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cratization Movement during the April Revolution Period
한자표기
四月革命期民主化運動
발생일
1960년 4월 19일
종료일
1961년 5월 16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의 붕괴 이후부터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다양한 민주화운동이 전개됐다. 교원노조를 포함한 노동운동이 크게 활성화 되었고,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 주도한 민간 통일운동이 전개됐으며, 한국전쟁기 피학살자유족회 활동 등 과거사 정리 운동도 진행됐다.
배경
4월혁명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적인 항쟁으로 집권자를 몰아내는 커다란 성취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권력 개편의 과정은 이승만이 사임 직전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3.15부정선거에 책임이 있는 여당인 자유당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기존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는 등 매우 보수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 장면 정부로의 정권 교체는 기존 보수 정치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허정 과도정부와 국회는 4월혁명에서 표출된 민주화의 열망을 수용하기 위해 국가보안법과 언론,출판, 집회에 관련된 법률들을 개정하여 일련의 자유화 조치를 실행했다. 항쟁의 주역이었던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4월혁명 직후 새롭게 열린 자유로운 분위기 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다양한 불만과 요구를 제기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원인
4월혁명 과정에서 젊은 학생 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시민들이 또한 참여했다. 각계각층의 시민들을 항쟁에 나서게 한 불만과 원인은 다양했고, 또한 그 요구의 수준도 편차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촉발된 민주화의 과정에서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쌓여온 불만과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정치적 민주화뿐만이 아니라, 학원의 자유화와 학원 비리의 청산, 민중 생존권 문제의 해결, 과거사 문제의 정리, 나아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인 분단 문제의 해결 등 다양한 내용과 수준의 요구와 행동이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나타났다.
전개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의 붕괴 직후부터 1961년 5.16쿠데타까지의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은 처음에는 학생, 노동자, 한국전쟁기 피학살자 유족 등 등 여러 집단이 각기 자신이 처한 영역 내에서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와 이해관계를 해결하고자 하는 활동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1960년 11월 무렵부터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민간 통일운동 등이 대두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 이대악법반대운동, 남북학생회담 추진 운동 등 진보적 사회운동도 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모두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쿠데타로 말미암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중단됐다.
1. 학원 민주화 운동과 계몽운동
학생들이 4월혁명 과정에서 주로 제창한 구호는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였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와 함께 학생들은 일단 이승만 정부에 의해 강요된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자치학생회를 건설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주로 허정 과도정부기인 1960년 5월과 6월에 거쳐 어용 교원, 무능 교원을 배척하고, 학원 비리를 청산하기 위한 학원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4월혁명 과정에서 학생들의 저항을 탄압하거나 방해했던 어용 교원과 부패 무능했던 교원을 배척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중고등학교 학교는 물론이고 대학에서도 이러한 활동이 발생했는데, 대학의 학원 민주화 운동 경우 내부 학내 파벌 대립과 연계되어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학원 민주화 운동은 주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학원 비리를 규탄하고 시정하기 위한 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사립학교들은 한 개인이 이사장과 학교장을 겸직하며 전횡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표적이 되었던 총장과 교장들이 대거 물러났다. 1960년 8월 장면 정부는 학원분규의 원인이 됐던 교육감, 교장 19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고, 사학 비리를 규제하기 위한 ‘사립학교법’ 제정도 이때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1960년 7월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국민 계몽운동이 전개됐다. 주로 여름 방학 때마다 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각종 계몽활동을 하는 것은 일제 식민지부터 이어진 전통이었다. 7월부터 대학을 중심으로 ‘국민계몽대’와 같은 여러 계몽운동 조직이 만들어져 활동했다.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1960년 7월 29일에 거행됐기 때문에 이때의 계몽운동은 선거 계몽에 주력했다. 학생 계몽대원들은 주로 농촌 지역을 찾아다니며 4월혁명 의의와 민주적 투표 방식을 계몽하고, 반혁명 세력을 선거를 통해 퇴출할 것을 선전했다. 계몽운동 과정에서 학생들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자유당 출신 후보자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규탄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동시에 도시 지역에서는 ‘신생활운동’을 전개하며 도시인들의 허영과 사치 풍토를 척결하고, 외래 사치품 소비를 억제하여 ‘자립경제’를 달성할 것을 주장했다. 학생들은 양담배를 회수하여 불태우고, 커피 안 마시기 운동도 전개했다.
