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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가족협의회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1974년 11월 21일 구속자 가족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주한미대사관 앞뜰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단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 양심범가족협의회
유사어/별칭/이칭
구가협
영어표기
the Detainees’ Families Association
한자표기
拘束者家族協議會
결성일
1974년 9월 1일
해체일
1976년 10월 14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1-4호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령된 1974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 단체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구속자 가족들이 참여하며 명칭을 변경했다. ‘양심범(수)’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전개했으며, 고문 반대 등 형사 절차의 민주적 개선에 기여했다. 주로 어머니와 아내 등 구속자 가족이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나서 인권 의제를 만들어낸 운동단체이다. 1980년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토대가 됐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가족운동의 출발점이 된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는 ‘1974년’이라는 시대의 토양에서 탄생했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1·2호’ 발동(1월 8일)으로 시작된 1974년은 4월 3일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유신헌법에 반대한 민주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장준하(張俊河), 백기완(白基玩)을 첫 표적으로 삼아 수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잇달아 구속했다. 비상군법회의 검찰은 긴급조치 제4호 위반만으로 1024명을 조사했고, 745명은 훈계 방면, 2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했다.주)001

긴급조치의 잇단 발령과 그로 인한 대량구속, 민청학련사건과 그 ‘배후조직으로서 인혁당사건’의 조작, 그리고 일사천리 사형 집행은 온 사회를 순식간에 공포와 절망에 빠뜨렸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틀조차 무너뜨린 유신 독재의 어둠은, 바로 무너진 그 토양에서 저항에 직면했다. 많은 민주인사와 학생이 구속되거나 수배되고, 언론마저 침묵하는 상황에서 저항의 흐름은 종교에서 시작됐고, 구속자들을 옥바라지하던 가족들(주로 어머니와 아내) 모임으로 연결됐다. 가족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사건의 진실과 유신 독재의 폭력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구속자를 면회하고 재판을 방청하며 “국가전복”, “공산혁명음모”라는 당국의 발표와 다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구속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바라보게 됐다. 다른 가족들과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을 결성하고 석방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연결시켜 나갔다. 그 첫걸음을 뗀 조직이 바로 구속자가족협의회다.

설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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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가족협의회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다. 그들은 단순한 가족모임으로는 대처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임을 확대하여 1974년 9월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조직했다.주)002 회장은 공덕귀(孔德貴, 윤보선 대통령 부인), 부회장 김윤식(金允植, 연세대생 김학민 아버지), 총무 김한림(金翰林, 서강대생 김윤 어머니)을 선임했다. 정금성(鄭琴星, 김지하 시인 어머니), 조정하(趙貞夏. 박형규 목사 부인), 최영희(崔玲姬, 이현배 부인), 박노숙(朴露淑, 유인태 어머니) 등이 활동했다. 석방운동이 긴급조치에 대한 직접적 저항이고, 곧 민주화운동인 시대에, 가족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일은 용기와 대담한 실천력이 필요했다. 저항운동의 흐름이 시작된 종교계의 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지도력과 조직력을 갖춘 이들의 존재가 조직 구축을 가능하게 했다. 가족모임에서 “큰언니”라 불린 정금성은 구속자 가족의 표상이자 모범이었으며 가족운동을 이끌었다.주)003 구가협의 초대 총무인 김한림은 평범한 “어머니들의 정서를 묶어서 저항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의 활동으로 구가협은 “민주화운동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주)004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 결성과 ‘양심범(수)’ 개념의 등장

