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유사어/별칭/이칭
- 한국비료사건
- 영어표기
- The campaign to condemn saccharin smuggling
- 한자표기
- 甘精密輸糾弾運動
- 발생일
- 1966년 5월 24일
- 종료일
- 1966년 9월 22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베트남 파병 반대 및 사카린 밀수 규탄운동
- 지역
- 서울, 부산, 대구
1966년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한국비료)가 박정희 정권의 묵인과 은밀한 협조 아래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대량 밀수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비료는 사카린 원료와 함께 금수품(禁輸品)이었던 양변기, 냉장고, 밥솥, 에어컨, 전화기 등을 대량 밀수해 이를 암시장에서 되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민심은 들끓었고, 야당인 민중당, 신한당과 학생들은 밀수재벌 처단과 밀수재벌을 비호하는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세력은 이른바 ‘5.16혁명 6대 공약’의 세 번째로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는 것을 내걸었다. 하지만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뺨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사건들이 줄지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4대 의혹 사건’과 ‘삼분 폭리 사건’이 있었다.
‘4대 의혹 사건’은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코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들은 모두 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의 창당 자금 등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조직적인 경제범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나같이 ‘권력이 비리의 몸통’인 중범죄였지만,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들은 초기에 각종 부정부패‘척결’을 강조해 온 쿠데타 세력의 도덕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결국 박정희 군사정부의 2인자였던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이 이 사건들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외유를 떠나고, 1963년 3월에 15명이 구속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듬해인 1964년 1월 15일에는 제6대 국회의 임시국회에서 ‘삼분(三粉) 폭리 사건’이 정치 쟁점화되었다. 설탕, 밀가루, 시멘트를 생산하는 이른바 삼분 재벌이 가격 조작과 세금 포탈 등으로 폭리를 취하고, 그 대가로 박정희 정권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건이었다. 설탕은 삼성 계열의 제일제당, 시멘트는 동양시멘트와 대한양회, 밀가루는 효성물산과 대선제분이 관련되어 있었다. 세 가지 품목은 모두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것이라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시위에서도 “정부는 5.16 이후 감행된 부패를 규명하고 부패 근절의 보장을 약속하라. 삼분 폭리를 비롯한 악덕 재벌의 부정축재를 몰수하여 민생고 해결에 투하할 수 있도록 법적 조치를 강구하라”는 등의 선언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삼분 폭리 사건에 대한 국회와 언론의 추궁은 정경유착에 대한 국민의 의혹만 남긴 채 서둘러 봉합되었다.
한편 1960년대에 밀수가 많아지고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1966년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조치로 밀수를 5대 사회악(밀수, 도벌, 마약, 탈세, 폭력)의 하나로 분류해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했다. 밀수가 가장 악질적인 범죄로 꼽힌 것은 망국적인 사치심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62년 박정희 군정 하에서 밀수 혐의로 혁명재판에 회부된 한필국(韓弼國)은 일벌백계의 희생양이 되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1965년 1월~1966년 1월 한 해 동안 밀수 사범 검거 실적을 보면, 2,168건에 2,521명이 검거되었고, 압수금액은 3억 2000만에 달했다.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기본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유상재정차관, 그리고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다만 양국 정부가 차관 도입 실시계획을 합의한 시점은 1966년 4월로 그 이후 공시·입찰이 구체적인 절차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청구권 자금’에 의한 매입과 자금 공급이 이루어진 것은 1966년 중반부터였다. 그러나 한일조약으로 양국 정부 간 경제협정이 체결될 것으로 예상한 미쓰비시(三菱)상사, 미쓰이(三井) 물산, 이토추(伊藤忠)상사 등 일본의 종합상사들은 한일회담 타결 전부터 이미 다양한 형태로 한국에 진출해 있었다. 일본 상사들은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부터 경제시찰단을 꾸려 한국을 방문하고 서울에 주재소나 출장소를 설치했다. 그곳을 통해 한일조약 이후 전개될 ‘청구권 자금’ 관련 사업의 수주를 둘러싼 이권을 찾아 한국의 권력층에 접근할 파이프라인을 구축했던 것이다.