2. 노동운동의 분출과 노동조합의 민주화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운동의 분출을 가져왔다. 1960년 한 해에만 388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졌고, 쟁의 발생이 전해에 비해 2배가 됐다. 노동자들은 쟁의 과정에서 빈번하게 가두시위를 전개했는데, 쟁의의 원인은 임금인상이 가장 많았고, 해고 반대가 그 다음이었다. 해고 반대운동은 주로 노조 활동과 관련하여 해고된 사람들을 복직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노동운동의 분출과 더불어 기존 노동조합의 관변적 성격과 노조 간부들의 비리 및 전횡을 규탄하는 노동조합 민주화 운동도 전개됐다. 이승만 정권기에는 해방 직후 반공주의 노동단체였던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계승한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노총)’와 그 산하노조가 유일한 노동조합으로 활동했다. 대한노총은 친정부적 성향의 관변 노동단체로, 휴전 반대, 북진 통일 시위 등 관변 반공운동에 노동자를 동원했다. 그러나 그 산하의 노동조합 일부는 노동자의 일상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노동쟁의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대한노총이 위원장 김기옥의 1인 지배체제로 개편되는 등 비민주적인 운영이 악화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김말룡 등 개혁파 세력들은 대한노총을 이탈하여 1959년 10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을 결성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 직후부터 대한노총 내에는 어용 간부 축출운동이 벌어졌다. 1960년 5월 3일 대한노총 위원장 김기옥이 물러나고, 일부 산하 노조의 간부들도 퇴출됐다. 한편 전국노협은 1960년 5월 한 달 동안 만에도 170개 단위노조를 개편 흡수하여 16만 명의 조합원을 갖는 조직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동조합 민주화 운동은 기존 대한노총 조직과 간부들을 완전히 해체하여 재조직할만한 역량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이에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의 통합 운동이 벌어져 1960년 11월 두 조직을 통합한 ‘한국노동조합총연합회(한국노련)’이 출범하고, 그 위원장으로 개혁파 김말룡이 취임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출범 반년 만에 쿠데타를 맞이하여 해체되고 군사정부 하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의 전국적 연맹체로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새로 조직됐다. 김말룡을 비롯한 노조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개혁파 인물들은 이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4월혁명기 노동운동에서 특징적인 현상 중에 하나는 은행과 신문사를 중심으로 사무직 노조가 새롭게 출범한 것이었다. 1960년 6월 조흥은행노동조합 설립을 필두로 여러 은행에서 노조가 설립됐고, 같은 해 7월 23일 ‘전국은행노동조합연합회’도 설립됐다. 일제하 식민지 조선의 은행들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고, 해방 직후 이들 은행들은 모두 미군정의 귀속재산으로 편입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56년부터 은행들이 민영화되기 시작했다. 민영화 과정에서 은행들이 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업가들에게 불하됨에 따라 당시 은행들은 여당의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은행노조의 설립은 금융 민주화 운동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1960년 5월 대구일보 노동조합의 설립을 필두로 언론사 노조도 설립되었는데, 은행노조처럼 전국적 연합체를 만들지는 못했다.
3. 교원노조의 합법화 운동과 미군 종업원 노조의 활동
4월혁명기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노동조합을 민주화하는 데 주력하고, 정치적인 문제에는 거의 개입하여 활동하지 못했다. 1960년 11월부터 시작된 진보적 사회운동과 통일운동에도 기존 노동조합은 조직적으로 합류하지 못했다. 다만 교원노동조합과 미군종업원노조는 예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여하여 활동했다.
4월혁명 과정에서 학생들의 저항과 희생을 지켜보고 자극받은 교사들은 4월혁명 직후부터 교원노조를 결성하여 그 합법화를 위해 대단히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교원노조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벌어졌지만, 경상남북도 지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지 3일 만인 4월 29일 대구 시내 중고교 교원대표들이 ‘대구시교원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필두로 주로 경상남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교원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960년 7월 전국조직으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도 결성됐다. 경상남북도 지역에서는 교사들의 60%가 노조에 가입했다. 그러나 허정 과도정부는 교원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고, 장면 정부도 관련 재판의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핑계로 끝까지 교원노조에 신고필증을 내주지 않았다. 때문에 교원노조는 4월혁명기 내내 정부를 상대로 합법화 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은 단식투쟁을 하며 수업을 강행하고, 상경 투쟁을 감행하는 등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교원노조는 사친회비와 학교 잡부금 폐지 운동도 전개하면서 학부모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또한 경북 교원노조는 이 지역 진보적 정당, 사회단체가 주도한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위한 공동투쟁위원회에 가담했고, 1961년 4월 이대악법반대시위에 각급 분회장 및 대의원 이상의 간부들은 조직적으로, 나머지 일반 회원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참여했다. 교원노조는 정부를 상대로 합법화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다른 노조들과는 달리 정치적 문제의 해결에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수많은 미군 부대가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한국인 노동자들이 주한미군을 위하여 일했다. 주한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미군종업원노조를 결성하여 활동했는데, 주한미군 측은 한국의 노동법을 자신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적용하지 못하도록 배제했다. 미군종업원노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0년 9월부터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위한 백만인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이듬해 1월부터는 인금 인상과 행정협정 체결을 위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미군 당국은 1961년 4월 주한미군을 위해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인상하는데 합의했고, 같은 무렵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한미협정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한미행정협정은 단지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범죄 문제 등 법적 지위와 기지 사용, 주한미군과 한국인들 사이의 노동 등 각종 민사 문제를 다루는 협정이었다. 이에 한미협정체결운동은 노동자 생존권을 확보하는 경제적 의미만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4. 진보적 사회운동과 통일운동 단체의 출현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한국전쟁으로 한국사회를 압도해갔던 반공주의를 벗어난 진보적 정치·사회운동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당과 민주당 등 기존 보수 정당과 차별화된, 당시에는 ‘혁신정당’으로 불렸던 진보적 성향의 정당도 설립되어 활동했다. 또한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등 진보적 성향의 청년단체와 각종 통일운동 단체도 결성됐다. 다양한 진보적 정치·사회운동 조직들이 주로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연대해갔던 것도 특징이었다.
