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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4월혁명 직후 조직된 피학살자유족회는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 차원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 규명, 학살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피학살자에 대한 기념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배경
한국전쟁 전후에 한반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분단, 전쟁과 더불어 민족사에 있어서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학살의 가해 책임은 우익과 좌익, 남한과 북한 정권 모두에게 있지만, 남한의 영토로 편입된 38선 및 휴전선 이남에서의 학살은 이들 지역을 장기간 점유하고 있었던 남한의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경우가 많았다.
그중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한국전쟁 이전에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속에서 수많은 지역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등에 대한 예비 검속과 집단 학살이 자행됐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수복지역에 대한 부역자 색출과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아래 민간인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민간인 학살사건들은 이승만 정부 수립 전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1950년대에는 거의 공론화되지 못했다. 다만 피해자 유족들의 노력에 의해 극히 일부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거나 특정 학살사건이 마을 단위로 기념될 뿐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였던 1950년 8월 김해군 진영읍(현 김해시 진영읍)에서 강성갑 목사가 학살당하자, 이에 반발한 주민 및 유족들에 의해 사건이 널리 알려지게 됐고, 그 결과 군법회의에서 경찰 및 우익 청년단체 간부들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주)001 제주도에서는 유족들이 군과 갈등을 겪으면서 또는 비밀리에 피학살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1956년에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만벵듸 공동장지 등과 같은 묘역을 조성했다.주)002
1951년의 거창사건은 1960년 4월혁명 전까지 민간인 학살이 정치 문제로 비화된 유일한 사례였다. 당시 거창의 주민과 유족은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고 했으나, 군의 방해와 정부의 비협조 그리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국회의 소극적인 조사로 인해, 군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사실만 밝혀졌을 뿐이었다. 거창사건 군법회의에서 오익경 전 11사단 9연대장과 한동석 전 9연대 3대대장은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0년의 형을 받았지만, 곧 감형 처분을 받고 사면됐다.주)003 피학살자 및 유족들에 대한 공식적인 명예회복이나 배상 등의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학살로부터 약 3년이 지난 1954년에 이르러서야 거창의 유족들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합동묘를 건립할 수 있었다.주)004
원인
1960년 4월혁명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소생시킴과 동시에 잘못된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특히 민주당에서는 법질서 회복 및 이승만 정부 비판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사건 중 거의 유일하게 알려져 있었던 거창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거론됐다. 이에 부산일보사가 호응하여 거창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유족 및 주민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이를 《부산일보》 1960년 5월 9일자부터 기사화했는데, 이는 4월혁명 이후 최초의 민간인 학살 취재 보도였다.주)005
1960년 5월 11일 거창에서 전직 신원면장 소사(燒死) 사건이 발생하자, 민간인 학살 문제는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됐다. 당시 거창의 유족들은 학살당한 가족들에 대한 합동묘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언론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유족들의 깊은 원한이 학살사건 당시의 면장에게 향했고 우발적인 사형(私刑)이 발생했다.주)006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는 점에서 전국 각지의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했고, 취재를 목적으로 많은 특파원들이 거창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인근 지역인 산청·함양 등지를 시작으로 전국의 학살사건들이 유족과 주민에 의해 폭로됐다.
이후 일부 거창 유족들의 상경 투쟁이 계획됐고, 5월 18일 거창 출신 재경 대학생들의 시위도 발생했다.주)007 언론이 10여 년 전의 민간인 학살을 대서특필한 원인은 일차적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갖는 화제성이었겠지만, 학살의 진상이 규명되고 그에 대한 합당한 조치가 이뤄져야만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당위적 명제이기도 했다.
1960년 5월 중순을 거치면서 학살사건 진상 규명에 대한 여론이 강해지자, 국회에서는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국회의 출장 조사는 충무(통영)·산청·함양·거창·부산·제주·문경·함평 등지에서 대체로 짧은 시간 동안 유족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목적 달성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 결과 6월 21일 국회 본회의에서 채택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행정부에 추가 조사 및 배상 등 후속 조치를 선언적으로 당부하는 데에 그쳤다.주)008
학살사건에 대한 언론의 취재와 국회의 조사는 피학살자 유족들이 공식적으로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유족들은 언론과 국회에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국가 폭력의 피해자에서 사회운동의 주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회 조사를 끝으로 한국 사회에서 학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자 피해 당사자인 유족들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개
1. 지방 피학살자유족회의 조직 양상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피학살자 유족들은 지역 단위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이를 주도했던 유족 대표들은 대체로 고학력자였으며 지역 사회에서 꾸준히 활동한 명사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대구의 이원식, 마산의 노현섭 등을 들 수 있다. 이원식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해방 전후 대구에서 민족운동 및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노현섭은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学]을 졸업하고 해방 이후 마산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한 인물이었다.주)009
유족회 조직은 거창이 속한 영남 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이들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았거나 짧은 기간 점령당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로써 영남 지역에서는 상호 학살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부역’ 혐의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주민들은 피해자임을 자처할 수 있었다. 또한 영남 지역에는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진보적인 인사들과 언론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유족들의 활동이 비교적 용이했다.