이러한 파이프라인은 한국과 일본에서 정·경제유착의 온상이 되었다. 일본의 경제협력이 “일본의 생산물과 일본의 용역”으로 제공되고 한국 정부가 국가주도적 자본 통제를 행함으로써, 10년간 매년 균등하게 지불되는 ‘청구권 자금’의 사업계약이나 발주처 선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각종 사업에서 일본의 기업이나 상사와 한국의 청와대나 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구 간의 밀착을 통해 계약이 성사되고, 그 과정에서 불법 댓가성 자금(리베이트, rebate)나 이중가격 설정으로 부정 자금이 오가는 밀착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권 구조에서 발생하는 부정자금이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었고, 청구권 자금에서 거액이 투입된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이 박정희 정권의 지지율을 끌어올려 선거를 유리하게 치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가 울산에 요소비료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미쓰이물산으로부터 상업차관 4,200만 달러를 제공받고 삼성이 그에 대한 커미션(commission)을 지불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삼성은 200만 달러의 정식 커미션을 상납했고, 그것을 국내에서 대신 보전하려는 속셈으로 한국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만을 골라 비료공장 건설자재로 위장했다. 이를 통해 사카린 원료인 OTSA(O-toluenesulfonamide)와 당시 수입금지품이던 양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을 대량으로 밀수, 이것을 암시장에 되팔아 엄청난 이익을 얻은 것이다.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이병철(李秉喆)의 장남 이맹희(李孟熙)의 회고에 의하면, 공장 건설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던 박정희와 이병철의 합작품이었다. 농촌인구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당시 한국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1967년 대선을 앞두고 비료공장 건설을 홍보용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이병철도 이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국민, 정부, 언론이 비료공장 건설을 지원할 것, 정부가 책임지고 10억 원의 은행 융자를 해줄 것, 공장 건설에 필요한 인허가 등을 신속히 해줄 것, 공장 건설과 관련하여 한 푼의 정치자금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미쓰이 물산과의 차관교섭과 도입과정, 조건협상은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이 직접 담당했고 정부는 지불보증을 서는 것으로 지원했다. 차관의 내용은 비료의 연 생산량 33만 톤, 외자 4,200만 달러(2년 거치 8년 상환, 이자율 연리 5.5%)였다. 당시 이자율이 6∼6.5%였음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히 저리였기 때문에 삼성 특혜설이 돌기도 했다. 처음에 밀수 자체는 중앙정보부 등의 비호 아래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밀수품 판매가 잘 안되어 한국비료 공장 앞마당에 숨겨두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적발되었던 것이다.
1966년 5월 5일 울산에 공장을 건설하던 삼성계열사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 2,259부대, 약 55~60톤을 건설자재로 꾸며 세관 몰래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 사건이 터졌다. 부산세관은 5월 19일 이 사실을 뒤늦게 적발하고도 극비에 붙여오다가 6월 1,059포대를 압수하고 세관장 직권으로 추징금 2,300만 원을 부과했지만, ‘밀수는 곧 망국으로 가는 흉악범죄’라는 등식이 존재하던 상황에서 대기업의 밀수 행위와 정권 차원의 방조 의혹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삼성은 이전에도 건설자재로 도입한 시멘트를 불법으로 전매해 2,400만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은 일이 있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세상에 폭로된 것은 4개월이 지난 9월 15일 「또 재벌밀수」와 「삼성재벌 밀수」라는 제목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특종 기사에 의해서였다. 이를 시작으로 신문들은 일제히 비분강개 조의 비판을 쏟아냈다.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고조되자, 9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검이 사건을 전면 수사해 이를 철저히 규명,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대검찰청은 특별수사반을 편성,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박정희는 10월 3일 ‘개천절 경축사’를 통해 이례적으로 이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삼성과의 선 긋기에 나섰다. “경제건설에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에 봉사해야 할 대기업이 민족이야 어떻게 되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고 나라야 망하건 말건 내 사업만 번창하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밀수에 뜻을 둔다면, 이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탄되어야 할 반국가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전면 수사 지시나 경축사 내용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은 삼성의 사카린 밀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 책임을 삼성에 떠넘긴 채 발뺌을 하는 바람에 모든 비난을 삼성그룹과 이병철이 감수해야 했다. 9월 22일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비료의 자기 지분 51%를 국가에 기부하며 재계 은퇴를 선언, 위기를 모면한 뒤 복귀했다. 이병철 대신에 한국비료 상무였던 둘째 아들 이창희(李昌熙, 일본 3대 종합상사인 미쓰이물산 중역 나카네 쇼지의 사위)가 사카린 밀수죄로 구속되어 6개월 징역살이를 했다.