장면 정부 수립 무렵부터 청년·학생 층 사이에서는 그 동안 억압됐던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가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1960년 9월 고려대학교 정경대 학생회가 주도한 ‘전국학생 통일문제 토론회’ 등을 비롯한 각종 통일 문제 관련 강연회, 토론회가 개최됐다. 여기서 청년, 학생층은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의 서신 교환을 비롯한 남북교류론을 주장하고, 중립화통일론, 남북협상론 등의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 중립화통일론은 한반도의 분단 원인을 주변 강대국의 군사적 패권 대립에 있었다고 보고, 스위스, 또는 오스트리아 방식으로 영세 중립국화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이었다. 남북협상론은 한반도의 분단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질서이니 만큼,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외세의 개입 없이 남북협상을 통해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60년 11월에 접어들면서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을 추진하는 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에 진보적 학생 및 청년운동, 사회운동의 흐름은 통일운동에 주력해가는 양상을 보였다. 1960년 11월 1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의 발족을 시작으로 18개 대학과 경북고등학교에서는 학생 통일운동 단체가 결성됐다. 이들 학생 통일운동 조직들의 전국적 연맹체 건설도 추진되어,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전학련) 결성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학생 통일운동은 4월혁명 전부터 대학 내에 존재했던 이념써클의 구성원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학생회 등 일반 학생 조직과는 달리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었고, 스스로도 자신들의 학생운동을 기존 학생운동과 차별화했다.
1960년 11월 26일 대구·경북 지역의 항일운동가와 혁신정당, 진보적 사회단체의 구성들의 주도로 ‘경북민족통일연맹(경북 민통)’이 결성됐다. 같은 달 마산에서는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당시 활동했던 여러 혁신정당과, 민민청, 통민청 등 진보적 청년운동 단체, 경북 민통 등 통일운동 단체들 사이에는 통일운동을 추진하는 연합조직의 건설이 진행됐다. 마침내 1961년 1월 15일 이들 조직들의 대표들을 망라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준비위원회’ 명단과 “우리는 민족자주적이며 평화적인 국토통일을 기한다”라는 내용의 강령이 발표됐다. 민자통은 1960년 9월 항일운동 원로들과 종교계 인사,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 만든 ‘민족자주통일 준비위원회’가 모태가 됐다. 1960년 11월경부터 혁신정당들과 경북 민통을 비롯한 통일운동 단체들이 전국적 통일운동체 결성에 합류함에 따라 조직이 질적, 양적으로 비약했다. 민자통은 1961년 2월 25일 정식 결성됐는데, 혁신정당과 진보적 사회운동, 통일운동 단체의 연합체로서 전국적으로 5만 여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한국전쟁 이후 결성된 최대 규모의 사회운동 단체였다.
