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15마산의거는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 시민이 일으킨 시위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집단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유혈 민주화운동이다. 이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약 한 달 후 4월 11일에 발견됨으로써 4.11제2차마산의거로 발전하였고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배경
마산은 개화기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도시였다. 특히 1945년 8.15해방 이후 해외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해방 전후 일본에서 귀환하여 마산에 정착한 인구는 약 2만 5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도 많은 피난민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약 5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마산 유입 피난민 중 북에서 온 사람들 다수가 마산에 정착했다.
1960년 당시, 거주 인구의 대다수가 마산 출신이 아닌 이주자였는데, 그중 40% 이상이 해방, 전쟁기 귀환민, 피난민이었다. 이로 인해 마산의 도시 규모는 급속하게 커졌지만, 도시민 가운데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하층민이 많았다.
1950년대 후반 경제 침체는 마산 시민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마산 시민 15만 명 중 약 2만 명이 실업자였고 육군 항구시설의 폐쇄와 일본 무역 중단 여파로 마산지역 경제피해가 가중되었다. 그 결과 마산지역 하층민의 불만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마산지역은 식민지 시기부터 노동운동이 전개되었고, 1950년대에도 부두노조 결성 등 노동운동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1960년 당시 마산에는 7개의 남녀 고등학교가 있었다. 마산 외 지역에서 마산으로 통학하거나 유학을 오는 경우가 많았을 만큼 마산은 인구 대비 고등학교 수가 많은 ‘교육 도시’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신이 배운 민주주의와 괴리된 사회 현실에 비판적이었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마산 시민과 학생들을 더욱 자극한 것은 마산 국회의원 허윤수(許潤秀)의 자유당 입당이었다. 당시 마산을 비롯한 경남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유당 이용범(李龍範) 의원은, 마산 경제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동양주정의 운영권을 매개로 민주당 소속이었던 허윤수를 자유당으로 끌어들였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속에서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바꾼 허윤수의 행위는 야당 성향이 강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 3.15부정선거가 마산에서도 감행되었다.주)001
원인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하루 전날인 14일 오후 5시, 마산 시민극장에서는 자유당 정책부위원장 한희석(韓熙錫), 경찰서장 손석래(孫錫來), 마산시장 박영두(朴永斗) 등이 배석한 가운데 마산시 일원의 전 공직자가 소집되어 부정선거 요령을 전달받았다.
선거 당일 민주당 마산시당은 투표 개시 시간인 오전 7시 이후 사전 4할 투표, 3인조·9인조 투표장 투입은 물론이고, 민주당 참관인의 입회조차 거부당하는 등 선거 부정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장군동 제1투표소 참관인이었던 도의원 정남규(鄭南奎)와 부인 안맹선은 투표 시작 전 투표함에 들어 있던 사전 투표용지를 확인하고 격렬히 반발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전 10시 30분경,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투표소에 배치했던 민주당 참관인들을 철수시켰으며, 마산시 오동동에 위치한 마산시당 당사에서 선거 무효를 선언하는 가두방송을 실시했다. 오후 1시 30분, 민주당 경남도당이 선거 포기를 선언했고, 오후 4시 30분에는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결의한 ‘3.15선거 불법·무효 선언문’이 각 지방 당부에 발송되었다.
전개
마산 지역 3.15의거의 발발
1960년 3월 15일 오전 10시 30분경에 이루어진 민주당 마산시당의 선거 포기와 무효 선언은 경남도당의 선언보다 3시간, 중앙당보다 6시간 앞섰다. 그리고 오후 2시경, 민주당 마산시당 당사 앞에서 불종거리까지 시민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창원을 지구당 선거부장 장복열(張福烈)이 앞장서, “3.15는 부정선거다!”, “협잡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고, 이윽고 1500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합류했다. 오후 2시 30분경,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정남규 도의원이 마산 지역 민주당원들에게 가두시위를 종용했고, 이에 따라 강경술(姜庚戌), 강선규(姜善圭), 황칠규(黃七圭), 정경도(鄭敬道), 정진철(鄭晋哲) 등 시당 간부 30명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후 3시 40분경, 도의원 정남규와 30여 명의 민주당원이 시위대에 합류했고, 시위대는 불종거리, 창동, 부림시장, 남성동 파출소, 서성동 어업조합을 돌며 구호를 외치고 평화적으로 행진하는 가운데,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주)002
1시간 30분 동안 마산 시내의 가두행진이 계속되자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도의원 정남규, 부위원장 강경술, 상무위원 황칠규, 감찰위원장 정경도, 당원 정진철, 박주복(朴注福) 등 민주당 간부 6명이 연행되었다. 5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남성동 파출소와 자유당 마산시당으로 달려가 투석전을 벌이며 경찰 및 반공청년단과 대치했다.
