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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통합 7주년 기념예배(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아카이브)
유형
단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KSCF
영어표기
the 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KSCF)
한자표기
韓國基督學生會總聯盟
결성일
1969년 11월 23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 청주, 대전, 이리, 전주, 광주, 대구, 부산

개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은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의 회원단체로 1960년대 세계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의 변화 속에 분산된 한국학생기독교운동 단체들의 연합을 위해 조직되었다. 조직 결성 이후부터 1970년대 개신교 사회운동, 민주화운동에서 학생조직으로 핵심역할을 담당했으며, 오늘날까지 사회적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KSCF는 해방 직후 1948년 4월 25일 기독교연합운동의 정신에 의해 통합된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에서 비롯됐다. 1950년대 이후 에큐메니컬 세계학생기독교운동 (WSCF, 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을 중심으로 대학 내 YMCA, YWCA, 기독학생회 등 분산된 학생선교운동의 통합기류가 형성되었다. WSCF와의 교류, 지도하에 1959년 7월 2일 대학 YWCA, KSCM(한국학생기독교운동, Korean Student Christian Movement) 지도자, 학생대표들이 모여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orean Student Christian, KSCC)가 발족했다. 4.19 직후 KSCC는 WSCF의 프로그램인 ‘라이프 앤 미션(the Life and Mission of the Church, 교회의 생명과 사명, LMC), FSS(Frontier Study and Service) 프로젝트 등을 도입해 젊은 기독지식인들의 사회참여 의식을 확산시켰다.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 신학’으로 통칭되는 에큐메니컬 신학의 변화흐름은 학생기독교운동(KSCM)을 중심으로 한국사회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과 대응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제3세계 저개발국가들의 경우 경제성장과 근대화 이행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면서 한국개신교 지식사회 안에 적극 수용되었다.

설립 과정

한국학생기독교운동 에큐메니컬 정책협의회 개최

196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제반 문제로 인해 한국 기독교인들의 현실 참여와 정치 참여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학생들도 좀 더 통일된 목소리와 사회적 실천을 위한 에큐메니컬 통합 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를 행동에 옮긴 것이 1968년 2월 20일부터 23일까지 KSCC와 NCCK의 주최로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개최된 ‘한국학생기독교운동 에큐메니칼 정책협의회’였다. 이날 18개 관련기관(단체)과 총 40여 명이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NCCK, YMCA, YWCA, KSCM, KSCC, 각 교단 교육부 혹은 청년부, 기독자교수회의와 기독교학교협회 대표, 세계대학생봉사회, 가톨릭학생회 등이었고, 국외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청년국,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아시아 간사, 미국교회연합회의 고등교육위원회 등이었다. 이 모임에서 YMCA, YWCA, KSCM 등으로 분열된 기독학생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통일된 기독학생운동체 조직을 위한 통합안을 제안한 후 통합 시한과 추진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1968년 4월 18일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1월 30일까지 통합을 완료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추진위원회로는 KSCC 실행위원회가 재정적 책임을 전담하고 학생 실무자와 교수 등 각각 1/3로 구성할 것을 명시했다. 대학 YWCA와 KSCM, YWCA 세 단체는 통합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먼저 KSCM은 1968년 2월 이사회에서 통합을 결의함과 동시에 통합추진위원을 선출한 후 본격적인 통합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KSCC는 4월 17일 통합위원회를 교수, 학생 대표와 실무자 등으로 구성했다. 대한YWCA연맹에서는 7월 11일 이사회에서 통합전권위원 5인과 직권상 위원 2인을 선출했다.

통합 추진과 통합을 위한 ‘한국학생사회개발단’ 공동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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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KSCC 주최로 수원 서울대 농대에서 세 단체 대통합을 위한 여름대회를 개최했다. 주제는 ‘한국을 새롭게’였다. KSCM, 대학 YMCA와 YWCA 회원 800여 명, 교수와 지도자 80여 명이 모였다. 대회 마지막 날인 7월 20일 대학 YMCA와 KSCM은 통합을 선언했지만, 대학 YWCA는 여성단체의 독자성 유지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불참의 뜻을 밝혔다. 9월 29일 대학 YMCA도 총회에서 통합을 결의하고 통합전권위원을 지정했다. 10월 KSCM과 대학 YMCA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공동사업 학생위원회를 조직하고 ‘한국학생사회개발단’ 활동 계획을 수립했다. 12월 20일 KSCM 이사회에서 통합전권위원을 구성했다. 1969년 1월 15일 KSCM과 대한YWCA연맹 전권위원들은 모임을 가지고 공동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6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1969년 1월 23부터 31일까지 경기도 안양 농촌개발원에서 ‘한국을 새롭게’라는 주제하에 회원 200여 명이 모여 연구 훈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를 통해 ‘학사단 5개년 계획’이 만들어졌다. 4월 11일 KSCC는 서울 YWCA에서 개최한 제10차 정기총회에서 회원 단체의 통합에 매진할 것을 결정한 후 간사로 안재웅(安載雄), 연구간사로 서독 출신 브라이덴스타인(Breidenstein)을 선정했다. 5월 6일 공동사업 6인위원회는 모임을 가지고 명칭, 조직, 사업계획, 예산안, 실무자, 지국 설치 등을 결정하고 ‘한국학생사회개발단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5월 23일 WSCF의 간사가 참가하여 통합운동의 중간 검토를 하고 학생운동정책협의회를 개최했다. 9월 23일 두 단체 통합전권위원 6인이 모임을 가지고 통합 협의 일정 및 내용을 결정했다.

