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ment for the Academy Democratization during the April Revolution Period
한자표기
四月革命期 學院民主化運動
발생일
1960년 4월 27일
종료일
1961년 5월 16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경북 대구시(대구광역시), 경남 부산시(부산광역시), 제주 제주시, 전남 광주시(광주광역시), 충북 청주시, 전남 목포시, 전북 전주시, 충남 대전시(대전광역시), 강원 속초시
개요
학원민주화운동은 이승만정권이 붕괴한 후 4월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 자치학생회를 건설하고 어용 교수 축출 및 재단 정화를 통해 학원의 비리와 비민주적 운영을 청산하기 위해 전개한 운동이다.
배경
1950년대 학원은 국가의 통제 아래 자율성이 억압됐고 양적으로는 팽창했으나 시설과 운영 면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학생들에게 반공주의를 고취하고 관제 시위에 동원하였다. 1950년대 후반 들어 학도호국단의 상급생 간부들을 중심으로 학교 당국의 비리에 저항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4월혁명 당시 일부 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가 시위를 주도했지만, 기본적으로 학도호국단은 국가가 주도하는 조직이었다. 때문에 그 통제적 성격과 비민주적인 운영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학원 내부적으로는 특히 사립학교의 문제가 심각했다. 설립자나 재단법인이 독단적이고 불투명한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법인 경영자로서 이사장이 총장 또는 학장을 겸임했고, 교원들은 학사 운영과 인사 문제에 관여할 수 없었다. 재단과 학교의 미분리와 사유화 경향은 영리주의적이고 사기업적인 학교 운영과 결합해 다양한 형태의 학원 비리를 낳았다. 이에 4월혁명기 학원에서는 학원 자치와 학원의 자율성 확보와 함께 누적된 학원 비리를 청산하고 학원 운영을 민주화하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원인
이승만 정부는 3.15부정선거를 획책하면서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각급 학교의 교원들이 자유당의 선거운동에 대거 동원됐으며, 이들은 유권자를 상대로 정부 정책을 선전하고 여당 후보들의 득표 활동을 벌였다. 한편 학생들에 대해서는 통제를 가했다.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야당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갖가지 이유로 휴일 등교를 강제했는데, 이처럼 학교 측의 방해로 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한 사건은 전주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학원에 대한 정치적 이용과 통제는 학생들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다. 학생들은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반대하고 학원의 자유와 함께 공명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이 시위는 선거 전날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4.19를 거쳐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도화선이 됐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후 학생들의 관심이 학원 민주화로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교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노골적으로 협력한 어용 교원들이 있었고, 이들은 3.15부정선거에 적극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3, 4월 학생 시위를 직접적으로 방해하거나 탄압했다. 독재정권 아래서 양성되고 누적되어온 학원 내 부정과 부패, 비민주적 악습도 시급한 청산 대상이었다.
학생들은 우선 마비된 경찰 기능을 대신해 질서 유지 및 사태 수습 활동에 나섰다. 그리고 유동적 상황이 일단 정리되자 본격적으로 학내 민주화를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1960년 5월 초부터 자치학생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또한 본격적인 학원 정화에 나서 어용・무능 교수를 축출하고 학원의 비리와 비민주적인 운영을 일소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전개
1. 학도호국단 해체와 자치학생회 건설
학원민주화운동은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 직후인 1960년 5월 초부터 본격화됐다. 학생들이 우선적으로 착수한 작업은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자치학생회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정부도 5월 3일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 해체를 의결하였다. 학도호국단 해체와 자치학생회 건설은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추진됐는데 그 명칭은 ‘학생자치위원회’와 ‘자치학생회’, ‘학생회’ 등 다양했다. 경북대와 제주대 부산대 등에서는 학도호국단 간부 배척 운동이 일어나 관련자들이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많은 대학에서 자치학생회 건설은 이전의 학도호국단 관계자들의 주도 아래 진행됐다. 성균관대와 한국외국어대, 고려대 등 대다수 대학에서 학도호국단 간부로 있었던 인물들이 자치학생회의 간부가 됐다. 이들이 각 대학에서 4.19시위를 이끌고 4・19의거학생대책위원회를 조직한 데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자치학생회는 인적인 측면에서 학도호국단과 연속성이 있었지만, 임원선거에서 직선제를 채택하고 집행부 견제를 위해 대의원회를 강화하는 등 조직과 운영 면에서는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학생 자치 조직을 지향했다.
