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ment for the Trade Unions Democratization during the April Revolution Period
한자표기
四月革命期 勞組民主化運動
발생일
1960년 4월 19일
종료일
1961년 5월 15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경남, 경북
개요
4월혁명기 억압적인 체제가 이완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대한노총 산하 어용노조의 개편과 신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은 노동조직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또한 노동쟁의도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부두, 광산, 철도, 방직, 광산 분야에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배경
정부수립 이후 1950년대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노총)은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에 영합하는 면모를 나타냈다. 1958년 규약 개정을 성사시켜 위원장이 된 김기옥도 자유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반김기옥파는 대한노총과는 별도로 노동조합 중앙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여 1959년 10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결성하였다. 정치권력에 예속된 노동조직을 비판하면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려는 목적에서 결성된 전국노협은 자유당의 탄압으로 활동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인
4월혁명 직전 김기옥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대한노총은 1959년 8월 자유당 당무회에서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마련한 ‘조직확대강화요령’에 맞추어 활동을 전개하였고, 3.15부정선거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억압적인 체제가 이완되자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대한노총 산하 전국의 노동단체도 정권교체에 영향을 받아 지도체제를 재편성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4월혁명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어용 노동조합을 개편하는 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러한 운동은 4월혁명 이후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가장 먼저 김기옥이 위원장으로 있던 부산부두노동조합에서 노조 개편운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군산, 목포, 인천의 부두노조에서도 노조 개편운동이 일어났으며, 부두노조 이외에도 철도, 방직, 전매청, 광산 분야에서도 노조 개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노조 개편운동과 함께 노동자들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목표로 신규 노동조합 결성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노동조합이 양적으로 확대됐으며, 그와 더불어 질적인 변화도 나타났다. 기존의 노동조합들은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조직됐지만 신규 노동조합은 중소규모의 사업장에서 결성된 것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는 4월혁명으로 노동운동의 자주성을 억압하던 장애 요인이 제거되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중소규모의 사업장에서도 노동조합 결성이 확대되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주)001
전개
1. 노동단체 통합과정과 한국노련
4월혁명이 일어나자 대한노총 위원장 김기옥은 4월 23일 “자유당과의 관련성을 버리고 엄정한 정치적 자립을 견지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25일에는 전국노동자에게 “모든 정당과의 연관을 끊고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립을 확립키로 결의”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보냈다. 이러한 발 빠른 대처는 지금까지의 대한노총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속셈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맞서 전국노협은 5월 1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제 노동집단인 대한노총의 간부들은 모든 책임을 지고 깨끗이 물러가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3일 대한노총 고문 정대천(경전(京電)노조 위원장)과 김주홍(철도노조 위원장)이 사임했으며, 김기옥 위원장도 대한노총에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대한노총 내에서 김기옥 체제와 대립하던 세력은 대한노총수습대책위원회(이하 수습위)를 구성하고, 5월 5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대한노총 간부의 총사퇴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수습위의 활동과 함께 기층 노동자들의 민주화 요구에 밀려 대한노총 간부는 5월 9일 총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대한노총은 기능을 상실하고 마비 상태에 빠졌으며, 10여 명의 수습 위원이 대한노총의 조직을 연명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게 됐다.
수습위는 대한노총 과도체제를 조직하여 새로 임원선거를 실시하고 노동조합을 재조직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노동계 일각에서는 어용 노동단체였던 대한노총을 깨끗이 해체하고 각 단위노조에서 자가숙정을 단행하여 민주노조운동의 기본터전을 닦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와는 달리 대한노총 간부가 총사퇴했으니 수습위를 통하여 각급 조직을 숙정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대한노총의 해체가 아닌 내부 개혁을 주장하는 집단도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의 견해가 충돌하고 있는 가운데 법무부는 수습위에 대해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유권적 해석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 7월 22일 김주홍, 성주갑 등은 대한노총 임시전국대의원대회 소집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이튿날 소집준비위원회 위원장 성주갑의 명의로 임시전국대의원대회를 8월 7~8일에 개최한다고 공고했다. 하지만 대한노총은 또다시 주도권 쟁탈전에 휘말려 들어가고 산하 노동조합원들의 반응도 냉담하여 결국 대회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4월혁명기 노동조직은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으로 대별되지만 이러한 조직 외에도 전진한과 김두한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제3세력이 존재했다. 김두한은 ‘부정축재처리긴급대책 노동권익투쟁위원회’라는 명의로 노동단체 재조직에 가세하였으며, 전진한은 한국사회당 중진으로서 7.29총선에 참여했다가 8월 3일에 이르러 “혁신을 위한 대중기반을 닦기로 결심”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사회당에서 탈당했다.주)002 9월 5일 전진한·김두한 세력은 대한노총 본부 사무실을 난입하여 무력으로 대한노총을 접수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김두한은 노동계에서 사라지고, 전진한은 노동조합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1960년 9월 14일 대한노총 성주갑과 전국노협 김말룡은 “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통합 전국대회 개최에 합의하였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통합대회는 예정대로 10월 1일 대의원 508명 중 324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지만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여,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했다.
