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전, 서울, 부산, 충주, 수원, 청주, 오산, 문경, 포항, 원주, 인천 등 전국 각지
개요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가 실시 전인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의 시위는 4월혁명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중고생들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학생 시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구호는 “학원 자유”였으며, “부정선거 배격하자”, “공명선거 보장하라”와 같이 부정선거에 직접 항의하는 구호도 있었다.
배경
정치적으로 이승만 정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하면서 영구집권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권력 강화는 도시민의 저항에 부딪혔고, 이러한 저항 의지는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자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획책된 극심한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야당 후보들이 크게 선전하면서 개헌 저지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권 유지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에 예정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한편,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과 학생들의 의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고 민주주의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특히 도시 지역으로 교육받은 인구층이 집중된 후 언론 등 대중매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쉽게 습득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내내 고등학생 수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1950년대 말까지는 학령인구 중 남성은 30%를 밑돌았고 여성은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 고등학생들이 사회적으로 엘리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대학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서울 외에는 사실상 고등학생들이 지역사회 내 최고 학력의 엘리트 집단이었다.주)001 이 때문에 4월혁명 당시, 서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선도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학도호국단 체제하에서 수많은 관제 데모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요된 관제 데모는 학생들의 불만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이승만 정권에 맞서 조직적 시위를 전개할 수 있는 학생들의 자산이 되었다.
원인
1960년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의 시위는 거의 모두 3월 15일 실시 예정인 정부통령선거 유세와 강연과 연관되어 있었다.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와 3월 8일 대전학생시위, 그리고 3월 10일의 대전, 충주, 수원 학생 시위는 모두 해당 지역에서 열린 여당과 야당의 선거유세나 강연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처럼, 3월 8일 대전과 3월 10일 수원에서도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張勉)의 선거 유세가 각각 열렸다. 대전에서는 장면의 선거 유세에 참석하지 말라는 학교 측의 지시에 학생들이 반발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고, 수원에서는 학생들의 시험 시간이 장면의 선거 유세와 같은 시간으로 변경되면서 시위가 발발했다.
3월 10일 대전에서는 자유당의 선거 유세가 있었다. 이날 새벽, 경찰이 시위를 모의한 몇몇 학생을 연행하면서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했다. 같은 날 충주에서는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지역 출신 자유당 국회의원의 선거 강연을 듣도록 강요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렇듯 4월혁명 초기에는 학교 단위의 학생 시위들이 대부분 선거 유세와 강연을 계기로 발생했다.
초기의 시위 과정에서 학생들은 선거 문제를 직접 언급하기보다는 주로 학원과 학생의 ‘자유’, 혹은 ‘정치 도구화’ 문제를 제기했다. 고등학생들은 아직 투표권이 없었기에 선거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보다 학생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자칫 선거 문제를 직접 거론하여, 이것이 야당에 대한 지지로 해석된다면 이승만 정권과 학교 당국의 탄압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차원의 조직적 시위가 아닌, 집회나 시위에서는 학생들 역시 공명선거를 강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이 다가오자 부정선거 작업 움직임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더욱 분명하게 공명선거 실시를 주장했다.주)002
전개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발생한 고등학생 시위는 당국이 학생들이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선거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데 대한 학생들의 반발에서 시작했다. 이 시위는 이후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학생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2.28대구학생시위 이후 첫 시위는 서울에서 발생했다. 3월 1일 서울운동장(현 DDP, 구 동대문운동장)에서 삼부요인과 시민, 학생을 포함해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공명선거추진전국학생위원회는 기념식 종료 직전, 만세삼창을 부르는 틈을 타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유인물을 살포했다. 유인물에는 “부정선거 감행하면 백만학도 궐기한다”, “3.1정신 받들어 민주주의 사수하자”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3월 5일에는 1000여 명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학생 시위가 서울 종로(인사동에서 화신백화점 앞)에서 광화문에 걸쳐 일어났다.주)003 이날 서울운동장(현 DDP, 구 동대문운동장)에서는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연설회가 있었다. 연설회가 끝나고 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학생들은 장면 후보의 차량 뒤를 따라 행진했다. 경찰의 저지에도 아랑곳없이 학생들은 “썩은 정치 갈아보자”, “부정선거 배격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계속해서 시위를 벌였다. 결국 시위대는 저지당했고 민주당원들과 학생 수명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학생들 중 6~7명은 정식 취조를 받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날 시위 이후, 자유당과 경찰 당국은 학생들에 대한 수사와 감시를 강화했다. 또한 이승만을 지지하는 학생조직이 동시에 등장해 학생조직체 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서울에서는 자유당의 압력과 회유, 매수 등을 통한 분열책동이 전개되었다.주)004
이후의 시위는 지방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3월 7일 서부산 일대의 고등학생들은 공명선거호소학생위원회를 결집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었다. 3월 8일과 10일에 걸쳐 대전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진행했다.
