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동의어
- 해당없음
- 유사어/별칭/이칭
- 해당사항 없음
- 영어표기
- the Declaration of Press Freedom in 1973
- 한자표기
- 言論自由守護宣言
- 발생일
- 1973년 10월 19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자유언론실천운동
- 지역
- 전국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1971년에 이어 다시 1973년에 벌인 자유언론실천운동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권력에 대한 언론의 비판과 견제 기능은 사라졌다. 정부의 언론탄압에 굴복하고 대신 주어진 경제적 특혜 속에 기업적 성장에 안주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언론사 내에 상주하며 사실상의 사전 검열을 했다. 반면 신문들은 카르텔 체제를 형성해 공생하며 차별성을 잃어 ‘그 신문이 그 신문’이라는 세평을 받을 정도였다.

1969년부터 대학생들의 시위는 언론들을 규탄하고 각성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으며 1970년에는 오히려 언론계의 타락을 드러내는 추문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해 6월 전라북도 이리(익산)에서 기자 20여 명이 공갈과 사기, 폭력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9월에는 언론사 부장단이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상당량의 녹용을 반입하다 발각됐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보도되지 않고 소문으로만 떠돌아 대학생들의 언론 규탄은 더욱 거세졌다.
1971년 3월에는 대학생들에 의해 대학 내뿐만 아니라 서울 광화문에서 언론 화형식이 벌어져 현장 언론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해 4월 15일 동아일보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한 것을 시초로 전국의 여러 언론사들이 선언에 동참했다. 이 선언들의 주요 내용은 진실을 적극적으로 보도할 것과 언론자유를 제약하는 외부적 강제를 거부하고 기관원의 언론사 상주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기자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0월 위수령을 발동하고 12월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연이어 1972년에는 계엄령 및 10월유신 선포 등 강경한 정책들을 펼치며 영구 집권의 길로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운동은 위축되고 말았다.주)001
1972년 10월 유신체제 출범 다음 해부터 언론자유수호의 움직임은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1973년 3월 중순 동아일보 기자들은 연판장(連判狀)주)002을 통해 독자적인 편집권 행사와 신문 지면의 쇄신, 합리적인 인사이동 및 봉급 조정을 요구했으며 70%에 가까운 기자들이 이에 서명했다. 이 사건은 기자 사회의 분위기를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1973년 10월 2일에는 10월 유신 이후 처음으로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 철폐와 민주 회복을 주장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보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이후 이어진 대학 시위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가 간부들에 의해 지면에서 배제되고는 했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 50여 명은 10월 7일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며 항의했다. 이후에도 학생시위 관련 기사들은 번번이 지면에서 제외되고 기자들은 항의농성을 벌였다.

이에 각 언론사의 기자들은 1971년에 이어 다시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1973년 10월 19일 경향신문의 초년생 기자들이 외부 압력 배제와 사실 보도 충실, 인사 쇄신, 급료 인상 등을 요구했다. 이어 23일에는 경향신문 견습 출신 기자들의 모임인 소공회가 ‘국민이 알아야 하고 국민에게 알려야 할 모든 것이 기사화되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을 선언했다. 뒤를 이어 11월 12일에는 기독교방송, 17일에는 조선일보가 선언에 참여했고 11월 20일에는 동아일보가 선언했다. 거듭되는 항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가 없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날 밤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을 통해 기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 정부는 언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하지 마라.
- 모든 언론인은 용기와 신념으로 외부의 압력을 배격하고 언론의 본분을 지켜라.
-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확보될 때까지 모든 힘을 바친다.
결의 내용은 1971년의 선언과 거의 같다. 그 후로도 11월 28일에는 문화방송, 30일에는 중앙일보, 12월 3일에는 신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문들을 채택했다.주)003
이러한 기자들의 움직임에 언론 단체들도 호응했다. 한국기자협회는 11월 29일 언론계가 안팎의 유형무형의 제재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통감하며 더욱 분투할 것을 다짐하고 1971년 5월 채택한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준수할 것을 결의했다. 언론사 간부들의 모임인 한국편집인협회도 12월 3일 일선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를 적극 지지하고 뒷받침하겠다고 다짐하고 정부는 언론에 대한 무모한 통제를 지양, 자율에 맡길 것을 촉구했다.주)004

언론인들의 이러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의 통제와 이에 굴복한 언론사 사주들의 태도는 여전했다. 기자들의 연이은 집단행동에 정부는 11월 중순부터 수차례 신문사 발행인과 편집국장 등을 간담회 형식으로 불러 자제를 요청하고 발행인들에게 ‘유신체제나 안보에 위해되는 기사는 싣지 않기로 한다’는 방침에 서명하도록 종용했다.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발행인들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12월 3일 다시 ‘언론자유수호 제3선언문’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서 기자들은 서명 공작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당시까지 서명을 하지 않은 동아일보 발행인이 서명하게 되면 ‘신문 제작과 방송 뉴스의 보도를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기자들의 저항이 지속적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1973년 12월 24일 재야를 중심으로 헌법개정을 위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74년 연초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기 시작했다. 1월 8일의 긴급조치 1호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이의 개정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청원하는 행위를 일체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어길 경우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도록 한다는 긴급조치 2호도 함께 공표했다.주)005 언론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1973년의 자유언론수호운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탄압의 강도는 더욱 커지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러나 긴급조치 1·2호로 언론을 탄압하는 현실에도 1974년 3월 동아일보에서, 12월에는 한국일보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등 언론자유를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고, 이는 같은 해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는 보다 강도 높은 투쟁을 벌이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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