 도시산업선교회는 노사 간 갈등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김진수사망사건을 계기로 한국노총과 같은 기성의 노동조합이 회사측 입장을 조합원들의 입장보다 우선하는 모습이 확인되자 한국노총과 결별하게 된다. 이후 산업선교회는 노동자 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합을 결성하도록 조력하는 역할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유신체제 이후 강화됐다. 이후 도시산업선교회는 기성 노동조합보다는 기독교학생운동단체와의 협조를 강화했다. 뿐만아니라 조합원 중심의 활동을 지향한 도시산업선교회는 공단에서 가장 약자였던 여성노동자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진수사망사건을 겪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경우도 노동집약적 사업장이 집중됐던 경공업 발달 지역인 영등포에는 다른 지역보다 여성노동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72년 도움을 청하러 온 한국모방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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