특히 3월 10일에는 대전뿐만 아니라 충주, 수원, 대구, 부산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충주고 학생 300여 명은 학교에서 충주 출신 홍병각(洪炳珏) 자유당 의원의 선거 강연을 듣도록 강제하는 데 반대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민주주의 만세”,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 도구로 삼지 말라”고 구호를 외쳤다.
한편, 수원에서는 3월 10일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마지막 선거유세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수원농고에서 오전 10시에 계획된 시험을 장면의 선거유세 시간인 오후 1시로 변경하자 학원 내 정치 간섭을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200여 명의 학생은 “학원에 대한 정치적인 간섭을 배격한다”, “학원 내에서의 간접적인 선거운동을 배격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주당 강연 장소로 행진했다. 대구에서는 “백만 학도여, 일어나라”라는 전단이 시내에 나붙었고, 부산에서는 동구와 진구 곳곳에 민권수호전국학생투쟁위원회 이름으로 교직원의 선거 간섭을 비난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3월 12일, 부산에서 처음으로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전격적인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오후 1시 무렵, 해동고 학생 150여 명이 중구 광복동 일대에서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이날 시위는 사전에 학교 당국과 경찰에 탄로 나는 바람에 주모자가 체포되고 준비한 전단지도 소각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시위에 참가한 학생 수도 적었고, 얼마 후 시위대도 경찰에게 진압됐다.주)005
정부통령선거가 임박해지자 자유당과 정부 당국은 여야를 막론하고 학생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켰고 탄압 강도도 높여갔다. 그럼에도 3월 13일, 서울에서 공명선거를 외치는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사전에 정보를 파악한 경찰과 교직원들의 저지로 시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서울시청 앞, 미도파백화점(현 명동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앞, 미국대사관(현 서울시청 을지로 청사) 앞, 반도호텔(현 명동롯데호텔) 앞, 국제극장(현 광화문 동아면세점 위치) 앞, 중앙우체국 앞 등 도심 곳곳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 이날 시위에는 전국학생구국총연맹, 유석(維石)학생동지회발기준비위원회, 아주(亞洲)청년동지회 등의 깃발을 단 차가 나타나, 학생 시위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주)006
한편, 경기도 오산에서도 오산고 학생 1백여 명이 장날을 이용해 장터 근처에서 “학원의 자유를 달라”, “우리는 좌시할 수 없다”, “우리가 앞서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바로잡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전개했다.주)007 경북 문경에서는 문경고 학생들의 시위가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3월 14일 연합시위
선거 하루 전인 1960년 3월 14일, 서울과 부산에서 진행된 학생 시위는 ‘연합시위’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연합시위는 인접한 여러 학교의 학생이 미리 약속한 장소에 모여 한꺼번에 시위를 벌이는 방식으로, 시위 역량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방식이다.주)008
서울에서는 중동고, 대동고, 균명고, 강문고, 배재고, 수송고,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 경기고, 보인상고(현 보인고), 조양고, 중앙고, 대신고, 경동고 등 야간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밤 9시를 전후하여 진행되었다. 이들은 인사동, 화신백화점 앞, 광화문 네거리, 서대문 로터리 등지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 횃불을 든 채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구호는 주로 부정선거를 거부하는 “공명선거”가 많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를 쓴 유인물을 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날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상당한 유혈 사태가 발생했는데, 서울시경은 180여 명의 고교생을 연행했다고 서울지검에 보고했다.주)009
3월 14일 저녁, 부산에서는 범내골과 범전동에서 데레사여고, 부산상고(현 개성고), 영남상고(현 부산정보고), 항도고(현 가야고), 북부산고, 혜화여고, 동래고 등 부산 시내 12개교 학생 600~700명이 참여한 대규모 연합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공산당 식의 테러를 우리는 배격한다”, “우리 선배는 썩었다”, “우리가 민주제단 지키자”, “학도여 일어나라, 우리의 피를 보이자”, “학도는 살아 있다, 민주국가 세우자”, “학원에 강제 선거운동을 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 수백 매를 살포했다. 격렬한 시위로 40명가량의 학생이 동부산경찰서와 부산진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어 연행된 학우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2차 시위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날 서울과 부산 외 포항, 인천, 원주 등지에서도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포항에서는 포항고 학생 200여 명이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원주에서는 원주농고(현 영서고) 학생들이 “수호하자 인권”, “취소하자 3인조”, “실시하자 공명선거”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렸다. 밤 10시 30분경, 인천에서는 송도고 학생 50여 명이 “학도여, 일어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공명선거를 시행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결과/영향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된 중고등학생들의 시위는 이후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전국 곳곳에서 고등학생 중심의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와 더불어 외쳤던 ‘공명선거’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고 3.15부정선거를 예정대로 강행했다.
주)001
오제연, <4월혁명과 학생>, 《4월혁명의 주체들》, 역사비평사, 2020, 24쪽.
주)002
오제연, 위의 글, 40~42쪽.
주)003
《조선일보》는 시위대가 수백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1960. 3. 6.(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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