오후 5시 투표가 완료되자 시위를 주동한 장복열, 이봉수, 이만제는 개표 장소인 마산시청에서 다시 대오를 규합하기로 결의했다. 경찰의 제지가 강화되자 시위대는 “7시 개표 시각에 시청 개표장 앞에서 모이자”고 결의하고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했다.
경찰의 첫 발포와 희생자 발생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당일, 낮에 시작된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낮 시위를 주도한 민주당 당직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행과 체포가 있은 뒤, 시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저녁 7시가 되자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는 다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몇몇 청년의 주도하에 남성동 파출소를 향해 진격했다. 수백 명의 군중이 돌멩이와 막대기 등 손에 잡히는 것들을 파출소를 향해 던졌다.
저녁 8시 이후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 1명이 쓰러졌고, 흥분한 시위 군중은 파출소로 밀어닥쳤다. 당황한 경찰들은 옆 창문을 통해 피신했다. 파출소를 완전히 장악한 군중은 사무 비품, 집기류 등을 부수고 각종 서류와 공문서들을 찢고 내던졌다.
이후 시위대는 남성동 파출소에서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했다. 대로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인파로 가득했다. 시위를 주도하는 청년, 학생들은 경찰이 시위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불이 켜진 건물을 향해 “불을 끄시오!” 하고 경고했다. 암흑으로 변한 시가지에서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사무소, 국민회 마산지부, 서울신문사 마산지사 건물 등을 부수기도 했다.
3월 15일 ‘밤시위’는 학생보다 시민, 특히 도시 하층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일례로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의 ‘귀환 동포’가 다수 거주하던 신포동에서는 품팔이, 부두노동자, 구두닦이, 넝마주이, 홍등가 여성 등 도시하층민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 밤시위는 시내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신마산 쪽에서는 변절자로 지목된 국회의원 허윤수의 집과 마산시장 박영두의 집이 파괴되었다. 특히 허윤수의 가옥은 시민들에게 완전히 파괴당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시민은 분뇨를 끼얹기도 했다.
개표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청 부근의 무학국민학교에도 시민들이 상당수 모여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청을 향해 전진했다. 시위 행렬이 시청 쪽으로 다가서려는 순간, 일렬로 늘어선 5대의 소방차가 시위대를 향해 헤드라이트를 비췄고, 그중 시동을 걸고 있던 한 대가 군중을 향해 소방 호스로 물을 살포했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소방차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던진 돌에 소방차 운전기사가 부상을 당했다. 소방차는 그대로 무학국민학교 앞 전봇대를 들이박았다. 전봇대가 쓰러지자 고압선 합선으로 폭음과 섬광이 번쩍였고, 정전으로 마산 시내 일원이 일시에 암흑으로 변했다. 군중 속에선 “경찰이 고의적으로 정전 시켰다!”는 외침이 쏟아진 반면, 경찰은 “불순한 데모대가 계획적으로 정전을 시켰다”고 몰아세웠다.
저녁 8시가 지나 경찰의 실탄 사격이 시작되었다. 소방차에서 강렬하게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시민들은 실탄 사격에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흩어진 시위 군중 가운데 일부는 다른 방향에서 오던 시위대와 합세해 북마산파출소를 포위했다. 일부 청년 학생이 파출소로 진격을 시도하자 경찰이 총격을 가했지만, 시위대의 투석에 눌린 경찰들이 도주하면서 파출소는 시민들에게 점령당했다.
밀려드는 시위대 인파로 파출소 내부에 비치된 난로가 쓰러지면서 밤 9시 30분경,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 진화를 위해 소방차가 급거 출동했지만, 흥분한 시위 군중 중 일부가 소방차를 향해 일제히 돌을 던졌다. 놀란 운전기사는 소방차를 버리고 도주했다. 뒤이어 달려오던 또 한 대의 소방차 역시 시위대의 돌 세례에 담벼락을 들이받은 채 쓰러졌다. 이 과정에서 북마산파출소는 전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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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30분이 넘은 시각, 마산 시민들은 다시 무학국민학교에 집결한 뒤 경찰과 대치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쳤다. 밤 10시 이후 경남도경 진압부대 200여 명이 도착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무학국민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의 투석도 만만치 않았다. 시위대는 드럼통을 굴리거나 돌, 막대기, 쇳조각, 유리병 등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던졌다. 그런 와중에 경찰로부터 카빈총 1정을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의 강력한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약 70명의 시위대는 학교 뒷담을 넘어 추산공원 산 정상 방향으로 후퇴했다.
