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울산현대조선소사건, 1974년 현대조선노동자투쟁, 1974년 현대조선 기능노동자투쟁
영어표기
the 1974 workers protest of the Hyundai Heavy Industries Co. Ltd. in Ulsan city
한자표기
1974年 蔚山現代造船勞動者示威事件
발생일
1974년 9월 19일
종료일
1974년 9월 20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지역
경상남도 울산시
개요
1974년 9월 19일 울산 현대조선에서 발생한 1970년대 최대 규모의 비조직적, 폭동적 형태의 노동쟁의로, 1970년대 중화학공업 남성 노동자 투쟁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수의 직접고용 노동자를 간접고용으로 전환하겠다는 회사의 방침이 계기가 되어 발생했으며, 열악한 노동조건, 차별대우, 억압적, 폭력적 노무관리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격렬한 폭력적 저항으로 표출됐다.
배경
1974년, 3년째에 들어선 유신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끈질긴 도전에 직면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긴급조치 1, 2, 4호를 연달아 발령하고 재야민주화운동 및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또한 1973년부터 시작된 석유파동은 중화학공업화 정책뿐 아니라 한국경제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은 민생안정을 위해 긴급조치 3호를 발령했다. 노동현장에서는 열악한 노동조건, 억압적·폭력적 노무관리 관행, 노동자에 대한 전근대적 차별의식과 대우 등이 만연했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표출될 가능성은 매우 컸지만 드물게만 드러났다. 그 이유는 국가의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과 한국노총의 어용화로 인해 노동자의 단결권과 쟁의권이 심하게 침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섬유산업 등이 밀집한 대도시 공업지역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의 도움을 받아 의식화·조직화한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민주노조운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국가의 지원이 집중된 중화학공업 부문, 건설, 광산, 조선산업처럼 지리적으로 고립된 지역, 지방의 신흥 산업도시 등에서는 그러한 조직화의 가능성이 거의 막혀 있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능공 고용제도를 직영에서 사내하청 일종인 위임관리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직영과 위임관리제 사이에는 임금, 복지 혜택만 아니라 고용 안정성과 직장 내 신분적 위세에 큰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 입장에서 직영을 위임관리로 전환한다는 회사의 통보는 근로계약의 일방적 파기와 다름없었고, 삶의 안정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중대 산업재해가 일상화된 매우 위험한 근로조건, 신생 산업도시의 열악한 주거 상황, 폭력적, 억압적 노무관리, 기능공 및 하청공에 대한 모욕적 차별대우 등으로 인해 노동자의 분노가 엄청나게 누적된 데 있었다. 이러한 갈등 요인을 조절할 수 있는 노사관계 제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노동자의 거대한 분노가 비조직적인 폭동과 분풀이의 형태로 만 하루 남짓한 시간 동안 불꽃처럼 폭발적으로 분출했다가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들 수 밖에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었다.
전개
현대조선은 1972년 봄 조선소 착공과 동시에 26만 톤급 유조선 2척도 건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꺼번에 많은 조선·금속·건설 분야 노동력이 필요했다. 현대조선은 고임금과 직접 고용을 앞세워 전국 각지의 수많은 노동자를 외딴 바닷가 마을인 울산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생산관리 능력과 숙련이 부족하여 재작업 등 비효율이 만연했다. 따라서 납기를 맞추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이에 현대조선은 1973년 8월부터 추가 인력을 위임관리 방식으로 충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4년 9월에는 위임관리노동자의 비중이 전체 노동자의 52.4%(1만 3379명 중 7011명)에 달했다.주)001
이에 그치지 않고 회사는 직영노동자마저 위임관리로 전환하려 했다. 1974년 9월 11일, 건조부 직영노동자 2455명을 9월 23일부터 위임관리로 전환하겠다고 통고한 것이다. 명분은 방만한 노무관리의 효율화였지만, 석유파동으로 유조선 수요가 급감하는 등 위기가 감지되는 상황에서 고용을 유연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전환 대상인 건조부 직영노동자들이 크게 동요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건조부 조장들이었다. 그들은 9월 17일부터 대책을 협의해오다가, 9월 19일 오전 7시에는 작업 지시를 받기 위해 건조부 앞마당에 모인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작업 거부 및 농성을 시작하면서, 회사의 설명을 요구했다. 회사의 설명이 없자 8시경 노동자들은 원가관리부 사무실로 몰려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충돌을 계기로 순식간에 폭력적인 집단행동이 시작됐다. 흥분한 노동자들은 원가관리부 사무실의 창문, 전화기, 장부 등 기물을 파괴하고 집단 시위를 개시했다. 야간작업조 등 다른 부서 노동자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는 순식간에 15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정문 앞에 있는 본관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뜨리고 현장 곳곳의 사무실에 진입하여 기물을 부쉈다.