전국노협과 대한노총은 다시 통합 문제를 협의했으며, 11월 25~26일 통합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 첫날 강령, 규약 등 수정안을 내걸고 갑론을박하다가 논의를 모으지 못하고 산회했다. 이튿날 계속된 대회에서 기본 강령과 행동 강령이 통과됐으며, 통합된 노동단체의 명칭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으로 결정하였다. 대회는 예정일을 넘겨 27일에도 속개됐으며, 중앙위원제를 채택하고 13명의 중앙운영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회의 진행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난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임원 선출 문제를 놓고도 직선파와 간선파로 논쟁이 붙어 급기야 폭력 사태로 이어져 대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11월 30일 한국노련 중앙운영회는 회의를 열어 임시 조직으로서 의장 김말룡(경북노련), 부의장 이규철(철도노련)·성주갑(조양사)·김정원(광산노련), 사무총장 최유식(전남노련), 총무부장 한진희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김말룡 중심의 한국노련이 성립된 데 대해 전진한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13인의 중앙운영회에서 선출된 임시 부서를 불법이라고 성명하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발족시켰으며, 이어서 노련회관 점령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계의 분열로 인해 노동단체의 완전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에도 두 조직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다가 1961년 5월 13일에 이르러 통합대회를 5월 30~31일에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5.16쿠데타에 의해 통합대회는 무산되고 끝내 노동단체의 통합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2. 어용 노조 개편과 신규 노조 결성
1960년 4월 26일 부산부두노동자는 “어용 간부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노동회관을 점거하고 김기옥 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퇴진을 주장하였다. 4월 27일에는 부산부두노동조합 산하 노동자 약 5000여 명이 부산 시내 초량동의 김기옥 자택을 급습하여 규탄 시위를 감행하기도 했다. 5월 1일 부산부두노조는 부두 노동자들의 규탄 시위로 인해 김기옥 위원장과 간부들이 도피하거나 행방을 감추는 등의 공백 상태에서 부두노조를 새롭게 개편하고자 노조운영대책위원회(이하 노조운대위)를 구성하였다. 노조운대위 위원들 대부분은 1958년, 1959년에 반김기옥운동을 전개한 세력이었다.
5월 18일 노조운대위는 기존의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새로운 노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이날 채택된 선언문에서 “어떠한 정당에의 가담과 정치세력의 개입을 배격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새로 개편한 노동조합은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였으며,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김기옥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 1959년 김기옥에 의해 제명당한 조합원을 복직시켰다. 더 나아가 정실에 의해 기용된 작업반장을 해임하고 분회장을 조합원의 직접·비밀 투표로 선출하였으며, 작업반장 임명제를 폐지하고 조합원의 직접 투표로 작업반장을 선출하는 등 조합 운영을 체계화시켜 나갔다.주)003
새로 출범한 조직에 대해 김기옥 일파는 5월 18일의 대회가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정화위원회라는 별도의 조직체를 만들어 도전했다.주)004 이러한 신구파 사이의 갈등은 5월 31일 수백 명의 조합원이 두 패로 나뉘어 한쪽에서는 “노동반역자 김기옥을 처단하라”라는 구호를, 다른 한쪽에서는 “정화위원회란 불법단체를 해체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양상으로 확대됐다. 급기야 신구파 사이의 갈등은 고발사건으로 이어졌다.
4월 29일 군산부두노조에서는 전 군산지구 위원장과 그 일파를 배격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5월 2일 목포부두노조에서도 노동자들의 요구에 밀려 노조 간부가 일괄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5월 3일 인천에서는 인천항만노동자들이 어용 노조 규탄 데모를 전개하였다.
5월 상순 철도노동자들은 노조 해체를 주장하는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5월 2일 서울지방전매청 의주로(義州路)공장 노동자는 관제 노조 숙청수습위원회를 결성하여 관제 노조 즉시 해체를 주장하면서 활동하였다. 5월 8일 안양 금성방직노조에서는 기존의 노조 간부를 사퇴시키고 새롭게 임원을 개선하였으며, 5월 26일 대구 삼호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은 어용 노조 규탄 데모를 벌이며 노조 간부 사퇴를 요구했다. 5월 9일 삼척 월암광업소에서도 어용 노조 규탄운동이 벌어져 임원을 개선했다.