후퇴 도중 다른 시위 군중과 합류한 시위대는 의신여중 교정에 집결했다. 2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의 대부분은 청년, 학생, 직업소년이었다. 이들은 자유당에 거액의 정치헌금을 바친 고려모직과 자유당 국회의원 이용범이 운영하는 대동공업사를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서 상당수 청년,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시위대는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 끝까지 남은 직업소년과 청년들이 경찰에 포위된 뒤 격투 끝에 체포되면서 격렬했던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연행자들에게 행한 경찰의 고문
경찰에 체포된 시민들은 남성동 파출소와 마산시청 지하실에 임시 구금되었고, 그곳에서 경찰과 정치깡패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총대와 곤봉, 야전침대 막대기로 구타하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두부를 난타하여 두개골이 터져 뇌장이 흘러나오기도 했고, 대퇴부가 부러진 이들도 있었다.
다리 사이에 나무막대를 끼우고 무릎을 꿇린 뒤 발로 밟고 올라서서 구타했다.
수갑이 채워진 손을 졸라매어 혈맥이 통하지 않게 한 뒤 손등을 곤봉으로 때렸다. 수갑을 채운 부분에 혈관이 끊어진 이들도 있었다.
수갑을 채워 책상에 묶어놓고 수갑에 줄을 매어 맞은편에서 끌어당겼다. 줄과 책상 사이에 주판을 세워 끼우고 막대기로 줄을 두드리면서, 거문고(혹은 기타)로 곡조를 맞춰 탈 테니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살려 달라고 고함을 지르면 노래를 부르라 하고 곤봉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구타했다.
입에 휴지를 말아 재갈을 물리고 어깨는 줄로 매어 수갑을 채운 채 천장에 매달았다.
쇠고랑을 채운 채 담뱃불로, 혹은 쇠붙이를 달구어 정강이를 지졌다.
코로 물을 먹였다.
10여 시간에서 다섯 끼까지 음식물을 지급하지 않았다. 배고픔과 갈증을 참다 못해 이를 요구하면 빨갱이라는 둥 폭언과 함께 구타를 행했다. 사식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경찰이 가로채어 먹었다.주)003
3‧15마산의거에 대한 진상조사
1960년 3월 16일 정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진상조사를 위해 마산으로 급파되었다. 자유당, 정부, 경찰 등에서도 조사에 착수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옹호위원회 역시 3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산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3월 19일, 마산경찰서장 손석래가 대한변호사협회의 진상조사단에게 시청 앞 발포 명령을 시인했다. 같은 날 오전, 내무부차관 이성우는 3월 15일 시위 당시 사망자가 4명, 중상자가 18명, 경상자가 27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날 오후 내무부 치안국은 사망자가 7명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날 민주당에서는 마산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민주당 경남도당에서도 진상 파악을 위해 조사본부를 설치했다.
3월 20일, 민주당은 마산사건 개요를 발표했고 민주당 마산사건대책위원회 본부는 피해자 제보 및 연락을 요청하는 광고를 《마산일보》에 게재했다. 이날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마산에 국회 차원의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합의했다. 3월 22일 치안국장 이강학이 사망자 7명의 명단을 발표했고, 경남경찰국은 3월 15일 시위 당시, 총 6개 지역에서 진행된 580발의 발포 상황을 부산지검에 보고했다.
1960년 3월 23일에는 마산사태의 책임을 지고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사임했다. 같은 날 마산의 적십자사 구호단이 마산사건 총상 피해자를 19명으로 확인했으며, 민주당 마산사건대책위원회는 총상 피해자 4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3월 25일, 발포 책임자로 지목된 경비주임 박종표 외 5명의 경찰관이 구속되었다. 3월 26일, 민주당은 마산사건 구속자를 고문한 경관 3명을 고발했고, 민주당 마산사건대책위원회는 김주열(金朱烈)을 포함한 5명의 행방불명자 명단을 발표했다. 3월 27일 민주당은 고문 피해자 12명의 대리로 고문경관 6명을 고발했는데 당일까지 드러난 고문 피의자는 69명이었다.
