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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목사·시노트신부추방사건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1994년 4월 9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열린 '민청학련 운동 4.9 통일열사 추모제'에 참석한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오른쪽부터 2, 3번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영어표기
the expulsion of Rev. George E. Ogle and Father James P. Sinnott
한자표기
오글牧師시노트神父追放事件
발생일
1974년 12월 14일
종료일
1975년 4월 30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74년 4월 조지 오글(George E. Ogle) 목사는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약칭 인혁당재건위)사건’의 문제점을 공식적으로 발언한 것으로 인해 1974년 12월 14일에 강제 출국을 당했다. 또한 제임스 시노트(James Sinnott)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인혁당사건’ 진상조사 발표 및 동종 조사 기자회견에 참여함으로써 체류 기간 연장 신청이 거부되면서 1975년 4월 30일 강제 출국됐다.

배경

1974년 11월 8일 유엔(UN)을 방문한 김동조(金東祚) 외무장관은 외국인 성직자들이 국내 정치문제에 간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입국 목적 위반이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가 계속될 경우 이들에 대해 추방령을 내릴 수 있다고 발언했다. 다음 날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는 한국기독실업인회 주최로 열린 국무총리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민주화를 위한 참여를 탈선행위이자, 내정 간섭행위로 규정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문제에 대한 활동 및 지원은 삼선개헌 무렵 결성한 ‘50인 위원회’에서 시작됐다. 이 모임은 ‘월요모임’으로 정착되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대한 소식을 공유하며, 지원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가 됐다. 이들은 대부분 유신헌법 공포 이전부터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 대상이 됐다. 긴급조치 1호 및 4호, 민청학련사건 이후 국민적 저항이 커지자 박정희 정권은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입국과 체류가 가능한 그들의 취약한 조건을 이용하여 그들에 대한 탄압을 시도했다.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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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는 ‘인혁당재건위’를 북한과 직접 연결된 반국가단체로 무리하게 옭아맸고,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억누를 목적으로 ‘인혁당재건위사건’을 조작했다. 1974년 4월 25일 신직수(申稙秀) 중앙정보부장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하면서 이들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등이 있다고 밝혔다.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서도원(徐道源), 도예종(都禮鍾) 등이 1969년부터 인혁당 잔재 세력을 규합하여 인혁당을 재건하고 서울, 대구 등지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검찰부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관련해 23명을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의 위반 혐의로 기소했고, 이 중 7명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1974년 가을 어느 날 밤 10시에 조지 오글 목사는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 중 한 명인 우홍선(禹洪善)의 부인으로부터 도청을 피해 만나달라는 요청 전화를 받았다. 다음 날 8명의 부인들이 오글 목사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오글 목사는 그들과의 만남 이후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의 죄목이 조작되었음을 알게 됐고, 이들을 위한 행동을 계획했다. 1974년 10월 10일 목요모임의 설교에서 오글 목사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가장 미천하고 겸손한 형제자매를 통하여 나타나십니다. 현재 수감된 사람 가운데, 가장 심한 벌을 받고 있는 여덟 명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비록 기독교인들은 아니지만 우리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어쩌면 그들은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조지 오글, 《한국 민주주의의 친구 조지 오글 –20세기 한반도 이야기 기다림은 언제까지, 오 주여!》, 신앙과 지성사, 2021, 215쪽.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들과 활동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진 시노트 신부(한국문제일본기독교긴급회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날의 기도 내용으로 인해 오글 목사는 다음 날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중정 직원의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다. 시노트 신부는 1974년 7월 즈음 월요모임에서 오글 목사를 통해 ‘인혁당재건위사건’ 조작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재건위사건’ 구속자들을 위해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장을 맡고 있었고, 후원회는 1975년 2월 2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 ‘인혁당사건’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4월 8일 ‘인혁당재건위사건’ 대법원 판결 공판에 참석한 시노트 신부는 사형 및 무기징역이 확정되자 분노하며 “A travesty(엉터리)”라고 소리쳤다. 대법정에 남아 판결에 항의하던 시노트 신부와 일행들은 경비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갔다.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들을 만난 시노트 신부는 재심 청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사형집행이 된다면 대한민국은 망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고, 경찰은 유족의 동의없이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해버렸다. 시노트 신부를 비롯한 월요모임 선교사들은 남은 송상진(宋相振)의 시신을 싣고 천주교-개신교 합동 장례미사를 개최하기 위해 응암동성당으로 이동 했다. 하지만 녹번동사거리에서 크레인까지 동원한 경찰에 결국 시신을 강탈당한 채 장례미사를 진행했다.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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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글 목사는 10월 10일 목요기도회에서 ‘인혁당사건’을 언급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다음 날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20시간 조사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오글 목사에게 유신체제를 비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오글 목사가 거절하자 12월 12일 다시 연행하여 6시간을 조사했다. 그리고는 14일에 100여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가족과 동료 선교사의 접근을 막으면서 강제출국이 집행됐다. 이는 김동조 외무장관과 김종필 국무총리의 발언 이후 벌어진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 추방이었다. 오글 목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여러 명의 사복 경비원의 감시를 받았다.
1975년 4월 14일 법무부는 시노트 신부의 체류기간 연장 신청을 불허하고 4월 30일까지 한국을 떠날 것을 통보했다. 시노트 신부는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세 번째 경고 및 추방 예정 공지를 받았다. 첫 번째 경고는 1974년 11월 16일 “입국 목적인 종교적 활동 이외에 다른 활동을 해서는 안 되며, 대한민국의 법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11월 29일 두 번째 경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인혁당재건위사건’ 사형집행 후인 1975년 4월 14일 시노트 신부가 입국 목적과 다른 행동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4월 28일 비자가 만료되어도 연장되지 않을 것이며, 4월 30일에 한국을 떠나야 하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4월 28일 명동성당에서 ‘시노트 신부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고, 정부의 시노트 신부에 대한 출국령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 주교단은 시노트 신부의 추방을 철회할 것을 법무부 장관에게 건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강제출국 전날인 29일 밤에는 시노트 신부가 소속된 천주교 인천교구 주체 미사가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답동성당에서 진행됐다. 4월 30일 추방조치로 인해 미국으로 출국하게 된 시노트 신부는 오후 7시 대한항공 비행기에 오르기 전 ‘Statement of Father James Sinnott, MM before leaving Korea’라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고난과 시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아픔을 표현하고, 한국에 대한 사랑과 축복을 전하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결과/영향

