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ment to stop dismissals of 'political professors'
한자표기
‘政治敎授’ 解職反對運動
발생일
1965년 7월 1일
종료일
1967년 8월 30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서울 및 전국 대학
개요
1964~1965년에 전개된 한일협정반대운동에서 학생과 야당 외에 지식인들, 특히 대학교수들이 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다. 당시 교수들은 ‘교수단’ 성명서 발표 등으로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65년 8월 14일 한일협정 국회 비준 이후 한일협정비준무효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물리력을 앞세워 그동안 자신과 맞섰던 대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8월 26일 서울 시내 위수령을 선포해 학생시위를 무력 진압한 박정희 정권이 학생시위 배후 조종자로 11개 대학 21명의 이른바 ‘정치교수’를 지목해 해직, 파면 등의 압력으로 학생시위를 무력화하려 했다. 이에 대해 ‘정치교수’ 해직반대운동이 전개됐다.
배경
1965년 1월 18일, 6.3항쟁으로 중단됐던 한일회담이 속개됐고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으로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이 시작됐다. 3월 26일 동국대 시위를 시작으로 대학과 고교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잇달았다. 4월 16일 동국대 학생 김중배(金仲培)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대학가의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자 6월 23일 전국 각 대학과 고교에서 한일협정 조인 무효화와 비준 반대 성토대회 및 시위, 단식이 잇달아 전개됐다. 비준반대운동이 학원에서 확산되자 교수, 변호사, 문인, 개신교 목사 등 지식인들도 참여하기 시작해 7월 초 개신교 목사들의 반대 성명서 발표, 7월 중순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의 비준 반대 성명서 발표에 이어 7월 말에는 대학교수단・예비역 장성・종교인・법조인・문인・여성계 등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조국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윤보선(尹潽善) 등 야당 국회의원들은 탈당계를 제출하고 ‘비준 저지의 최후 수단인 민중당의 해체’(“복수정당제를 규정한 현행 헌법에 비춰 야당 없는 국회비준은 위헌이며 무효”라는 논리)를 주장하는 등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을 막는 시위가 거국적으로 전개됐다.
원인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서울 소재 대학교수들은 한일협정 비준 국회 개회에 맞춰 7월 12일 ‘재경(在京) 대학교수단 354명’ 명의로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교수단은 한일회담의 경과와 협정 내용이 민족적 자주성과 국가적 이익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뿐더러 장차 심히 우려할 사태가 전개될 것을 지적하고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당파적 이해를 초월하여 치욕적인 불평등 협정을 결연히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서울대 의과대학 뒤뜰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재경 대학교수단’은 의장단에 조윤제(趙潤濟), 김윤경(金允經), 이헌구(李軒求), 권오돈(權五惇) 등을 선임하고 이후 전국적 규모의 서명운동, 비준반대투쟁을 계속해 갈 것을 결의했다. 이에 대해 윤천주(尹天柱) 문교부 장관은 “다음 세대를 짊어질 학생을 지도할 입장에 있고 대학교수란 신성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학교 관리자의 허가 없이 학원 안에서 정치적 집회를 감행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난했다. 13일 문교부는 서명 교수들의 명단을 대학별로 분류, 서명 교수의 성분 파악과 본의에 의한 서명 여부를 조사하라고 각 대학에 지시했다. 14일 농협중앙회교육원 최종식(崔鍾軾) 교수는 “선언대회에 참가하거나 선언문에 서명한 일도 없으니 이름을 도용한 자를 처벌해 달라”고 경찰에 고발했다. 함께 고발했다고 알려진 중앙대 유인호(兪仁浩) 교수는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고발한 사실이 전혀 없고 내 스스로 서명했으며 비준 반대의 소신에 변함없다”고 밝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8월 8일 재대구 교수단 43명은 “지난 7월 12일 자로 재경 교수단이 채택한 한일회담 비준 반대 결의 및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 찬동한다”면서 서명을 했다.