3월 28일 내무부차관 이성우와 치안국장 이강학이 해임되었고, 마산경찰서장 손석래가 부산지검에 입건되었다. 이날 대한변호사협회 현지 조사단은 진상조사 보고서를 성명서 형태로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 따르면 발포로 인한 사망자는 8명, 부상자는 72명이었다. 3월 30일, 대검찰청 차장검사 소진섭(蘇鎭燮)은 검찰의 조사결과 발표에서 3‧15마산의거에 공산당이 배후 조종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4월 9일, 민주당 마산사건수습대책위원 조일재(趙一載), 김용진(金溶珍) 의원은 국회 등원 전, 마산경찰서장·고문경관 전원 구속과 진상 규명, 피해자 구호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1960년 4월 10일, 국회 합동 마산사건조사위원회가 여야 간의 견해 차이로 결렬되었다. 4.11제2차마산의거 발발 후인 4월 14일 오후 2시 15분에야 여야 합동 마산사건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개시되었다. 조사 범위는 3.15마산의거와 4.11제2차마산의거를 모두 포함했다. 더불어 특별조사위원회의 한 국회의원은 3.15의거에 사용된 최루탄이 내무부장관 최인규, 전 치안국장 이강학에 의해 미 국제협조처(ICA) 자금으로 도입되었다고 언급했다.주)004
3.15마산의거에 대한 용공 조작 시도
1960년 3월 16일, 부산지검 마산지청장 서득룡(徐得龍)은 ‘마산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같은 날 12시 10분 경 치안국은 민주당 중앙당부 앞에서 연행된 인물들 중 대남간첩으로 검거된 자가 있다며, “이래도 여러분은 공산당에게 속지 않는다고 봅니까?”라는 취지의 내용을 발표했다. 3월 17일 치안국장 이강학은 ‘마산사건’이 공산당 수법과 유사한 증거가 있다고 언급했고, 3월 18일 자유당 마산시당에서는 군중 사이에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사람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3월 19일, 3.15마산의거로 인한 사상자 발생과 기자 구타 사건을 규탄하는 한국신문편집인협회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신문편집인협회는 성명서에서 “사건 후 이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한 책임 추궁과 사건 진인(眞因)의 규명과 아울러 격동한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위협적인 언사로써 민중을 대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는 더욱 해괴하다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주)005 이에 치안국장 이강학은 22일 신문기자의 취재 활동을 방해하는 경찰관을 파면 조치할 것이며, ‘마산사건’ 당시 취재기자를 구타한 경찰관 처벌을 천명했다.
또한 1960년 3월 26일, 자유당 마산사건조사단의 증인신문에서 조사단의 한 의원이 마산경찰서장 손석래에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면서?”라는 내용의 유도신문을 했다. 이날 이필재(李必宰) 서울신문 마산총국장은 시위대 구호 중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발언은 이후 3.15마산의거의 ‘대공 용의점’에 대한 근거로 줄곧 인용되었다. 실제 1960년 4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신언한(申彦瀚) 법무부차관이 “인민공화국 만세” 설을 언급하며 3.15마산시위는 “규모에 있어 공산당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못한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서울신문 마산총국을 제외한 재(在)마산 언론인들은 4월 18일, 위 증언이 사실이 아님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 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우발적인 금차(今次) 사건을 공산당과 결부시켜 ‘데모’에 참가한 많은 학생, 청소년, 시민을 ‘빨갱이’로 몰고, 따라서 폭악무도하게 무차별 총격과 고문‧폭행을 합법화시키려는 목적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를 사회정의와 인도상에서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에 해당되는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지적지 않을 수 없음도 부기(附記)하는 바이다.주)006
더불어 1960년 6월 1일,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와 부산지검 허형구 검사에 의해 3.15마산의거 당시, 마산경찰서장 손석래와 마산경찰서 사찰계장 강상봉의 지휘 아래, 총탄에 쓰러진 시위대의 시신 안에 “이승만을 죽여라”, “인민공화국 만세” 등의 전단을 만들어 넣은 것이 드러났고, 이필재의 위 증언 또한 허위로 판명되었다.