삼성의 2000억대 밀수 사건은 한·일 양국의 대재벌이 밀수에 관여했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정치적 쟁점으로 번져 야당의 공세가 끊이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밀수 행위를 묵인, 방조, 지원했다는 의혹에 있었다. 정치자금을 매개로 권력 상층부와 삼성그룹이 거래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의혹을 부채질한 것은 밀수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9월 16일 김정렴 재무부 장관이 나서서 이 사건이 삼성 계열의 한국비료와는 무관한, 한국비료 직원의 개인적 밀수라고 주장했고, 한국비료 측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는 점이었다.
9월 21일 삼성재벌계 한국비료 밀수 사건이 국회 본회의에서 정식으로 규탄 대상이 됐다. 여야 의원들은 이례적으로 보조를 맞춰 밀수 재벌의 망국 행위와 정부의 미온적인 방임 정책을 신랄히 비난했다. 9월 22일 대정부 질문 첫 발언자로 나선 공화당 이만섭 의원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병철 씨가 천인공노하게도 사카린을 밀수해 온 국민을 격분시켰다. 그런데도 삼성 밀수 사건의 송사리만 잡아넣고 왜 이병철 씨는 잡아넣지 못하는가”라며 정부를 추궁했다. 민중당의 김대중(金大中) 의원도 이병철의 즉각 구속과 정일권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하며 이만섭의 주장에 동조했다.
뒤이어 무소속의 김두한 의원이 올라왔다. 그는 자신의 반공투쟁 경력 등을 소개한 뒤에 “나는 배우지 못해서 말은 못하나 행동으로 부정과 불의를 규탄하겠다. 여기 앉은 각료들은 3년 동안이나 부정과 부패를 한 피고들이다”라고 말하고 들고 온 통을 들고 국무위원석으로 다가갔다. 그는 “이것은 재벌이 도둑질 해 먹은 것을 합리화시켜 주는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라고 외치면서 통에 든 걸 뿌렸다.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고루고루 맛을 봐야 알지.” 국무총리 정일권(丁一權),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張基榮), 재무장관 김정렴(金正濂), 법무장관 민복기(閔復基), 상공장관 박충훈(朴忠勳) 등 국무위원들이 미쳐 피할 틈도 없이 인분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김두한(金斗漢)의 인분 세례에 국민은 박수를 쳤지만 국회 분위기는 과도한 행동이었다는 인식이 컸다. 9월 23일 박정희는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공한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하여 국회가 신속하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국회와 행정부의 위신과 권위를 다시 찾고 동시에 앞으로는 이러한 불상사가 다시는 없으리라는 충분한 보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다음 날 국회 본회의는 재석 155명 중 찬성 111표로 김두한의 사직원을 가결했으며, 김두한은 서울교도소에 수감 됐다. 일사천리로 법적 처벌이 이뤄진 셈이다. 정일권 내각은 인분 세례에 항의해 일괄 사표를 제출했으며, 9월 28일 법무장관 민복기, 재무장관 김정렴, 문교장관 권오병(權五柄)은 해임되었다.
그 이전인 9월 22일 미쓰이 물산은 사실상 삼성이 밀수의 주체였음을 확인하는 발표를 했다. 사카린 원료인 OTSA는 건설자재로 정식 수출 계약된 것이며, 그 대금은 차관 대금에서 결제했다는 것으로, 이 사건이 한국비료 일개 직원의 개인적 밀수가 아님이 확인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밀수에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은 사건 당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신한당 당수 윤보선은 9월 26일 밀수 사건의 책임이 박정희에게 있으며, 국회가 박정희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연설회를 열어 밀수 재벌을 비호하는 박정희 정권을 규탄했다. 9월 23일 대구에서는 민중당과 신한당 간부 40여 명이 밀수 재벌 타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고, 9월 27일에는 이인, 백남훈(白南薰), 박기출(朴己出), 신숙(申肅) 등 재야 원로들이 정부 내부의 부패를 경고하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건이 국회에서 공론화된 직후 공동으로 개최하려던 민중당(대표최고위원 박순천)과 신한당(총재 윤보선)의 삼성 재벌 밀수 규탄대회는 두 당이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바람에 연기를 거듭하다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0월 6일 사카린 밀수 사건을 수사해 온 대검 특별수사반(반장 김병화 대검차장검사)은 재수사에 착수한 지 18일 만에 수사를 종결, 이창희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이일섭(李逸燮, 전 한국비료 상무)에겐 업무상 배임과 문서손괴죄를 적용해 서울형사지법에 구속기소하고, 성상영(成尙永, 한비 대표이사)에 대해서는 관세법을 적용, 기소했다.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 중이던 전 부산세관장 문용섭(文鏞燮)은 무혐의 불기소처분과 동시에 석방되었다. 귀추가 주목되었던 이병철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의 추궁 없이 매듭지어졌고, 관계 공무원들도 무혐의 불기소 처분됨으로써 세상을 뒤흔들었던 한국 최대 재벌의 밀수사건은 많은 의혹을 남긴 채 일단락되었다.