오전 9시경에는 150여 명의 경찰이 도착하여 시위를 제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시경에는 노동청 울산지방사무소장이 도착하여 노동자들에게 ‘과격행동’을 중단하고 대표를 뽑아 협상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대표가 없는 비조직적인 시위였기 때문에 대표를 통한 협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산발적인 집단행동이 넓은 조선소 여기저기서 종일 계속됐다. 노동자들은 본관 진입을 가로막는 경찰을 격퇴하고 사무실에 진입하여 닥치는 대로 기물을 파괴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전부터 대화도 진행됐다. 대화는 경찰과 노동청 관료가 주선하여 마련된 자리에서 회사 간부가 설명하고, 노동자들은 누적된 분노를 터트리고 거칠게 불만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정리된 노동자들의 요구는 다음 13개 항목이었다. ①위임관리제 반대, ②노동조합 결성, ③사원과 기능공 차별대우 반대, ④상여금 지급, ⑤시간급 인상, ⑥휴식시간 임금 지불, ⑦식당 관리 개선, ⑧능률급제 폐지, ⑨부당해고 금지, ⑩장려수당 지급, ⑪수습기간 단축, ⑫교통문제 해결, ⑬시간외수당 지급.
그러나 회사는 위임관리제 폐지 등 일부 사항에 대한 수용을 완강히 거부했다. 오후 5시 30분부터는 본관 앞 농성 현장에 도착한 정주영(鄭周永) 회장과 노동자들의 대화가 시도됐지만, 정 회장은 위임관리제는 절대 철회할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정 회장에게 돌을 던져 항의하면서 대화는 중단되고, 시위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변했다. 곧이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가운데, 노동자들은 본관 건물, 사원 식당, 각 공장의 사무실, 회사 정문, 매점, 훈련소, 회사 차량 등을 공격하고, 일부에는 불을 질렀다. 기계를 파괴하고 물건을 약탈하기도 했다. 공격의 대상들은 평상시 억압, 폭력, 차별대우 등과 직접적 또는 상징적으로 관련이 깊은 것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또한 관리직 사원, 경비대, 감독노동자들을 공격하고, 하청노동자들은 직영노동자들에게 반감을 표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차별과 억압적 관리에 대한 적의의 표현이었다. 오후 4시경 출근한 야간조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자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의 수는 3000~4000명에 달했다. 날이 어두워진 오후 7시경부터는 노동자들이 정문을 통해 공장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상남북도와 부산에서 파견된 경찰 1300여 명과 노동자들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울산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1개 중대도 현장에 파견됐지만, 중요 시설만 경비할 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밤 10시경 회사는 스피커를 통해 노동자들의 요구 13개 사항을 모두 수락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시위는 오히려 격화됐다. 그들은 소방차, 시내버스, 택시 등을 세워 공격하고, 회사소유 차량 2대에 불을 질렀다. 밤 11시 30분쯤에는 회사 정문 밖 외국인 숙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손했고, 반장급 이상의 감독노동자와 사원들이 사는 사택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다음날인 9월 20일 오전 1시경 장시간에 걸친 시위에 지친 노동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폭력적 시위는 종결됐다. 회사는 3일간의 휴업을 선포하고 수습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경찰은 본격적인 연행을 개시했다. 노동자 877명이 연행됐는데,주)002 시위 현장에서도 붙잡혔지만, 가장 많이 붙잡힌 곳은 회사 인근의 독신자 숙소였다.
9월 20일 노동청, 치안당국을 비롯한 울산의 각 기관장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사건을 분석한 뒤, 노동자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라고 회사에 지시하고, 유사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한 ‘대화 통로’로서 노사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9월 21일 밤 11시부터 9월 22일 오전 1시 30분까지 새마을협의회(회사 대표 9인, 노동자 대표 8인, 위임관리자 대표 3인)가 열렸다. 이 회의는 노사협의회의 구성 및 정례화, 위임관리제 보류, 나머지 노동자 요구의 전면 수용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10월 5일에 발족식 겸 첫 회의를 연 노사협의회에서 회사는 차별대우는 개선하되 위임관리제는 계속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연행된 노동자를 조사하여 39명을 입건한 다음, 최종적으로는 16명을 구속·기소했다. 기소된 사람 중 2명의 조장급은 17일 조장회의 주도와 19일 아침 농성 주도 혐의, 기능공 1인은 노동자 대표 중 1인으로 노동자의 요구사항을 기록했다는 혐의, 기능공 5인은 선동 또는 과격 행동 혐의, 1인은 차량 방화 혐의, 나머지 7인은 시위 가담 또는 소소한 물품 절취 혐의를 받았다. 이들 중 8인은 1심에서 2년 이내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2심에서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이 사건은 당시 노동쟁의로서는 보기 드문 대규모 시위였기 때문에 발생 원인과 사건 진행, 결말 및 사후 조치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언론매체들이 상세하게 다루었다. 국회 보건사회위원회도 1974년 9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노동청을 상대로 발생원인을 따져 묻고 대책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 노동청은 9월 23일부터 9월 28일까지 5인의 조사반을 투입하여 사건 발생원인, 회사의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 등을 상세히 조사했고, 그 결과를 10월 16일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 보고했다.주)003 노동청은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노사협의회 미설치 등 위법사항에 대해 시정조치를 하는 한편, 근로기준법 위반 등을 이유로 대표이사, 총무이사, 인력관리부장을 입건하고,주)004 근로감독관 1인을 전담 배치했다.