전국에서 많은 학생 조직이 결성되자 전국 단위의 학생 조직 필요성이 제기됐다. 다양한 학생 조직을 정리, 통합하고 학생들의 단합력을 제고하기 위해서였다. 각 대학의 자치학생회 대표들은 7월 7일 서울에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14일 ‘대한민국대학생총연합회(대총련)’를 결성했다. 대총련에는 16개의 서울 소재 대학과 17개 지방 대학이 참여했다. 대총련은 11월 23일 경희대에서 전국 35개 대학 대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전국 대의원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경희대의 김동성을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하는 등 임원진을 결정했다. 그러나 경북대 등 지방의 17개 대학 대표들은 임원 배정이 지나치게 서울 중심적이고 선출된 임원들 가운데 과거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대회 도중 퇴장해 버렸다. 지방 대학 대표들은 따로 회의를 열어 중앙위원회를 견제하고 탄핵할 수 있는 규정 제정을 결의했다. 그리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는데 이로써 대총련은 서울 조직과 지방 조직으로 양분됐다. 이후 서울 중심의 대총련은 1960년 12월 3일 전국학생반공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또한 1961년 2월 성균관대에 모여 신생활계몽운동과 국토 개발, 치산치수 작업에 대해 논의하는 등 비정치적인 현실 참여의 입장에서 계몽운동과 학내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한편 고려대 등 몇몇 대학의 학생회 간부들은 결성 초기부터 대총련이 과거 학도호국단의 재판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1961년 2월 ‘대한민국학생자치연합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4일 서울 시내 18대 대학교 및 고등학교 대표 60여 명이 연세대에 모여 서울지구 결성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 역시 서울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고, 신생활운동과 학생복검소화운동 같은 계몽운동 차원의 학생운동을 표방하여 대총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처럼 자치학생회를 바탕으로 한 연합적인 학생 조직이 서울 대총련과 지방 대총련, 대한민국학생자치연합회 등으로 분열하자 지방 대총련은 1961년 5월 2일과 3일 경북대에서 임시 전국 대원 대회를 열고 ‘대한민국학생연합회’라는 조직을 새롭게 발족시켰다. 전국의 학생 자치 단체를 대한민국학생연합회로 통합하려 한 것이다. 이 대회에는 120명의 전국 대의원 중 78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대회 도중 의결권 부여 문제로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이 대립했고, 5월 3일에는 부산대 측에서 제안한 남북학생연석회의 안건이 부결됨으로써 부산대 대표가 퇴장하고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주)001
결국 단일한 전국 학생조직의 건설은 실패했다. 그러나 각 대학에서 조직된 자치학생회는 어용 교수 축출과 재단 정화 등 4월혁명 시기 추진된 학원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고 국민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 어용・무능 교원 배척 투쟁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새롭게 열린 공간에서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크고 작은 분규가 학원을 휘감았는데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퇴진 이후 약 2개월 동안 전국 52개 대학 중 과반수에 달하는 대학에서 분규가 발생했다. 지역적으로는 대학들이 밀집된 서울이 중심이었지만 학원 분규는 부산과 광주, 청주, 대구 등 전국에 걸쳐 있었다. 형태도 다양하여 학생총회와 교내 농성, 경찰서 점거, 관계자 자택 파괴와 같은 방식들이 동원됐고, 물리적 충돌과 함께 유혈 사태가 벌어진 곳도 있었다.
학생들의 요구가 집중된 것은 어용・무능 교원의 축출과 재단 정화였다. 어용・무능 교원 축출 운동은 주로 공립학교와 국립대학에서 두드러졌는데 사립학교에 비해 정부 권력에 보다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독재 정권에 협조한 교원들과 수업 및 학생 지도에 무능하고 학생들에게 편파적인 행동을 하거나 교육자로서 품위를 상실한 교원들을 축출 대상으로 삼았다.
먼저 중고등학교의 상황을 보면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일부 학교에서는 1960년 3~4월 학생시위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거나 탄압했던 교사들에 대한 퇴출 운동이 전개됐다. 또한 부정선거에 관여한 교원, 무능・무자격 교원의 퇴진을 요구했는데 이와 같은 어용・무능교원 퇴진 투쟁은 1960년 5, 6월에 집중됐다. 목포의 해양고, 서울 영등포여중고, 전주 신흥중, 동래 장안중 등 여러 학교에서 이와 관련된 동맹휴학과 시위가 이어졌다.