KSCF의 출범과 조직 완비, KSCC의 해산

1969년 10월 22일부터 23일까지 두 단체 학생 통합전권위원 전원이 모여서 헌장 기초안, 기구도표, 총회 임원 전형안, 이사 및 실행위원회 구성안, 통합대회 준비안 등을 결정했다. 11월 대한YMCA연맹 제20차 정기총회에서 대학 YMCA의 통합을 위한 헌장 수정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1969년 11월 23일 오후 3시에 서울 YMCA에서 KSCM과 YMCA연맹이 통합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한국기독학생총연맹(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KSCF)이 출범했다. 임원으로는 회장, 부회장, 서기, 감사, 학생이사, 실행위원 등을 선출했다.
1970년 1월 24일 서울 YMCA 회의실에서 KSCF의 창립 이사회가 개최됐다. 이날 1970년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승인한 후 이사회와 사무국을 조직했다. 3월 14일 개최된 실행위원회에서는 이사회 위임사항을 결정하고 사무국 내규 및 직원을 선임했다. 이사회는 이사장 박대선, 부이사장 정희경, 서기이사 최효섭, 재정이사 황달호, 이사 성갑식, 김해득, 이창식, 김진만, 나상조, 김관석, 강원용, 이성행, 정의섭, 현영학, 김용준, 양우석, 김희선, 김치묵, 김용옥, 홍현설, 김천배, 안상용, 임동신, 강병덕, 이재복, 황호만, 국동출, 김재진, 감사 이대순, 차동성 등이 선정됐다. 사무국은 사무총장 오재식, 연구부장 부광석, 대학부장 이직형, 호남지방 지도총무 안재웅, 영남지방 지도총무 정용환, 출판부장 김경제, 사무장 김문소 등으로 구성됐다. 아울러 두 단체의 선배들이 선배회를 조직했다. 이로써 KSCF는 에큐메니컬 통합기구로서 통일된 기독학생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KSCC는 11차 총회를 끝으로 활동의 목적을 다하고 해체를 결의했다.

단체 활동

학생사회개발단 활동

학생사회개발단은 일명 학사단이라 불렀다. 기원은 1968년 7월 기독학생운동을 통합하기 위한 여름대회에서 실제적인 행동의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구상한 사업에서 비롯됐다. 1969년 1월 24일에서 2월 1일까지 개최된 동계대학에서 학사단운동의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제1기는 1969부터 1971년까지이고 제2기는 1972년부터 1973년까지였다. 5월에 학사단 6인 공동 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명칭을 한국학생사회개발단으로 결정했다. 5월에서 6월, 2개월간 지구별(서울, 청주, 대전, 이리, 전주, 광주, 대구, 부산) 4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학사단 요원 훈련을 받았다. 학사단운동의 목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민중현장과 밀접하게 결합된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3년 10월 4일 YMCA 지역사회개발단 발단식(경향신문 포토뱅크)

학사단운동은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으로 구성됐다. 중앙조직은 대외관계 및 모금, 사무행정 및 회계, 연구 및 자료출판 등을 담당하고, 지방조직은 서울, 광주, 전주, 이리, 대전, 청주, 대구, 부산 등에 지방 책임자를 두었다. 각 대학에서는 8명의 조직이 기본단위로 구성되며, 대장, 총무, 사회부, 산업부, 교육부, 보건부 등을 두었다. 5단계 전략을 수립해 운동을 추진했다. 단원 모집과 연구훈련단계, 대상 지역 실태파악단계, 지역조직단계, 전략행동의 단계, 확대운동단계 등이었다. 학사단운동 제1기의 첫해인 1969년은 ‘문제 발굴의 해’로 삼고 접촉, 조사, 경험 등에 중점을 두었다. 1970년에는 ‘문제 고발의 해’로 설정하고 실질적인 운동 전개와 사회 여론 형성 도모에 힘썼다. 1971년에는 조사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성사회단체나 교회들로 하여금 적극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제2기인 1972년에는 구체적인 현장문제 해결 및 이를 위한 민중 조직을 위한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과 십자가 선언, 구속자 석방운동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유신헌법이 선포된 지 1년이 될 즈음인 1973년 10월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됐다. 같은 해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로 있다가 11월에 들어서면서 경북대를 시작으로, 서울대, 감리교신학대, 중앙대, 성균관대, 서울신학대, 전남대, 고려대, 연세대, 숭전대(현 숭실대), 이화여대, 한양대, 동국대, 숙명여대, 수도여사범대학, 경희대, 대구영남대, 덕성여대, 홍익대, 단국대, 상명여대, 부산대, 동덕여대, 한국항공대, 가톨릭의대, 명지대, 국제대, 대구 효성여대, 영남신학대, 광주일고, 개신교회 교인들 등의 시위가 12월까지 계속됐다.
1973년 11월 NCCK 산하 신앙과 인권협의회에서 ‘인권선언’이 발표됐다. 이어 12월 16일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체인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에서도 ‘1973년 한국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민청학련사건은 1974년 4월 3일 발생했다. 이날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주요 대학에서 소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며, 민청학련 명의의 ‘민중·민족·민주선언’과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KSCF에서도 4월 3일을 기점으로 반유신 민주화 요구 투쟁을 벌이기로 계획을 세운 후 KSCF 사무국과 모든 학생들이 이에 참여하는 조직적 활동으로 이어졌다.