1965년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여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하자 한일협정 비준을 무효화하기 위한 학생들의 시위가 재개됐다. 여름 방학 종료와 함께 모든 학교가 일제히 개강한 8월 23일 이후 전국 14개 대학 1만여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규모 학생시위가 부활하자 박정희 정권은 보다 강경한 탄압으로 학원 시위에 대응했다. 8월 20일 문교부는 정치 활동에 참여한 학생 서클 해체 방침을 공언했고, 21일 치안국장은 학생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전 경찰에 지시했다. 23일 전국 대학 및 고교생 1만여 명의 시위에 이어 24일에는 서울지역 대학생 1만여 명이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학교별로 성토대회를 가진 뒤 거리로 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박정희 정권의 강경한 태도와 압박에도 8월 25일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자 정부는 시위 진압에 무장 군인을 투입했다. 이날 오후 무장 군인 50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해 학생들을 군화로 짓밟고 곡괭이 자루로 패며 수십 명을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날 저녁 7시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한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까지 학생들의 데모 등 범법 학생을 선도 못한 교직자들도 그 직에서 물러나도록 할 것”이라며 야당 정치인, 교직자, 학생들을 비난한 후 학교 폐쇄 등의 강경책을 예고한 뒤 다음 날인 26일 ‘위수령’을 선포해 학생시위 진압에 나섰다주)001
전개
위수령 선포로 전방 주둔 6사단 병력이 서울 소재 각 학교에 분산 배치되어 학생시위를 진압하자 학생들은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 규탄 집회’로 대응하고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학원 침입이 국토방위냐” 등의 구호로 교문 밖 가두시위를 시도했다. 박정희 정권은 8월 27일 학생시위에 대한 강력 대처를 천명하고 윤천주 문교부 장관과 신태환(申泰煥) 서울대 총장을 전격 경질했다. 신 총장 후임으로는 학생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던 유기천(劉基天) 법대 학장을 임명했다. 27일 오전 청와대 대변인은 학생시위에 대처하는 정부의 4단계 조처로 1단계-시위 주동 학생 색출과 처벌, 2단계-총·학장 해임과 승인 취소, 3단계-휴교, 4단계-재단 인가 취소를 통한 폐교 등을 발표했다.
전날인 26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김성은(金聖恩) 국방부 장관, 양찬우(楊燦宇) 내무부 장관, 윤천주 문교부 장관,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등과 데모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고, 28일까지 사태 수습에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학교 폐쇄 등 모든 조처를 단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윤천주 문교부 장관은 “데모 주동 학생이나 이를 선동하는 교수를 빨리 조처하라”는 내용의 지시문을 사립대 총·학장들에게 전달했다. 연세대·고려대를 제외한 서울 시내 8개 사립대 총장들은 조선호텔에 모여 이 지시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27일 연세대와 고려대를 제외한 서울 시내 대학은 시위 주동 학생 12명 제적, 26명을 무기정학, 6명을 근신 처분하는 등 징계 절차를 밟았다.주)002
‘정치교수’ 의 등장
박정희 정권에게 ‘정치교수’란, 일종의 ‘낙인 효과’(stigma effect)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한 부정적 용어로, 정권에 비판적인 교수를 뜻했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1965년 8월 31일 시국 수습 7개 항에 ‘학생데모를 선동하는 교수’로, 다음날인 9월 1일 한 문교 당국자는 ‘조국수호협의회 등 정치단체에 직접 가담, 성명서를 발표, 사회나 학교를 혼란시키는 교수’로 정의 내렸다.
박정희 정권의 학생시위 강경 대응과 폐교 위협에도 불구하고 8월 27일 서울 시대 9개 대학 1500여 명의 ‘학원 방위 학생 총궐기대회’를 열어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독단”에 공동 투쟁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등은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총장이 경질된 서울대는 11개 단과대학 학생회장과 간부들이 모여 29일 오전 11시 문리대 교정에서 서울대 학생총회를 열기로 결정하는 한편, ①신임 유기천 총장 취임 반대, 총·학장 및 대학원장의 해임 반대, ②학원 방위 기구 설치를 제창할 것을 결의했다.주)003
8월 27일 신태환 서울대 총장과 윤천주 문교부 장관이 경질됐고 후임 문교부 장관에 권오병(權五柄) 법무부 차관이 임명되는 등 학생시위를 저지하려는 정부의 강경한 행정 조치들이 잇달았다. 28일 정부는 정일권 국무총리 주재로 시위수습 관계 당국자 회의를 열어 “모든 수사기관을 동원해 학생데모를 선동 책동하는 배후 인물 및 조종 학생을 철저히 색출할 방침”을 밝혔다. 이날 경찰은 시위 주동자로 140여 명을 지명 수배하고 검거자들에게 반공법과 내란 선동 혐의 적용 방침을 세웠다. 서울지검은 학생시위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 92명의 명단을 작성, 이중 이미 구속된 12명을 제외한 80명을 전원 체포할 것을 관할 경찰에 지시했다. 같은 날 첫 기자회견에 나선 권오병 신임 문교부 장관은 무장 군인의 고려대 난입 사태를 “학원이 자초한 일”로 논평하고 “책임 없는 말로 학생들을 그릇 인도하는 교수들에게 책임을 물어 교권을 확립할 것”을 밝혔다. 이어 29일 문교부는 처벌 학생 157명의 명단을 각 학교에 통보하고 31일까지 결과 보고를 지시하면서 불응 시 학교 제재 방침도 함께 통보했다.