5.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과 2대악법반대운동
1961년 2월 학생 민통련과 진보적 청년단체들을 중심으로 공동투쟁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서울과 부산에서 ‘한미경제협정’ 체결을 반대하는 집회가 개최됐다. 한미경제협정은 기존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관련 협정들을 모두 통합한 것이었다. 모든 분야에 걸쳐 한국 정부의 경제 관련 기록들을 미국 당국자가 제약 없이 접근해서 활용할 수 있으며, 원조관련 업무를 하는 미국 관리들에게 외교관에 준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조항 등이 한국의 주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장면 정부와 보수 정치권은 반공주의에서 벗어난 진보적 사회운동과 통일운동이 나타나자 이를 억압하기 위해 1961년 3월 초 ‘반공임시특별법’을 만들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억압적인 방향으로 개정하려 했다. 이러한 조치는 4월혁명 이후 진행된 민주화의 역행되는 것으로 인식됐고, 보수적인 정치인과 언론인들도 상당수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두 법(이대악법)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전국 각지에서 발생했다. 각계각층에서 이대악법 제정에 비판적인 여론은 있었지만, 여기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는 주로 진보적 사회단체와 통일운동 조직들이 주도했다. 때문에 이대악법반대운동 과정에서는 “평화 통일”, “밥과 일터는 통일에 있다”, “반공이란 구실 아래 인권을 유린 말라” 등 통일운동과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구호들이 함께 제창됐다. 이에 두 법을 만들려는 장면 정부의 기도는 일단 좌절됐다.
6. 남북학생회담 제안과 지지집회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이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이틀 후인 5일 민통전학련 결성준비위원회는 이를 전국 학생의 결의로 확인했다. 남북학생회담은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다는 차원에서 학생 기자교류, 학술토론회, 체육대회 개최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통일운동이 조직 결성과 선전·계몽활동을 넘어 직접 남북 교류를 추진하는 단계로까지 가자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발생했다. 보수 정치권과 대부분 반공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한국의 언론들이 이를 매우 충격적인 일로 간주하고 반발했다. 애초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던 학생들은 이에 다소 주춤했지만, 민자통은 남북학생회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아가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대전 등 대도시에서 대중을 동원하여 남북학생회담 지지 집회를 개최했다. 그러던 중 5.16쿠데타가 발생했다.
7. 피학살자유족회 활동과 과거사정리운동
4월혁명 직후에는 해방 직후, 한국전쟁 기간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 등 과거사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한국의 민주화 이행 과정은 항상 과거사 정리와 병행되는 양상이었는데, 4월혁명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많은 민간인들이 적군은 물론이고, 자국 및 동맹국의 군대와 경찰에 의해서도 학살됐다. 4월혁명은 한국전쟁이 정전으로 종결된지 7년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발생했다. 당시까지는 학살을 자행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었고, 이들에 대한 처벌도 가능한 시점이었다. 1950년 6월부터 경상도 지역에서 피학살자유족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유족회는 합동 위령제를 개최하고, 유골을 발굴하고, 위령비를 세우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진상규명, 학살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 명예 회복 및 보상을 촉구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지만 유족회의 활동은 모두 경상도 지역,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한 낙동강 이남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여타 다른 지역의 경우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만이 아니라 전쟁의 과정에서 좌우익 집단이 서로 학살을 주고받았던 형편이었다. 때문에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을 수용하는 시민사회의 반응도 서로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4월혁명기 민간 통일운동과 교원노조 등 개혁, 진보적 성향의 사회운동이 상대적으로 확연하게 경상도 지역에서 활성화된 이유도 역시 이 지역이 한국전쟁 때 미점령 지역이었다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다.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전체 제주 인구의 10% 정도의 사람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4월혁명 직후 1960년 5월 제주대생들은 ‘4.3사건징상규명동지회’를 만들어 각지를 순방하며, 이 사건의 진상과 피해상황을 조사하였다. 제주도 의회도 진상조사를 결의하였고, 지역신문인 《제주신보》는 피해자 명단을 접수하기도 했다.
한편 1949년 5월 육군 소위 안두휘에 의해 자행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도 벌어졌다. 이승만 정부 붕괴직후인 1960년 6월 23일 김구 선생 추도식에 약 3000명의 군중이 참여했고, ‘고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발족됐다. 1961년 4월 28일에는 효창공원에서 암살사건배후자 규탄대회가 개최됐다.
결과/영향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은 쿠데타로 인하여 약 1년만에 모두 중단됐다.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이 시기에 민주화운동을 벌인 사람들을 2000명 넘게 체포하여 탄압했다. 그러나 군사독재 정권기에도 4월혁명은 계속해서 기념되고, 기억됐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도 정치적 민주화와 교원노조를 비롯한 노동운동의 분출, 진보 정당의 출현, 5.18 광주 학살 등 과거사 정리운동, 민간 통일운동이 다시 부흥하는 패턴이 나타났다.
멀티미디어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경찰과 대치 중인 연세대학교 학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일 18시간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가두행진하는 시위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문교부로 몰려와 교원노조 불법화를 반대하는 전국대표자들과 타협하는 윤택중 차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이근성 정리 (황건 증언), <민통련은 4.19 통일 <논의>를 <운동>으로 끌어 올려>, 《월간중앙》 4월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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