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유사어/별칭/이칭
- 재일교포 서승·서준식형제 간첩사건
- 영어표기
- The Incident of the spy group of the Korean-Japanese students (Seo Seung and Seo Jun-sik)
- 한자표기
- (徐勝·徐俊植)在日僑胞留學生間諜團事件
- 발생일
- 1971년 4월 20일
- 종료일
- 1972년 5월 23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 지역
- 서울
1971년 4월 20일 육군보안사령부가 발표한 재일교포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서 재외국민에 대한 남북한 두 체제의 관리 및 통제 방침의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표적 공안사건이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가 추진됐고 이 과정에서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영주권이 인정되면서 모국유학도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한일협정 직후인 1966년부터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단기간 한국에 방문하는 모국수학프로그램이 시작됐고, 1968년에는 서울대학교에 재외국민교육연구소가 부설되어 4월에서 12월까지 9개월간 국어, 국사, 영어 등을 교육받고 희망하는 대학에 응시할 수 있는 대학입학 예비교육과정이 개설됐다.주)001 이러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됨에 따라 재일조선인의 모국 방문과 유학 기회는 점차 증가하게 된다. 모국 방문을 위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들 역시 증가했다.
그러나 모국유학이 본격화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1970년대 초 무렵 재일교포가 연루된 간첩단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유학생들의 상황은 크게 변화하게 된다. ‘재일한국인정치범 구원 가족교포회’에 따르면, 1970~80년대에 발생한 재일교포간첩단사건은 160여 건에 달했다. 이 중 120여 건이 국내 출신을 제외한 재일교포 출신 사건에 해당했다. 제1공화국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건 출현 빈도를 살펴보면, 1950~60년대에 비해 1970년대에 발생한 사건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사건에 연루된 이들 중 상당수가 유학생 신분에 해당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시기 한국의 수사당국은 ‘첩보수집활동과 병행하여 근원 발굴에 치중하여 교포 입국, 유학생, 국내 취업자들을 대상으로 개인별 용의점을 분석하여 학원, 산업계, 군부 침투 우회 간첩을 색출’한다는 기조 아래 국내에 들어와 있던 많은 유학생들을 간첩 혐의로 검거했다.주)002 그런 점에서 1971년도의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은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재일교포 관련 간첩단 사건의 첫 자리에 놓이는 대표 사례로서 그 의미와 중요성을 가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이 발표된 것은 1971년 4월 20일로, 4.27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육군보안사령부는 선거 기간을 틈타 국가 전복을 획책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발생했다고 공표하며 사건의 중심에 재일교포유학생들이 놓여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됐다. 동백림사건이나 통혁당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법당국은 관련자에게 무기징역 또는 사형선고와 같은 중형 처분을 내림으로써 사건의 엄중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공포감의 확산을 통해 예방 효과를 창출했다. 1971년도의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을 시작으로 집중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일련의 재일교포간첩 사건들은 1969년 삼선 개헌 이후 정부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던 대내적 상황을 통제하고 선거 국면을 맞아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데 관계됐다. 특히 이 사건들이 세칭 ‘학원간첩단사건’으로 불렸다는 점은 1960년대 중반 한일협정반대운동을 계기로 지펴진 대학가의 대항적 움직임에 대한 정부의 통제 방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971년 4월 20일 육군보안사령부는 선거를 앞두고 학생, 지식인, 노동자층에 침투하여 민중봉기와 사회혼란을 조성하여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하고자 암약해온 재일교포 유학생 등이 포함된 대규모 간첩단 4개 망(網), 51명을 지난 17일과 18일에 걸쳐 서울, 부산, 제주 등지에서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보안사령부에 따르면, 이번 간첩단은 1970년 11월 북한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김일성(金日成)이 주창한 대남공작의 제2단계인 민중봉기를 조성하고 무장폭동을 통한 무력침투전쟁을 유발한다는 임무를 띠고 북한대남사업 총책임자인 김중린(金仲麟)의 지령을 받아 1967년 이래 학원 및 각계각층에 잠입, 지하당을 조직하고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반정부선동 및 학생데모 배후조종, 노동자 연합봉기, 중요기관 폭파, 요인 암살 등을 기도해왔다.