결과/영향
이 사건은 1970년대 노동자투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언론에 의해 자세히 보도됐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여러 차례 기사로 보도했다. 한국일보에서는 현대조선 하청공이 보내온 투고를 한 면 전체에 걸쳐 게재하기도 했다.주)005 뿐만 아니라 주요 신문사들은 사설을 통해 전근대적 권위주의적 노사관계와 대화의 부재가 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노사대화 창구의 복원과 민주적 노사관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주)006 한국노총도 모처럼 목소리를 내어, 노동3권의 회복을 통한 노사 간 힘의 균형 회복과 노동조합을 통한 노사협조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야당인 신민당은 사건 발생 직후인 9월 23일 김수한(金守漢)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울산 현지에 파견하여 현장조사를 실시했고, 3차례에 걸친 국회보건사회위원회 회의에서 사건의 원인과 정부 대응 등에 대해 질타했으며, 이 문제가 비단 현대조선 하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재벌기업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노동청은 노사협의회 설치 및 건의함 설치 의무화, 대규모 사업장과 공장밀집지대에 대한 근로감독 강화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상당한 정치적·사회적 충격을 주었고, 다수의 노동자가 연행, 구속되는 등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는 거의 관철되지 못했다. 노사 간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노사협의회는 감독노동자에 해당하는 반장, 조장들이 노동자 대표를 독식하여 대표성을 갖지 못했으며,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했다. 회사가 약속했던 근로조건 개선 등의 사항도 유야무야됐으며, 하청노동자 위주의 채용은 더욱더 확대돼갔다. 그 결과 울산 현대조선의 현장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 억압적, 권위주의적 노동통제 체제가 유지됐다.
이 사건은 1970년대 최대 규모의 비조직적·폭력적 형태의 노동쟁의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역사적 맥락으로 보면, 이 사건은 1971년 한진상사 파월노동자 KAL빌딩방화사건에서 1977년 현대건설 사우디주베일항건설노동자분규사건을 거쳐 1980년 사북사건으로 연결되는 대규모 시위 형태의 노동쟁의 중 하나다. 또한 이 사건은 1970년대의 노동운동을 섬유·봉제·가발 등 경공업 부문 여성 노동자 민주노조운동이 대표했던 흐름에서 매우 드물게 발생한 중공업 부문 남성 노동자투쟁이었다. 이 점에서 당시 중화학공업화가 막 시작되는 가운데, 향후 1980년대 노동운동에서 중공업 부문 남성 노동자의 폭발적 잠재성을 암시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적된 불만을 연료로 일순간에 거대한 불길 같이 시위가 격렬하게 타올랐지만, 그 에너지를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방출한 끝에 만 하루도 안 되어 모두 소진하고 사그라졌다는 점에서 비조직적 투쟁의 한계, 그리고 1970년대 중공업 부문 남성 노동자 저항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주)001
<제90회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5호>, 대한민국국회사무처, 1974년 10월 16일.
주)002
같은 자료.
주)003
같은 자료.
주)004
<현대조선 등 벌금 약식 기소>, 《조선일보》, 1974.9.29. 7면.
주)005
하창래, <어느 독자가 목격한 현대조선 사건의 불씨>, 《한국일보》, 1974.9.27.
주)006
<현대조선 사건의 교훈>, 《동아일보》, 1974.9.27. 2면 등 참조.
멀티미디어
'난동'으로 표현한 1974년 울산현대조선노동자시위사건 보도(경향신문 1974.9.20.)
일간신문 광고면에 게재한 '현대조선 분규에 대한 해명서'(경향신문 1974.9.25.)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광진섬유 노조원들
현대조선 기능공들. 1974년 울산현대조선노동자시위사건은 노동 조건 악화 등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우리나라 조선공업사상 최대인 26만톤급 유조선이 현대조선에 의해 건조된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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