4월혁명기 노동운동의 주요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미조직 분야에서 노조 결성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새롭게 신설된 노동조합 중에서는 전국노협 계열의 조직도 일부를 차지하였다. 4월혁명기 대구지역의 진보적 세력은 전국노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는데, 제일모직 파업이 실패로 끝난 1961년 1월 이후 혁신 세력은 김말룡과 결별하고 2월에는 10여 개의 단위 노동조합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조직으로서 노동조합대구시연맹을 결성하였다.주)005
노동운동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은행원, 신문기자, 교원 등 화이트칼러 사무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조가 결성되어 노동조합운동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이다. 사무직노조의 활성화는 특히 금융 부문에서 두드러졌다. 그동안의 관치 금융을 타파하고 금융의 민주화를 기하며, 행원들의 권익 실현을 목적으로 은행노조설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은행노조는 6월 1일 처음으로 조흥은행노조가, 그 뒤를 이어 6월 9일 제일은행노조가 결성되었다. 6월 11일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노조가 각각 결성되었으며, 6월 18일 서울은행의 노조가 결성됨으로써 3개의 국책은행을 제외한 5개의 일반은행에서 노조 결성이 완료되었다. 이러한 신규 은행노조 중에서 7월 9일 한일, 조흥, 제일은행노조는 대의원 대회를 각각 열어 노조연합회 구성을 결의했으며, 7월 23일 5개 은행의 단위 노동조합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 대회를 열어 전국은행노조연합회를 출범시켰다. 전국은행노조연합회는 1960년 9월 25일 농업은행 경남지구노조가 발족하자 농업은행의 노조설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그 결과 12월 20일 농업은행 서울지구노조도 결성될 수 있었다.주)006 신문노조는 5월 15일 대구일보 기자들이 회사의 기술공 등 여타 직원과 함께 대구일보노동조합을 결성한 것을 비롯하여 6월 17일 연합신문노조가, 그 뒤를 이어 6월 22일 평화신문노조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후속적인 신문노조 결성은 나타나지 않았을뿐더러 활동도 거의 미약했다.
이 시기 교육행정의 부패 제거와 학원 민주화, 교원의 권익 옹호를 목적으로 전개된 교원노동조합설립운동도 주목할만하다. 허정 과도정부는 교원노조에 대한 불허 방침을 표명했으며, 장면 정부도 노동조합법 개정을 통해 교원노조를 불허하고자 했다. 이에 맞서 교원노조는 교원노조합법화투쟁, 노동조합법 개악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5.16쿠데타 후 군부세력의 탄압으로 교원노조는 합법성을 쟁취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3. 노동운동의 고양
4월혁명기 노동운동은 해방 이래 제2의 고양기를 맞이하여 노동쟁의는 급격히 증가했다. 노동쟁의는 노동자들의 경제적인 요구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4월혁명 전에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노동쟁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광산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극히 열악했고 임금 체불도 반복적으로 행해져 몇 차례 쟁의가 발생했는데, 4월혁명기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석탄광노조연합회는 1961년 2월 15일 대한석탄공사를 상태로 임금 50%인상을 요구하는 쟁의를 일으켰으며, 4월 26일을 기해 48시간 제1차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해 대한석탄공사 측에서 불응하자 5월 5일부터는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였으며, 5월 10일 대한석탄공사 산하 6개 광산노조가 파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은 5.16쿠데타 발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주)007
이와 더불어 임금 인상 쟁의로써 철도연맹의 파업이 주목된다. 전국철도연맹은 1961년 1월 27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시간 전기통신 분야로 국한해 파업을 단행하였다. 비록 한 시간 동안의 실력 행사를 벌인 부분파업이었지만 이는 철도노조 역사상 처음 있는 단체행동으로서 의의가 있다. 이 쟁의는 3월 31일 노사간의 협정 조인으로 종결되었다.주)008
4월혁명이 일어나자 어용 노조 개편을 위해 선두에 섰던 부두노조에서도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1960년 10월 전국자유노련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쟁의를 일으켰으며, 12월 20일 인천, 군산, 부산 등 9개의 항구에서 36시간 시한부 파업을 단행했다. 이어서 21일에는 72시간 시한부 파업에 들어갔다. 또한 1961년 3월 31일 자유노련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무기한 파업을 결의했다.주)009
섬유부문의 노동쟁의도 임금 인상 요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노조 민주화를 위한 어용 노조 간부 사퇴, 부당 해고 반대 등도 제기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의 노동자들은 부당 해고자 복직과 쟁의기간 중 불법 채용자 정리 등을 내걸었으며, 인천 흥한방직에서도 부당 해고 노동자의 복직, 어용 노조 규탄, 임금 인상 등을 요구했다.주)010 제일모직 대구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4월혁명을 계기로 노동조합 결성에 나섰으며, 6월 중순에 이르러 제일모직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러자 사업주 측에서는 노조 파괴를 위해 6월 말에 직장 폐쇄를 단행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불법 폐업에 항의하여 농성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싸움은 12월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공권력 투입에 의해 투쟁이 좌절되고 핵심 조합원들이 해고를 당함으로써 제일모직 쟁의는 실패하였다. 당시 쟁의를 주도했거나 지원했던 활동가들은 김말룡과 한국노련 중앙 간부들이 회사측과 타협하고 쟁의를 포기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어 쟁의가 실패하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제일모직 쟁의는 1961년 1월에 한국노련 의장 김말룡이 제일모직 사장 이병철과 직권 타결함으로써 일단락됐다.주)011