일차적으로 유족회는 1960년 5월 말부터 시·군 단위로 조직되기 시작했지만, 경북에서는 경북위령제 거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구를 중심으로 지역 유족회가 결성됐다. 국회의 조사 역시 경북에서는 대구를 거점으로, 경남에서는 각지에 출장하는 방식으로 각각 진행됐고, 이들 지역에서 모두 유족회가 만들어졌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유족회가 국회 조사단의 방문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유족회 조직이 국회 조사에 대응하여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2. 지방 피학살자유족회의 활동
지방 유족회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일은 피학살자에 대한 기념사업이었다. 유족들은 당국에 항의 집회를 하거나 수소문하는 등 학살 장소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피학살자들의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던 지역에서는 거대한 합동묘 및 합동묘비가 건립됐고 이들 앞에서 위령제가 엄수됐다. 학살 장소를 특정하기 어렵거나 단시간의 유해 수습이 어려운 경우, 역전 및 학교 등지에서 피학살자들의 신위를 모시고 합동위령제를 거행했다.주)010
위령제는 일차적으로 피학살자에 대한 장례 의식으로 기획됐고 유족을 위로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 또한 기획 단계에서 지역민의 참석이 요청됐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는 장소에서 개최됐으며, 학살의 불법성에 대한 성토가 이뤄졌다. 이는 위령제가 학살의 기억을 지역 사회에 확신시키는 동시에 그동안 학살을 은폐해왔던 국가 권력에 도전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학살 가해자를 색출하여 법의 심판에 맡기는 일도 지방 유족회의 주요 사업이었다. 당시 형사소송법에서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15년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학살 가해자들을 사법당국에 고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살 가해자로 지목된 군경에 대한 조사는 당국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월성군(경주시) 유족들의 집단 고소로 대구지검이 이협우를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한 것은 4월혁명기 유일한 학살 가해자 처벌 시도였다. 이협우는 1961년 3월 6일 대구지법에서 10여 년 전의 살인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주)011
경주유족회와 경북유족회는 이 재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경주에서는 반동적인 이협우 석방 운동이 추진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경주의 군경유족회 및 상이용사회가 경주유족회 사무실을 습격했다. 경주유족회와 경북유족회는 합동으로 이에 대한 대응 집회를 열고 학살범 처단을 방해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주)012 또한 경주유족회는 재판 방청 및 법정 증언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경북유족회는 학살자재판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재판에 대한 다른 유족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3. 전국피학살자유족회의 결성
영남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유족회가 조직됐고 언론 보도 및 국회 조사를 통해 서로를 인지하게 된 유족 대표들은 연대에 공감하고 있었다. 1960년 6월 15일 조직된 경북유족회는 7월 28일 경북위령제를 전후하여 도내 시·군 유족회를 산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자극을 받은 경남의 유족 대표들은 경북유족회와의 통합을 염두에 두고 8월 28일 경남유족회를 결성했다. 그리하여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전 자유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전국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됐다. 회장과 사정위원장으로 각각 노현섭과 이원식이 선출됐다.주)013 전국유족회는 가해자 처벌, 피해 사실 규명, 유족 사찰 중지, 피학살자 호적 정리, 유족에 대한 형사보상, 위령제 거행 및 위령비 건립 등 6개 결의 사항을 채택했다.주)014
전국유족회는 결성 당시 영남 지역 유족회들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무원 사무처에 보내는 연말 보고서를 통해 경상도 외 서울·경기·충청·전라·강원·제주 등지에도 유족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정부에 알렸고, 1961년 초에는 서울유족회 조직을 시도했다. 이렇듯 전국유족회는 1961년 5.16쿠데타로 해산되기 전까지 진정한 의미의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4. 전국피학살자유족회의 활동
전국유족회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여 지방 유족회와의 차별화를 모색하고자 했다. 하지만 다수의 유족회원을 동원할 수 있었던 지방과는 달리, 전국유족회는 서울 중구 충무로2가에 사무실을 두고 일부 유족 대표들을 상경시켜 대통령·국무총리 이하 내무·법무·국방·보건사회부 장관, 민의원·참의원 의장, 대검찰청장·치안국장 등에게 학살 관련 대책을 촉구하는 청원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대한 장면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국가 재정의 투입 없이 사재 출현만으로 학살 문제를 무마시킨다는 것이었다. 특히 1961년 2월 9일 국회 민의원에서는 전국유족회의 결의 사항과 관련된 대정부 질문이 있었는데, 장면 국무총리는 이를 이행할 생각이 없다는 답변을 했다.주)015 이로써 전국유족회는 장면으로부터 100만 환을 받는 등 행정부 및 국회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개인적인 후원금 정도만 받는 데에 그쳤지만, 유족회 사업에 대한 당국의 전향적인 방침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