검찰의 수사 결과에 반발한 야당은 10월에 옥외에서 대규모 규탄집회를 열었다. 경찰은 규탄집회를 안내하는 거리방송차 4대를 압류하고, 선전물을 나눠주던 야당 당원 78명을 연행했다. 또한 전단 5만 매와 벽보 2500매를 압수했으며, 현수막을 철거했다. 민중당은 10월 9일 효창구장에서 4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궐기대회’를 열고 이병철 등 책임자 처벌과 정부 내 비호세력 척결을 주장하여 많은 청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특히 김대중 의원은 “지난 5월 밀수사건이 났을 때 한비의 부사장이 청와대에 가서 보고했는데, 정부는 그때는 왜 안 잡고 세상이 시끄러워지니까 잡는다고 하다가 흐지부지하는가”라고 주목할 발언을 했다. 이어 유진산 의원은 “재벌밀수는 밀수가 아니라 정권과 공모해서 공공연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공수(公輸)라고 해야 하며, 박정희 씨는 5.16쿠데타 후 공약을 어겼으니 정계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재벌밀수규탄 민중당 부산시투쟁위원회 간부 150여 명은 삼성밀수규탄 성토대회를 열고 박정희 정권은 법치국가의 장송곡을 더 이상 연장하지 말라는 등 선언문을 채택한 뒤 밀수재벌 및 그 옹호자의 우상을 화형하고 23시간 단식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10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공화당 6명, 민중당 4명의 비율로 구성된 ‘특정재벌밀수사건진상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공화당 김진만 의원) 구성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본회의에서 민중당의 유청(柳靑) 의원은 특위의 조사 대상으로 삼성, 판본 밀수에 국한시키지 말고 다른 재벌들의 밀수 행위도 조사하하자고 주장해 다른 야당 의원의 지지를 받았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1월 11일 국회 특조위는 30일간의 조사 기간 동안 50여 명의 증언과 현지 출장조사 등 19차 회의를 거듭했지만, 심증 이상의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채 활동을 마감했다.
10월 15일 신한당은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25000여 청중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열었다. 같은 날 민중당은 대구 수성 천변에서 35000여 청중이 모인 가운데 특정재벌 밀수규탄대회를 열었다. 특히 대구 집회에서 장준하는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의 밀수 왕초이며, 김종필 씨 등에게 정치자금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아 밀수 내막이 터진 것”,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라는 등 허위사실을 공공연히 유포해 국가원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서울형사지법(안우만 판사)은, 장준하(張俊河)의 연설은 대통령의 정치적 명예뿐 아니라 사회적 명예까지 훼손했지만 막사이사이상을 받는 등 언론에 헌신한 사회적 경력 등을 참작, 장준하에게 징역 6월(구형량은 징역2년)을 선고했다. 조윤형 의원도 11월 12일 부산 시국강연회에서 “장준하 씨가 사카린 원료 밀수 관련, 박정희 씨를 밀수 왕초라고 한 이야기는 우리 국민이 모두 알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 불구속 기소되었다.
학생들은 한일협정 반대투쟁 이후 형성되었던 반외세 반매판의 기조 아래 재벌 규탄에 나섰다. 9월 22일 고려대 상대 4학년 70여 명은 교정에서 ‘삼성재벌의 밀수를 규탄한다’는 성토대회를 갖고, 취직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삼성재벌의 각종 회사에서 실시하는 입사시험을 보이코트한다’고 결의했다. 9월 23일 서울대 상대에서 학생들이 ‘삼성재벌 밀수사건 성토대회’와 삼성 산하 기업체에 대한 입사시험 거부 결의문을 채택하려다 학교 측의 만류로 해산했다. 9월 27일 서울대 총학생회(회장: 정형근·법3) 학생회장단은 “대표적 매판자본들이 국민적 신의를 배반하고 경제건설과는 동떨어진 금융특혜 등 정치권력과 결탁, 폭리 행상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규탄했다.
