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단체
- 분류
- 사회운동
- 유사어/별칭/이칭
- 조국수호협의회, 조국수호협
- 영어표기
- The Council of Defenders of the Fatherland
- 한자표기
- 祖國守護國民協議會
- 결성일
- 1965년 7월 31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 지역
- 전국
1965년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 당시 대학교수단, 예비역 장성, 기독교계, 법조계, 여성계, 청년단체, 문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 300여 명이 결집하여 7월 31일에 결성한 단체이다. 1965년 8월 26일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위수령 발동 이후 반정부 활동 및 학생시위 선동 혐의로 탄압을 당할 때까지 야당, 학생과 더불어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51년부터 지속한 한일회담은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하에서 급속하게 진전되어 1964년경 타결을 눈앞에 뒀다. 이 과정에서 과거사 문제, 청구권 문제, 평화선 문제 등에서 저자세를 보인 박정희 정권의 태도에 대해 ‘굴욕외교’라는 비판이 크게 일어났다. 1964년 초부터 야당이 먼저 박정희 정권의 굴욕외교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고, 3월부터는 학생들의 시위가 본격화했다. 특히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박정희 정권 타도의 방향으로 고양됐고 6월 3일에는 마치 4월혁명 당시를 방불케 하는 대규모 도심 시위로 폭발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여 학생시위를 일단 진압했지만 한동안 한일회담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65년 들어 재개된 한일회담은 급진전하여 6월 22일 양국 정부의 한일협정 조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일기본조약과 4개 협정(청구권, 어업, 재일 한인 법적 지위, 문화재 반환)의 내용은 한국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조인 전부터 야당과 학생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한일 양국 정부 간에 이루어진 한일협정 조인 뒤 후속 절차로 남은 국회의 비준 과정에서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 이후 국회의 한일협정 비준 문제가 쟁점이 됐다. 통합 야당이었던 민중당은 비준에 반대했지만 여당인 공화당이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협정 비준을 막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국회 밖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의 목소리가 커졌다. 7월 1일 한경직(韓景職), 김재준(金在俊), 강원용(姜元龍) 등 개신교를 대표하던 목사 100여 명이 영락교회에서 한일회담 비준 반대 성토대회를 연 것을 기점으로 7월 내내 사회 각계각층에서 비준 반대 성명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에 흔히 ‘재야’라 불리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이들은 점차 결집을 시도했고 ‘조국수호국민협의회’(조국수호협) 결성으로 결실을 보았다.
1965년 7월 31일 오전 10시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연합체인 조국수호협이 서울 시내 대성빌딩 강당에서 결성됐다. 하루 전날인 30일 밤 11시경 남대문경찰서는 결성 대회에 사용할 규약, 결의문, 선언문 등 5000여 장을 수색영장도 제시하지 않은 채 압수하고 인쇄소 대표를 연행했다.
결성 대회에는 대학교수단, 예비역 장성, 종교계, 법조계, 여성계, 청년단체, 문인 등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을 펴온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해 한일협정비준반대범국민운동을 촉구하는 선언문과 결의문 및 박정희 대통령, 국회, 존슨(Lyndon B. Johnson) 미국 대통령,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을 채택했다. 대회는 이인(李仁, 전 법무부장관), 양주동(梁柱東, 교수), 함석헌(咸錫憲, 종교인), 김홍일(金弘壹, 예비역 중장), 정석해(鄭錫海, 교수), 서병호(徐炳浩, 종교인) 등 6명을 임시의장으로 선출, 김홍일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어 각계 대표 21명으로 망라된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그동안의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반대투쟁을 단일화해 앞으로 한일협정 비준 반대 연합전선을 이끌어나가도록 위임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비준 저지를 부르짖는 전 국민의 정의의 대열을 곤봉과 최루탄으로 탄압했다”면서 조인된 한일협약은 일본에게 경제 침략의 발판을 마련해 주고 우리의 주권을 약화하는 결과를 빚어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4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①국회 비준 저지와 협정의 폐기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②정부는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여 협약을 즉시 폐기하고 국민 의사를 반영하는 재출발의 자세를 취하라.
③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당리를 초월하여 비준 동의를 거부하라.
④미국은 극동 정책에 있어 다시금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권고한다.
결성 대회에서 조직된 21인 집행위원회는 대표집행위원에 김홍일(예비역 육군중장, 전 외무장관), 간사장에 박원빈(朴圓彬, 예비역 육군준장,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대변인에 남기영(南基永) 등을 각각 선출했다. 집행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학계: 권오돈(權悟敦), 조윤제(趙潤濟), 정석해.
▲독립운동자: 김홍일, 신봉제(辛鳳濟).
▲기독교: 서병호, 박윤영.
▲경제계: 유창순(劉彰順).
▲문인: 양주동, 박두진(朴斗鎭).