8월 31일 정일권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8.25특별담화를 강력히 실천하기 위해서 “정치만을 일삼는 학생, 정치교수를 모조리 학원 밖으로 들어내어 선량한 학생과 교수, 학원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의 7개 방침을 천명, “학원의 자유는 특별한 기본권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라면서 “캠퍼스는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적 존재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9월 4일 박정희 정권은 시위 주동 학생과 소위 ‘정치교수’에 대한 처벌이 미온적이란 이유로 6일부터 고려대와 연세대에 무기 휴업령을 내리고 학사 감사에 착수했다. 이날 휴업령을 발표한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고려·연세 두 대학은 학생데모를 주동한 학생과 이를 선동한 교수를 자율적으로 처리하기를 기다리고 명단까지 개별적으로 작성해 주었는데 이를 처벌치 않아 데모의 요인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이 요인이 제거될 때까지 무기한 휴업하게 될 것”이라고 해 시위 주동 학생과 교수에 대한 대학의 처리방침을 휴업령 해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권오병 문교부 장관이 징계 대상자로 발표한 ‘정치교수’ 2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양호민(梁好民)·황성모(黃性模)(이상 서울대), 서석순(徐碩淳)·이극찬(李克燦)·정석해(鄭錫海)·권오돈(이상 연세대), 김성식(金成植)·김경탁(金敬琢)·조지훈(趙芝薰)·조동필(趙東弼)·이항녕(李恒寧)(이상 고려대), 정범석(鄭範錫, 건국대), 양주동(梁柱東, 동국대), 김윤경(한양대), 이헌구·김성준(金成俊)(이상 이화여대), 김삼수(金三守, 숙명여대), 전경연(全景淵, 한국신학대), 박삼세(朴三世, 대구대), 조윤제·김경광(金慶光)(이상 청구대) 등.
전국 11개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은 모두가 한일회담 비준을 직간접으로 반대했거나 학생을 선동한 것으로 낙인찍혔으며, 문제가 된 행적은 재경 교수단 한일협정반대선언대회,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재경문인한일협정반대성명, 기독교직자들의 ‘나라를 위한 기도회’ 등에 서명 참석했거나 소위 학원 내 정치 서클 지도교수 또는 신문잡지를 통해 정치성을 띤 문필활동을 했다는 것 등이 그 요인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서울시경이 시위 주동자 및 배후 조종자 일제 검거에 나선 가운데 8월 29일 연세대 권오돈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됐으며, 30일 오전에는 1960년 4.19교수단 데모의 주역이었던 연세대 정석해 교수가 자택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연행됐다. 9월 3일에는 한일협정비준반대성명서에 서명한 연세대 서석순 교수가 출근 중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정치교수’해직반대운동
정부의 연세·고려대에 대한 휴업령 방침에 대해 고려대생 700~1000여 명은 9월 6일 ‘민주교권방위대회’를 열어 학생·교수 처벌과 연·고대 휴업령 철폐 등을 결의하고, 8월 24일부터 이어진 동맹휴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서울대 상대 학생 400여 명도 ‘학원 방위 및 한일협정 무효 성토대회’와 ‘군화‧최루탄‧경찰곤봉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연·고대 휴업 조처에 대해 “대학의 자유를 말살하고 학원을 정치도구화하려는 조처”라고 비난하고, 두 학교의 휴업령이 풀릴 때까지 무기한 동맹휴학(맹휴)을 결의했다. 치안국은 군화 화형식 주동 학생 4명(정운영, 조상희, 지무남, 정성찬)을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괴뢰 총장 취임 반대”, “일당 국회 비준 무효”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열린 이날 궐기대회에서 서울대 상대 학생들은 ①한일협정 비준 무효 ②위수령 즉각 철회 및 서울 주둔 병력 원대 복귀 ③구속학생 즉시 석방 ④우국 교수들에 대한 파면 조치 철회 ⑤유기천 총장 자진 사퇴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서울대 법대 학생 460여 명도 학생총회 결의로 기말시험을 보이콧, 무기한 맹휴를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시작된 서울대 1학기 말 시험에는 일부 졸업반 학생들만 응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김치선(金致善) 학생과장은 학기말 시험 응시 여부를 묻는 무기명 투표를 제안했고, 학생들이 받아들여 무기명 비밀투표 결과 재석 476명 중 맹휴(동맹휴학) 찬성 328명, 응시 찬성 137명, 기권 11명으로 맹휴가 결의됐다.
