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연관사건
- 동의어
- 김옥선 파동, 김옥선 사태
- 유사어/별칭/이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어표기
- the Expulsion of Lawmaker Kim Ok-sun
- 한자표기
- 金玉仙議員除名事件
- 발생일
- 1975년 10월 8일
- 종료일
- 1975년 10월 13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후기 ‣ 긴급조치 9호기 반독재민주화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1975년 10월 8일 신민당 김옥선(金玉仙)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자, 여당과 유신정우회는 이를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한 행위로 규정하고 제명을 추진했다. 정부의 압박과 야당 지도부의 권유 속에서 김옥선 의원은 자진사퇴 형식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에서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이 무력화된 대표적인 국회 탄압 사례이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긴급조치를 남용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강하게 억압했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이에 따른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로 안보 위기론이 확산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명분으로 관제 안보 궐기대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학도호국단과 민방위대를 부활시키는 등 ‘안보 동원’ 체계를 강화했다. 특히 1975년 5월에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정을 요구하는 행위,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학생의 집회 등을 금지하고 위반 시 영장 없는 체포·구금과 처벌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반유신운동을 철저히 봉쇄하고자 했다. 국회에서는 여당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을 대통령이 임면하는 유신정우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제1야당인 신민당 내부에서는 ‘선명야당론’과 타협적 노선이 충돌하면서 정권에 대한 견제 기능이 약화됐다.
1975년 10월 8일 제94회 정기국회 제7차 국회본회의 사회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선 신민당 김옥선 의원은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를 상대로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적 현황의 본질부터 확인해 보고자 한다”며 비판을 시작했다. 김옥선 의원은 외신 보도를 인용하며,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에서는 독재자로 알려져 있다고 언급한 후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 등 독재체제의 통치 기술상의 특징을 한국의 현실과 비교하며 대통령이 자신의 독재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해 전시 위기 상황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주)001
김옥선 의원의 발언 도중 국회에서는 고함과 야유 등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장내 소란과 김진만(金振晩) 국회부의장이 김옥선 의원에게 질문만 하라고 수차례 주의를 주었으나 김 의원은 발언을 계속했다. 결국 장내 소란 속에 김진만 국회부의장은 정회(停會)를 선포했다.주)002 당시 국회의장 정일권(丁一權)은 김 의원의 발언 중 일부를 속기록에서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유정회는 김 의원의 발언을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이적 행위’이자 ‘국가원수에 대한 중대한 모독’으로 규정하고 10월 9일 ‘징계요구안’을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했다.주)003

신민당은 초기 강력한 대여 투쟁의 의지를 표명했다. 10월 8일 긴급 의원총회에서 신민당은 소속 의원 전원이 김옥선 의원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의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0월 10일 기습적으로 소집된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신민당 의원들이 회의장 입구를 봉쇄하는 등의 조치 속에서 여당과 유정회 의원만으로 김옥선 제명 징계안을 의결했다.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의원의 국회 내 발언은 면책특권의 대상이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의회 민주주의의 압살”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주)004 여권이 ‘국회 해산’ 등 비상조치 가능성을 내세우며 압박하자, 신민당에서는 당의 붕괴를 막기 위해 사퇴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정권의 압력에 맞서야 한다는 강경파가 충돌하는 등 극심한 내분이 발생했다. 결국 당 내부에서 당의 와해를 막기 위해 김옥선 의원이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지자, 지도부는 김옥선 의원에게 자진사퇴를 권고, 설득했다.주)005

10월 13일 김옥선 의원은 “본인의 발언이 결과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당과 국회에 누를 끼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한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사퇴서를 제출했다.주)006 국회의장이 경호권 발동을 준비하고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본회의에는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소속 의원 등 153명이 참석하여 ‘김옥선 의원 사직의 건’을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다. 김옥선 의원의 사퇴로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선명 야당’을 표방했던 김영삼 총재는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1976년 신민당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이철승(李哲承) 체제로 전환됐으며, 제도 정치의 한계와 야당에 실망한 민주화운동 세력은 재야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본격적인 장외 투쟁에 나서게 됐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에 대한 침해 및 의원직 제명이라는 억압적 통제는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의 제명을 가져왔다. 결국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부마민주항쟁과 10.26사건은 유신체제의 붕괴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유신정권은 이후 김옥선 의원을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고,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10년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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