결과/영향
피해 현황
3.15마산의거 당일, 김영호(金永浩), 김효덕(金孝德), 김영준(金泳濬), 김용실(金涌實), 김삼웅(金三雄), 전의규(全義奎), 오성원(吳成元) 등 7명이 경찰의 실탄사격에 사망했고,주)007 김주열이 최루탄에 직격당해 절명했다. 또한 부상자들 중에서 조현대(趙鉉大)는 이듬해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60년 3월 23일 당시, 민주당 측에서 파악한 총상 부상자는 총 43명이고, 고문 피해자는 40명에 육박했다.주)008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파악한 4월혁명과 관련된 마산 지역 희생자는 총 12명이며,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26일까지 조사된 4월혁명 관련 부상자는 총 183명이다.주)009
4.11제2차마산의거
1960년 3.15마산의거 직후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은 그날 《부산일보》 허종(許鐘) 기자의 기사를 시작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곧바로 마산에서 시위가 재개되었고(4.11제2차마산의거), 이는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외부 반응
1960년 3월 17일 주한미국대사는 3.15부정선거에 대한 한국인의 격앙된 민심을 미국 국무부에 전달하고, 미국의 대한정책 목표인 “친미적이고 반공적”이며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한국”의 건립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언급했다.주)010 이튿날 미국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으로 보낸 전문을 통해, 미국 정부는 부정선거 시비와 ‘소요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한(對韓) 지원이 계속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원조로 지어진 충주비료공장의 한국 정부 이양식 및 한국은행의 개발기금차관(DLF) 증여, 한국 정부에의 잠수함 대여를 모두 연기할 것을 지시했다.주)011
3월 18일 도쿄 발 《AFP통신》은 한국 정부와 자유당이 3.15부정선거에 대한 외신의 불리한 보도에 당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3월 19일 서울 발 《AFP통신》은 3.15마산의거와 관련해 야당 측 주장을 소개하고 3.15의거의 사상자 수를 보도했다. 또한 3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국제신문협회(IPI) 총회에서 《CDN》 극동특파원은 강연을 통해 “한국 신문인의 투쟁은 용감”하며 “외국인 기자의 취재 활동은 극히 곤란하다”고 언급했고, 토론 과정에서 3.15마산의거와 관련해 사망자 연령이 12~20세라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혁명재판과 발포 책임자, 고문 경관 처벌
1960년 7월 13일, 3.15마산의거 발포사건 공판이 부산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9월 23일 경비주임 박종표에게는 사형, 남성동파출소 주임 김종복(金鍾馥)에게 무기징역, 마산경찰서 수사주임 이종덕(李鍾德)에게 무기징역, 마산경찰서 형사 주희국(朱熹國)과 이종한(李鍾漢)에게 각각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5.16쿠데타 후, 1961년 9월 30일 혁명재판소는 박종표에 무기징역, 김종복, 이종덕에게 징역 15년, 주희국, 이종한에게 각각 징역 4년을 선고했고, 12월 15일 원심을 확정했다.주)012 더불어 3.15마산의거 당시 고문을 자행한 마산경찰서 수사계 형사 황재우(黃在禹)는 1960년 11월 11일 자신이 고문했던 피해자 박재현에게 발각되어 검찰에 인계되었고, 1961년 10월 30일 혁명재판소는 황재우에게 징역 1년 6월을 확정했다.주)013
전 마산경찰서장 손석래는 1960년 4월 5일 검찰 소환을 앞두고 서울로 잠적했다가 1968년 8월 27일 도피행각 8년 4개월 22일 만에 서울지방검찰청에 자수했다. 서울지방법원은 1968년 12월 20일 그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했으며, 1974년 6월 28일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주)014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장 서득룡도 잠적 11년 2개월 만인 1971년 5월 27일 대구지방검찰청에 자수했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73년 7월 21일 대구지방법원이 징역 4년을 선고하여 재수감되었다.주)015
시위 발생 시점은 《동아일보》, 《마산일보》는 오후 3시 40분, 《4월혁명 투쟁사》는 오후 3시 45분, 《기적과 환상》은 오후 3시 30분, 《조선일보》는 오후 4시경, 《민주혁명의 발자취》는 오후 3시, 《3.15의거사》는 오후 2시 30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아일보》, 1960. 3. 16.(석간);《마산일보》, 1960. 3. 17.;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24쪽;《조선일보》, 1960. 3. 16.(조간);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51쪽;3.15의거기념사업회, 《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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