같은 날인 9월 6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동국대, 건국대, 국민대 등 서울 시내 6개 대학 학원방위단 대표 9명은 모임을 갖고 “정부가 탄압 정책만을 고집할 때는 학생들도 이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비상시국선언을 통해 “정부는 학생들의 정당한 의사 발표를 총칼로 억압함으로써 자유 대한을 군국 대한으로 타락시켰으며, 일부 정치인들은 학생과 국민들의 순수한 애국 운동을 정리 정략에만 이용하는 데 급급했다”고 여야 정계를 비난하고, ①대통령에게 학원탄압의 기수가 되도록 강요하는 청와대 비서진의 책임자와 정(일권) 내각의 총퇴진 요구 ②학생들의 피를 빨아 경륜 없는 수구 정치를 획책하는 안국동 봉건 잔재와 박(정희) 정권에 기생하여 매국적 치부를 추구하는 기회주의 집단을 구축하자 ③무모한 한일협정을 계기로 한 일본 신제국주의의 경제문화 침략을 분쇄하기 위해 학원은 총궐기하자 ④위헌적인 위수령, 행정 테러적인 무기 휴업령은 망국의 첩경이며 내란의 촉구제다 ⑤구속, 수배, 징계된 학생, 교수, 시민을 즉시 석방하라 등 10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시위 주동자와 정치교수 처벌 시한인 9월 7일을 넘기면서 서울대와 연세대·고려대 등 각 학교가 교무위원회, 교수회의 등을 열어 논의한 결과 8일 오전 서울대를 제외한 10개 대학은 처벌 대상 교수들이 “학교나 국가에 유공자니 처벌 규정을 완화하고 기한을 늦추어 달라”는 보고를 문교부에 제출했다. 연세대는 9월 8일 총장실에서 열린 교무위원회 결과 홍윤명(洪允命) 교무처장은 종래 학교 방침인 “선학원 정상화 후처벌이 사태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는 것으로 말했다. 고려대는 해당 교수 5명이 학교를 위해 자진 사퇴 의사를 보이자 이를 만류한 뒤 문교부에 자진 사퇴도 가능한지 질의했으나 “해직시켜야 한다”는 문교부의 강경 태도에 8일 오후 다시 교무위원회를 열어 논의했다. 이어 9일 서울 시내 10개 사립대 총장들은 학원 수습 방안을 논의하고 교수 징계 완화를 문교부에 건의할 것을 결정했다. 정치교수 징계 요청을 받은 각 대학은 문교부 강경책에 ‘대부분 징계위원회 회부 중’으로 보고해 결말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10개 대학교 중 교수 징계 지시를 받지 않은 대학 총장들이 문교부와 교섭에 나설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편 서울대는 9월 8일 오후 한상봉(韓相鳳) 문교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문교부 국장급 7명을 위원으로 하는 교육공무원 특별 징계위원회를 열어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와 전 서울대 학생처장 김치선 등 2명에 대해 교육공무원법 제43조·제56조(성실 의무) 및 57조(복무 의무)를 적용, 정치에 관여한 혐의로 파면을 의결했다.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서울대 교수 2인의 징계 사실을 밝히고 이외에도 서울대에 2, 3명의 징계 대상 교수(법대 양호민·문리대 황성모 등)가 더 있는 것으로 말했다. 서울대의 조치로 9월 9일까지 9개 대학(고려대, 연세대 제외)에서 13명의 교수가 파면 또는 징계위에 회부됐다.