10월 7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반 밀수재벌 학생투쟁위원회’가 이병철의 즉각 구속과 재벌의 재산몰수, 일본상사 추방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10월 8일에는 서울대 법대생 250여 명이 ‘밀수 매판 재벌 성토대회’를 열고 금권과 정권의 결탁을 방관하는 것은 민족경제 자립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규탄하며, ‘밀수매판재벌의 본영인 이병철을 즉각 구속하라’고 성토했다. 서울대 법과대 교수회의는 성토대회를 주동한 안상수(법학3)와 조영래(법학2)에 대해, 학내질서를 문란케 했다는 이유로 1개월의 정학 처분을 내렸다. 조영래는 “망국적인 밀수의 원흉은 떳떳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데, 밀수를 규탄한 우리가 처벌되는 현실이 서글프다”고 개탄한 뒤, “대학은 이제 진리와 정의를 가르치는 대신 불의의 옹호와 방관과 굴종을 강의하는 곳으로 변질된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회의도 성토대회를 주동한 정진일(사회3)은 3개월 근신에, 손학규(정치2)는 무기정학에 처했다. 서울대 유기천 총장은 정학 처분에 대해 “정치적인 문제로 번진 삼성 밀수사건을 학생들이 성토한 것이 나쁘지 않다면, 학업을 버리고 정치에 관여한 학생을 정학 처분한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밝혔다. 학생들은 “밀수재벌을 규탄한 학생들을 처벌하는 것은 밀수 행위를 방조하는 것”이라며 학교당국의 처사를 비난하며, 학교 측의 납득할 만한 답변이 없을 경우 학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10월 10일에는 건국대생 500여 명이 ‘특수재벌밀수 규탄 궐기 대회’를 열어 ‘매판자본’, ‘사카린’ 등을 써 붙인 허수아비를 교정 연못에 던져 넣는 등 ‘매판자본 해외 추방식’을 가졌다. 같은 날 연세대생 100여 명도 성토대회를 열고 “대재벌은 밀수를 했고 법을 다루는 자들은 법질서를 파괴 해가며 재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면서 ‘밀수대왕 이병철을 극형에 처하라’, ‘꼭두각시 신xx는 국민의 심판을 받으라’는 구호를 외쳤었다. 10월 13일 연세대 총학생회는 2,0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재벌 밀수규탄 성토대회’를 열고 이병철 엄단, 삼성 산하 기업체 국유화 밀수 집단과 결탁한 정상배 추방, 반국가적 재벌과 유대 단절 등을 요구하고, 삼성재벌 제품의 상품 불매운동을 결의했다. 다음날 연세대 학교 당국은 성토대회를 주최한 총학생회에 대해 ‘학원질서를 문란시켰다’는 이유로 기능 정지 처분을 내렸다.
10월 27일 고려대 강당에서 전국 27개 대학 180명의 대표가 참가한 모의국회가 열렸다(아남민국; 고려대학교 학생자치행사-편집주). 여야 의원들은 삼성 재벌 밀수를 긴급동의 의제로 채택했다. 열띤 논쟁 끝에 밀수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전 국무위원의 해임결의안을 가결시키고,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삼성 재벌의 전 재산몰수, 재벌총수의 즉각 구속과 극형으로 처단할 방침을 밝혔다. 10월 27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 400여 명은 학원자유수호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도살장 아닌 자유 학원을!’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학교 당국에 압수당한 데 대해 ‘정권 유지의 시녀로 타락한 학장, 교수들은 물러가라’고 선언한 뒤 ‘학원자유수호투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다. 궐기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삼성 밀수에 대해서는 ‘대통령도 마땅히 국민의 규탄을 받아야 할 망국적 행위라고 했는데, 유기천 총장의 발언은 사회를 동요케 한 소위 정치적 망발’이라고 비난했다. 11월 4일 고려대생 500여 명은 ‘삼성밀수 규탄 성토대회’를 열고, “삼성재벌의 괴수 이병철은 파렴치한 밀수를 해 국민의 공분을 샀고, 당국 또한 2차에 걸친 밀수 수사에서 밀수 재벌을 비호해 국민의 의분을 샀다”고 규탄했다. 또한 밀수 원흉이며 망국의 주범인 삼성 재벌총수 이병철 즉각 구속, 밀수단의 하수구인 한국비료 국유화, 삼성 밀수의 주구 노릇을 한 일부 지성인을 망국의 종범으로 단죄, 밀수사건의 전면 재수사 등을 촉구했다. 고려대는 긴급교무위원회를 소집, 성토대회를 주동한 총학생회장 조동세(경영3)에게 학교당국의 지시를 어기고 불법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11월 11일에도 800여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밀수가 합법이냐, 방조가 당위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밀수규탄 성토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정부가 다짐했던 강력 수사가 밀수 원흉의 탈출구를 만들어주는 데 그쳤다며 재수사를 요구했다. 특히 이들은 삼성 산하 모든 기업체 국유화, 재벌들의 각성,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에 대한 경계와 대일 자세의 전면 재검토 등을 주장했다. 정부당국은 데모에 대비해 1500여 명을 경찰을 동원했다. 고려대 학교당국은 교무위원회를 소집해 성토대회 주동학생인 이기웅(법학3)과 이종권(법학3)을 허가없이 집회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결의했다.