두 성직자의 추방은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미국, 일본 등의 교회 조직에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의 추방 사실을 편지, 성명서 등을 통해 전달했다. 1974년 12월 미국 샌안토니오 미국 감리교 총회 다민족 집회 참여자 40여 명이 오글 목사 추방과 관련해 미 국무부와 포드 대통령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31일 필라델피아 메트로폴리탄 기독교위원회도 성명을 통해 오글 목사의 추방 사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투옥, 인권과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는상황에 대한 분노를 표명했다. 포드 대통령 방한 이후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던 미국 언론 역시 오글 목사의 추방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오글 목사는 추방 6일 뒤인 1974년 12월 20일 미 하원 외교위원회 산하 국제기구 및 운동 소위원회에 출석하여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증언했다.

조지 오글 목사 구술 영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임스 시노트 신부 구술 영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노트 신부 역시 미 의회에 한국의 인권문제를 알리는 일에 적극 행동했다. 1975년 5월 22일 미 하원 외교분과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증언에 나서서 ‘인혁당사건’의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국의 상황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주장했다. 또한 6월 미 하원의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 석방 시위, 주미 한국대사관 앞에서 개최한 ‘민주화 투쟁 구속인사 석방’을 위한 기도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한국의 인권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멀티미디어
  •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지원하는 외국인 선교사 모임인 월요모임 참석자들(Suzanne Belden Rice, Walter Ransom Rice, Jr.,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선교자금 사건 관련 사진과 사진설명
  •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들과 활동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진 시노트 신부(한국문제일본기독교긴급회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예배를 드리고 있는 조지 오글 목사(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74년 12월 14일 정부로부터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조지 오글 목사가 비행기 트립에 오르면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75년 3월 17일 새벽 자유언론실천을 요구하며 녿성하던 동아일보 기자들과 함께 끌려나오는 시노트 신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강제출국명령을 받은 조지 오글 목사와 그의 자녀들
  • 유신체제 유감발언으로 인해 강제출국령을 받은 감리교목사 조지 E 오글
  • 공장에서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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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글 목사 구술 영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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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시노트 신부 구술 영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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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글 목사 구술 영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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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시노트 신부 구술 영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김종철, 《제임스 시노트 평전》, 서울, 바오로딸, 2015.
  • 이상록, <1960~1970년대 조지 오글 목사의 도시산업선교 활동과 산업 민주주의 구상>, 《사이間SAI》19, 2015.
  • 이상록, <추방당한 두 성직자의 초국적 인권 연대 이야기 - ‘인혁당 재건위 사건’ 구속자 구명운동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146, 2024.
  • 임인재, <1960년대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조지 오글>, 《기전문화연구》 40(2), 2019.
  • 제임스 시노트, 《1975년 4월 9일(현장증언)》, 서울, 빛두레, 2004.
  • 조지 오글, 《한국 민주주의의 친구 조지 오글》, 신앙과지성사, 2021.
집필정보
집필자
임인재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5-09-16 17: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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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