문교부의 징계 요구는 사립학교법 54조(“임면에 관한 승인·보고·해직 등의 요구”) 3항, “사립학교의 감독청은 사립학교의 교원이 교육법 77조의 결격사유에 해당하거나 이 법에 규정한 징계 사유에 해당될 때 당해 법인 또는 사립학교 경영자에게 해직 또는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는 규정을 징계 요구의 근거로 들었다. 정부 당국은 교수들이 “정치 운동, 노동운동 행위, 또는 집단 수업 거부, 정당 지지 또는 반대를 목적으로 학생들을 선동할 경우(사립학교법 58조 4호) 해직시킬 수 있다”는 규정을 적용해 해직 처리 근거로 내세웠다. 사립대학교수 징계는 사립학교법 62조 규정에 따라 ‘교원 징계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징계위원회에서 교수들의 무실(無實)이 증명되면 해당 학교는 즉각 문교부에 보고해야 하며, 문교부는 재차 징계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실상은 문교부 장학 당국도 대학교수들의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서명’ 참여를 정치 활동으로 보기 어려웠으며, 당국이 정치 활동으로 규정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참여 교수들에 대해서도 이들이 특정 정당 지지·가담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징계 조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9일 아침 서울대 법대 양호민 교수가 서울 종로구 체부동 자택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됐으며 같은 날 아침 고려대 조지훈 교수가 자택에서 요원에 의해 연행됐다가 조사받은 후 귀가 조치 되는 등 정치교수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처벌은 계속됐다.
정치교수 징계 조치를 고려대·연세대 휴업령 해제 조건으로 제시한 문교부는 1965년 9월 13일 사립대 총장들과 재차 간담회를 개최해 논의했다. 이 모임에는 정일권 국무총리, 권오병 문교부 장관, 홍종철(洪鍾哲) 공보부 장관, 연세대 박대선(朴大善) 총장, 고려대 차낙훈(車洛勲) 총장 직무대리를 비롯한 서울 시내 10개 사립 종합대 총장들이 참석했다. 대학 총장들은 대학 교육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한 정부 협조를 다짐하고 교수 징계 문제를 학교장 재량에 맡겨줄 것을 건의해 동의를 얻었다. 이 간담회로 문교부는 ‘정치교수’ 징계에 대한 종래의 “반드시 해직” 입장에서 “자퇴, 정직, 감봉, 견책 등 학교 책임하에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완화했다. 그러나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교수 징계 문제를 다루라고 해서 데모 요인을 없애지 않고 해당 교수들을 가볍게 징계, 당국의 지시를 어기면 휴업령은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주)004
결과/영향
“교수 징계는 학교 자율 재량에 따른다”는 정부 당국과 서울 시내 10개 사립대학 총장 간 합의 이후, 9월 16일 문교부는 고려대 김성식, 김경탁 등 두 교수와 연세대 서석순 교수에 대한 징계 절차를 밟을 시 휴업령 철회 방침을 밝혔다. 문교부는 3인 교수에 대해 “파면이든 자퇴 형식이든 해직만 시킨다면 곧 휴업령을 해제할 것”이라 하고 “대학의 자율성을 인정, 정부가 다시 한번 베푸는 관용”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당국이 세 교수를 정치교수로 지목한 이유는 ①김성식 교수는 재경 교수단의 ‘한일협정반대선언대회’에 주동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매스컴과 강연을 통해 한일협정 비준 반대로 학생을 선동했다는 것이고 ②김경탁 교수는 재경 교수단 선언대회를 주동, 의장단 멤버로 활약했으며 ③서석순 교수는 재경 교수단 선언대회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주동 역할 외에도 동아일보 논설위원, 동아방송 뉴스 해설위원 등 정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주)005
휴업령 해제를 조건으로 문교부가 직접 압력을 가한 연세대의 서석순, 이극찬 교수는 9월 16일 학교 징계위원회에서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고려대의 경우 문교부가 정치교수로 지목한 김성식, 김경탁 교수 등이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고 24일에는 이화여대의 이헌구·김성준, 동국대의 양주동, 건국대 정범석 교수 등 4명이 추가로 자진 사퇴함으로써 정치교수로 해직된 교수는 앞서 7명(고려대 김성식·이항녕·김경탁, 연세대 서석순·이극찬, 서울대 특별 징계위에서 파면된 황산덕·김기선)과 합쳐 모두 11명이 됐다 문교부는 사표를 낸 교수들이 자퇴서에 ①앞으로 복직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②이들이 만약 다른 대학으로 전근하는 경우 문교부에 보고되면 각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주)006