전매노조에서도 임금인상과 해고자 복직, 전매청장 배척(퇴진)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 10월 대구전매청노조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쟁의를 제기하자 전매청은 조합원들을 집단적으로 해고하였다. 이에 11월 17일 대구전매청노조는 부당해고 철회와 청장 배척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23일 전국전매청노조연합회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노동자 15,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노동쟁의에 들어갔다. 노동쟁의는 계속 이어져 12월 14일 대구지방전매청노조에서 전국전매청노조연합회의 지시에 따라 12월 21일부터 1차적으로 태업, 2차적으로 파업에 돌입하는 안을 놓고 가부투표를 실시하여 절대다수의 찬동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4월혁명기에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의 두드러진 활동은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이었다. 한국노련의 김말룡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김대연은 1960년 12월 20일 전국대의원회에서 전국미군종업노조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지도 아래 임금 인상과 퇴직금제 실시, 한미행정협정의 조속 체결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됐다.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은 1960년 9월 20일부터 10월 19일까지 전개한 백만인 서명 운동으로 확대되어 사회 각계의 호응을 얻었으며, 1961년 3월 2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를 만장일치로 결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주)012
결과/영향
4월혁명기에 노조 결성이 활발히 이루어져, 1959년 노동조합수 547개, 노동조합원 280,438명이던 것이 1960년 노동조합 914개, 노동조합원 32만 1097명으로 증가하였다. 1959년 신고·설립된 노동조합이 81개였는데, 1960년 한 해 동안에 388개의 노동조합이 신고·설립되었다. 이를 다시 월별로 살펴보면 1~3월에 각각 11개, 11개, 10개이던 것이 4월에 17개를 차지하고 있으며, 5월 이후 크게 증가하여 25개(5월), 59개(6월), 77개(7월), 35개(8월), 43개(9월), 30개(10월), 34개(11월), 36개(12월)를 기록하였다.주)013
노동쟁의도 증가하여 1960년 4월 이후부터 1961년 5월까지 1년여 동안 노동쟁의 발생 건수는 총 282건에 이르렀다. 또한 1960년 한 해 동안의 쟁의 발생 건수는 227건으로 이는 1953~59년에 일어난 발생 건수(216건)를 훨씬 넘어선 수치이다. 쟁의 방식도 동맹파업이라는 집단적 투쟁이 1958년 4.9%, 1959년 1.04%인데 비해 1960년에는 19.38%를 차지하는 등 질적인 변화양상을 보였다.
노동쟁의의 원인에 대해서는 월별 통계가 없어 4월혁명 이후부터 1961년 5월까지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1960년에는 임금 49.6%, 근로시간 2.3%, 보건후생 0.78%, 감독자 배척 3.9%, 해고 반대 12.89%, 공장폐쇄 반대 1.56%, 기타 28.9%로 나타나고 있어 임금 관계가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해고 반대와 감독자 배척 순으로 쟁의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주)014
4월혁명 직후 노동운동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원칙을 확보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운동 내부의 주체적인 역량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관계로 노사협조주의를 극복하고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을 결합시켜 ‘새로운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가 있다.
4월혁명에 의해 급격히 성장한 노동운동은 1961년 5.16쿠데타로 인해 일시 후퇴하게 되었다. 군부세력은 5월 22일 포고 제6호를 공포하여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5월 23일을 기해 해산시켰다. 이리하여 한국노련을 비롯한 전국의 노동단체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군부세력은 8월 3일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노동조합법에 의해 보장된 노동자의 단체활동권을 다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8월 5일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를 발족시켜 노동조직을 재편성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김말룡이 중심이 되어 전국노동단체 재조직연락위원회를 조직했으나 군부세력은 이를 배제하고 이규철 중심의 재건조직위원회를 통하여 중앙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1961년 8월 30~31일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는 15개의 산별노조를 토대로 결성 대회를 개최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발족시켰다.
주)00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244쪽.
주)002
임송자,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 선인, 2007, 358~360쪽.
주)003
부산부두노동약사편찬위, 《부산부두노동약사》, 부산부두노동약사편찬위, 1969, 127~128쪽;임송자, 앞의 책, 2007,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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