구속자가족협의회와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를 이끈 공덕귀 여사(왼쪽)와 박용길 장로 및 그 가족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가협은 3.1민주구국선언 구속자 가족들과 힘을 합쳐 1976년 10월 14일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회장은 구가협을 이끌던 공덕귀가 계속 맡았으며, 그 뒤를 이어 박용길(朴容吉)이 1980년경부터 1985년 12월 민가협이 창립될 때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 일은 가족운동과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단순히 구속된 ‘상태’를 말하는 ‘구속자’가 아닌, ‘양심범’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양심범(수)’이라는 규정은 양심과 표현의 권리를 행사하다가 감금된 사람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시국사건 구속자’를 인권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창을 제공한다. ‘양심범(수)’ 문제는 국제연합(UN)의 세계인권선언이 정하고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인 “사상·양심의 자유(제18조)”, “의사·표현의 자유(제19조)”등을 위배하는 반인권적 사안으로, 인권 의제의 가장 앞자리에 놓인다. 양심범가족협의회는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재는 척도인 ‘양심범(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인권 현실을 직접적이고도 분명하게 드러냈다. 양심범가족협의회는 십자가 침묵시위, 서대문구치소 뒷산 새벽송, 보라색 한복 시위, 공정재판 구호를 새긴 부채 및 양산 시위, 빅토리 숄 시위 등 다양한 방법주)005으로 양심수 석방,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며, 유신정권의 반인권적 행태를 고발했다.

단체 활동

법정투쟁과 교도소 인권 문제 등 시민·정치적 권리의 개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계기로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한 이희호 여사(맨 오른쪽) 등 구속자 부인들이 남편의 수인번호를 가슴에 달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출처: 김대중평화센터)

구가협과 양심범가족운동협의회는 양심수가 발생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시절,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이를 알릴 책임은 이 조직의 중요한 사명이 됐다. 면회를 차단한 채 밀실 수사를 벌이고 있는 수사기관에 달려가 고문 중단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고, 고문으로 탈진한 양심수를 일으켜 세우며, 황망함과 비통함에 잠긴 양심수 가족들을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영장 없는 불법체포, 정신적·신체적 고문 행위, 허위자백으로 인한 사건 조작 등 수사기관의 인권침해가 이 조직을 통해 폭로됐다. 면회를 차단하는 구치소 당국과 싸우는 일, 재소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교도소 인권 개선 투쟁도 이 조직의 일이었다.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재판 방청을 통해 검찰과 법원의 부정의한 행위에 무언의 시위, “도덕적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시위와 농성의 맨 앞자리에서 국가권력과 직접적으로 대면해온 가족들은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은 흔했고, 서울의 외곽지에 마구 버려지기도 했지만, 그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구류는 말할 것도 없고 구속까지 당해야 했다. 구가협과 양심범가족협의회의 활동은 우리 사회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향상시킨 인권운동이자 법, 제도 개선운동이었다.

양심수 석방운동과 민주화운동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시국사건 구속자 가족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양심수 석방운동이 곧 민주화운동이던 시절, 구가협과 양심범가족협의회는 감옥에 갇힌 가족의 석방뿐 아니라 유신정권의 폭압성, 불법성을 폭로하며 민주화운동의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구가협이나 양심범가족협의회는 주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성명서나 결의문을 발표했다. 1974년 11월 21일 결의문을 보면, “우리 구속자 가족들은 우리들의 투쟁이 없이 자식과 남편을 구할 수 없고 우리들의 투쟁이 없이 얻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 우리는 이제 자식이 외치다가 들어간 유신독재 철폐를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아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이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을 위하는 길이고, 자식을 구하는 지름길임을 알았습니다”는 내용이나, 1978년 12월 29일 “민주주의로의 회귀를 전제하지 않는 어떠한 석방조치도 오로지 하나의 기만극”이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 끈질긴 투쟁만이 우리들의 남편과 아들과 딸들을 완전히 감옥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억압과 독재의 질서로부터 해방하는 유일한 길임을 만천하에 선언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는 이 사실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가족들의 투쟁은, 유신에 대한 저항 활동보다 훨씬 치열한 측면이 있었다. 단순한 석방운동이 아니라 “유신독재의 철폐”나 “민주주의로의 회귀”를 향한 투쟁, 결국 민주화투쟁이기 때문이다.