이날 발표된 간첩단의 주요 활동 내역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강장운(姜將運)을 중심으로 한 12명의 관련자는 고려대를 거점으로 지하당 조직, 좌익서클 활동, 학생데모 배후조종 등을 전개하였다. ②서승(徐勝), 서준식(徐俊植) 형제 등 21명은 서울대를 거점으로 지하당 조직, 학생봉기, 박 대통령 3선 저지를 위한 각 대학연합전선 형성 등을 도모했다. ③강석만(姜錫万)을 중심으로 한 3인은 고려대 유도부를 중심으로 대상자를 포섭하고 학생데모 배후조종 등을 획책했다. ④정시일(丁時一)을 중심으로 한 15명은 부산을 중심으로 노동자, 어부 등을 포섭하고, 지하당 조직, 반정부선동과 민중봉기 등의 획책을 위해 암약해왔다. 대공수사기관은 이들 중 간첩 10명과 반공법 피의자 6명에 대한 심사를 마쳤으며, 관련자 35명에 대한 수사는 진행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관련자들로부터 송수신용 난수표, 사제 폭발물 제조 교육서, 김일성 육성 녹음테이프, 녹음기, 공작금, 불온문서 등 총 50여 점의 증거물을 압수했다고 밝혔다. 당시 유수의 언론을 통해 해당 사건은 대서특필됐으며, 이 과정에서 사건의 주요 내용과 관련 인물에 대한 신상정보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세칭 ‘학원간첩단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에서 쟁점이 됐던 것은 간첩단 사건의 주요 거점이 ‘일본’이라는 점과 주동 인물의 출신 배경이 ‘재일교포’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하여 본 사건은 ‘일본을 거점으로 한 학원침투간첩단사건’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보안사령부의 발표에 의하면, 간첩 10명 중 4명이 재일교포유학생에 해당했으며, 이들 중에는 형제 관계에 놓여 있는 인물도 포함돼 있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많은 이들 중에서 유독 서승, 서준식 형제가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 인물로 남겨지게 되었던 까닭은 두 사람의 옥중투쟁 이력과 출옥 후의 저서 집필 및 인권 활동이 크게 부각됐기 때문이다.
서승은 1945년 일본 교토에서 출생한 재일조선인 2세로서 1967년 3월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모국 유학을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1년 4월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동생인 서준식과 함께 기소됐다. 당시 수사당국에 따르면, 서승은 친형인 북한재일공작지도원 서선웅(徐善雄)에게 포섭돼 1967년 8월 1차 입북을 시도했고, 1970년 8월에는 동생 서준식과 함께 2차 입북을 하여 밀봉교육을 받고 남파됐다. 교포유학생으로 가장하여 입국한 이후,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서준식을 비롯하여 다수의 인물을 포섭하고 서울대를 거점으로 지하당을 조직, 학생데모 및 민중봉기를 지원하는 한편, 박 대통령 3선 저지와 각 대학연합전선 형성 등을 도모했다는 것이 주요 혐의 내용에 해당했다. 한편, 서승의 동생인 서준식은 1948년 일본 교토에서 출생하여 1967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어학연구소에서 1년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70년 8월 서승과 함께 북한에 가서 밀봉교육을 받은 후 대상자 포섭과 전국학생동향 파악 보고 등의 지령을 받고 1970년 9월 입국하여 간첩 활동을 전개해온 혐의를 받았다.