대학의 정치교수 징계 처리와 병행해 9월 18일 문교부는 ①학사 자격고시를 부활시켜 국가가 관리하며 수준은 고등고시 본고시에 준거, 객관식 출제를 지양한다 ②특권적 학도 군사 훈련(ROTC) 제도를 폐지하고 대학생 병역 복무기간 현행 30개월(사병인 경우)에서 10개월로 단축해 전체 학생에 대한 일률적인 군사교육을 부과해 정규 학점으로 채점하고 졸업 후 장교 후보로 특수 교육한다 ③학생 성적은 100명 단위 A학점 10%, B학점 15%, C학점 30%, D학점 15%, E학점 10%, F학점 20%로 분류해 100명 중 F학점 20명은 무조건 낙제시킨다 ④정치적·사상적 불순 교수와 학생에 영합하려는 교수는 순차로 도태시키며 특히 동아일보·사상계에 관여 교수는 조처한다, ⑤학생 단체 간부 후보는 평균 A학점 이상 취득자에 한해서 입후보 자격을 주고 현재 조직을 전면 개편하며, 종래 자치회비를 등록금에 포함 징수하던 것을 금지하고 자금의 액수 및 사용처를 제한하며, 학생회장 선출도 선거제가 아닌 학교에서 임명하기로 한다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대학교육정상화방안>을 마련해 관계 법령 제정·개폐 등 절차를 거쳐 실시할 것임을 밝혔다. 특히 이 방안은 학생 단체 등록 재정비로 순수 학술 연구 및 종교·체육 목적 이외 단체는 해산시키도록 했는데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 6.3동지회 등이 포함됐다.
9월 20일 오전 10시를 기해 문교부는 고려대·연세대의 휴업령 해제를 발표했고, 22일 오전 서울대 법대는 긴급 학생총회를 열어 8월 24일부터 시행한 동맹휴업 철회 방침을 결정했다. 학생들은 동맹휴업 결의 시 주장했던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유기천 총장 사퇴’, 9월 6일 맹휴 재확인 결의 시 내걸었던 ‘위수령 철회’, ‘구속학생 석방 및 학생 검거 중지’, ‘정치교수 징계 철회’, ‘연·고대 휴업령 철회’ 등 요구조건 중 연세대·고려대 휴업령 해제 조치만 반영된 상태에서 다른 조건들은 정치적 사안으로 순차적으로 관철시킬 것으로 논의하고 학원 정상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주)007 이어 국방부는 9월 25일 위수령 해제를 발표해 8월 26일 위수령 선포로 서울지구에 진주했던 위수군(육군 제6사단)은 전원 원대 복귀했다.
대학교수들의 한일협정반대운동 참여와 이에 따른 ‘정치교수’ 해직을 둘러싼 파동은 그 뒤 박정희 정권이 대학의 ‘정상화’를 명분으로 교수들을 제도적, 항시적으로 통제하는 시발점이 됐다.
주)001
≪동아일보≫ 1965.8.25 석1면;≪경향신문≫ 1965.8.25. 석1면;≪동아일보≫ 1965.8.26 석1면;≪경향신문≫ 1965.8.26. 석1면 등
주)002
≪동아일보≫ 1965.8.27. 석3면;≪경향신문≫1965.8.27 석3면; ≪동아일보≫ 1965.8.28. 석7면;≪동아일보≫ 1965.8.29. 호외1면 등
주)003
≪동아일보≫ 1965.8.28. 석7면.
주)004
≪동아일보≫, 1965.9.13. 석3면;≪경향신문≫, 1965.9.14. 석1면.
주)005
≪동아일보≫, 1965.9.16 석1면;≪경향신문≫, 1965.9.16. 석1면.
주)006
≪동아일보≫, 1965.9.24 석1면;≪경향신문≫ 1965.9.24.
주)007
≪동아일보≫, 1965.9.22 석3면; ≪대학신문≫, 1965.9.23. 1면.
멀티미디어
학생시위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태도를 예고한 경향신문 1965년 8월 25일자 기사(경향신문사)
‘학원방위학생총궐기대회’가 열린 고려대 정문(≪사상계≫ 1965년 10월호)
서울대 상대 학생들이 최루탄 및 군화 화형식(경향신문사)
문교부가 '정치교수'로 지목한 교수들의 면면과 그 이력을 보도한 경향신문 1965년 9월 10일 자 기사(경향신문사)
교수사회에 대한 통제를 통해 학생운동을 탄압한 대표적 사례의 하나인 1965년 '정치교수' 파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 달 가까이 유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맹휴를 계속해온 서울대 법대 학생 300여 명은 도서관에 모여 맹휴를 철회하고 등교하여 투쟁하기로 결의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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