▲법조계: 이인, 김춘봉(金春鳳).
▲천도교: 박연수(朴延壽).
▲여성계: 최은희(崔恩喜).
▲유림: 오양(吳養).
▲사회 인사: 함석헌.
▲청년 대표: 하은철(河銀喆), 정원찬(鄭元燦).
▲예비역 장성: 박원빈, 손원일(孫元一), 박병권(朴炳權).주)001
1965년 8월 2일 조국수호협은 집행위원회를 소집해 행동 강령과 당면 실천 방안을 결정했다. 실천 방안은 다음과 같았다. ①우리는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왜족의 재침을 분쇄하고 조국 수호의 역군이 된다. ②우리는 매국조약인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최후까지 투쟁한다. ③우리는 민족적 총단결로써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공산 도배의 간접침략을 분쇄한다.주)002 이어 강령을 채택하고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해 대규모 비상국민대회를 열 것을 결정했고, 야당의 비준 저지 투쟁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 여당 국회의원을 비준 저지로 이끌기 위해 개인 설득에 나서기로 했다. 이와 함께 ‘민중당 국회의원에게 고함’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의원직을 초개처럼 여기고 조금이라도 집착하지 말라”고 촉구하면서 “우왕좌왕 자중지란의 추태만을 드러내고 있는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주)003 8월 4일 조국수호협은 “요즘 경향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반장과 이‧동장 등을 통해 국민주권을 침해하는 관제 민의가 동원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일협정 비준 지지를 위한 강제동원 찬성 날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진상 조사위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주)004 한편 조국수호협이 결성된 이래 예비역 장성 출신인 김홍일과 박원빈의 집으로 ‘날뛰면 재미없다’는 내용의 협박 전화가 매일 끊이지 않고 걸려오기도 했다.
1965년 8월 7일에는 조국수호협 주최 ‘조국수호국민대강연회’가 서울 종로예식장 신관에서 1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연사 모두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열변을 토했고, 강연회가 시작되기에 앞서 ‘한일협정비준반대 4.19동지회’ 대표 서형석(徐亨奭)은 조국수호협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했다. 함석헌은 ‘헌정질서 파괴자는 누구냐’는 강연을 통해 “정부는 국민이나 야당이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한다지만 진짜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은 정부다. 나라를 팔려는 현 정부 뒤에는 일본이 있고 일본 뒤에는 미국이 있다. 정부는 도둑질을 하면서 국민 보고는 가만 있으라고 한다”며 박정희 정권을 질타했다.주)005 같은 날 조국수호협은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권고문을 보내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조국수호협은 권고문을 통해 공화당 의원들에게는 “한일협정을 비준 동의하여 국가와 민족에 중대한 불행을 초래하고 자신의 오명을 역사에 남기지 말라”고 호소하는 한편, 민중당 의원들에게는 “2년간의 국회의원직에 집착하고 매국의 오명을 천추만대에까지 남기지 말라”고 촉구했다.주)006 8월 11일 조국수호협은 안국동 민중당사에서 1964년 이래 한일협정반대운동을 지속해 온 야당 중심의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와 연석회의를 열고 ‘최대최선의 연합 전선을 펴기로’ 합의하고, 비준 저지 대책을 위한 8인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부 당국은 조국수호협을 불법 단체로 지목했다. 8월 12일 양찬우(楊燦宇) 내무장관은 조국수호협 등 한일협정을 둘러싼 정국의 격동에 편승해 난립한 ‘즉흥적인 잡다한 불법 정치단체’들에 대해 그 목적과 명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정당법이나 사회단체등록법을 적용, 제재를 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대해 조국수호협은 다음날 항의 성명을 발표하여, 조국수호협이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률 규정에 의해 등록 신청을 했으며 접수증을 받은 바 있는 합법적 민간단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1965년 8월 14일 조국수호협이 주최한 비상국민대회가 7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서울 시내 대성빌딩에서 열렸다. 정부 당국이 옥외 집회 장소를 불허해 옥내 집회를 하게 된 것이었다. 연사로 나온 함석헌, 변영태(卞榮泰), 백기완(白基玩) 등은 모두 “한일협정 비준안의 국회 특위 날치기 통과는 비민주적이므로 위헌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조국수호협은 선언문을 통해 “한일협정이 자세에 있어서 굴욕적이요, 내용에 있어서 매국적이요, 방법에 있어서 비민주적이요, 결과에 있어서 반민주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박정희 대통령과 국회, 유엔과 미국 대통령, 재일 교포, 군경과 관공리, 종교인, 어민, 학생에게 보내는 한일협정 비준안의 철회 폐기를 위해 ‘맹성과 총궐기’를 호소하는 7개의 메시지를 채택, 낭독했다.주)007
비상국민대회가 끝난 오후 5시경 청중 100여 명은 애국가를 부른 뒤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이들은 “매국 협정 저지시켜 조국 수호 이룩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①공화당 정권은 매국 국회를 해산하라 ②야당은 파쟁을 중지하고 탈당, 해당 등 최후 수단을 쓰라 ③양심 없는 교육자는 교단에서 꺼지라 ④정치 방학 연장을 중지하고 교문을 열라는 등 5개 항목의 성명서를 배포했다. 이에 경찰은 박병권, 함석헌, 백기완 등을 연행하고 뒤따르던 청중들을 해산시켰다.주)008 이날 밤 여당인 공화당만의 일당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통과됐다.