유족회 기관지로 《돌꽃》이 대구에서 간행되었고, 흑색 바탕에 백골을 표시한 회기(會旗)를 사용했다. 회가(會歌)의 제목은 ‘맹서하는 깃발’이고, 유족회의 선전 구호는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였다. 이들은 경북유족회 및 대구유족회에서 고안된 것으로 유족회 통합 차원에서 경남유족회가 이들을 차용했다.주)016
5. 진보적 사회운동과의 연계
피학살자유족회는 장면 정부에 대한 비판 단체로서 한미경제협정 및 2대악법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이는 유족회가 학살을 반민족적·반민주적 범죄로 규정한 것과 관련 있다. 특히 2대악법은 학살의 명분인 반공을 강화하면서 유족회의 활동을 제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족회의 규탄 대상이 됐다. 2대악법반대운동에 서울에서는 전국유족회 소속의 유족 출신 학생들이 동참했고, 특히 1961년 3월 21일 대구역전에서 열린 집회에는 경북유족회가 “상기하라 대학살 철회하라 2대악법”이란 현수막을 들고 참여했다.주)017
결과/영향
1961년 5.16쿠데타 이후 군부 세력은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피학살자유족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유족회의 학살 가해자 처벌 주장은 학살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군부를 비롯한 기성 반공 권력 집단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됐다. 또한 피학살자 기념사업은 반공 투쟁으로 점철되던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 기억에 도전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유족회는 태생적으로 반공적인 한국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유족회 대표들은 이미 장면 정부 때부터 유사시 검거해야 할 대상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며주)018 5.16쿠데타가 발생하자 신속하게 예비검속 당했다.주)019
군부 세력은 피학살자를 아무런 증거 없이 ‘용공분자’로 왜곡하면서 학살 가해자를 ‘반공투사’로만 인식하려고 했기 때문에, 유족회의 민족·민주·인권운동을 이적행위로 규정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 세력은 경북유족회 회장이면서 전국유족회 중앙위원이었던 신석균이 옥중 병사하자 그를 월북한 간첩으로 조작했다.주)020 이후 그와 함께 전국유족회를 결성하는 데에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인물들은 대체로 ‘혁명재판’에 회부됐다. ‘혁명재판’ 결과 대구유족회 대표위원 겸 전국유족회 사정위원장이었던 이원식은 사형 판결을 받았고, 경남유족회 이사 겸 전국유족회 회장이었던 노현섭은 처음에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62년 2월 9일 이들의 형량은 상소가 기각됨으로써 확정됐다.주)021 이후 이원식과 노현섭은 몇 차례 감형 처분을 받아 판결로부터 약 10년 동안 구금되어 있었고 형 집행이 끝난 이후에도 요시찰 대상이 됐다.
유족회가 만든 피학살자를 위한 기념물 역시 군부 세력에 의한 훼철 대상이었다. 거창의 합동묘와 제주의 백조일손지지는 1950년대에 조성되어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반공개리에 존재할 수 있었지만, 유족회 대표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한창이던 1961년 6월 15일 동시에 파괴됐다. 4월혁명 이후에 조성된 합동묘들 역시 파헤쳐졌고 강제 개장 당했으며 합동묘비는 산산조각이 났다.주)022
학살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도 5.16쿠데타로 중단되고 말았다. 경주에서의 이협우에 대한 사형 판결은 4월혁명기 학살범 처단의 유일한 사례였다. 하지만 5.16쿠데타 이후 경주유족회 간부들이 예비검속 당하고 혁명재판에 회부되자 유족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증언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상급심 재판부는 유족 증언의 증거 능력을 의심했고, 이협우는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 선고를 받았다.주)023
5.16쿠데타 이후 유족회 해체는 한국 사회가 학살 문제에 다시 침묵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 또한 유족에게는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과 1961년의 유족회 탄압에 따르는 이중의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각 지역에서는 유족회가 부활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시민사회단체인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의 도움으로 전국유족협의회가 결성되었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일부 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특히 5.16쿠데타 이후의 유족회 탄압을 인권 침해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후 ‘혁명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부 유족회 간부들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원식과 노현섭 역시 2011년 3월 24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주)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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