KSCF 나상기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1975년 2월 15일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할 당시를 찍은 사진(한신대학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부는 같은 날 저녁 10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단체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이른바 노동자 농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기도한 것으로 수사 당국에서는 소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기도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계속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이후 수많은 학생, 교수, 언론인, 종교계 인사들이 구속됐다. KSCF 회원들은 회장 서창석(徐昌錫)을 포함하여 간부 전원과 실무자 총 26명이 투옥됐다. 중앙정보부와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서는 대구지역의 옛 혁신계 인물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지역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하여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인 민청학련을 조직함으로써 대규모 시위를 통해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고 했다고 수사 상황을 밝혔다. 비상군법회의에 송치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사형에서부터 무기징역, 무기징역이 아닐 경우 최고 20년에서 최하 5년의 징역이 선고됐다. 인혁당 관련자 8명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확정 판결로 다음 날 새벽 사형에 처해졌다. 긴급조치 해제 직후인 9월부터 KSCF는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어 기독학생들은 현 시국 상황에 맞서서 투쟁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라는 십자가선언을 발표했다.

YWCA위장결혼식사건과 KSCF 통합 10주년 기념행사

KSCF 회원들이 대거 참여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 현장(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아카이브)

1979년 11월 24일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하여 서울 명동 YWCA 강당에 회집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140명이 모두 연행 조사를 받았으며, 그중 14명이 구속되었다. KSCF에서는 박종렬(朴鍾烈) 간사가 구속되었으며, 안재웅(安載雄) 총무, 이재정 이사, 금영균(琴榮均) 감사 등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조사를 받았다. 곧 이어 KSCF는 11월 27일 10주년 기념행사를 기독교회관에서 개최했다. 계엄당국에서는 이 행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KSCF 실무자들은 구속을 각오하고 준비했다. 행사 당일 학생들은 계엄당국과 충돌했으며, 학생간부와 실무자 전원이 체포됐다. 학생들이 농성을 계속하자 공수부대가 회관에 투입되어 60여 명을 강제로 연행했다. KSCF 단독으로 최대의 학생들이 연행된 사건이었다.

결과/영향

KSCF는 세계에큐메니컬 선교신학의 배경으로 탄생해 1970년대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주정치, 인권옹호, 학원자유수호 등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70년대 정부의 학원 탄압 국면에서 기독학생 조직인 KSCF는 학생활동가들을 종교의 우산 아래 품어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며, 위수령-긴급조치 등 강권 발동으로 각 대학 학생운동이 진공상태에 빠졌을 때 주도적 활동으로 불씨를 살리는 데 기여했다. KSCF 학생활동가들은 제적 혹은 졸업 후에도 노동운동, 청년운동, 재야운동 등 기독교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저변을 형성했으며,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1990년대 이후로는 한반도의 평화, 노동과 인권, 불공정과 양극화, 반전반핵 등과 관련된 사회참여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멀티미디어
  • 1959년 발행된 대한기독학생회(KSCM) 소식지(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국을 새롭게'라는 주제를 부각한 학사단 팸플릿(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통합 7주년 기념예배(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아카이브)
  • 1973년 10월 4일 YMCA 지역사회개발단 발단식(경향신문 포토뱅크)
  • KSCF 나상기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1975년 2월 15일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할 당시를 찍은 사진(한신대학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KSCF 회원들이 대거 참여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 현장(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아카이브)
  • KSCF의 민주화운동 주도적 참여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YWCA 위장결혼 사건 배후조종 혐의로 수경사의 조사를 받은 윤보선 전 대통령
  • 한국을 새롭게
  • 대학에 있어서 학생의 지위와 기본적 권리에 관한 선언
참고문헌
  • 윤정란, <1960년대 미국선교사에 의한 한국기독학생운동의 세계교회와의 연대 기반 구축>, 《사림》 72. 수선사학회, 2020.
  • 고지수, <1960년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의 조직과 특징>, 《사림》 63, 수선사학회, 2018.
  • 안재웅, <KSCF 반세기를 돌아보며>, 《기독교사상》 479, 대한기독교서회, 1998.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 도서출판 다락원, 1998.
집필정보
집필자
윤정란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5-09-16 17: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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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 설명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통합 7주년 기념예배(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아카이브)
  • 출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