중고등학교의 어용・무능교수 배척 투쟁이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그쳤던 반면 대학에서는 교수 사회의 내분과 결합하여 장기화되고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대 상대와 경북대 의대의 분규이다.주)002 서울대 상대에서는 5월 4일 학생들이 총회를 개최하고 “곡학아세하여 학자적 양심을 상실한 사이비 교수를 배척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5월 6일부터 동맹휴학에 들어갔는데 학생들이 처음 사퇴를 요구한 교수는 3명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장기화됐고 교수들 사이의 파벌 갈등과 내분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학생들도 3명의 교수를 추가로 지목하고 퇴진을 촉구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상대 교수들은 9월 19일 총회를 열고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도의적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퇴진을 요구한 교수들은 사표를 내지 않았고 학생들은 이들의 자택을 찾아다니며 사퇴를 압박했다. 이 사건은 교수들 사이의 소송전으로 비화되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2년 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경북대 의대의 경우 5월 6일 학생들이 교수 3인의 퇴진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에 들어갔다. 이유는 교육의 무성의와 시험 문제 사전 누출, 학적 평가의 불공평, 임용 과정의 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십수 년 동안 계속된 의대의 내분, 즉 대구의전과 서울의대 출신 교수들 간의 알력과 결합해 복잡하게 전개됐다. 또한 의대생들의 퇴학원서 제출과 교수들의 지지 성명, 5개 단과대 학생 4000여 명의 동맹휴학이 이어지는 등 갈등이 격화됐다. 급기야 학생들이 교수를 납치하여 총장실에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고 문교부는 경북대 의대에 휴교 조치를 내렸다. 의대 교수들은 전원 사표를 제출하였고 병원 업무 또한 마비됐다. 경북대 의대 분규는 교수 22명이 전원 해임되고 교수 감금을 주도한 학생 18명이 모두 구속됨으로써 일단락됐다. 문교부의 휴교 조치가 해제된 것은 8월 16일이었다.
이 외에도 서울대 미대에서는 학생들의 인격과 자주성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학장이, 충남대에서는 학장과 총장이 퇴진했다. 사립대학 역시 어용・무능교원 배척운동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성균관대에서는 4월 29일 어용학자성토대회가 열려 총장 이선근이 사퇴했다. 숙명여대의 경우 부정선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학생들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은 김두헌 총장이 사표를 제출했고 대구대에서도 재단 이사장 및 자유당과 관련이 있는 이사가 사임했다. 단국대에서는 무능교수배척운동이 일어나 학생과 교수 1명이 물러났다.
3. 학원 비리와 비민주적 운영 청산
학원비리정화운동은 그동안 누적되어 온 학원의 비리와 비민주적인 운영을 청산하는 작업이었다. 사립학교에서 나타난 이 움직임은 학생과 교수들이 합세하여 학교법인 이사회 조직에 직접 대항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쟁점도 학원 비리와 독단적이고 불투명한 학교 운영, 등록금・기성회비 문제 등 다양했다. 이 가운데 납입금이 문제가 된 곳은 한양대가 대표적이다. 한양대에서는 김연준 총장이 등록금 인하에 합의했다가 이를 이행하지 않아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건국대와 성균관대, 수도의과대 등에서도 시설비 납부를 거부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농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학교들은 한양대처럼 극단적인 폭력 사태로 이어져 장기화된 사례도 있었지만 대체로 학교법인 측이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짧은 시간에 문제가 해결됐다. 반면 재정 비리가 불투명한 회계 운영 또는 학교법인 소유의 자산 및 수익 사업체 운영으로까지 이어진 경우 갈등은 더욱 심각했고 법정 공방으로까지 확대됐다.주)003 그 전형적인 예가 조선대학교이다. 조선대학교는 광주 지역 사회가 힘을 합쳐 설립한 학교였다. 그러나 박철웅 총장을 비롯한 그 일가가 학교를 독단적으로 장악하면서 이미 1950년대부터 학교법인 소유 기업체들이 박철웅 일가의 사유재산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더구나 박철웅이 4대 국회에서 자유당 소속 의원이었기 때문에 부정선거에 가담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학생들은 5월 14일 총장 사퇴와 학처장급 인사들의 개편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그리고 5월 18일 총장 사퇴와 이사진 개편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5월 26일에는 서울로 가 문교부에서 농성 투쟁을 전개했다. 교수들도 20여 명이 조선대학교학원민주화투쟁교수단을 조직하고 6월 16일 법인재산 유용 등을 이유로 박철웅을 검찰에 고발했다. 결국 박철웅이 사퇴를 표명함으로써 분규는 종식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수습일 뿐 박철웅의 법인 이사회 장악과 그로 인한 조선대 분규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갈등의 강도는 덜했지만 동국대에서는 백성욱 총장이 등록금 횡령과 학교법인 및 후원회 결산서 허위 작성 등의 혐의로 고발당했고 국학대와 효성여대에서는 공금 횡령과 불법적인 경리, 정실 인사 등이 문제가 되어 학장이 구속되거나 퇴출당했다.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서울 화광고에서는 학생들이 학교 공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교장퇴진투쟁을 벌였고 속초여중생들은 잡부금과 기성회비 징수에 항의하며 동맹휴교를 단행하였다. 서울 배문중고교 학생들과 강문중고교 학생들 역시 납부금 인하와 기성회비 용도의 해명을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했다.
