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Struggle against 「Comprehensive Agreement regarding Economic and Technical Assistance between ROK and US」 in 1961
- 한자표기
- 韓美經濟協定反對運動
- 발생일
- 1961년 2월 8일
- 종료일
- 1961년 3월 2일
- 시대
-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 지역
- 전국
1961년 2월 8일 조인된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이 한국경제의 자립을 방해하고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강화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전국에서 진보적 학생단체, 청년단체, 사회단체, 정당들이 연대하여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대 중반 미국 아이젠하워(D. D. Eisenhower) 행정부는 뉴룩(New Look) 정책을 입안하면서 ‘건전한 재정’을 이유로 재정지출을 감축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정책 기조에 따라 한국에 대한 원조도 1957년부터 축소되기 시작했다. 1960년 3월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경제·군사원조를 조정하기로 결정했는데, 여기에는 기존에 한미 간에 체결됐던 경제원조 협정들을 개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했다.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張勉) 정부는 장기적인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국 원조의 운용 방식을 개선하고 1948년 체결된 기존의 한미 경제원조 협정을 개정할 필요를 느껴 미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김영선(金永善) 재무부 장관은 딜론(D. C. Dillon) 미국 국무부 차관과 경제 문제를 논의했고, 그 결과 1960년 10월 25일 ‘딜론 각서’에서 환율 개혁, 원조 절차 개선, 공공요금 인상 등을 추진하기로 명시됐다. 한국 정부는 딜론 각서를 토대로 미국과 원조 협정 개정을 추진했다.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는데, 정일형(鄭一亨) 대한민국 외무부장관과 매카나기(W. P.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각각 양국 대표로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은 1948년 12월 10일 한미 양국 정부 간에 체결된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와의 원조협정’, 1952년 5월 24일 대한민국 정부와 유엔사령부 사이에 체결된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1953년 12월 14일 한미 양국 정부 간에 체결된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 협정’ 등 기존의 경제원조 관련 협정들을 통합 개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은 미국이 이 협정을 통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첫째, 미국 대표가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한국 정부의 경제 관련 기록들을 관찰·재검토할 수 있고(제3조), 둘째, 미국 정부나 그 대행 기관의 고용인이 소득세와 사회안전보장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으며(제6조), 셋째, 미국 정부가 원조 계획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자신들의 자체적 판단에 따라 중단시킬 수 있다는 조항들(제7조)이 문제가 됐다.주)001 한미경제협정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한국 경제의 자립을 방해하고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강화할 것이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장면 정부는 원조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미국이 요구하는 표준적인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1961년 2월 13일 장면 총리, 정일형 외무부 장관, 태완선(太完善) 부흥부 장관이 출석한 민의원 본회의 대정부 질의 시간에 야당 의원들은 협정의 내용, 성격, 조인 과정 등을 비판했다. 신민당의 강승구(姜昇求) 의원은 이 협정의 체결 경위가 을사늑약과 비슷하다고까지 지적하면서, 장면 정부가 자주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신민당의 박준규(朴浚圭) 의원은 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야당과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하며, 미국이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면 장면 정부의 원조 물자 활용 능력을 불신하여 이러한 협정을 체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주)002
이에 대해 장면 총리는 미국은 일본과 같이 침략 의도를 가진 나라가 아니며, 지나친 의심은 미국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서 협정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은 원조를 받는 다른 국가들에서도 모두 있는 예이며, 미국은 내정간섭을 자초하려는 뜻도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혁신계와 진보적 학생단체들도 본격적으로 투쟁에 나섰는데, 이때 한미경제협정반대시위는 여러 단체의 연대로 전개됐다. 1961년 2월 12일 8개 대학의 민족통일연맹을 비롯한 학생단체 11개는 ‘전국 한미경제협정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이 학생단체들의 학생 총 100여 명이 연합하여 2월 14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전국학생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호소문과 격문을 낭독·배포한 후 경찰에 의해 10여 분 만에 해산당했다.
협정 비준 여부가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던 2월 21일 학생단체들은 사회단체들과 연합하여 명동성당 앞에서 성토 대회를 가졌는데, 이때 시위대 중 200~300명이 미국대사관 앞까지 진출했다가 해산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투쟁들에 참가한 학생들은 호소문과 격문을 통해 장면 정부가 “민족의 분할을 영구화하고 조국의 주권을 굴욕적으로 침해하는 한미경제협정”을 체결했다고 비난했다.