1971년 7월 19일 서울형사지법 합의8부는 세칭 ‘학원간첩단사건’의 첫 공판을 열고 인정신문을 진행했다. 같은 해 10월 11일 서울지검 공안부 서돈양(徐燉洋) 검사는 학원간첩단 사건 결심공판에서 서승, 서준식, 정시일 등 3명에게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나머지 14명의 피고에게는 징역 3년~12년을 구형했다. 서 검사는 이날 논고를 통해 “피고인 대부분이 20대의 대학생들이고 특히 서승 피고인 등 3명은 재일교포모국유학생들로 국가가 온정과 은혜를 베풀어왔는데도 간첩행위를 한 것은 가공할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며 이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주)003
1971년 10월 22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간첩행위 등 검찰의 공소사실을 인정하여 서승에게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서승과 마찬가지로 사형이 구형된 바 있는 서준식에게는 노동당 입당 사실을 입증할 근거의 부족과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구형했다. 피고인 15명 중 2명(서승, 정시일)에게는 구형량대로 사형을 선고했고, 4명은 징역 1년~15년의 징역 및 자격정지를, 6명은 집행유예, 그 외 5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서울고법 형사부는 1972년 2월 14일 해당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일부 피고인에 대한 원심을 깨고 정시일 피고인에게는 무기징역을, 정봉기 피고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재판부는 나머지 10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는 피고인과 검찰의 항소를 기각했고 서승 피고인(원심 사형)에 대해서는 신병관계로 재판을 분리하여 따로 공판을 갖기로 결정했다. 1972년 5월 23일 대법원 형사부는 해당 사건의 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검찰과 피고인들의 상고를 이유 없음으로 판단하여 모두 기각했고 정봉기 등 4명의 피고인에게 원심대로 무죄를 확정했다. 또한 사건의 주범으로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서승 피고인은 신병관계로 다른 피고인들과 분리 심리한 후 선고하기로 결정했다. 서승은 2심 판결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어 상고심에서 기각, 형이 확정됐다. 이후 1988년 12월 정부의 시국, 공안사범 석방 및 사면, 복권조치에 따라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이 됐으며, 1990년 2월 1일 법무부가 3.1절을 맞아 장기 복역한 좌익수 22명을 비롯하여 1111명의 수형자를 전국 각 교도소에서 특별 가석방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동년 2월 28일 석방 조치된다. 서승은 22명의 좌익수에 포함되어 19년의 복역 생활을 마치고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됐다.
서승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신병관계가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화상으로 인한 신체 훼손과 관련이 있다. 1971년 4월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강압적 수사를 받던 중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해 자백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으로 인해 고초를 겪게 된 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수사관과 경비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난로를 끌어안고 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얼굴과 온몸에 중화상을 입게 된다. 혼수상태에서 회복된 후 재판을 받고 구치소에 수감됐으며, 한동안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법정에 서야 했다. 서승은 투옥 중에도 사상전향제도가 독재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통제 수단으로서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사상전향서 제출을 거부했다. 정부의 가석방 조치로 1990년 2월 28일 석방된 후에는 서울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입북 사실은 인정하나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과 간첩행위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서준식은 징역 7년형에 따라 1978년 5월 27일 형기 만료 출소가 예정돼 있었으나 1975년에 제정된 사회안전법에 의해 사상전향을 거부했다는 등의 이유로 보안감호 처분 대상이 되어 청주보안감호소로 재수감됐다. 사회안전법에 규정된 보안처분의 종류는 세 가지(보호관찰, 주거제한, 보안감호)로 이 중 ‘보안감호’는 징역형에 준하는 것이었다. 사회안전법의 시행으로 정치범의 경우 형기가 만료됐다고 하더라도 ‘재범의 현저한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법원의 판결을 거치지 않고 법무부가 보안감호 처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서준식의 경우 보안처분이 네 차례에 걸쳐 갱신됨에 따라 10년을 더 복역하게 된다. 그는 1982년, 1984년, 그리고 1986년에 걸쳐 총 세 차례의 ‘보호감호처분 갱신 결정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진행했으나, 모두 승소하지 못했다. 비록 승소를 하지는 못하였더라도 이 소송은 “그 자체가 반사회안전법 투쟁의 기록”주)004이라는 점에서 서준식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988년 5월 25일 법무부가 ‘주거제한’으로 보안처분 완화 결정을 내림에 따라 서준식은 비로소 출소하게 된다. 이로써 1971년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88년 출옥할 때까지 17년의 기간 동안 이어진 수형생활에 종지부가 찍혔다.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몇 해 전에 발생한 ‘동백림사건’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1968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에 있는 조총련계나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교포들에 침투를” 시도하는 북한의 대남정책을 주시하며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이에 엄격한 경계를 하면서 대비를 특별히 강화”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주)005 한국 사회에서 동백림사건은 북한의 대남적화활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수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1971년도의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 역시 남북한의 재외국민에 대한 대외정책 및 통제 방침의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 공안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은 남북한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선전활동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거점(據點), 즉 남북을 매개하고 양자가 교착되는 접촉지대로서 ‘일본’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이곳을 경유하여 이동하는 주체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한층 강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알려준 사례에 해당했다.주)006 또한 해당 사건은 그 자체로 일종의 본보기 처벌의 사례가 되어 이후 발생하는 유사 사건들에 하나의 전거로서 기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울러 재일교포사회에 또 하나의 분단상황을 초래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무거운 역사적 의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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