결과/영향

1974년 구속자가족협의회 결성은 구속자 가족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조직을 구축한 첫 시도로써, 민주화운동 조직 결성에서 중요한 진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구가협의 조직과 활동은 종교계의 활동과 더불어 정부가 독점한 ‘인권’을 시민사회가 전유하기 시작한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주)006 반면에 1970년대 활동에서는 비전향장기수, 조작 간첩 등 장기수, ‘양심수’ 문제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도 있다.

구가협과 양심법가족협의회는 1985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설립의 모태가 됐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8년 양심범가족협의회로 명칭을 변경하며,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한국사회에서 종합적인 활동을 하는 인권운동 조직으로 성장, 분화할 수 있는 주춧돌주)007이 되었고,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설립의 모태가 됐다. 가족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활동은 더 많이 조명되고 복원되어야 할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자산이다. 주로 어머니와 아내가 주축이 된 가족들은 다양한 정치적 활동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치적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주)008했다. 조직을 구축하여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나섰고, 끊임없는 조직 활동을 통해 ‘양심수’ 문제를 주요한 인권 의제로 만들었다. 양심수를 대리하는 주변적인 존재가 아닌, ‘여성’들이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민주화운동 주체로 활동하며 우리 사회의 인권 향상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주)001
《조선일보》, 1974.12.19. 3면. 
주)002
김설이·이경은, 《잿빛시대 보랏빛 고운 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주)003
김정남, 〈어머니 사랑의 힘-정금성〉, 《이 사람을 보라》, 두레, 2012, 381~395쪽. 
주)004
한인섭 대담,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민주화운동 40년 김정남의 진실 역정》, 창비, 2020, 341쪽.; 김한림 선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정남, 〈어머니, 우리 시대의 어머니, 김한림〉, 앞의 책, 397~408쪽 참조. 
주)005
정경아 엮음, 《봄길 박용길》, 삼인, 2020, 163~179쪽. 
주)006
이정은, 〈민주화운동과 조직적인 인권운동의 발전〉, 《대한민국인권근현대사 4》, 국가인권위원회 2019, 67쪽. 
주)007
이정은, 앞의 글, 73쪽. 
주)008
김화숙, 〈여성의 사회적 저항 경험에 관한 여성주의적 접근-민가협, 유가협 어머니 활동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1998. 
멀티미디어
  • 구속자가족협의회와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를 이끈 공덕귀 여사(왼쪽)와 박용길 장로 및 그 가족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계기로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한 이희호 여사(맨 오른쪽) 등 구속자 부인들이 남편의 수인번호를 가슴에 달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출처: 김대중평화센터)
  • 1975년 2월 17일 출감한 서강대 민청학련 구속자 김윤(오른쪽)이 어머니 김한림 구가협 총무와 포옹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시국사건 구속자 가족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구가협과 양심법가족협의회는 1985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설립의 모태가 됐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양심범을 위한 문학의 밤 연단
  • 양심범과 그 가족들의 모임 선언
참고문헌
  • 김설이·이경은, 《잿빛시대 보랏빛 고운 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 김정남, 〈어머니 사랑의 힘-정금성〉, 《이 사람을 보라》, 두레, 2012.
  • 한인섭 대담,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민주화운동 40년 김정남의 진실 역정》, 창비, 2020.
  • 정경아 엮음, 《봄길 박용길》, 삼인, 2020.
  • 이정은, 〈민주화운동과 조직적인 인권운동의 발전〉, 《대한민국인권근현대사 4》, 국가인권위원회 2019.
  • 김화숙, 〈여성의 사회적 저항 경험에 관한 여성주의적 접근-민가협, 유가협 어머니 활동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1998,
  •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학련》, 메디치, 2018.
집필정보
집필자
송소연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5-09-16 17: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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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1974년 11월 21일 구속자 가족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주한미대사관 앞뜰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