2월 14일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는 동안, 16개 진보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은 사회대중당 사무실에 모여 ‘한미경제협정 반대공동투쟁위원회(경협반대 공투위)’를 결성했는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 동참했던 정당과 사회단체 대부분이 여기에 참석했다.주)003 경협반대 공투위는 2월 2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 성토 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때 “반민족적인 한미경제협정의 국회 비준 거부를 위하여 불퇴전(不退轉)의 결의 밑에 투쟁한다”라는 내용의 공동 투쟁문이 발표되기도 했다.주)004
이러한 단체들의 연대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 주요 도시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전라남도 지역의 혁신계 정당들은 ‘2.8한미경제협정반대 전라남도공동투쟁위’를 결성하고 성토 대회를 추진했다. 다만 이들 정당들은 외부 행사를 개최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이 전면에 나서서 행사를 추진하면 사회당과 같은 혁신정당들이 자금 동원, 인력 지원 등을 분담하는 식으로 시위가 이루어졌다. 혁신정당들에 속한 인사 상당수가 공안 기관의 감시로 인해 공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 역시 통민청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시위들에서는 한미경제협정 문제뿐만 아니라 통일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모두 함께 다루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혁신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이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벌였다. 1961년 2월 11일 대구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의 주도 아래 대구지역의 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모였는데, 이 회의에서 그들은 한미경제협정에 반대하는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어서 2월 19일에는 사회당 경북도당의 주도로 혁신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이 연합하여 ‘한미경제협정 경북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2월 22일 대구역 앞 광장에서 시민 궐기대회를 가졌는데, 여기에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참석했다. 이때 “한미경제협정은 을사조약과 무엇이 다르냐!”, “빵을 구걸하다가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슬로건이 등장했다. 집회에서 강연을 행한 인사들은 협정체결반대운동이 반미운동이 아님을 전제로 삼으면서, 이번 협정에 한국을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국회의 반대와 미국의 재고(再考)를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성토 대회는 2월 24일에도 대구역 광장에서 개최됐고, 2월 28일에는 대구 시내 중·고등학생들이 ‘2.28 대구학생 의거 1주년 기념식’을 가진 후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지만, 이날 협정 비준안이 국회에서 최종 통과됐다.
부산에서는 1961년 2월 22일 경상남도 경협반대 공투위 주최로 부산역 앞에서 ‘한미경제협정성토대회’가 열렸다. 부산 민민청과 통민청은 협정 반대와 함께 남북교류 시행을 촉구했다.
이처럼 혁신세력이 주도하는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에 대하여 장면 정부, 그리고 보수 성향의 야당이었던 신민당도 이를 ‘용공(容共)’과 ‘반미운동’으로 규정하며 반대 입장을 취했다. 1961년 2월 13일 신민당 간사장 유진산(柳珍山)은 “혁신계(진보적 인사)”를 가리키며 일부 정치 세력들이 국민 감정에 불을 질러 미국을 불신하는 방향으로 선동시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신민당 박준규 의원은 의회 투쟁을 통해 협정을 반대할 수는 있지만 원외에서 통일체를 구성하여 국민운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하며 혁신계의 연대 투쟁을 경계했다.
2월 15일 장면 총리는 북한 공산당이 합법을 가장하여 한미경제협정 반대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발언하기도 했다. 장면 정부의 ‘반공 공세’에 대하여 신민당과 혁신계는 모두 자신들의 협정 반대 주장이 결코 반미운동이 아님을 피력했다. 혁신계는 더 나아가 장면 정부의 독재성이 이승만 정권기 때와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1961년 2월 16일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는 정일형 외무부 장관에게 장면 정부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매카나기는 한미경제협정에서 논란되고 있는 3개의 조항이 미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맺어진 상호안전보장협정과 일치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있다고 말하며 장면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1961년 2월 19일 신민당 박준규 의원은 매카나기 대사의 한국 주권 존중 성명이 이번 협정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을 조건으로 국회에서 비준안에 동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때부터 민의원에서 비준과정이 시작됐다. 2월 20일 정부는 민의원에 비준 동의 요청서를 제출했고, 이것은 2월 23일 민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원안대로 통과되어 본회의에 상정됐다. 2월 25일에는 한미경제협정에 관한 비준 동의안이 민의원 본회의에 상정됐다.
한미경제협정 비준안은 1961년 2월 28일 민의원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다만 면책 및 면세 특권을 받는 원조 기관 요원들의 수를 한정할 필요가 있고, 이들의 명단을 사전에 제출할 필요가 있으며, 면세 범위·대상자 등의 세목(細目)을 양국 협의로 결정한다는 내용의 부대 결의가 첨부됐는데, 이는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가결된 비준 동의안은 바로 참의원으로 이송되어, 같은 날 참의원에서도 비준 동의안이 가결됨으로써 이때부터 한미경제협력은 그 효력이 발효됐다. 2월 28일은 딜론 각서에서 정한 기한의 하루 전날이었다.주)005
한편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은 일반대중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했다. 한미경제협정은 원조를 매개로 하여 기존에 존재해온 한미 간 종속 관계를 정리한 것이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종속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만일 미국의 원조를 받지 않는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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