한편 10월 18일 4.19회 회원 100여 명은 서울 수유리 4.19기념탑 앞에서 밀수재벌규탄 범국민운동의 첫 단계로 박정희 정권의 밀수 재벌 비호를 규탄하는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하려다 해산당했다. 10월 21일 한국신문윤리위원회(위원장 고재호)는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에 대한 삼성재벌계 중앙일보(발행인 이병철)의 일부 보도 및 논평은 특정 업체를 비호하기 위한 편파적 보도로 인정하고,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4단 이상으로 사과하고 위원회 결정 전문을 게재할 것을 결정해 통고했다.
1964년 초의 ‘삼분 폭리사건’부터 1964년 말의 삼호, 화신, 판본 등에 대한 거액의 특혜 융자 사건, 1966년 9월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까지 재벌의 부정부패 사건이 계속 이어졌지만, 야당의 폭로와 비판 여론이 고조되면 정부와 공화당이 이에 부응하는 듯 조사에 착수했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용두사미의 수사 결과를 내놓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의 저서 『회상록-묻어둔 이야기』(1993)에 따르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자신이 직접 현장 지휘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삼성이 공모한 조직적인 밀수였다. 즉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 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과 삼성과의 유착 자체도 큰 문제지만, 한국 재벌의 자본축적 과정의 표본인 삼성이 저지른 사카린 밀수사건은 재벌의 매판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밀수 재벌에 대한 규탄 투쟁은 한일협정 반대투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한일협정 체결 이후 미쓰이 등 일본 독점자본의 전초 부대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있으며, 삼성 등 재벌들이 여기에 결탁하여 매판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 밀수사건은 재벌의 매판성과 정권과 재벌 사이의 결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므로, 민족 자립경제 달성을 위해서는 일본 자본 추방과 재벌 재산몰수까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매판자본, 정경유착 등의 비판에 맞서기 위해 개별 기업들은 1965년부터 ‘기업이 사회성’을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사회복지를 위한 기부를 하거나 삼성문화재단 같은 각종 문화·교육 재단을 본격적으로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전경련은 비판 여론에 맞선 여론전에 앞장섰다. 외자 도입과 내자 조달에 비리가 생기고 소위 정치와 결탁된 민간기업은 정부가 전체 금융기관을 민영화시켰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였다. 정부와 외부 환경에 대한 책임 전가를 통한 일종의 ‘협박’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대학가에서는 밀수재벌에 대한 규탄과 함께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반대투쟁으로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징계 해제 투쟁도 함께 전개되었다. 이는 단순한 징계 철회가 아니라 학원의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학교 측이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때 내린 징계를 해제하는 것은 고사하고 ‘밀수재벌 성토대회’를 준비한 학생들을 처벌하면서 학원자유화 투쟁은 격화되었다.
삼성 사카린 밀수 규탄에서 대정부 공동전선을 만드는 데 실패한 민중당과 신한당 등 야당은 대통령 후보 단일화와 정권교체를 목표로 1967년 2월 7일 통합전당대회를 열고 신민당을 창당했다. 유진오(俞鎭五, 고려대 전 총장)를 대표위원으로 선출한 신민당은 1980년 해산되기까지 박정희 정권에서 제1야당으로 활동했다.
본 자료의 경우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표시기준(공공누리)” 제4유형을 적용하여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항에 따라야 합니다.
멀티미디어, 연계자료의 경우 해당기관 또는 사이트의 저작권 방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 저작권 정책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