이렇게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새롭게 한일협정비준무효화운동이 시작됐다. 조국수호협도 비준무효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8월 16일 조국수호협은 지금까지 서울에만 국한했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앞으로 어떠한 저지 방해를 받더라도 이를 극복,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한일협정무효화운동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8월 19일 조국수호협은 한일협정 파기 제1단계 운동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조국수호협은 16개 항목에 달하는 성명을 통해, “한일협정 비준 동의의 부존재와 완전 무효”를 거듭 주장하고, “박 정권은 원내외에 걸쳐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국회는 즉시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해야 할 것”이며, “새로운 국회에서 대통령과 내각에 대한 탄핵을 단행하라”고 밝혔다.주)009
이에 박정희 정권은 조국수호협에 대해 본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먼저 8월 20일과 21일에 걸쳐 경찰이 조국수호협이 발행한 “위헌 매국의 한일협정-왜 파기되어야 하나?”라는 제목의 팸플릿 4만 2000여 권을 압수했다. 명분은 조국수호협이 ‘불법 단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8월 21일 정부 당국은 조국수호협의 사회단체등록을 거부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유는 조국수호협이 국회 해산과 대통령, 내각에 대한 탄핵을 주장하고 데모와 집회를 선언하는 등 법률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 아니라, 등록을 마치기도 전에 국가 질서를 문란케 하는 단체행동을 했으므로 건전한 사회단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홍종철(洪鍾哲) 공보부 장관은 법적 요건을 갖춰 등록을 신청한 조국수호협이 건전한 사회단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등록 서류를 반환했다고 밝혔다. 8월 23일 내무부는 범국민투위와 조국수호협, 비준반대서명교수단, 무궁화애호총연합회, 6.3동지회, 한국학사청년연맹, 초급대학학생연합회, 범태평양동지회 등 8개 단체를 등록이 되지 않은 불법 단체로 규정, 공보·보사·문교부 등 관계 부처에 의법 조처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맞서 조국수호협은 성명을 발표, 등록 거부는 불법 행위라고 비난했다.
1965년 8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날로 격화되는 학생시위를 군을 동원하여 진압하기 위해 위수령을 발동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은 물론 조국수호협을 비롯한 재야인사들까지 본격적으로 사법처리했다. 8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성명을 낸 조국수호협 김홍일 대표집행위원 등 예비역 장성 8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입건하고 그중 일부를 구속 기소했다. 8월 31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조국수호협에 대한 관계 서류를 압수해 전반적인 내사에 착수했다. 9월에는 조국수호협 부완혁(夫琓爀) 간사장 대리가 검찰에 소환됐고 대변인 남기영(南基永), 집행위원 하은철(河銀喆), 조직 간사 한동학(韓東學), 기획 간사 이진면(李鎭勉) 등이 수사기관에 연행됐다. 이들은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하은철 위원은 내란선동죄로 구속 기소됐다.
조국수호국민협의회의 결성은 그동안 한일협정반대운동의 구심체였던 범국민투위의 위상이 약화됐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는 야당 내부 권력 갈등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조국수호협의회가 결성됐지만 전반적으로 한일협정반대운동은 각 조직, 대학 간에 충분한 조직적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산발적으로 전개됐다. 반대운동 조직은 일반 대중에 호소할 힘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점이 한계였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 결과이기도 했다.
1965년 8월 말 위수령 선포 이후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물리적 탄압에 직면한 조국수호협은 이미 단체로서의 조직적 힘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별도의 해산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1966년에도 일부 참여 인사들은 조국수호협의 직함을 내세워 사회적 발언을 이어 나갔다. 또한 일부 참여 인사들은 1966~67년에 개별적으로 야당에 입당하여 정치인이 됐다. 한편 박정희 정권의 사회단체등록 거부에 맞서 당시 조국수호협이 제기한 ‘사회단체등록 취소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1967년 7월 18일 대법원은 정부의 처분이 부당하다고 하여 조국수호협의 손을 들어 줬다. “모든 국민은 헌법 18조 규정에 따라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률에 의한 등록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단체를 결사, 조직,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명무실해진 조국수호협은 이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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