재정 관련 비리뿐 아니라 학교법인 이사회 중심의 권력 구조도 재단정화운동에서 중요한 이슈였다. 이 문제는 총장 및 이사장의 1인 겸직 분리와 이사회 권한 제한, 인사권 문제에서 교수 자치 요구 등으로 구체화됐다. 동아대학교에서는 교수진이 정재환 총장에게 이사장직 분리 등을 요구하며 강의를 전면 거부했다. 결국 총장이 사퇴하고 교수 전체회의를 통해 학장과 학과장을 선출하기로 함으로써 사태는 수습됐다. 동국대에서도 교수인사협의회 회칙이 제정되어 교원 임면 과정에서 교수회의 참여가 보장됐다. 그러나 극심한 갈등 끝에 유혈 사태로 치달은 곳도 있었다. 한국외국어대에서는 이사회 측이 학교법인의 사기업화 지양, 학사행정에 대한 재단 측의 압력 배제 등을 요구하는 교수들을 해임하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총회 자리에 깡패들을 투입했다. 결국 한국외국어대에는 정부의 휴교령이 내려졌다.
4월혁명기 가장 치열하게 학원민주화운동이 전개된 곳은 연세대학교였다. 1960년 5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연세대 분규는 학원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의 상징과도 같았다. 연세대는 백낙준이 이사장과 총장을 겸임하며 학교를 운영했는데 학생들은 5월 초 학생총회를 열고 중앙집권적 행정체제 지양과 총장・이사장 겸직 금지 등을 결의했다. 교수들도 전체 교수회의를 열고 학교기구개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사회는 교수회가 강의 거부 등 실력 행사에 나서자 6월 13일 단과대학 교수회 대표들과 백낙준 이사장의 사표 수리 및 총장・이사장 분리, 새로운 교수회 구성, 총장 이하 신임 교수 임명에 교수회의 동의권 행사에 합의했다.
그러나 방학 중인 7월과 8월 이사회는 이 합의를 무위로 돌리고 학교 개편안에 적극 참여했던 교수 3인을 해임했다. 또한 총장 서리에 설립자의 손자인 원일한(Horace G. Underwood)을 임명했다. 이사회의 조치로 인해 사태는 다시 악화됐다. 교수진은 21일에 걸친 장기 농성을 단행했고, 학생들은 ‘학원민주화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사진 개편과 권력 및 금력에 아부하는 교수의 사퇴 등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적인 지향이 표출됐는데 한 성명서에서 학생들은 “외국인에 의하여 한국대학의 참다운 민족교육이 성취될 수 없고 이 나라와 학원의 민주화는 달러가 보증해주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주)004
하지만 이사회는 계속해서 강경 입장을 고수했고 해임된 세 교수에 대한 조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주동학생 3명을 퇴학시켰다. 결국 학생들은 11월 6일 미국대사관 앞으로 달려가 원일한 총장과 신임 이사장인 사우어(Charles S. Sauer)의 본국 소환을 요청했다. 또한 원일한과 사우어의 집을 파괴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61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51명이 구속됐다. 극단으로 치닫던 연세대 분규는 12월 6일 교수단이 농성을 해제하고 12월 9일 문교부가 전 경북대 총장인 고병간을 신임 총장에 임명하면서 일단락됐다. 구속된 학생들도 대부분 석방됐다. 하지만 해임된 교수들은 복귀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연세대 분규는 종식되었고 학원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도 잦아들었다.
결과/영향
4월혁명기 학원민주화운동은 새롭게 건설된 자치학생회가 주도하여 전개된 것으로 1960년 5월부터 그해 말까지 계속됐다. 목표는 학생 자치를 실현하고 학원 내 비민주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에 대한 통제 및 동원 기구로 활용됐던 학도호국단이 해체됐고 어용・무능 교수와 학교법인 비리 관련자들이 물러났다. 학원민주화운동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부조리를 청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연세대 분규에서 보이듯 민족주의적인 지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제도권의 학생운동은 서울 대총련의 반공궐기대회 개최에서 알 수 있듯이 반공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고 통일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던 당시 사회운동의 분위기와도 거리가 있었다. 활동 또한 학내 민주화와 비정치적인 신생활운동 내지 계몽운동에 국한됐다. 무엇보다 학원민주화운동을 통한 성취가 임시적인 것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이를 뒷받침할만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민주당 정부 아래서 사립학교법 제정 논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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